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를 수출하는 ‘오트포르!’
[턴키방식의 정권교체]
전설은 1998년 가을의 어느 날, 베오그라드 도심의 한 카페에서 시작됐다. 이날 카페에 모인 청년들의 대부분은 1992년과 1996~1997년 학생시위에 참여했던 경험이 있었다. 그들은 저항을 뜻하는 ‘오트포르!(Otpor!)’라는 명칭의 단체를 만들어,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대통령을 퇴진시키고자 했다. 1986년 신유고연방의 대통령이 된 밀로셰비치는 대학가까지 장악하려 했다. 이날 오트포르!의 일원인 네나드 페트로빅 두다는 종이 귀퉁이에 높이 올린 검은 주먹을 그려 옆에 앉은 친구에게 보여줬다. 그리고 11월의 어느 아침, 이 그림은 오트포르!의 상징이 돼 반체제 슬로건과 함께 시내 곳곳의 벽면에 스텐실 기법으로 새겨졌다. 시위대 구성원 4명이 체포돼 15일 동안 구금됐다. 주먹 그림은 일간지 <Dnevni Telegraf>의 1면을 장식했고, 이 일간지의 편집장인 슬라브코 쿠루비자는 법정에 소환됐다.
“오트포르!는 신흥세력으로 떠올랐습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도 갑작스럽게 유명세를 타게 됐습니다.” 해양생물학을 전공하는 대학생이자 뮤지션이었던 스르자 포포비치(1)는 훗날 록스타가 된 후에 정치에 입문하고자 했다.
본래 오트포르!는 30여 명의 대학생들로 구성돼 있었다. 그리고 1년 후, 오트포르!의 동지들이 세르비아 전역에서 수천 명으로 늘어났다. “우리는 곧 대학 내에 인프라를 마련했습니다. 야당이 분열돼 있던 시기라 청년들은 자연스럽게 모였습니다.” 오트포르!의 공동설립자가 설명했다.
당나귀와 함께 시위를 벌이다
오트포르!의 작은 조직 규모와 공식 대표가 존재하지 않는 수평적인 문화는 현 정권의 명분을 약화하고 권위를 떨어뜨리는 데 장점으로 작용했다. 오트포르!는 우선 시민들, 특히 정치 상황에 환멸을 느끼고 있던 청년들을 공략하는 데 주력했다. 또한, 군주제 지지자, 사회민주주의자, 자유주의자까지 끌어모았다. 특별한 목표는 없었다. “특별히 정치적인 활동은 하지 않았습니다. 지루하니까요. 다만 우리의 활동이 유쾌하고, 사람들에게 웃음을 선사하기를 원했습니다.” 영국의 신선하고 혁신적인 코미디 집단 ‘몬티 파이튼’의 열렬한 팬인 포포비치가 말했다.
일례로, 오트포르!는 세르비아 중부의 크루셰바츠에서 군인 복장을 한 당나귀와 함께 우스꽝스럽게 시위를 벌였는데, 경찰은 시위대를 체포했지만, 당나귀를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해했다. “경찰이 곤봉을 휘두르며 당나귀를 화물운송차에 싣고자 안간힘을 쓰는 기상천외한 장면이 펼쳐졌습니다.” 과거 활동가였던 스르단 밀리보제비치가 말했다. “시위대는 ‘우리나라의 영웅을 건드리지 말라’고 외쳤습니다.” 이 익살스러운 광경과 시위대의 체포 소식은 다음 날 각종 언론의 1면에 실렸다. 경찰의 시위대 탄압은 정권의 정당성을 훼손했고, 전 세르비아 지도자인 밀로셰비치의 얼마 남지 않은 지지자들까지 분열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오트포르! 세대는 구(舊) 유고의 동족상잔 내전과 국제적 고립을 경험한 세대다. 이들은 거창한 정치적 계획이 있다기보다는 그저 ‘평범한 삶’을 꿈꾼다. “우리나라 상점의 판매대가 텅 비어 있었을 때, 우리는 위성채널을 통해 파리와 런던에 있는 같은 세대의 청년들이 어떻게 사는지를 봤습니다. 우리는 생존을 위해 싸웠습니다.” 오트포르!의 초기 회원 중 한 명인 프레드라그 레시치의 말이다. “우리는 무엇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누군가에게 반대하기 위해 투쟁했습니다.” 과거 오트포르!의 비공식 대변인이었다가 현재는 케냐로 이주해 사는 이반 마로비치가 말했다.
1999년, 코소보 전쟁과 NATO의 유고연방 폭격은 오트포르!의 중대한 전환점이 됐다. “1999년 3월 24일에 잠에서 깨어보니 프랑스군이 세르비아의 상공에서 폭탄을 투하하고 있었습니다. 밀로셰비치의 독재정권을 붕괴시키려고 말입니다.” 포포비치가 회상했다. 기자였던 그의 어머니는 국영 TV 방송사로 떨어지던 폭탄을 가까스로 피했다. 포포비치는 은신한 덕분에 목숨을 건졌지만 쿠루비자는 밀로셰비치 정권의 하수인에게 암살됐다.
이런 혼란의 시기 이후, 오트포르!는 정치적 단체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지지층을 넓히고 좀 더 많은 의견을 모으기 위해 오트포르!는 대학생만이 아닌 모든 시민의 단체로 변신을 꾀했다. 억압의 수위는 점점 더 높아졌지만 오트포르!는 정당, 협회, 독립언론, 노조 등과 연대해 반정부 노선을 구축했다. 그리고 2000년대 중반, 오트포르!는 수많은 당원을 거느린, 강력한 반정부 세력의 주축으로 떠올랐다.
국내외의 압력에 사면초가 상태가 된 밀로셰비치는 2000년 9월 조기 대선을 실시하겠다고 선언했다. 오트포르!는 시민들의 선거참여를 독려했고 결과적으로 밀로셰비치 대통령을 축출하는 데 성공했다. 포포비치는 민주당 대표의 자격으로 의회에 입성했다. 그리고 조란 진지치 총리의 고문, 환경부 장관 비서, 부총리의 지속 가능한 개발 고문을 거치며 승승장구했다. 오트포르!는 이제 정식 정당으로 거듭나고자 했다. 그러나 2003년 의회 선거 결과는 완전한 실패였다. 오트포르!는 1.6%의 득표율에서 그쳤다.
‘평범한 혁명가’의 평범치 않은 모험
그러나 스스로를 ‘평범한 혁명가’로 소개하는 포포비치의 모험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2003년, 포포비치는 오트포르!의 또 다른 설립자인 슬로보단 디노비치와 함께 ‘CANVAS(le Centre pour les Actions et stratégies Non Violentes AppliquéeS: 비폭력 활동 및 전략의 적용을 위한 센터)’를 만들었다. CANVAS의 강사들은 조지아, 우크라이나, 벨로루스, 알바니아, 러시아, 키르기스스탄, 우즈베키스탄, 레바논, 이집트 등 50여 개 국가에 비폭력 투쟁의 노하우를 전파했다.
뉴 베오그라드의 한산한 쇼핑몰에 위치한 CANVAS의 좁은 사무실에는 CANVAS의 광범위한 네트워크와 활발한 활동을 짐작할만한 그 어떤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포포비치는 설명했다. “활동가들의 훈련과 교육이 우리의 주된 업무가 됐습니다. 첫 번째 수업에서는 미래를 향한 강력한 비전을 제시함으로써 통합을 이뤄내는 방법을 이야기합니다. 어떻게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를 가진 이들을 공통된 목표를 중심으로 포용해 여론의 50% 이상을 얻어낼 수 있는지를 설명합니다.”
디노비치 대표는 자신의 회사, 오리온 텔레콤을 경영하며 틈틈이 전세계 곳곳으로 비폭력투쟁 관련 강연을 하러 다닌다. 조만간 강연이 예정된 국가들로는 베트남, 짐바브웨, 스와질란드, 시리아, 소말리아, 서파푸아, 아제르바이잔, 파푸아뉴기니, 베네수엘라, 이란이 있다. 안전상의 이유로, 수업은 대개 인접 국가의 유명 호텔에서 이뤄진다. CANVAS의 강사들은 비폭력적인 방법을 이용한 정권교체 전략을 가르친다. 그들은 혁명이 저절로 성공할 수는 없다고 확신한다. 모든 것은 계획과 전략에 따라 실행돼야 한다. CANVAS는 어떻게 연합을 구성하고, 시민 불복종을 유도하고, 보이콧을 조직하는지, 그리고 어떤 슬로건과 음악을 사용해야 하는지 조언한다.
그들의 방식은 4단계로 구성된다. 1.상황 분석, 2.작전 설계(무엇을 해야 하는지), 3.실행(어떻게 이길 것인지, 누가 무엇을 언제 어떻게 그리고 왜 할 것인지), 4.기술적인 측면(물류, 조율, 커뮤니케이션)이다. CANVAS는 우선 해당 정권의 지지세력(경찰, 군, 기관, 언론)이 가진 특성들을 파악한 다음, 구체적인 예를 들어 그들을 복종시킬 전술을 알려준다. CANVAS는 그들의 세계관을 널리 알리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데올로기 단체가 아니라 교육단체입니다. 활동가들이 가진 정치색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극단주의자는 걸러냅니다. 극단적 이데올로기로는 비폭력투쟁이 어렵기 때문입니다.”
CANVAS의 팀은 규모가 매우 작다. “5명 직원의 인건비, 사무실, 무료 인터넷 연결선, 무료 전화가 전부입니다.” 포포비치가 열거했다. “4개국 출신의 강사 12명이 교육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들의 본업은 따로 있습니다. 필리핀 강사 한 명은 베오그라드에 소재한 비정부단체 소속이고, 또 한 명은 IT업계에서 일합니다. 또 다른 한 명은 회계 사무소를 운영 중이고, 나머지 조지아 출신의 강사들은 다른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초창기의 고객은 동유럽 국가들이었다. 폴란드 재단인 ‘유럽교육기금’은 2002년 9월에 CANVAS로 접촉을 해와 벨라루스의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독재정권 타도를 위해 결성된 주브르(Zubr, 폴란드 들소를 의미함)의 활동가들을 교육해 줄 것을 의뢰했다. 그러나 6개월 뒤 벨라루스 당국은 CANVAS의 강사들을 페르소나 논 그라타(Persona non grata: ‘호감이 가지 않는 인물’이라는 뜻의 외교용어-역주)로 지정했다. 조지아의 단체 크마라!(Kmara, ‘이제 그만’이라는 뜻)는 2003년 6월 세르비아에서 교육을 받은 뒤에 2003년 9월 ‘장미 혁명’에 참가해 에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의 퇴진을 이끌었다. 특히 우크라이나에서는 2003년 가을과 2004년 겨울에 오트포르!의 방법을 대대적으로 적용했다. 그리고 우크라이나의 활동가들은 오트포르!에서 교육받은 내용을 다시 아제르바이잔, 리투아니아, 러시아, 이란 등 다른 국가들로 널리 알렸다.
유럽 중부와 동부 국가들의 체제 변화는 남아메리카와 아프리카의 아랍 이슬람 국가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2005년 레바논의 백향목 혁명 전날, 그리고 3년 뒤 몰디브에서, 검은 주먹 그림이 다시 등장했다. 2009년에는 이집트의 청년단체 ‘4월 6일’과 ‘키파야(Kifaya, ‘이제 충분해’라는 뜻)’에 소속된 15명의 활동가들이 베오그라드로 와서 30년째 장기 집권 중인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을 권좌에서 끌어내리기 위한 전략을 연구했다. 워크숍은 헝가리 국경 인근의 팔리치 호수 주변에서 이뤄졌다.
“우리에게 교육받은 내용을 자국으로 돌아가 그대로 재교육했던, 매우 특별한 경우였습니다. 그들은 이집트의 15개 도시에서 무려 50여 번의 회의 워크숍을 개최했습니다.” 포포비치는 말했다. “시민 불복종, 비폭력투쟁, 시스템의 근간을 무너뜨리는 방법에 관한 교육 내용은 이집트 혁명의 방향을 결정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과거 ‘4월 6일’ 단체에서 시위조직 책임자로 일했던 타렉 엘-크훌리가 덧붙였다.
화염병 대신 꽃으로 대화하라
튀니지에서 아랍의 봄이 시작되고, 반정부 시위가 자연스럽게 확산되며 지네 엘 아비디네 벤 알리 대통령이 갑작스럽게 퇴진했다.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2011년 1월 카이로의 타흐리르 광장에 젊은 활동가들이 모였다. 그들은 불끈 쥔 주먹 그림과 ‘주먹이 카이로를 구할 것이다!’라는 슬로건이 새겨진 플래카드를 들고 있었다. 그 전날 인터넷상에는 점령할 장소들(이집트 공영방송국, 경찰서, 대통령궁)과 공권력을 따돌리는 방법이 구체적으로 명시된 문서가 돌아다녔다. 그리고 시위대에게 손에 장미를 들고, 긍정적인 슬로건을 외치고, 마주치는 군인을 포옹하고, 경찰에게 시위에 합류하라고 설득할 것을 독려했다. 이는 당연히 CANVAS가 작성해 배포한 문서였다. 무바라크가 퇴진하자, 시위에 가담한 활동가들의 일부는 압델 파타 엘-시시의 세력에 합류했고 또 일부는 투옥됐다.
아랍의 봄의 ‘비밀 설계자’라고도 불리는 포포비치는 이집트 혁명이 실패한 것은 미래에 대한 계획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들은 단지 무바라크 대통령을 축출하는 데만 관심이 있었을 뿐 그 이후의 일은 깊이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우크라이나와 세르비아의 경우에는 목표가 분명했습니다. ‘우리도 유럽처럼 살고 싶다’였지요. 그러나 아랍 국가들은 미래를 위한 긍정적인 모델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결국, 무슬림 형제단과 정부군이 다시 국가를 장악했고 시위대의 대부분은 감옥으로 갔습니다. 정말 안타깝고 슬픈 일입니다.”
포포비치는, 니콜라스 마두로 현 베네수엘라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야당 지도자이자 자칭 ‘대통령’인 후안 과이도를 직접 교육한 사실은 부정했지만, 그가 친구라는 사실은 인정했다. “과이도가 군의 지지조차 받지 못하는 마두로 정권을 상대로 투쟁한다면 저는 당연히 모든 능력을 동원해서 그를 도울 것입니다.” 2006년 12월 우고 차베스가 62%의 득표율로 재선에 성공하자 CANVAS는 ‘2007세대’라는 이름의 베네수엘라 청년단체를 교육하고 멕시코와 세르비아 등지에서 베네수엘라 활동가들과 작업했다. 과이도 팀의 멤버들 중 일부는 2007년 베오그라드에서 훈련을 받았다. 팀의 커뮤니케이션 책임자 제랄딘 알바레스, 오트포르!의 방식과 비주얼 상징을 활용해 학생 운동을 홍보하는 엘리자 토타로, 유럽의 인도적 지원을 담당하는 로드리고 디아망티가 그들이다.
2017년 6월에 작성된 문서에서 CANVAS의 책임자들은 그들이 생각하는 효과적인 전략을 공개했다. “베네수엘라의 야권은 화염병, 돌, 오물을 던지는 대신 음악, 포옹, 꽃을 매개로 경찰과 대화해야 한다.”(2) 2010년 9월에 CANVAS는 베네수엘라의 가장 큰 구조적 문제가 전기공급이라는 사실을 파악했다. “야당은 이런 상황을 이용할 수 있다.”(3) 일례로, 모하메드 무르시(무슬림 형제단, 2012~2013) 대통령이 집권 중인 이집트는 단전문제로 시민들의 불만이 매우 높았다. CANVAS의 문서에 의하면, 군의 쿠데타는 시민들의 반정부적인 목소리가 아주 높아져야 성공할 수 있다.
“최근 이집트에서 있었던 3차례의 쿠데타 시도는 모두 비슷한 수순을 밟았다. 군은 시민들로부터 충분한 지지를 받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실제 여론은 쿠데타에 긍정적으로 반응하지 않았고(또는 부정적으로 반응했고) 결국 쿠데타는 실패로 돌아갔다.” 2013년 3월 차베스가 사망하고 베네수엘라의 경제 상황이 급격하게 악화하면서 사회적 안정성을 저해하는 사건들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2019년 3월, 시몬-볼리바르 수력 발전소가 고장이 났다. 카라카스와 베네수엘라 대부분의 지역은 온통 암흑으로 변했다. 2010년부터 제기돼 온 인프라의 노후문제는 상당히 심각해서, IT 분야 등 외부의 지원을 받아도 완벽한 복원을 보장할 수 없다. 마이클 폼페이오 미 국무부 장관은 곧바로 트위터에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다. “식량도, 의약품도 없는데 이제는 전기도 없다. 그다음으로는 마두로가 없을 것이다.” 과이도는 “(마두로의) 횡령이 끝나야 전기가 다시 들어올 것”이라며 군의 도움을 요청했다. 카라카스 주재 미국 대사를 지낸 윌리엄 브라운필드는 이 요청에 화답했다. “사상 처음으로 군과 행정부에 명확한 메시지를 보내는 야당 지도자가 등장했다. 그는 군과 행정부가 천사들과 선량한 시민들을 지켜주기를 원한다.”(4)
이는 CANVAS의 목표가, 미국이 USAid(국제개발처)와 OTI(Office of Transition Initiatives)를 통해 실현하려는 목표들에 얼마나 완벽하게 부합하는지를 보여준다. 위키리크스가 폭로한 2006년 11월 보고서를 보면 브라운필드는 베네수엘라에 대한 미국의 전략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민주적 기관의 힘을 강화하고, 정부의 정치적 기반에 침투하고, 차비스주의(Chavism)를 분열시키고, 미국의 핵심적인 이권을 보호하고, 차베스를 국제적으로 고립시킨다.” 그리고 “이는 베네수엘라에서 USAid와 OTI가 벌이는 활동의 주된 전략적 목표들”이라고 결론을 내렸다.(5) 실제로 CANVAS는 미국의 주요 동맹국인 사우디아라비아, 아랍 에미리트, 파키스탄에는 단 한 번도 개입한 적이 없다.
CANVAS의 작은 팀이 얼마나 많은 국가들에 영향을 줬는지를 이해하려면 1990년대 말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999년 4월 14일 미국평화연구소(United State Institute of Peace)가 발표한 특별 보고서에 관련 내용이 나온다. “미국 정부는 유고연방의 민주주의 정착지원금을 대폭 늘려, 현재의 1,800만 달러 수준에서 올해 회계연도가 끝나기 전에 5,300만 달러까지 증액해야 한다. (…) 이 기금은 학생 지도자들의 해외여행 경비와 유럽과 미국의 유학 및 인턴 프로그램 등록비용 지원에 쓰일 예정이다.”(6) 이 보고서에는 오트포르!의 상징인 검은 주먹이 그려져 있었다.
어떤 정당보다도 위원회가 많은 단체
“전 세계의 수많은 단체들이 ‘슬로바(슬로보단 밀로셰비치)’ 퇴진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포포비치는 설명했다. “정치적 이야기를 나눌 수 있고 지원금도 받을 수 있는 대상, 예를 들어 정당들과 협업하는 민주주의를 위한 국가기금(NED), 국제공화당연구소(IRI), 미국민주주의연구소(NDI), 그리고 언론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프리덤 하우스가 있습니다.” 이 4개 기관은 공식적으로는 NGO(Non-Governmental Organization: 비정부기구)지만, 실제로는 미국의 2개 주요 정당의 산하기관으로 미 의회와 정부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고 있다.
불가리아, 크로아티아, 세르비아에 주재했던 전 미국 대사 윌리엄 데일 몽고메리는 당시 미 국무부 장관이었던 매들린 올브라이트가 오트포르!를 지원하면서 밀로셰비치의 퇴진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는 사실을 공개했다.(7) “세르비아의 야당은 매들린 올브라이트와 가까운 관계임을 과시했습니다. 야당 지도자인 부크 드라스코비치는 올브라이트 장관과 입을 맞췄고, 이 장면을 찍어 정치적으로 이용했습니다. 그러나 만나서 함께 사진을 찍었다고 해서 지원을 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제가 절대로 그들과 함께 사진을 찍지 않았던 이유입니다.” 포포비치는 말했다.
“우리는 밀로셰비치를 어떻게 몰아내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러던 중에 밀로셰비치가 조기 대선을 실시하겠다고 선언하면서 반정부 캠페인을 벌일기회를 얻게 됐습니다.” 빌 클린턴 대통령 집권 당시 발칸 지역 특사였던 제임스 오브라이언이 설명했다.(8) 미 국무부의 정치계획 책임자였던 그는 이후에 올브라이트 스톤브릿지 그룹(Albright Stonebridge Group)의 부대표가 됐다. ASG는 퇴직한 공무원, 군 장성, 외교관이 모여 설립한 기업들 중 하나로 코소보 공공기업들의 인수를 전문으로 한다.(9)
과거 NED의 지역대표였던 폴 매카시에 의하면, 오프포르!는 NED가 1998년부터 세르비아에서 지출한 300만 달러의 지원금 가운데 가장 많은 부분을 가져갔다. 이 지원금은 시위를 조직하고, 선전물(불끈 쥔 주먹이 새겨진 티셔츠, 포스터, 스티커 등)을 제작하고, 활동가들을 교육하고 결집하는 데 사용됐다. “우리는 ‘이제 끝났다’라고 쓰인 전단지 200만 장을 인쇄해 세르비아 전역에 배포했습니다. 168개 지역에 위원회가 있었습니다. 당시로써는 가장 광범위한 활동 네트워크였고, 세르비아의 그 어떤 정당보다도 위원회가 많았습니다. 누군가가 네트워크 형성 비용과 사무실, 휴대폰 등의 경비를 부담했겠지요.” 레시치가 말했다.
세르비아 활동가들의 교육과정에는 진 샤프의 이론에 의거한 비폭력투쟁 전략 실습도 포함돼 있었다. 진 샤프는 2018년에 사망한 하버드 대학교 출신의 정치학자로 그의 저서들은 비폭력투쟁의 바이블로 통한다. 진 샤프는 자신의 대표 저서 중 하나인 『독재에서 민주주의로』 3차 개정판의 서문에 다음과 같이 썼다. “밀로셰비치가 퇴진한 이후 세르비아를 방문했을 때 사람들은 이 책이 반정부 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이야기했다.”(10) 2000년 여름에 부다페스트에서 열린 세미나에 IRI의 초청을 받아 참석한 포포비치와 오트포르!의 다른 지도자들은 샤프의 측근인 헬비를 알게 됐다. 베트남전에 참전했다가 랑군의 무관을 지내고 대령으로 은퇴한 헬비는, 미국의 군 정보 전문가로서 ‘전략은 비폭력투쟁과 군사적 활동 모두에서 중요하다’는 샤프의 행동 원칙을 포포비치와 그 동료들에게 가르쳤다.
그러나 포포비치의 말은 달랐다. “그들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부다페스트에서 4일간 헬비를 만났습니다. 아마 그때 우리가 미국인들에게 교육받았다는 이야기가 나온 것 같습니다. 하지만 진 샤프의 이론도 우리가 이미 다 알고 있던 내용입니다.” 포포비치는 주장했다. 포포비치가 헬비 대령과 친분을 쌓은 것은 그 뒤의 일로, 그는 포포비치에게 ‘친구이자 스승’인 동시에 ‘개인적인 요다(Yoda)’가 됐다.(11) 헬비 대령은 심지어 자신의 고양이 이름을 포포비치의 이름을 따 스르자로 지었다. “발음은 별로 안 좋아요.” 포포비치는 웃으면서, 최근에 미국을 방문해 그를 만나 서로 소지한 무기에 관해 이야기했다고 전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진정한 미국인이 맞아요. 우리는 그 주제로 끝도 없이 농담을 주고받았거든요.” 미군 대령과 협업하는 것에 대해서는 거부감이 전혀 없었을까? “저는 그를 미군 대령으로 생각하고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오트포르!의 이데올로기는 처음부터 분명하게 비폭력투쟁이었습니다.” 포포비치는 또한 CANVAS가 가르치는 전략은 ‘상대방과 다른 수단을 이용하는 전쟁’이라고 말했다. “즉, ‘비대칭 전쟁’입니다. 우리는 순진한 소년 단체가 아니라 진지한 정치적 활동가 단체입니다.”
투명한 단체의 불투명한 후원내역
<워싱턴 포스트>에 의하면, 미국은 밀로셰비치 축출 작전에 무려 4,100만 달러를 썼다. “세르비아를 기점으로, 미국은 해외정권의 수장을 처단함에 있어, 이란과 과테말라에서처럼 CIA의 주도로 비밀작전을 수행하지 않고 현대적인 선거운동 기법에 엄청난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기 시작했다.”(12) 전세계의 협력 네트워크가 이 작업에 참여했다. 미국과 EU의 재정 지원을 받아 인권과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일하는 프리덤 하우스를 비롯한 포드, 카네기, 록펠러의 민간 재단, 조지 소로스의 ‘열린사회연구소’(Open Society Institute), 찰스 스튜어트 모트 재단 등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세르비아 야당 및 ‘시민 사회’ 대표들과 친분이 있는 대사 및 대사관 직원들도 포함됐다.
외부의 후원, 지원금을 받는 것은 포포비치에게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트포르!는 “투명하게 일하는 단체”이기 때문이다. 포포비치는 CANVAS의 자금 조달처를 묻는 말에 굉장히 모호한 답변을 내놓았다. “고정비용(임금, 임대료)은 민간기금으로 충당하는데, 생계문제로부터 자유롭기 위해서입니다.” 프로젝트 운영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우리는 30개 이상의 단체들과 함께 작업했습니다.” 이집트에서 프리덤 하우스와 협업했다는 것 외에, 구체적인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CANVAS의 인터넷 사이트에는 ‘친구들’의 목록만 있을 뿐 세르비아로 유입되는 해외지원금의 내역은 확인할 수 없었다. 우리는 다른 출처를 통해 벨기에의 보두앵 국왕 재단(King Baudouin Foundation)의 미국 자회사가 2006년과 2015년 사이에 시리아와 이집트의 프로젝트를 의뢰한다는 명목으로 CANVAS 측에 2,500만 달러를 지원한 사실을 알아냈다.
사실 마로비치와 포포비치는 2002년 잭 듀발과 피터 애커먼이 설립한 국제비폭력갈등센터(ICNC)와 2003년부터 협업해오고 있다. 과거 샤프의 제자였던 피터 애커먼은 금융시장과 고위험 채권을 이용해 큰돈을 벌었다. 함께 사업을 하던 파트너가 어느 날 사기 혐의로 징역형을 선고받게 되자, 그는 돌연 민주주의 홍보 대사로 나섰다. 2005년에는 프리덤 하우스 자문 위원회의 회장이 됐다. 그의 전임자는 제임스 울시로, CIA 국장, 유럽재래식무기감축조약(CFE)의 협상 담당 미 대사, 미 상원 군사위원회의 고문을 지낸 인물이다. 그렇다고 해서 애커먼이 사업을 완전히 접은 것은 아니었다. 그는 여전히 크라운 캐피탈(Crown Capital Group)과 락포트 캐피탈(RockPort Capital)이라는 투자 회사 두 곳을 운영하고 있다.
포포비치가 듀발과 애커먼을 만난 것은 오트포르!에 관한 다큐멘터리 <Bringing Down A Dictator(독재자의 퇴진)>(2002)을 촬영하던 때였다. 마로비치는 ICNI가 제작한 비디오 게임인 <A Force More Powerful>(2006)과 <People Power>(2010)의 설계 단계에 참여했다. 악한 독재자들과 선한 민주주의자들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악한 자들을 없애면서 점수를 올리는 게임이었다. 마로비치는 ICNI의 매뉴얼인 <The Path of Most Resistance>(가장 위대한 저항의 길)’도 제작했다. 2016년 그는 사회운동에 관한 조언 및 교육에 특화된 NGO인 Rhize를 설립했다.
과거의 활동가들은 프리덤 하우스나 조지 소로스의 민간 재단 등의 기관에 쉽게 취직했다. 정계에 입문하거나 심지어 정부의 요직을 차지한 이들도 있다. 현재 포포비치와 디노비치는 미국의 여러 대학에 출강하고 있으며, 하버드 대학교에서도 온라인 강의를 맡고 있다. 포포비치는 2017년에 영국 스코틀랜드의 세인트앤드루스 대학교 학장으로 선출됐다. 그는 미국 콜로라도스프링스에 위치한 미국공군사관학교에서 1년에 1회 강연도 한다.
“저의 이론은 늘 같습니다. 성공한 체제 전복의 4%는 폭력적인 방식으로, 그리고 96%는 비폭력적인 방식으로 이뤄졌다는 것이지요. 제 강연을 들은 학생이 훗날 사회에 나가 ‘폭격하자’ 또는 ‘폭격하지 말자’를 결정하는 자리에 오를 수도 있습니다. 그 결정에 수많은 생명이 달려 있습니다.” 포포비치는 2012년 노벨평화상 후보에 진 샤프와 함께 올랐다. 그는 다보스 세계경제포럼의 차세대 지도자(Young Global Leaders) 중 한 명으로 선정됐으며, 미국의 잡지 <포린 폴리시>가 꼽은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에도 포함됐다.
글·아나 오타세비치 Ana Otasević
베오그라드 거주, 기자 겸 영화감독
번역·김소연 dec2323@gmail.com
번역위원
(1) 스르자 포포비치(Srđa Popović)는 2011년 『포린 폴리시』 선정 ‘100인의 세계 석학’에 올랐으며, 2013년 세계경제포럼에 의해 ‘세계를 이끌 젊은 지도자’로 선정됐다. 포포비치는 하버드 케네디스쿨, 뉴욕 대학, 콜로라도 대학에서 교수로 활동했으며, 현재 베오그라드에 살고 있다. 그의 저서 『Comment faire tomber un dictateur quand on est seul, tout petit, et sans armes 우리가 혼자이고, 너무나 왜소하고, 무기가 없을 때 어떻게 독재자를 무너뜨릴 수 있을까』(Paris, 2015)는 2016년 문학동네에서 『독재자를 무너뜨리는 법』이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됐다.
(2) Srđa Popović & Slobodan Đinović, ‘The blueprint for saving Venezuela’, <RealClear World>, 2017년 6월 2일, www.realclearworld.com
(3) ‘Analysis of the situation in Venezuela’, CANVAS Analytic Department, Belgrade, 2010년 9월.
(4) Ana Vanessa Herrero & Nick Cumming-Bruce, ‘Venezuela’s opposition leader calls for more protests if they dare to kidnap me’, The New York Times, 2019년 1월 25일.
(5) ‘USAid/OTI programmatic support for country Team 5 Point Strategy’, 주 베네수엘라 미국 대사의 보고서, WikiLeaks, 2006년 11월 9일, https://wikileaks.org
(6) ‘Yugoslavia: Building democratic institutions’, 미국평화연구소(United States Institute of Peace), Washington, DC, 1999년 4월 14일.
(7) Roger Cohen, ‘Who really brought down Milošević?’, 2000년 11월 26일.
(8) Valerie J. Bunce et Sharon L. Wolchik, Defeating Leaders in Postcommunist Countries,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1.
(9) Matthew Brunwasser, ‘That crush at Kosovo’s business door? The return of US heroes’, 2012년 12월 11일.
(10) Gene Sharp, De la dictature à la démocratie. Un cadre conceptuel pour la libération(독재에서 민주주의까지. 자유의 개념틀), L’Harmattan, Paris, 2009(1st ed.: 1994).
(11) 포포비치는 자서전에서 ‘별들의 전쟁’의 제다이 마스터 요다를 언급했다.
(12) Michael Dobbs, ‘US advice guided Milosevic opposition’, The Washington Post, 2000년 12월 11일.
미국이 준 영감 오트포르!와 CANVAS는 ‘비폭력의 마키아벨리’라고도 불리는 미국의 정치학자 진 샤프(1928~2018)의 이념을 바탕으로 활동한다. 진 샤프의 이데올로기는 1958년 토머스 셸링, 헨리 키신저, 로버트 보위, 에드워드 메이슨이 설립한 하버드대학교 국제문제센터 내의 소수의 전략가 서클에서 시작됐다.(1) 이 서클을 거쳐 간 이들 중에는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새뮤얼 P. 헌팅턴, 조지프 나이를 비롯해 가장 영향력 있는 정부 고문과 국제관계 이론가들이 다수 포함돼 있다. 진 샤프의 저서 중 가장 유명한 책의 서문을 쓴 셸링은 “게임 이론의 분석을 통해 갈등과 협력 메커니즘의 이해를 높인” 공로를 인정받아 2005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했다.(2) “폭력의 외교”를 옹호한 그는 “남에게 해를 끼치는 능력이 곧 협상의 능력”이라 주장했으며 억제를 넘어선 억압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3) 해당 센터에 도움을 준 인물 중에는 다비드 갈룰라(1919~1967)도 있었는데, 중국혁명과 그리스 내전에 참여했고 알제리 전쟁에서는 한 부대를 지휘했던 프랑스 장교 출신이다. 훗날 베트남전 파병 미군 부대를 지휘한 윌리엄 웨스트모어랜드 장군의 초청으로 하버드 센터에 발을 들이게 된 그는, 1964년에 고전적인 군사 활동 방식이 아닌 심리적, 정치적, 수사적(police) 방식에 근거한 반혁명 전쟁 이론을 확립했다. “이 경우 기관총보다 등사기가, 박격포 전문가보다 소아과 전문 군위관이, 철조망보다 시멘트가, 보병보다 사무실 직원이 더 필요할 수 있습니다.”(4) 프랑스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갈룰라의 저서는 2005년부터 육군대학원(Army War College)의 실습생들에게 배포되고 있다. 갈룰라의 대표 저서 서문에서, 이라크 전쟁의 군사 협력 사령관을 지낸 데이비드 퍼트레이어스는 갈룰라의 전략을 ‘반봉기의 클라우제비츠’라고 표현했다. 샤프는 1965년에 센터에 합류했다. 대학에서 30여 년간 그는 냉전 중에 일어난 사회운동을 연구했다. 샤프는 핵폭탄의 투여나 고전적인 전쟁보다, 시민을 참여시킨 사회운동이 성공 가능성도 더 높고 비용도 덜 든다고 주장했다. 그에 의하면, 가장 효과적인 체제 전복 방법은 비폭력적인 활동을 통해 다수의 지지자들을 확보하고 대학, 군, 경찰, 언론과 같은 권력의 지지 기관들을 포섭해 그들이 체제 전복에 힘을 보탤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샤프는 ‘민주주의의 확산’을 주도한 레이건 독트린의 연장선상에서, 고문 역할의 셸링을 포함한 몇 명의 협력자들과 함께 1983년 알버트 아인슈타인 연구소(Albert Einstein Institute)를 설립했다. 이 연구소는 민주주의를 위한 국가기금(NED)과 국제공화당연구소(IRI)를 통해 공공 기금을 지원받아 운영되고 있다.(5) 샤프의 글은 특히 1990년대 초에 구소련의 중앙 정부를 상대로 투쟁을 벌이던 발트 3국에 큰 영향을 줬다. 리투아니아의 전 국방 장관(Audrius Butkevicius)은 “핵폭탄을 보유하는 것보다 샤프의 책 한 권을 소유하는 것이 낫다”고 말할 정도였다.(6)
번역·김소연 (1) Center for International Affairs, 1998년에 Weatherhead Center for International Affairs로 명칭을 변경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