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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백과 재난, 신카이 마코토의 세카이계에 대하여
공백과 재난, 신카이 마코토의 세카이계에 대하여
  • 이현재 l 영화평론가
  • 승인 2023.03.31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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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카이 마코토 초기 단편 3부작 (왼쪽부터) <별의 목소리>(2002), <구름의 저편, 약속의 장소>(2004), <초속 5센티미터>(2007). 아즈마 히로키는 <별의 목소리>를 대표적인 세카이계 아니메로 선정하기도 했다 / 출처: 네이버 영화>

공백에 기반한 세계, 세카이계

하즈마 히로키는 저서 『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에서 세카이계를 “주인공과 히로인을 중심으로 한 작은 관계성의 문제가 구체적인 중간과정 없이 세계의 위기와 같은 추상적이며 중대한 문제에 직면하는 이야기를 묘사한 작품군”으로 정의한다. 적어도 아즈마 히로키에게 세카이계 장르의 특징은 원인과 결과 사이에 어떤 공백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어째서 『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에서 세카이계를 정의했을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우선 아즈마 히로키가 제시한 ‘게임적 리얼리즘’이 무엇인지 이야기해볼 필요가 있다.

우선 게임적 리얼리즘이 리얼리즘, 즉 사실주의라는 점을 다시 한번 환기해보자. 그게 무엇이었든 간에 현실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려고 하는 창작 태도, 바꿔 말해 어떤 것을 모방하려고 하는 미메시스(Mimesis)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게임적 리얼리즘이란 결국 필연적으로 현실과 강한 관계를 맺고 있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는 현실을 게임으로 파악하려는 시도와 다름이 없다.

그렇다면 현실을 게임으로 파악하려는 시도는 어떤 것인가? 아즈마 히로키는 일본 내에서 급성장한 서브컬쳐 혹은 오타쿠 문화가 사실주의를 굴절시키는 것을 넘어, 사실주의의 다른 차원을 열었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그는 자신의 아이디어를 관철시키기 위해 ‘게임적 리얼리즘’이 오스카 에이지의 ‘만화・애니메이션적 리얼리즘’의 맥락 안에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에서 ‘만화・애니메이션적 리얼리즘’이 자연주의적 리얼리즘, 즉 전통적 리얼리즘과 대비되는 위치를 점유하고 있다고 봤다.

그에 따르면 ‘만화・애니메이션적 리얼리즘’은 “사생한 현실(私生な現実)”에 기반을 둔다. 이를 입증하기 위해 하즈마 히로키는 ‘만화・애니메이션적 리얼리즘’이 일본의 사소설에 바탕을 뒀다는 점을 근거로 든다. 사소설(私小設)이란 작가가 ‘거의’ 허구를 섞지 않은 사생활을 이야기로 재현하는 일본의 독특한 소설 형식이다. 자전적 소설이 개인이 겪은 사건을 중심으로 둔다면, 사소설은 개인이 겪은 ‘심리’를 중심으로 둔다.

때문에 사소설은 사실(혹은 현실)을 묘사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야기가 아닌, 나를 묘사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야기라고 평가된다. 다만, 나를 쓰기 위해 사실들을 나열한 만큼 사소설은 사실들의 표본들을 자의적으로 편집하여 현실을 왜곡한 사실인 셈이다. 아즈마 히로키는 바로 이 점이 “사생한 현실”에 기반을 둔 리얼리즘이며, 나(화자)에 의해 임의로 굴절된 현실이라고 지적한다. 다만, 아즈마 히로키는 “사생한 현실”은 가상에 바탕을 둔 세계라고 주장하는데, 오스카 에이지는 이에 동의하진 않는다.

바로 이 지점에서 ‘만화・애니메이션적 리얼리즘’와 ‘게임적 리얼리즘’이 분기된다. ‘만화・애니메이션적 리얼리즘’이 “사생한 현실”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개인적 표본들의 세계라면, ‘게임적 리얼리즘’은 ‘만화・애니메이션적 리얼리즘’이 표본화한 데이터들을 재편집한 세계다. 따라서 게임적 리얼리즘은 샘플에 대한 샘플링이자 시뮬라르크에 대한 시뮬라시옹에 가깝다. ‘게임적 리얼리즘’은 현실과 사실로부터 상당한 어긋남이 생겼으나 그 바탕이 사실이라는 점 자체는 변하지 않기에 리얼리즘의 사조에 속해 있는, 매우 독특하고 한정적인 리얼리즘인 셈이다.

문제는 그 어긋남에 있다. 가령, 우리는 세카이계의 시조라고 불리는 안노 히데야키의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보고 그 묵시적 세계가 사실이라고 느끼지는 않는다. 그러나 우린 신지가 느끼는 심리적인 압박과 고뇌가 사실적이라고 느끼는데, 여기서 사실적인 부분들은 대단히 무의식적이다. 따라서 비가시적이고 확인할 수 없으나 작품의 수용자가 작품 내 캐릭터와 어떤 연결과 맥락을 찾을 수 있다면, 그것을 어떻게 지시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가 생긴다. 그리고 그것은 왜 ‘사실’이 아니라 ‘사실적’이기만 한 것인지에 대한 탐구가 ‘게임적 리얼리즘’인 셈이다.

그러므로 사실은 아니되 사실적인 리얼리즘을 두고 우리는 ‘게임적 리얼리즘’이라고 지칭할 수 있다. 그렇다면 ‘사실인 것’과 ‘사실적인 것’을 우리는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게임적 리얼리즘은 사실의 표본에 대한 표본화를 이룬 사실주의로서, 사실과는 어긋남이 있다. 그 어긋남은 표본의 특징으로 인해 유발되는데, 표본이란 앙드레 바쟁이 「사진적 이미지의 존재론」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시간으로부터 유리된 성질의 것이다. 따라서 표본화되었다는 것은 시간의 흐름에서 이탈했다는 것이며, 표본의 표본화는 시간 그 자체를 찾기 어렵다는 뜻이다.

이는 맨 처음 언급한 “공백의 문제”와 이어진다. 게임적 리얼리즘에서 현실과 표본을 이어줄 특정한 시간성을 찾아볼 수 없듯이, 세카이계 역시 특정한 맥락을 찾을 수 없다는 공통점이 있다. 아즈마 히로키는 그것을 탈역사적인 특징으로 묶어서 설명하는데, ‘구체적인 중간과정 없이 추상적이며 중대한 문제에 직면하는 이야기’라는 정의가 바로 그것이다. 즉, 세카이계에서 중요한 것은 ‘구체적인 중간과정’이 없다는 점이다. 고로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세카이계의 ‘묵시적인 분위기’ 혹은 ‘세기말’은 그저 표본을 표본화한 실체일 뿐이다.

 

<신카이 마코토. <날씨의 아이>(신카이 마코토)  GV 중 / 출처 : 네이버 영화>

신카이 마코토, 재난의 세카이계

세카이계 작가들 중 괄목할만한 성장과 성과를 이룩한 작가가 있다면, 당연 신카이 마코토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특히 2016년 <너의 이름은.> 이후로 대중과 평단의 고른 지지를 받으며, 일본 내에서만 세 작품 연속(<너의 이름은.>, <날씨의 아이>, <스즈메의 문단속>) 1000만 관객을 동원하는 기염을 토했다. 많은 대중들은 그가 <초속 5센티미터>(2007)에서 보여주었던 아련한 감성을 그의 강점으로 뽑고, 평단은 애도를 그의 가치로 언급한다. 여기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그가 다루는 주요한 서사가 상실을 바탕에 둔 이야기라는 점이다.

세카이계와 마찬가지로 그가 다루는 작품은 구체적인 중간 과정 없이 (혹은 적어도 구체적으로 표현할 수 없는 중간과정으로 인해) 인물들은 상실을 경험하고 그것을 극복하거나 수용한다. 이러한 특징은 그가 다루는 세계가 재난에 가깝다는 인상을 준다. 초기작 <별의 목소리>(2002)와 <초속 5센치미터>(2007)에서는 서로 이렇다 할 사건을 공유하지 않은 주인공과 히로인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지 않았다는 사실 그 자체로 상실을 경험하는 사적인 재난에 처한다.

주인공과 히로인이 그 상실을 극복하고, 자신이 처했던 재난에 대해 애도하는 과정 역시 구체적인 중간과정을 생략한다. 가령, <언어의 정원>(2013)에서는 주인공과 히로인은 구두와 발이라는 매개체 외에 어떠한 구체성도 공유하지 않지만, 그들은 서로의 감정과 교류에 관계없이 서로를 위로하는 데 성공한다. 심지어 <언어의 정원>에서는 서로 어떤 재난을 경험했는지조차 공유되지 않고, 관객에게도 주인공과 히로인의 사적인 재난에 대한 정보가 주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어쨌든 발을 만졌다 / 발이 만져졌다 는 행위만으로 상실을 극복하기에 이른다.

이런 특징은 신카이 마코토가 한동안 포르노그래피적 구성을 시도하는 일차원적인 작가라는 오해를 불러 일으켰다. 여기에는 애니메이션 테크닉에 대한 찬사의 의미가 있었지만, 마치 포르노그래피와 같이 구체성을 띄고 있는 실체가 캐릭터의 형태·표정 등 작화에만 매몰되어 있어 작품 내적인 빈곤을 띄고 있다는 비아냥거림이기도 했다. 이런 평가가 뒤집히기 시작한 것은 출세작 <너의 이름은.>(2016)부터였는데, 그 배경에는 2011년 3월 11일 발생했던 동일본 대지진이 있었다.

<너의 이름은.>과 전작들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공적인 기억이 재난의 중심에 있다는 것이었다. 전작들이 숙명적인 우연에 의해 발생한 개인의 사적인 재난을 다뤘다면, <너의 이름은.>에는 자연적으로 발생한 우연이 집단적 재난의 풍경으로 발전되어가는 과정이 있었다. 그러나 그 집단적 풍경이 구체적인 설명 없이 개인의 상실과 애도로 내면화되며 이어진다는 점에서 여전히 세카이계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나아가 윤리적으로 재현해서는 안 된다고 여겨지는 이미지에 대한 훌륭한 우회로를 제공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구체적인 과정이 없다는 점에서 재난을 지나치게 쉽게 판타지로 소비한 것이 아니냐는 질문에 직면해야 했으며, 이는 손쉽게 일차원적인 작가라는 평가로 귀결되었다. 이런 비판에 대한 신카이 마코토의 대답으로 볼 수 있을 만한 작품이 <날씨의 아이>(2019)다. 이 작품에서 주인공과 히로인은 여전히 재난의 중심에서 서로를 그리워하고, 재난으로 인해 잃어버린 것들을 되찾기 위해 분투한다. 하지만 <날씨의 아이>가 <너의 이름은.>보다 나아간 것이 있다면, 잃어버린 것을 되찾기 위해서는 그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점이다.

<날씨의 아이>에서 주인공 ‘타키’는 히로인 ‘히나’를 구하는 대신 일본을 수몰시킨다. <날씨의 아이>는 ‘타키’가 어째서 세계를 버리고 ‘히나’를 구하게 되었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도쿄와 세계의 수몰이라는 결과에는 ‘타키’의 구체적인 선택이 개입되어 있다. 여기에는 신카이 마코토의 이전 작들과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전작들이 재난 이전의 세계를 구하기 위한 몸부림을 담은 판타지였다면, <날씨의 아이>는 세계가 폐허로 변하더라도 서사를 진전시키겠다는 구체적인 선택이 있다. 

 

<스즈메의 문단속>(2023) / 출처 : 네이버 영화

고르기아스의 매듭은 알렉산더의 칼을 꿈꾸는가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왜 하필 신카이 마코토의 인물들은 재난으로 엮여 있는가? 신카이 마코토의 신작 <스즈메의 문단속>은 이에 대한 답을 얼핏 드러낸다. <스즈메의 문단속>의 중심에는 지진을 일으키는 영물 ‘히미즈’(日不見, ‘두더지’와 동일하다)가 등장한다. 히미즈는 의식과 의지가 없는 일종의 ‘현상’으로 오직 폐허에서 나타나며 오직 폐허의 행복했던 한때의 기억으로 저지되는데, 히미즈를 막는다고 하여 이미 폐허가 된 세계가 복구되지는 않는다. 

여기에는 주인공 ‘스즈메’와 히로인 ‘소타’가 히미즈를 저지한다고 하여 폐허가 된 세상이 구원을 얻진 않는다는 함의가 필연적으로 내재된다. 다만 한때 존재했던 그 풍경을 기억하지 않는다면 또다른 폐허가 늘어나는 것은 상수일 것이다. 즉, 미래는 폐허라는 상수를 지닌 시간인 셈이다. 그러므로 미래는 모두를 위한다면 저지해야 하는 무언가이지만, 개인에게는 그저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일 뿐이다. <날씨의 아이>와 <스즈메의 문단속>의 세계에는 폐허로 만들 것이냐, 아니냐는 선택이 동일하게 등장한다.

그러나 <스즈메의 문단속>에는 등장하되 <날씨의 아이>에는 등장하지 않는 요소가 있다면, 바로 신(神)이다. <스즈메의 문단속>에서 신이란 소타가 진술하듯 “본질은 변덕”이다. 이는 신카이 마코토의 세계에서 신이란 철저히 우연적 존재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그리고 작품의 클라이맥스에서 세계가 폐허로 변하지 않은 것은 신이 다시 본인의 자리로 돌아가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그 사이에는 스즈메의 선택 등이 있지만,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길은 ‘신이 그렇게 결정했다’는 것 해명 외에는 없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신카이 마코토가 재난을 어떻게 여기고 있는지 엿볼 수 있다. 재난이란, 결국 우리의 의지로는 선택할 수 없는 미래다. 그리고 상실을 불러일으키고 애도를 요구하는 사태다. 하지만 한편으로 재난은 (<날씨의 아이>에서 그러했듯) 새로운 룰을 정립할 수 있는 폐허를 제공하기도 한다. 폐허란 좋든 싫은 일종의 개간(Cultivate)된 평지인 셈이다. 그러나 그것은 오직 기다림으로만 맞이할 수 있는 철저한 우연의 영역이다.

이 지점에서 나는 신카이 마코토가 호평받는 이유를 생각해본다. 우리는 과포화된 정보의 시대를 넘어 과밀화된 맥락의 시대에 살고 있다. 가령, 연준은 끝없이 금리를 높이고 있지만, SVB가 파산하자 모든 예금을 보존하는 사실상의 구제 금융을 실행하여 유동성을 공급했다. 여기에는 포스트 코로나 이후의 가파른 인플레이션과 미국-서방세계와 중국-러시아의 신냉전, 2008년 리먼 사태에 대한 트라우마와 바이든 정부의 정치 공학적 계산 등 수많은 맥락이 고르기아스의 매듭 마냥 복잡하게 얽혀있다. 

그리고 그 매듭의 중심에는 대중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정치·경제 엘리트들의 복잡하고도 다단하며 지난하고 지겨운 계산이 있다. 쉽게 싹 다 밀어버리고 새롭게 시작하는 것. 지나온 세계를 완벽히 부정하고 공백의 상태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 그것이 신카이 마코토가, 나아가 세카이계가 제공하는 판타지는 아닐까. 혹은 고르기아스의 매듭은 남몰래 알렉산더의 칼을 꿈꾸고 있는 것은 아닐까. 

 

 

글·이현재 
평론가, 경희대학교 K컬쳐·스토리콘텐츠연구소 연구원, STRABASE 객원연구원. 202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영화평론부문으로 등단했으며, 2021년 한국만화영상진흥원 만화 평론 신인상을 수상했다. 2022년부터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 정기간행물 「글로벌 게임 산업 트렌드」 필진으로 참여했으며, 경희대학교 한국문화콘텐츠 전공 박사과정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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