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니 타이머’ 에 반하는 사용가치의 연장
어떻게 하면 무분별한 소비습관을 버릴 수 있을까? 그 해답은 제품의 보증기간 연장에서 찾을 수 있다. 보증기간 내에 고장 나는 제품의 80%는 판매자나 제조사에서 수리가 가능한데, 이런 단순한 사실만 봐도 보증기간 연장이라는 제안은 설득력이 있다.(1) 수리 비율은 천차만별이다. 사람들은 프린터보다는 손목시계를 더 오래 쓰며, 두 제품의 가격이 같아도 프린터보다 손목시계에 더 긴 수명을 기대한다. 이것이 포괄적인 추산이라 하더라도, 이 수치(수리 비율)는 다수의 소비자가 이런 권리를 활발하게 행사한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보증기간이 끝나는 즉시 수리 비율은 절반 이하로 떨어지는데, 전기 및 전자제품은 40% 이하로 낮아진다. 소비자는 보증기간이 끝난 토스터나 컴퓨터의 수리 보다는, 새로 구입하는 데 돈을 지불한다. 따라서 법을 개정해 제품의 보증기간을 연장하면 된다. 보증기간을 늘리면 사람들은 물건을 더 많이 고쳐 쓰고, 더 오래 쓸 것이다. 새로 제품을 구매하는 속도와 천연자원 개발 속도는 물론, 에너지 생산에 맞물린 에너지 유통의 흐름도 늦출 수 있다. 보증기간은 경제적 변화는 물론 정치적 변화를 견인하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
프랑스에서는 여러 단체들이 합심해 보증기간 연장을 요구하고 있다. 프랑스 자연환경(FNE)이 지원하는 ‘지구의 친구들(Les Amis de la Terre)’, ‘계획적 진부화 중단(HOP; Halte à l'Obsolescence Programmée)’(2), ‘기후 행동 네트워크’(RAC-F) 등은 보증기간을 10년으로 연장하자는 청원을 제출했다.(3) 2014년 ‘아몽법(loi Hamon, 계획적 진부화 금지 법안)’이라 불리는 소비법이 시행된 이후, 프랑스는 1999년의 유럽연합 지침에 따라 법적 의무 보증기간을 2년으로 정했다. 이전에는 제조업체가 보증기간을 1년으로 하든 6개월로 하든 통제할 수 없었다.
보증기간을 10년 이상으로 변경하면, 다른 분야에 미치는 파급효과도 엄청날 것이다. 상품의 생산과 소비의 판도도 바뀔 것이다. 끊임없이 상품을 구매하는 행태를 중단시키는 이 조치는, 환경 측면에서 한층 지속가능한 사회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일회용 문명을 끝내는 ‘보증기간 10년’
기업들이 이에 결사반대하는 것을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다. 구매가 활발해질수록 이윤이 창출되는데, 소비자가 한 제품을 오래 사용할수록 기업의 이윤은 감소하기 때문이다. 어떤 제품이든 마찬가지다. 물론, 제품 수리는 수익성이 있는 분야다. 자동차 등 일부 제품에는 이미 현실화되고 있으며, 덕분에 수천 명의 자동차 정비공들이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장기적인 관점에서 제품수리의 수익성을 보려면 현재 생산 중인 모델들의 수명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해야 한다.
이런 변혁이 달갑지 않은 기업들은, 보중기간 연장에 드는 비용은 결국 소비자가 부담하게 될 거라고 거듭 강조한다. 수리 요구가 월등히 증가하면 제조자와 판매자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추가비용이 발생할 수밖에 없고, 이 비용은 제품가격에 반영될 것이라는 논리다. 또한 제품혁신이란 상품이 지속적으로 회전해야 가능한데, 수리증가로 제품혁신이 침체될 위험이 있다는 주장도 덧붙인다. 기업들의 주장에 의하면, 이런 식의 회전속도 저하는 자본주의가 작동하는 데 중추적 역할을 하는 연구개발 분야의 침체로 이어질 것이다. 나아가 소비자들은 ‘자유로운 선택’의 권리를 잃게 될 것이다. 원하는 만큼 스마트폰을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이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한 가지 측면에서는 기업들이 주장이 맞다. 제품을 더 오래 보증하려면 내구성이 좋은 재료로 제품을 생산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일회용 문명의 종말을 의미한다. 특히 19세기 말 질레트 면도기가 개발된 이후 소비사회의 기둥역할을 해온 문명 말이다.(4) 법적 보증기간을 연장한다는 것은 부품을 오래 사용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일부 가전제품 제조업체의 경우에는 그 기간이 10년 혹은 그 이상이 될 수도 있다. 제조업체들은 제품을 진부화하기 위해 고의로 사용기한을 줄이기도 한다. 오래 사용이 가능한 부품들을 확보하려면 길고 지루한 시간을 인내해야 한다. 판매자조차도 그런 부품이 존재하는지 모른다. 소비자는 기다릴 여유가 없다. 그들은 새로운 제품을 다시 구매한다.
따라서 가장 먼저 필요한 절차는, 부품별로 분류돼 있고 누구나 열람, 이용 가능한 ‘장기간 사용가능한 부품 목록’을 만드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자동차의 경우, 이런 목록화 작업이 이미 시작단계에 있다. 관건은 이 목록에 누구나 접근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상태로는 저작권법이나 산업기술 관련법 때문에 접근이 용이하지 않다. 부품 정보의 개방과 공유 이면에는 사유재산 문제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어떤 기업이 시장에 상품을 내놓고 그것을 팔아 이익을 얻는다면, 그 상품의 독점권은 제품을 생산한 기업이 소유한다. 그리고 자본가의 이익은 이 독점권에서 발생한다.
온실가스도 줄이는 ‘작업의 현지화’
보증기간을 늘리려면 수리 인력도 더 많이 필요하다. 10년 동안 프랑스에서 수리를 전문으로 하던 자영업계 절반이 폐업했다.(5) 그나마 자동차 정비소는 형편이 나은 편이지만, 가전제품 수리점이나 구두 수선점의 경우는 전국적으로 초토화된 상황이다. 제품 보증기간을 늘리면, 이런 직업들이 되살아날 것이다. 일부 도심에서는 소비자들이 물건을 고치러 오게끔 유도하는 ‘수리 카페(Repair Cafés)’ 운동이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6) 이는 옛 수리방식의 복고 열풍일 수도 있지만, 소비자들의 의식이 변화한 결과다. 수리 카페로 인해 많은 이들이 새로 사는 것보다 고쳐 쓰는 것을 선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영업 수리공이라는 직업에는 ‘작업공간의 현지화’라는 특징이 있다. 보통 스마트폰이 고장나면 세상 저 끝으로 보내졌다가 되돌아오는 일이 종종 벌어진다. 특히 판매사(프랑스에서는 가장 흔한 상황)나 제조사(예를 들면 독일)를 거쳐 수리하는 경우가 그렇다. 반면 자영업 수리공에게 맡길 경우, 현지 인력이 직접 수리를 한다. 기업들은 보증기간을 확대하면 제조 및 유통비가 증가해 고용을 위협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보증기간을 늘릴수록 수리 요청도 늘 것이고, 덩달아 일자리도 늘어날 것이다. 물론 고용시장 구조의 변화가 선행돼야 한다. 이를 활성화할 고용시장의 재전환 조치를 시행할 주체는 국가가 돼야 할 것이다.
제품을 고쳐 쓸 수 없다면, 즉 애초에 고쳐 쓸 수 없게 제품을 만든다면, 아무리 부품사용 기간을 늘리고 수리 부문을 활성화해야 소용이 없다. 제품을 만드는 방법에는 부품들을 (분리할 수 없게) 서로 붙이는 방식도 있고, 나사로 고정하는 방식도 있다. 간단하지만 어떤 방법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부품을 교체하기 쉬울 수도, 어려울 수도 있다. 여러 부품을 한 덩어리로 만드는 ‘모노블록(일체형 주조방식)’ 구조에서는 ‘구성요소’라는 개념 자체가 사라진다. 덩어리를 쓰거나 버리거나, 둘 중 하나만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자동차 헤드라이트가 그렇다. 제조업체는 실상 ‘계획적 진부화’를 위해 노력할 필요도 없다. 애초에 고칠 수 없는 ‘한 덩어리’로 만들면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 편이 훨씬 간단하고 법적으로도 안전하기 때문이다.
보증기간 연장은 상품생산의 재현지화를 이끄는 지렛대 역할을 할 것이다. 현지생산 방식으로 복귀하지 않는 한, 생태학적 전환이 성공할 가능성은 없다. 지구 반대편에서 온 값싼 상품들은 (반생태학적 제조공정과 장거리 운송 탓에) 온실가스 배출량이 높은 탓에, 10년이라는 보증기간 요건을 채우기 어렵다. 우리는 시장의 세계화가 필연적으로 상품의 질을 떨어뜨리고, 대다수 상품의 보증기간을 없애버린다는 점을 자주 간과한다. 기업들이 자사 제품을 10년 동안 책임져야 한다면, 기업들은 세계 곳곳에 널리 퍼져 있는 수많은 공급업체에 질 좋은 부품을 확보하라고 지시할 것이다.(7)
자동차가 아니라, ‘운전 기간’을 산다
마지막으로, 보증기간의 연장은 ‘사용비용(Prix d’usage)’의 공시와 함께 이뤄져야 한다. 아몽법에 의하면, 사용비용은 “동산(動産)의 소유가 아닌, 동산에 의해 발생하는 서비스의 사용과 관련된 상품 가치”(8)를 지칭한다. 2014년 당시 정부는 사용비용 공시를 의무화하지 않고 기업들의 재량에 맡겼다. 그 결과, 아무도 사용비용을 거들떠보지 않았다.
그러나 사용비용은 놀라운 도구다. 어떤 상품의 공시가는 낮을 수 있지만, 그 사용비용은 높을 수 있다. 이 두 비용이 반비례하는 경우가 많다. 낮은 가격이 산정됐다면 그 이유는 낮은 품질과 생산자의 열악한 노동여건 때문일 것이다(이 두 가지는 대체로 짝을 이룬다). 사용비용 책정은 상품의 ‘표준’ 수명에 따라 달라진다. 모든 상품에는 구상단계에서 추산하고 소비자가 예상하는 ‘기대수명’이 존재한다.
스마트폰은 평균 20개월마다 바꾸지만, 냉장고는 더 오래 작동하기를 기대하는 것이다.(9) 제품의 내구성이 강할수록 그 제품의 사용비용은 낮아진다. 제품의 총 사용비용을 더 긴 기한으로 나누기 때문이다.
제품 가격의 ‘블랙박스’를 열어 소비습관의 변화를 불러일으킬 수는 있겠지만, 과연 실효성이 있을지는 의문이다. 우리가 구입하는 식품의 품질표시 라벨은 주로 영양성분이나 열량 등 구성요소를 알려준다. 그러나 그 제품의 생산조건, 생산자의 임금, 공급자의 마진 등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10) 이는 다른 모든 상품도 마찬가지다.
사용비용 공시에는 전체 생산공정에 관한 정확한 정보가 뒷받침돼야 한다. 우선 노동조건을 명시한 라벨을 의무화해야 한다.
예를 들어 생산자의 임금, 노동시간, 남녀평등 준수 등과 같은 생산관련 사항을 라벨에 상세히 기재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과거 공장이나 상점에서 노동조합의 존재를 인증하는 ‘조합 라벨’ 전통도 부활할 것이다.(11) 내구재와 관련해서는, 라벨에 사용기한을 추산한 비용, 재료의 품질 같은 환경의 지속 가능성을 알려주는 지표를 명시해야 한다.
결국 사용비용을 공시하자는 논리는 보다 근본적인 변화의 밑거름이 된다. 어떤 이들은 이를 ‘기능성의 경제’라고 부른다. 이제 사고 파는 것은 물건 그 자체가 아니라, 그 물건의 ‘사용성’이기 때문이다. 즉, 자동차를 사는 게 아니라 운전할 수 있는 기간을 구매한다. 다시 말해, 더 이상 ‘소유권 이전’이란 개념이 존재하지 않게 된다. 이것은 경제 전반에 걸쳐 보편화된 ‘임대의 법칙’이다. 이제는 교환가치보다 사용가치가 우세해진다.
그러나 이런 교환방식에서 발생하는 이윤을 사적 플랫폼이 장악할 수 없게 하려면, 사회적 자산 소유에 공공성을 도입해야 한다. 자동차를 렌트할 경우, 자동차 소유주는 렌터카 회사이므로 렌트 조건이나 가격을 책정할 권리는 렌터카 회사에 있다. 그러나 주차장이 (코뮌이나 공공기관의) 사회적 재산이 된다면, 사용자들은 주차장 사용조건과 가격에 압력을 행사할 수 있다. 민주주의는 이런 식으로 논쟁과 반론을 통해 사용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런 변화가 가능해지려면, 교환가치를 지지하는 사회세력에 맞서야 한다. 이 세력은 막강하다. 이런 관점에서 ‘기능성의 경제’에는 여러 사회 분야의 협조를 이끌어낼 정치적 프로젝트가 뒤따라야 한다. 우선 서민층을 동원할 수 있을 것이다. 사유재산에 맞서 사용가치를 지지한다면 사회주의 및 정치적 생태학의 공통기반을 구축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기반은 변화의 시발점이 될 것이다.
글·라즈미그 크쉐양 Razmig Keucheyan
저서로 『만들어진 욕구. 어떻게 소비습관을 버릴 것인가 Les Besoins artificiels. Comment sortir du consumérisme』, Zone, Paris, 2019년 9월 19일 출간 예정.
번역·조민영 sandbird@hanmail.net
번역위원
(1) ‘Allonger la durée de vie de nos biens: la garantie à dix ans, maintenant! Note de plaidoyer 재화의 수명을 연장하라: 보증기간을 10년으로, 지금 당장! 변론 노트’, Les Amis de la Terre(지구의 친구들), 2016년 9월, www.amisdelaterre.org.
(2) ‘계획적 진부화’란, 기업에서 신상품의 판매를 위해 의도적으로 제품의 수명을 단축시키는 기술적 조처를 취하는 것을 말한다. 일례로 ‘소니 타이머’는, 소니 제품의 무상수리 보증기간이 막 지난 시점에서 제품이 고장 나는 현상을 말한다.(-역주)
(3) Serge Latouche, 『Bon pour la casse. Les déraisons de l’obsolescence programmée 낭비사회를 넘어서-계획적 진부화라는 광기에 관한 보고서』, Les Liens qui libèrent, Paris, 2012.
(4) ‘Signez la pétition Garantie dix ans maintenant 당장 10년 연장 청원을 승인하라’, Les Amis de la Terre(지구의 친구들), 2016년 10월 24일, www.amisdelaterre.org.
(5) ‘Allonger la durée de vie de nos biens: la garantie à dix ans, maintenant! Note de plaidoyer 재화의 수명을 연장하라: 보증기간을 10년으로, 지금 당장! 변론 노트’, op.cit.
(6) Nicolas Six, ‘Dans un Repair Café, avec les bénévoles qui redonnent vie aux objets cassés 고장난 물건들에 새 생명을 선사하는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수리 카페에서’, <르몽드>, 2017년 10월 1일.
(7) Philippe Moati, ‘Étendre la garantie sur les biens à dixans’(제품 보증기간을 10년으로 연장한다면), <르몽드>, 2010년 5월 3일.
(8) 2017년 3월 17일 소비 관련법, 2장, 1절 4항, www.legifrance.gouv.fr
(9) Clément Chauvin & Erwann Fangeat, ‘Allongement de la durée de vie des produits 제품의 수명 연장’, 프랑스 환경에너지 관리국(Ademe)이 지원한 연구, Angers, 2016년 2월.
(10) Franck Cochoy et al., ‘La consommation low cost 저비용 소비’, <La Nouvelle Revue du travail(노동신보)>, n°12, Paris, 2018년.
(11) Jean-Pierre Le Crom, ‘Le label syndical 조합 라벨’, dans Jean-Pierre Le Crom (dir.), 『Les Acteurs de l’histoire du droit du travail 노동법 역사의 주역들』, Presses universitaires de Rennes, 2005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