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메이션 영화 <소나기>는 부침이 심한 한국 애니메이션 업계에서 드물게 오랫동안 꾸준히 작업하고 있는 안재훈감독의 작품이다. 안재훈 감독은 그간 “치유의 힘이 있는 그림, 감동이 있는 빛깔”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한국적 애니메이션에 천착해 왔다. 특히 오랫동안 공들여 만들고 2011년 발표했던 장편 창작 애니메이션 <소중한 날의 꿈>(한혜진 공동연출)이 좋은 평가를 받았다. 2014년에는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연필로 명상하기”를 통해 ‘한국 단편문학 애니메이션’ 프로젝트시리즈를 시작했는데, 첫 번째 작품인 극장용 애니메이션 <메밀꽃, 운수 좋은 날 그리고 봄봄>을 통해 한국 애니메이션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한국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사람이라면 누구나 소설가 황순원을 알고 있고, 그의 대표작이 <소나기>라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소설 <소나기>는 한국인들의 심층 저변에 흐르는 서정성의 표상으로 기억된다. 실제 황순원의 작품 중 단편 소설이 차지하는 비중이 많지 않고 그러한 단편 소설들 중에서도 서정성이 두드러지는 작품이 많지 않다는 것, 또 <소나기>와 같은 시기에 쓰인 황순원의 소설들이 환상성과 그로테스크에 입각한 엽편소설 위주라는 점은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다. 전후 소설의 계통에서 주로 연구되는 황순원의 작품 계보에서 <소나기>는 매우 이채로운 작품으로, 전쟁의 폭압성과 인간성의 상실됨이라는 극악한 현실의 한 가운데 놓여있는 태풍의 눈과도 같은 작품이다. 작가는 전쟁으로 얼룩진 어른들의 세계 대신 소년과 소녀로 표현된 유년기의 순수성을 통해 농촌으로 묘사되는 풍경의 아름다움을, 그리고 왜곡되지 않은 인간성의 한 소박한 측면을 되살려보려 했던 것이다.
안재훈 감독은 원작소설의 서사적 진행과정과 대화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서사적으로 새롭게 추가된 장면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원작은 단문체의 건조함이 두드러지는데, 이는 소년과 소녀의 동화 같은 한 시절을 그리는 데 있어 과도한 감상성을 피하고 오히려 이들의 사랑을 현실적 층위에서 벗어나 환상적인 것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특성을 보여준다. 영화는 이러한 원작의 측면을 수용하면서도 단문체로 세밀하지 않게 표현된 빈 지점들을 영상으로 재구성해내는 부분에서 작가적 상상력을 드러낸다. 특히 오프닝 타이틀에서 창작자의 상상력이 돋보인다.
소설의 첫 장면은 “소년은 개울가에서 소녀를 보자 곧 윤 초시네 증손녀 딸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소녀는 개울에다 손을 잠그고 물장난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서울서는 이런 개울물을 보지 못하기나 한 듯이.”로 소년과 소녀의 만남에서 시작한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꽃과 풀, 푸른 하늘과 구름의 변화로부터 시작한다. 구름이 어두워지면 굴다리 위로 기차가 지나가고, 기차 안의 초록 좌석에 덩그러니 놓인 빨강 란도셀 가방이 있다. 소달구지에 이삿짐을 싣고 오는 소녀의 가족들의 장면이 짧게 지나가고, 학교를 파한 소년이 개울물에 이르면 그제서야 소년과 소녀의 만남이 성사된다. 특히 빨간 란도셀 가방은 소녀로 유비되어 영화의 말미에서 유품 태우는 장면에서도 등장한다. 원작에 나오지 않는 장면으로, 농촌에 사는 소년의 사정과 대비되는 서울에서 내려온 소녀의 특성을 재현해내기 위해 고안한 것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애니메이션이 가진 탁월한 아름다움은 마치 수채화로 그린 듯한 맑고 투명하면서도 화려한 풍경 묘사에 있다. 풀이 바람에 흔들리고 민들레의 씨가 날아가는 장면으로 영화가 시작되고 계절의 변화와 농촌의 풍경이 세밀하게 펼쳐진다. 특히 소년과 소녀가 만나는 개울가의 반짝이는 돌들과 맑은 물, 배경을 두르고 있는 초가을 산의 울긋불긋한 모습들이 셀애니메이션이 가진 질감을 느끼게 해준다.
배경에 치중한다는 점은 최근 인기를 끌었던 신카이 마코토 감독이 <너의 이름은>과도 비교될 수 있는 부분이다. 두 영화모두 인물 작화를 기존의 방식대로 단순하게 구성한 데에 비해 배경을 마치 실사인 듯 보이도록 엄청난 공을 들이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기본적으로 셀애니메이션으로 인물을 그려내면 실제 사람처럼 보이게 하는 리얼리티보다는 2차원적 회화로 표현된 미감에 치중한다. 다만, <너의 이름은>이 배경을 와이드하고 촘촘하게 묘사하여 실제의 사진이나 영상처럼 보이도록 하는 리얼리티에 몰두하고 있는 것에 비해, 이 작품에서는 동화적이고 감성적인 작품 내적인 아우라와 연결되도록 하는 배경으로 묘사된다. 요컨대 반짝이는 물과 조약돌, 구름의 색채 변화, 억새밭의 환상적인 펼쳐짐 등은 단순한 현실 모사가 아니라 이 작품만이 가진 고유한 미감적 성취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두 작품에서 인물들의 움직임 역시 비교될만 하다. 재패니메이션은 특유의 성차에 의한 인물 행동 표현 방식을 드러내는데, 가령 손을 가슴에 모으고 웃거나 안짱다리로 뛰는 여학생이라든가, 입모양을 과장되게 움직이는 인물의 표정, 눈이 강조되어 귀여운 인상을 주는 인물 표현이 두드러진다. 이에 비해 이 영화는 인물들의 얼굴 생김이나 표정, 느리게 움직이는 몸짓 등에서 좀 더 소박하고 자연스러운 율동감이 드러난다.
이외에도 몇 가지 새로 추가된 장면들이 있다. 소년에게 업혀 개울을 건넌 소녀가 버려두고 온 꽃들이 생각나서 “꽃들에게 미안하다”고 말하고 이에 소년이 “또 오자, 가지러.”라고 말할 때 삽입화면으로 짚단 속의 뭉개진 꽃들이 잠깐 지나간다. 끝부분에서 소년이 홀로 운동장에서 돌들을 뛰어넘다가 보이스 오버로 덧붙는 장면들 역시 새로 추가된 장면들이다. 또한 쇼트 연출에 있어 인상적인 장면들이 있는데 소년과 소녀가 산 너머로 놀러갔다가 갑작스레 소나기를 만나는 장면에서 비가 쏟아지기 시작할 때 극단적인 앙각(Low Angle)으로 잡는 장면이나, 끝부분 억새밭을 조감하는 쇼트가 그것이다.
이 영화가 가진 이러한 성취에도 불구하고 정전으로 지정된 원작을 선택한다는 점에서 서사적으로 새로 시도될 부분이 적다는 점이 여전히 아쉬운데, 이는 ‘한국 단편문학 프로젝트’ 시리즈 전체에 대해 가질 수 있는 의문이기도 하다. 이미 완결된 완전한 서사는 시나리오상의 고민을 덜어주고 대중적 소구력을 갖는다는 점에서 장점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콘텍스트로서의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정도로 머무르기에는 너무나 많은 이들의 노동집약적인 수고가 필요한 영역이 애니메이션 장르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화면과 정서적 친연성이 느껴지는 잔잔한 서사가 그립다면, 그리고 학창시절에 읽었던 <소나기>에 대한 낭만이 있는 관객이라면 볼 만한 작품이다. 이 영화의 러닝타임은 48분이며, 노강민, 신은수 두 아역 배우가 목소리 연기를 했다. ‘연필로 명상하기'와 EBS가 공동 제작, 배급은 리틀빅픽쳐스가 맡았고, 개봉은 2017년 8월 31일이다.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글: 이수향
영화평론가. 2013년 영평상 신인평론상을 수상하였으며, 웹진 문화다 편집동인으로 활동하며 대학에 출강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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