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개혁이 곧 심리 치료다

[서평]

2010-12-03     김종락

<불안증폭사회: 벼랑 끝에 선 한국인의 새로운 희망 찾기> 김태형 지음, 위즈덤하우스

다시 한 해를 정리할 시기, 지난해를 요약하는 키워드가 등장하는 때다. 10여 년 전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사태가 나라를 뒤흔든 뒤 출판계에서 내놓는 단골 키워드가 있다. ‘(개인의) 불안’이다. 출판 동네에서 ‘불안’은 흔히 마음 수양이나 심리 분야의 책들이 팔린 현상을 설명하는 키워드다. 하지만 실제 ‘불안’으로 설명할 수 있는 책의 범위는 이보다 훨씬 넓다. 자기계발, 재테크 책이 종합 베스트셀러 상위 순위에 반드시 포진하는 것부터 불안에서 유래한다. 심리학, 뇌 과학 책이 인기를 얻고 행복 추구 열풍이 분 것도 불안이나 분노, 우울과 멀어지기 위해서다. 최근 뇌 과학의 발달에 힘입어 마음과 뇌의 관계를 분석하며 세로토닌 부족을 만병의 근원으로 보고 대안을 제시한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현상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온갖 분야의 책들이 마음의 병 치유에 나선 지 10여 년, 그럼에도 우리 사회의 불안과 우울이 줄어든 정황은 보이지 않는다.

중견 심리학자가 쓴 <불안증폭사회>는 “IMF 경제위기 이후 한국인이 미쳐버렸다”며 “그 마음의 병을 강요하는 일차적 원인이 사회에 있을 뿐 아니라 치유 또한 사회에 있다”고 주장하는 책이다. 당연하지만 불안을 비롯한 부정적인 병의 기본 원인이 유전자나 뇌 등에 있다는 주류 심리학자들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 반대다. 마음의 병을 유발하는 사회적 요인이 70%쯤이라면 개인적 요인은 30%에 그친다. 요컨대 한국인의 불안은 IMF 위기라는 정신적 외상을 겪은 이들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다.

책에 따르면 전쟁터의 포탄처럼 작열하며 한국인의 마음에 외상을 입힌 요인은 신자유주의다. 신자유주의는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한국의 주류세력을 통해 거침없이 확산시켰고, 한국 사회의 모든 영역을 완벽하게 장악했다. 그러나 그 대가로 한국인의 마음은 피멍이 들었고, 그것은 어느새 치명적인 마음의 병이 돼버렸다. 생사를 가르는 전쟁터에서 천신만고로 살아남은 사람들이 미쳐버리듯, 신자유주의의 폭격으로 짓이겨진 채 살아남은 한국인도 미쳐버렸다. 따라서 책은 불안의 치유도 마음 수양이나 심리 치료만으로는 가능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필요한 것은 사회개혁이다. 심리학 저작뿐 아니라 신문, 잡지 등을 많이 인용한 이 책이 심리학 저작 못지않게 진보적인 정치·사회 운동 서적으로도 읽히는 이유다.

책날개에 적힌 이력에 따르면, 저자는 학부와 대학원에서 임상심리학을 공부하다 주류심리학에 대한 회의로 한동안 학자로서의 꿈을 접었다고 한다. 그 뒤 사회운동에 몰두하다 심리학자의 길로 돌아온 것은 중년의 나이가 되어서다. 사회운동에 열정적으로 참여하면서 만난 사람들과 다양한 경험은 인간에 대한 이해를 한층 깊게 해주었고, 학문적 견해를 발전시키는 데 든든한 뒷받침이 되었다. 특정 분야의 학자가 외도를 경험한 뒤 이를 바탕으로 통찰력이 빼어난 이론 체계를 만드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문제는 과학적인 뒷받침과 설득력이다. 책은 자신의 주장을 지지하기 위해 책 말미의 일부를 할애해, 주류 진화심리학을 공박한다. 이를테면 돈이나 권력을 가진 늙은 남자가 미모의 젊은 여성과 결혼하는 것을 두고, 남성은 번식욕 때문에, 여성은 아이를 잘 기르기 위해 남성의 돈과 권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것이 진화심리학의 기본 입장이다. 그렇다면 거부들이 좋아하는 여성은 호리호리하고 말라서 아이를 잘 낳을 수 있는 체형과 거리가 먼 현상은 어떻게 설명하는가. 게다가 언제 죽을지 모르는 늙은 남자가 애를 잘 키우기는커녕, 번식 능력조차 의심스러운 현상은. 저자에 따르면 나이 많은 거부는 돈으로 자신의 늙음을 보상받으려 하고, 젊은 여성들은 남성들이 가진 돈·위자료·권력 등에 매력을 느껴 서로 결합하는 것이 상식이다. 주류심리학이 과학의 함정에 빠져 인간을 돼지로 보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는 것이다. 세로토닌이 인간의 행복을 결정한다며 뇌의 유전자나 화학물질로 사회현상까지 설명하는 것을 ‘첨단과학의 탈을 쓴 환원주의’라고 비판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대안 심리학자’라 할 저자의 진단은 심리학 이론을 동원했으나, 상식에 가깝다. 책은 우선 IMF 경제위기란 초대형 쓰나미가 휩쓸고 간 뒤 10여 년이 지난 한국 사회의 모습을 주관적·객관적으로 그린다. 거리를 다니는 한국인의 얼굴이 대개 화나 있거나 긴장돼 있거나 우울하고 힘들어 보이거나 생기 없는 표정이 압도적이라는 이야기는 주관적이니까 일단 제쳐놓자. 흔히 접하면서도 새삼 놀라운 것은 객관적인 통계다. 책이 제시한 2009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통계에 따르면 회원국 중 한국은 자살률, 이혼율, 사교육비 비중, 노동시간, 노동유연성(해고의 용이성), 비정규직 비율, 저임금노동자 비율, 산재사망자, 세 부담 증가율 등이 1위이고, 출산율은 거꾸로 1위다. 삶의 조건이 열악한 가운데 자살률과 이혼율은 1위이고, 출산율은 꼴찌인 나라가 가는 길은 한 곳뿐이다. 멸종의 길이다.

책에 따르면 미국발 신자유주의의 가장 큰 폐해는 이에 기초해 만들어진 ‘한국식 경쟁’이다. 이 경쟁의 다른 이름은 서로를 죽이려는 ‘악의의 경쟁’이다. 이것의 가장 큰 특징은 승자독식, 즉 ‘개평도 없는 싹쓸이’다.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에서 아웃은 곧 죽음이다. 이른바 루저가 되면 사회에서 배제당할 것이고, 그러느니 삶을 포기하는 것이 낫다. 이런 사회에서 아이를 낳지 않겠다는 것은 당연하다.

책은 이어 신자유주의로 인해 불안이 증폭되는 9가지 심리 코드 설명에 많은 부분을 할애한다. 부끄러움조차 잊은 채 사회에 만연한 이기심을 비롯해 고독, 무력감, 의존심, 억압, 자기혐오, 쾌락추구, 도피, 분노…. 저자의 진단에 따르면 세계에서 유래를 찾기 힘든 명품 열풍과 자신의 계급이익에 반하는 계급 배반 투표, 한국인의 냄비 근성과 범죄율의 가파른 상승도 신자유주의에서 나온 사회병리가 일차적인 원인이다. 나쁜 짓을 하고도 무엇이 나쁜지 모르는 도덕불감증, 무위도식과 한탕주의도 마찬가지다. 우리 사회를 휩쓰는 박정희 향수는 신자유주의로 미친 세상을 나 혼자 바꿀 수 없다는 무력감에서 나온 병적인 현상이다. 돈만 있으면 행복한 줄 알고 시장만능·경쟁만능으로 인간의 본성과 어긋나는 세상을 만들었다가 그만 한국인 모두가 미쳐버린 것이다.

이제 멸종의 길로 가는 한국인, 멈춰 세울 방책은 무엇인가. 모든 병이 그렇듯이 치료는 자신의 병이 무엇이며, 왜 걸렸는지 아는 것에서 출발한다. 병의 원인을 신자유주의로 지목한 책의 치유책 또한 자명하다.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와 사회 시스템을 철폐하는 것이다. 폭주하는 사회에서 살아남는 개인적인 방법도 제시된다. 인간관계를 재검토해, 자신과 주변 사람을 살려내라. 건강한 공동체에 소속해 개인적 무력감을 떨치고 사회적 실천에 나서라. 그리하여 ‘돈 중심의 세상’이 아닌 ‘사람이 중심 되는 세상’을 만들라. 무엇보다 돈과 물질만 있으면 행복해진다는 저급한 미신에서 벗어나라.

혹시 ‘말이야 좋지만, 이 미친 세상을 내가 어떻게 하겠어’라고 생각하는가. 심리학자답게 이를 예견한 저자는 이렇게 적고 있다. “포기하지 말고, 첫 단추라도 한번 채워보자. (중략) 우리가 스스로를 버리지 않는 한, 세상에는 항상 희망만 남아 있다.”

글•김종락
농부. 신문의 문화부, 국제부 등에서 일하다 문화부장을 잠시 지냈다. <스코트 니어링 평전>을 우리말로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