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을 보면 우리가 보인다”

미국계 흑인의 눈에 비친 팔레스타인인들

2019-04-30     실비 로랑 l 하버드대 연구원

 

흑백의 한 동영상 속에서 갈색 피부의 사람들이 플래카드를 들고 서 있다. 레게머리, 스카프, 카피예(아랍 전통두건) 등 다양한 모습이지만, 메시지는 하나다. “우리를 향한 살인을 멈춰라”, “우리의 존엄성을 돌려 달라.” 퍼거슨, 미주리 등 경찰관의 무죄 평결 때문에 흑인들의 분노를 샀던 지역과 팔레스타인 점령지의 사진이 함께 걸려있다. 팔레스타인인들은 단체 ‘블랙 라이브즈 매터(흑인의 목숨도 소중하다)’를 지지하고, 미국의 흑인들은 팔레스타인에 대한 압제를 인종차별이라 주장한다. 이들에게는 공동의 적이 있다. ‘콤바인드 시스템즈’라는 미국기업으로, 퍼거슨 경찰서에 최루가스와 진압용 무기를 납품하고 있다. 또한, 가자지구와 요르단강 서안지구를 점령한 이스라엘군에도 무기를 공급하고 있다.

2015년 제작된 이 영상은, SNS를 통해 일반인은 물론 미국의 유명 흑인들에게도 널리 퍼졌다. 흑인 혁명가이자 『자유는 끝없는 투쟁: 퍼거슨, 팔레스타인 그리고 운동의 토대』의 저자인 엔젤라 데이비스,(1) 철학자 코넬 웨스트, 영화감독 겸 배우인 대니 글로버(1987년 넬슨 만델라를 연기했음), 가수 로린 힐, 작가 엘리스 워커도 영상을 보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 영상을 만든 누라 에라카타는 대학교수이자 변호사인데, 미국에서 강의를 하고 있어서 앞서 언급된 인물들이 반체제운동가로서 가진 파급력을 익히 알고 있었다. 

한편 미국의 흑인 투쟁가들과 팔레스타인인들의 연대를 담은 영화 <그들을 보면 우리가 보인다>(2)는 유난히 많은 박해를 받아온 이 둘의 파란만장하고 오랜 역사를 그리고 있다. 

1967년, 6일 전쟁에서 승리한 이스라엘은 요르단강 서안지구와 가자지구를 점령했다. 이 전쟁 이후 미국 시민권 운동은 그동안 고수해온 비폭력과 기독교적 태도를 버리고, 보다 적극적인 주장을 펼치게 됐다. ‘블랙파워’는 제3세계 국제주의와 1930~40년대 흑인 반식민주의 운동의 명맥을 잇는 흑인운동이다. 폴 로브슨처럼 공산주의자나, 마커스 가비와 맬컴 엑스처럼 민족주의자나 모두 이 운동에 가담했다. 특히 맬컴 엑스는 1957년에 예루살렘, 1964년에 가자지구를 방문해, 초국경적이고 범세계적인 해방투쟁의 큰 지표를 남겼다. 또한, 1964년 9월 출간한 『시온주의 논리』에서는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거에 대해 ‘식민지배의 위장’이라고 비판했다. 특히 이스라엘이 소위 ‘달러리즘(dollarisme)’이라는 미국의 전략적 금융 지원을 발판삼아 자신들이 저지른 폭력을 호의로 둔갑시켰다는 것이다.(3)

학생비폭력조직위원회(SNCC)와 흑표범단은 당시 이스라엘과 미국을 저격했던 대표적인 조직들이다. 흑인해방을 외치는 청년투사들은 노예로 박해받은 역사가 있는 이스라엘에 본능적으로 느꼈던 동질감을 거두었다. 흑인들은 무려 17세기부터 성서중 출애굽기를 가장 좋아했고, 이스라엘 건국은 ‘하늘의 도우심’이라 믿어왔었다. 1948년, 미국의 흑인 소설가 제임스 볼드윈은 “흑인 중 가장 경건한 자는 유대인처럼 생각하는 자이며, 이집트를 탈출하게끔 인도할 모세를 기다리는 자다”라고 기록했다.(4) 볼드윈은 1961년 팔레스타인을 방문해 흑인들이 조국, ‘돌아갈 집’, 자신의 뿌리와 역사를 품을 땅을 쫓는 민족에게 얼마나 깊은 동질감을 품는지 표현했다. 자유의 땅을 쫓는 유대인의 마음을 그만큼 잘 이해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볼드윈은 침탈과 강제이주의 의미 또한 잘 알고 있었다. 1967년 팔레스타인 점령을 기점으로 미국의 흑인 운동가들이 시온주의자에게 품었던 호감은 급격히 시들었다. 한때 히브리 민족과 같은 입장이라고 믿었던 흑인 운동가들은, 지금은 아랍인에게 더 강한 동질감을 느낀다. 아이러니하게도 마틴 루터 킹은 이스라엘 건국을 반겼지만, 그의 멘토인 마하트마 간디와 콰메 은쿠루마(가나 독립운동가)는 ‘반식민지 투쟁’의 이름 아래 시온주의를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그리고 마틴 루터 킹의 후손격인 SNCC는 1967년에 팔레스타인과 연대를 맺었다.

새로운 흑인운동가 세대가 주장하는 반제국주의는 무엇보다 ‘민족성’을 부여한 제3세계주의로, 이들은 갈색인종(피부색이 갈색인 인종. 말레이인이 이에 해당)과 연합하고 있다. 이 세대는 스스로를 내부적 식민주의의 포로라고 생각하며 살고 있으며, 특히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이들은 미국에서 ‘2국가 해법’을 주장하기도 한다. 역사학자 알렉스 루빈은 이 현상을 “아프로-아랍(Afro-Arab)의 정치적 상상력”이라고 불렀다.(5) 이 같은 상상력에 입각해 흑표범단은 서둘러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와 접촉했다. PLO는 팔레스타인 문제를 반식민주의, 반인종주의, 반자본주의 투쟁과 엮기에 시의적절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되면 팔레스타인 투쟁이 유구한 식민지·영토권 역사의 한 축으로 자리 잡아, 국제문제로 확대될 것이라 믿었다. 

SNCC와 흑표범단은 대변인을 통해 “우리는 반시온주의자지만 반유대주의자는 아니다”라는 입장을 명확히 밝혔다. H. 랩 브라운 SNCC회장은 1967년에 “우리는 이스라엘 지도자들에게 이 땅에 대한 권한이 없다고 생각할 뿐, 반유대주의자는 아니다”라고 선언했다.(6) 1970년 흑표범단은 휴이 뉴튼의 지시에 따라, 일부 조직원의 지엽적인 발언들을 부인하고 유대인을 옹호하는 대신 백인 우월주의를 적대시하는 ‘혁명적’ 국제주의를 옹호했다. 뉴튼은 군국주의와 이스라엘-미국의 “반동적 민족주의”에 억압받는 민족들에게 자결권을 부여해야 한다고 수차례 주장했다.(7) 흑인과 미국계 유대인의 동맹은 현재 위태롭지만, 시민권 운동(1954~1968) 시기에는 견고했었다. 1909년 미국흑인지위향상협회(NAACP) 창설부터 랍비 아브라함 요수아 헤셀이 마틴 루터 킹과 함께 행진하기까지, 진보적 유대인 엘리트들은 흑인해방운동에 중대한 역할을 했다.(8)

이 동맹관계에 균열이 전혀 없던 것은 아니다. 주로 고학력의 유대인이 흑인을 통제하려 한다는 비판이 일었는데, 결국 동맹이 깨지는 데 팔레스타인 문제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67년, 미국계 흑인 수필가 해롤드 크루즈는 그의 저서 『흑인 지식인의 위기』에서 미국계 유대인의 이중성을 지적했다. “두 민족은 ‘똑같이’ 억압받고 고통 받았다. 그중 힘을 지닌 유대인들은 ‘우리’라는 입장에서 ‘우리’의 해방을 위해 그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그러나 이렇게 압제자에 저항하던 정신이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 시에는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걸까?”(9)  

크루즈는 신보수주의 잡지 <코멘터리>가 던진, “유대인 지식인들은 시온주의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하는가?”라는 질문에 답하려면, 정의를 원하는 흑인들이 이 동맹의 정당성을 제대로 따져봐야 한다고 말했다. <코멘터리>에 의하면, 노만 포드호레츠 등 일부 미국계 유대인 지식인들의 입장이 1960년대 말부터 점차 변화하기 시작했다. 국내적으로 흑인에 대한 모든 지원을 철회하고, 국제적으로 이스라엘을 무조건적으로 지원하는 방향으로 말이다.

1975년, UN 총회가 결의안 3379호를 채택해 시온주의가 “인종주의 및 인종차별의 한 형태”라고 비판하자, 미국에 큰 파장이 일었다.(10) 다니엘 패트릭 모이니한 미국 UN대사도 이에 크게 분노했다. 10년 전, 대학교수이자 존슨 대통령의 측근이었던 그는 미국계 흑인을 위한 사회정책 보고서를 작성해, 구조적인 사회적 소외 문제를 규명한 업적으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러나 이제는 이스라엘의 ‘인종주의’를 거론하는 자에게 야유를 보내는 신보수주의자가 됐다. 

팔레스타인 문제가 미국 흑인사회에 일으킨 반향을 이해하려면, 시민권운동 이후 미국 사회에 나타난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 미국 사회에서 팔레스타인을 지지한다는 것은, 반체제적 권리를 주장하는 것과 같다. 그것은  한때 흑인, 멕시코, 인디언의 영토와 권력을 빼앗고 이제는 중동까지 지배하려는 강력한 미국의 권위에 도전하는 셈이다. 

남아공의 흑인차별 정책(아파르트헤이트)은 대학가에 격렬한 사회운동을 일으켰다. 흑인 빈곤 지역의 게토화를 반대한 운동가들도 대학생들의 시위를 부추기는 데 한몫 했다. 미국과 이스라엘은 식민주의와 자본주의 지배의 상징인 남아공 정권을 지지하며 무기를 공급했다. “이스라엘 아파르트헤이트”란 말도 자주 등장했다.(11) 팔레스타인은 이 때문에 디아스포라의 일원이 됐다. 남아공 운동가들은 남아공 대학에 대한 미국의 지원을 모조리 철회시키라고 정부에 요구했다. 

1979년, 시민권 운동가 출신의 앤드류 영은 PLO 지도자들을 만났다는 이유로 미국 UN대사직에서 파면됐다. 지미 카터 대통령은 결국 이 사건으로 미국계 흑인 대표들의 미움을 샀다. 제임스 볼드윈은 1979년 9월 29일 주간지 <더 네이션>에 이렇게 기고했다. “이스라엘이 건국된 이유는 유대인의 안녕을 위해서가 아니라 서구의 이권을 위해서다. 팔레스타인은 “원활한 통치를 위해 분할된” 영국식 식민정책의 희생자이자, 30년간 유럽이 기독교인으로서 가졌던 죄책감의 희생자다.” 그러나 앤드류 영에 대한 파면 조치는 지정학적 사안이기보다는 미국의 국내 문제에 가까웠기 때문에, 많은 흑인들은 미국계 유대인들이 파면 조치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이 때문에 반유대주의 정서는 더욱 거세게 일었다. 

1990년대, 미국계 흑인 급진주의자들의 활동이 저조해지면서 흑인-팔레스타인 동맹도 정체기를 맞이했다. 흑인 지도자들의 온건한 태도, 흑표범당 급진 혁명가들의 분열, 1993년 오슬로 협정 이후 불어온 중동의 평화 물결이 미국흑인해방운동의 핵심요소인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을 잠재웠다.

2015~2016년이 돼서야 흑인-팔레스타인 동맹이 다시 불붙기 시작했다. 경찰이 비무장 상태의 흑인 청소년들을 공격하고 퍼거슨 지역의 흑인 폭동을 강제 진압한 것이 도화선이었다. SNCC의 뒤를 이어 블랙 라이브즈 매터도 인종차별적 세계 지배구조에 반대의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잠잠했던 동맹에 다시 불을 붙이는 데는 SNS의 역할이 컸다. ‘블랙스 포 팔레스타인(B4P)’이라는 이름의 페이스북 그룹도 등장했다. 반인종주의 조직인 ‘드림 디펜더스’는 2017년에 흑인 예술가들과 점령지를 방문했고, 이스라엘 보이콧 논란이 끊이지 않는 미국 대학가에서 토론회를 주최했다.(12)

몇몇 운동가와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단체들이 흑인과 팔레스타인 동맹을 지지하기 시작했다. 시카고 출신의 래퍼 빅 멘사는 일간지 사설란에 “팔레스타인이 내게 가르쳐준 미국 인종주의”라는 제목의 글을 게재해, 2017년 점령지를 방문하며 느꼈던 복잡한 심정을 풀어냈다.(13) 그는 이스라엘 군인이 팔레스타인 소년을 심문하는 장면을 목격했을 때 마치 거울 속 나 자신의 모습을 본 것 같다고 느꼈다고 말했다. “나 자신이 용의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감이 먼저 들었다. 그리고 곧이어 깨달았다. 저곳에서 말하는 ‘흑인’은 저들(팔레스타인인)이라는 것을 말이다.”  

 

 

글·실비 로랑 Sylvie Laurent 
하버드 및 스탠퍼드 객원연구원, 시앙스포 파리 강사, 『루터 킹. 지적·정치적 전기』(2015년)의 저자

번역·이보미
번역위원

 

(1) Angela Davis, 『Freedom is a Constant Struggle: Ferguson, Palestine, and the Foundations of a Movement』, Haymarket Books, Chicago, 2016년.

(2) ‘When I see them, I see us’, Black Palestinian Solidarity, www.blackpalestiniansolidarity.com

(3) Malcolm X, ‘Zionist logic’, <The Egyptian Gazette>, Le Caire, 1964년 9월 17일.

(4) James Baldwin, ‘The Harlem Ghetto’, V COMMENTARY 165, 169 (1948)

(5) Alex Lubin, ‘Geographies of Liberation: The Making of an Afro-Arab Political Imaginary’, <The University of North Carolina Press>, coll. ‘The John Hope Franklin Series in African American History and Culture’, Chapel Hill, 2014년.

(6) Cité par Douglas Robinson, ‘New Carmichael Trip’, <The New York Times>, 1967년 8월 19일.

(7) Huey P. Newton, ‘On the Middle East’, 『To Die For the People』, Random House, New York, 1972년.

(8) Murray Friedman, ‘What Went Wrong? The Creation and Collapse of the Black-Jewish Alliance’, <The Free Press>, New York, 1995년.

(9) Harold Cruse, ‘The Crisis of the Negro Intellectual: A Historical Analysis of the Failure of Black Leadership’, <Morrow>, New York, 1967년.

(10) 결의안은 “인종 간 우월함에 차이가 있다는 어떤 독트린도 과학적으로 거짓이며, 도덕적으로 비난 받아야 하고, 사회적으로 불공정하며 위험하다”고 규정. 72개국 찬성, 35개국 반대(32개국 기권)로 채택된 이 협약은 이스라엘의 요구에 따라, 1991년 12월 16일에 채택된 결의안 46/86에 의해 폐지되었다.

(11) Lire Alain Gresh, ‘Regards sud-africains sur la Palestine’,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09년 8월호.

(12) Alain Gresh, ‘Lobby israélien, le documentaire interdit(왜? 알자지라 다큐멘터리는 방영 금지됐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한국어판, 2018년 9월호.

(13) ‘Vic Mensa: What Palestine taught me about American racism’, <Time>, New York, 2018년 1월 1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