이제는 세인의 기억에서 잊힌 ‘도덕재무장’(MRA) 운동. 창시자 프랭크 부크먼이 꿈꾼 것과 달리, 이 운동은 ‘세상을 변혁’하는 데 실패했다. 대신 냉전의 절정기에 이 미국의 정치·종교 운동이 보여준 이념과 전술은 한 가지 교훈을 남긴다. 바로 ‘더불어 사는 삶’, ‘사회적 대화’, ‘돌봄’ 등 긍정적인 구호도 지배층의 입을 거치면 가공할 전쟁 무기로 변화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Smile ’til it hurts>(아프도록 웃어요).(1) 최근에 나온 어느 다큐멘터리 영화 제목이다. 이 영화의 소재가 된 것은 다름 아닌 음악운동 ‘UWP’(Up With People)이다. UWP란 1960년대 중반 미국에서 태동한 음악사회운동을 말한다. 희망을 잃은 당대 젊은이들에게 ‘긍정의 힘’이 됐다는 운동이다. UWP 공연은 대강 이런 식이다. 매번 단정한 머리에 원색 옷을 차려입은 말쑥한 젊은이들이 무대 위로 우르르 몰려나온다. 그러고 나서 ‘소리 높여 노래해요! 즐거운 노래! 여러 길이 함께 만나는 곳!’(Sing Out! The Happy Song! Where the roads come together)이라며 흥겹게 후렴구를 제창한다.
UWP는 인종차별이 없는, 평화롭고 활기찬 화합의 사회라는 꿈을 표방하며, 단숨에 사회지도층 사이에 큰 인기몰이를 한다. 세간에 이름이 알려지면서 UWP의 젊은 가수들은 TV 전파를 타기 시작한다. 백악관 저녁 만찬이나 슈퍼볼 결승전에 초대돼 행사 분위기를 뜨겁게 달군다. (코닥, 엑손, 핼리버턴 등) 미국의 다국적 회사의 지원을 받은 UWP는 세계 순회공연에도 나선다. 몬트리올에서 마드리드, 요르단, 바티칸, 아일랜드, 중국에 이르기까지 전세계를 종횡무진하며, 많은 이들에게 인생의 즐거움(더 나아가 ‘더불어’ 사는 인생의 즐거움)을 설파하고 다닌다.
가시적 웃음과 자선의 상업적 이면
다큐멘터리 <아프도록 웃어요>는 UWP가 속삭이는 달콤한 감언이설의 이면을 낱낱이 파헤친 영화다. 가식적인 웃음과 자선이란 이름으로 포장된 상업성, 하나에서 열까지 철저히 조작된 연출 등이 얼마나 거북스러운지 보여준다. 특히 이 영화는 오늘날 세인의 기억 속에 가물가물해진 또 다른 운동을 재조명하는 계기가 됐다. UWP 운동의 단초가 된 ‘도덕재무장’(MRA) 운동이 바로 그것이다.
냉전 초기 절정에 달한 MRA 운동이 처음 태동한 것은 1910~20년이다. 당시 미국의 루터파 목사 프랭크 부크먼(1878~1961)은 교계에 대한 불신감과 심리학에 대한 열정을 바탕으로 자기만의 독자적 교리를 확립한다. 부크먼 목사는 전세계 모든 문제의 근원이 개인의 내면에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죄라는 종기를 절제하는 영혼의 수술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2) 그는 치유 과정에서 “죄인이 교화될 때, 비로소 그의 영혼이 완치된다”고 보았다. 그에게 영혼의 수술은 ‘긍정의 바이러스’와 같은 개념이었다. 부크먼은 사회에 주입된 긍정의 바이러스가 전세계로 퍼져가면 사랑과 조화가 넘치는 새로운 세상이 도래하고, 모든 갈등이 사라진다고 생각했다.
부크먼은 신학자였다. 그렇다고 현실 감각이 영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부크먼은 “세상을 변혁하려면 영향력 있는 사람을 우선적으로 개종하는 편이 훨씬 유리”하다고 판단한다. 그래서 미국과 영국의 대학가(프린스턴, 예일, 옥스퍼드, 케임브리지 등)를 주요 표적으로 삼았다. 명문 대학가를 중심으로 부크먼의 교리는 유순하면서도 전도유망한 젊은이들을 매혹하기 시작한다. 훗날 ‘옥스퍼드 그룹’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이 예의바른 젊은이 집단은 유럽 본토와 남아프리카, 오스트레일리아 등으로 세를 확장해나간다.
세계 곳곳에서 부크먼의 추종자들이 ‘하우스 파티’를 연다. 신도들은 한시적인 모임을 갖고 아늑하고 따뜻한 분위기에서 서로를 돌보거나, 음식이나 집안일,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자기만의 사명, 심지어 죄까지 함께 나누며 신앙을 다져나간다. MRA 운동에서 고백은 강력한 영혼의 치유 도구였다. 영혼의 때를 지우고, 다른 이를 ‘변화의 삶’이란 오솔길로 인도해주었다.
옥스퍼드 그룹은 1930년대에 이르러 새롭게 변화한다. 대공황이 발생하고 외교적 긴장감이 고조됨에 따라, 부크먼의 신도들은 사회 안정이나 세계 평화를 설파하는 전도사로 변신한다. 부크먼의 운동은 비종교적인 분야로 확대되면서,(3) 마케팅이나 스토리텔링으로 변질되거나 오피니언 리더나 할리우드 인사의 입맛을 맞추기에만 급급해진다. 유명인사가 된 부크먼은 헨리 포드나 하비 파이어스톤 같은 유력 기업인과 친분을 맺는다. 또 나치즘에 대해 약간의 호감을 보인다. 하지만 평화주의자던 부크먼 목사는 나라나 국민을 도덕적으로 재무장하는 데 더 관심을 기울인다. 도덕적으로 나라나 국민을 재무장하는 것이 세계를 변혁할 가능성이 더 높다고 여겼다. 그가 말한 ‘도덕재무장’이라는 표현은 1938년에 이르러 부크먼 운동을 지칭하는 공식 명칭이 된다.
영혼을 수술하고 전쟁서 승리하자
미국이 세계대전에 참전하자, 프랭크 부크먼은 가족과 기업이라는 내부 전선을 다스리는 데 총력을 기울인다. 선전술의 대가였던 MRA는 노동자들에게 간부 직원과 공장노동자 사이의 형제애를 다룬 극작품 <잊힌 요소>(Forgotten Factor)를 선보인다. 당시 상원의원인 해리 트루먼은 “전시에 제작된 연극 가운데 단연 최고”라며 격찬했다. 1945년이 되자, MRA 회원들은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으니, 이제는 평화를 이끌 차례”라며 전세계로 노하우 전수에 나선다. 캐나다 항만노동자, 독일 루르 지역 광부, 프랑스 북부 지역 섬유노동자 등을 찾아가 ‘잊힌 요소’, 다시 말해 인간적 요소의 중요성을 설파했다. MRA는 인간적 요소만이 계급투쟁을 대체할 수 있다고 믿었다.
전세계에 냉전 기운이 감돌면서 사회적 안정이 시급한 문제로 대두된다. MRA는 이념적·심리학적 특성이 강한 새로운 종류의 전쟁에 능했다. MRA 운동은 비로소 황금기를 맞이한다. MRA는 재력가의 후원을 받는다. 또한 공산주의를 치료할 만병통치약을 찾던 정부로부터 은밀한 지원을 받는다. 덕분에 MRA는 으리으리한 대저택 두 채를 소유하게 된다.한 채는 미국 미시간 호수 위의 매키노 섬에 있었고, 다른 한 채는 스위스 코쉬르몽트뢰에 자리한 동화 속에나 나올 법한 호화스러운 고저택이었다.
냉전시대, 정부 뒷배로 밀실 외교
과거 ‘하우스 파티’ 시절처럼, 온정의 분위기가 가득 넘쳐 흘렀다. 국적을 불문한 노동자와 경찰, 노조원, 경영자, 학생, 기자, 귀족이 한데 어우러져 감자 껍질을 벗기거나, 계급 간 갈등 극복을 주제로 노래나 연극 무대를 선보였다. 하지만 이들이 보여준 친밀감은 인위적인 것이었다. MRA 운동이 설파하는 ‘겸손’이나 ‘용서’는 그저 개인이 사회 내에서 자신의 위상을 체념하고 받아들이게 하기 위한 명분에 불과했다. (물리학에서처럼) 이중적 상보성이 평등의 대체물이 되도록 만들기 위한 속임수인 셈이다.
달콤함과 사악함을 동시에 내포한 ‘더불어 사는 삶’을 기치로 내걸며, 코(Caux)와 매키노의 저택은 밀실 외교의 장으로 변신한다. 그것이야말로 부크먼이 진정 관심 있던 분야였다. 1946년부터 미래의 독일 총리가 될 콘라트 아데나워가 코 센터를 방문한다. 로베르 슈만 프랑스 외무부 장관도 부크먼의 초대에 응한다. MRA는 프랑스-독일 외교 관계 개선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며 자부심이 넘쳤다. ‘화해의 사도들’(1950년 슈만이 붙인 이름)은 유럽연합 구상에 중요한 역할을 한 사실을 미화하며,(4) 전세계로 평화의 메시지를 전파하러 다닌다. 일본, 사이프러스, 미국 등지를 찾아다니며 ‘인종 간 화해’를 설파한다. 모든 면에서 보수주의적 색채가 강했던 MRA 신도들은 다른 동시대인에 비해 인종차별주의적 성격은 약했다. 그래서 이들은 미국 흑인 지도자들의 해방운동에 깊은 우려감을 나타냈다. 과거 국가와 계층 간 화해를 추구했던 MRA는 1950년대에 이르러 비로소 ‘인종 갈등 예방’이라는 원대한 계획을 품게 된다.
MRA는 식민지 독립이 한창인 아프리카를 새로운 개척지로 선택한다.(5) 다른 곳에서처럼 아프리카에서 MRA는 엘리트 계층을 핵심 타깃으로 삼는다. MRA는 튀니지 민족주의자들을 프랑스인에 대한 선입견에서 해방시킴으로써 평화적 독립의 물꼬를 터줬다. 케냐에서는 미래 대통령이 될 조모 케냐타가 당시 국내에서 활발하게 활동 중이던 MRA 운동에 심취한다. 나이지리아도 비슷했다. 미래의 대통령 은남디 아지키웨가 MRA의 매력에 흠뻑 빠진다. 카메룬에서는 샤를 아살레와 MRA가 강력한 유착관계를 형성한다. 전 민족주의 운동가이자 훗날 카메룬 총리가 될 샤를 아살레는 1957년 매키노 방문을 계기로 도덕적으로 재무장한다.
MRA가 아프리카 엘리트층에서 높은 인기를 구가한 것은 단순히 이 운동이 강력한 국제적 인맥 네트워크를 제공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MRA의 교리는 현지 부르주아층의 기대에도 잘 맞아떨어졌다. 아프리카 엘리트들은 실질적 독립을 쟁취하기보다는 본국에서 온 식민지 거주자와 권력을 공유하길 더 원했다. 한편 제국주의보다는 반공주의적 성격이 짙었던 MRA 운동은 흑인과 백인이 우호적으로 협력하는 새로운 아프리카 사회 건설을 추구한다. MRA는 이를 주제로 <자유>라는 영화를 제작해 아프리카 전역에 상영했다.
하지만 인종을 초월한 형제애를 다룬 이 영화를 통해 MRA가 진정 추구하려 한 것은 아프리카 엘리트층에게 새로운 신제국주의 질서에 국민을 순응시킬 이념 무기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아프리카에서 도덕재무장 운동은 군국주의적 색채가 짙어진다. 케냐는 영국 장교 앨런 나이트 대령이 MRA의 전술(공개고백, 연극, 영화 등)을 포로로 잡은 마우마우단 전투원을 교화하는 데 사용한다. 알제리와 카메룬에서는 1960년대 말 프랑스 군대가 민족주의 운동가와 시민들을 상대로 MRA 전술과 흡사한 심리전술을 펼친다. 그도 그럴 것이 스위스 코(Caux) 센터에는 정기적으로 심리전에 정통한 프랑스 전문가들이 찾아와 다른 서구 국가의 전문가들과 경험을 공유하는 자리를 갖곤 했다.
1960년 6월 말 독립을 쟁취한 벨기에령 콩고의 사례는 MRA의 대아프리카 활동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다. 벨기에령 콩고가 내전의 소용돌이에 휩싸이자 MRA는 전 마우마우단 전투원과 전 남아프리카 민족주의 운동가, 유럽 노동조합원, 미국 뮤지션 등으로 구성된 국제 화해 설교단을 꾸려 현장에 파견한다. 몇 년이 지나 콩고에 다시금 평화가 찾아왔다. 그러자 이번에는 콩고 장교들을 스위스 코로 초청해 ‘체계적인 도덕적·영적 훈련 프로그램’을 제안한다. 아직 제대로 완성된 프로그램이 아니었지만, MRA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바로 수년간 콩고-자이르에 체류하던 열성 회원 중 한 명인 윌리엄 클로즈의 영향력이었다. 미국 외과의사인 그는 모부투의 주치의이자 자이르 군대의 대표 군의관이었다.(6)
해방 대신 형제애 설파하며 CIA와 결탁
1961년 창시자 프랭크 부크먼이 사망하자, 이미 비난 공세에 만신창이가 된 MRA가 더 큰 위기로 빠져든다. 일각에서는 MRA의 진정한 동기나 막대한 부, 심지어 미국 정보국과의 결탁 가능성 등에 의문을 갖기 시작한다.(7) MRA 내부에서도 자성의 목소리가 높아진다. 원로 신도들은 내면을 강조하던 ‘옥스퍼드 그룹’의 정신을 되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어떤 이들은 ‘평화 강화와 문화 간 대화’에 역점을 두어야 한다고 했다.(8) 또 다른 이들은 서구의 베이비붐 세대가 이미 성의 해방과 베트남 반전을 부르짖는 이 시대에 구태의연한 구호는 갈아치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게 1965년, 환한 미소로 무장한 질서정연한 음악그룹 UWP가 탄생한다.
글·토마 델통브 Thomas Deltombe
언론인.
번역·허보미 inougy@naver.com
서울대 불문학 석사 수료.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각주>
(1) 리 스토리, <Smile ’til it hurts: The Up With People story>, 스토리 프로덕션, 미국, 2009.
(2) 대니얼 색, <Moral Re-Armament. The reinvention of an American religious movement>, p.17, 팰그레이브 출판사, 뉴욕, 2009.
(3) 1935년 미국에서 태동한 익명알코올중독자모임(AA) 운동도 옥스퍼드 그룹 운동의 일환으로 탄생했다.
(4) 프랑스에서 출간된 프랭크 부크먼 강연집 <새로운 세상 만들기> 서문.
(5) <Missions, Nationalism, and the End of Empire>(브라이언 스탠리 엮음, Grand Rapids: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mpagny, 케임브리지, 2003) 가운데 필리프 부비어가 저술한 <Moral Re-Armament in Africa in the Era of Decolonization>.
(6) 윌리엄 클로즈의 딸 여배우 글렌 클로즈는 1960년대 말 UWP를 위해 활동했다.
(7) 정보국과의 결탁설은 1989년 전직 CIA 요원 가운데 한 명이 1950년대 CIA와 MRA 사이에 계약을 체결한 사실을 폭로하면서 사실로 밝혀졌다. 그에 따르면 MRA는 CIA가 유럽 및 아프리카 지도자들의 ‘두뇌집단과 직접 접촉’할 수 있도록 도왔다. (마일스 코플랜드, <The Game Player: Confessions of the CIA’s Original Political Operative>, Aurum Press, 런던, 1989).
(8) MRA는 2001년 IofC(Initiatives of Change)로 명칭이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