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에서 파리까지 거리로 나선 사람들

퇴직연금, 부패, 물가…

2019-12-31     세르주 알리미 l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발행인

신자유주의와 정부에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가 어느덧 제3의 물결, 혹은 제4의 물결이 돼 세계 곳곳을 휩쓸고 있다. 레바논에서 칠레, 프랑스에 이르는 각국의 정치권은 강경책까지 동원해보지만, 난국을 타개할 해법을 찾지 못한 채 진퇴양난에 빠져있다.

 

A~F를 관통하는 일맥상통한 흐름이 있다. 여기서 A는 알제리요, B는 볼리비아, C는 칠레, E는 에콰도르, 그리고 F는 프랑스다. 반정부 시위가 1개월 이상 지속되면, 애초에 시위의 도화선이 된 계기는 의미를 잃어갈 공산이 크다. 그 시점이면 시위대도 기존 요구조건보다 더 많은 변화를 기대하게 된다. 범죄인 인도법을 철회한 홍콩 정부가 반대론자들을 무장 해제시키지 못했듯, 칠레의 세바스티안 피녜라 대통령이 내린 전철 요금 4% 인상 철회 결정도 산티아고의 거리를 메운 시위대를 물러나게 할 수는 없었다. 일단 거리에 시위의 물결이 일기 시작하면, 정부는 더 많은 것을 양보해야 한다. 경찰과 군대를 투입하려 들 수도 있겠지만, 이라크·칠레·알제리 정부의 경우 개헌이라도 약속해야 하리라.

한쪽에서 불길이 잦아들면 이내 다른 곳에서 불씨가 다시 타오르기 마련이다. 시위대의 요구사항은 사뭇 대범하다. 그들의 요구는 다름 아닌 정권의 몰락이다. 이런 대중의 염원을 과연 어떻게 실현할 수 있을까? 이들이 이루고자 하는 바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뚜렷한 방법과 목표가 없을지라도 대중은 계속 앞으로 나아간다. 알제리에서 일어난 대중시위는 1년 가까이 이어져 왔다. 6월에 시작된 홍콩시위도 반년이 넘었다. 물론 탄압에 대한 두려움이 시위대를 잠시 위축시킬 수도 있다. 하지만 시민들은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반정부 시위 사망자 수마저 비밀에 부치는 이란에는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사회에 만연한 불신은 시민들을 단결시키는 촉매제가 된다. 불신이란 사회계층을 상하로 구분해 분열시키며, 차별적 신분 사회를 공고히 하는 이른바 경제 자유주의에 대한 불신이다. 나아가, 속칭 ‘엘리트’라는 지배계층이 자신들의 특권을 지키고자 권력의 근위대를 자처하는, 오늘날의 정치제도가 보여주는 오만과 직권 남용에 대한 대중의 불신이다.

이런 권력의 무능을 명백히 입증하는 분야가 바로 환경문제다. 제21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1)에서 세계 각국은 온실가스를 감축하기로 엄숙히 선언했지만, 그 후 3년이 지난 시점에 베네치아는 최악의 홍수 피해를 겪었다. 가진 자들이 득세하는 이 지구행성에서 도무지 식을 줄 모르는 ‘소비열’은 지구온난화의 위험을 고조시킨다. 한편, 사회당 출신 안 이달고 파리 시장은 알맹이 없는 생태학적 장광설만을 열심히 늘어놓으며 명품 업체나 휴대전화를 선전하는 거대하고 화려한 온갖 광고물로 프랑스 수도의 건물들이 도배되는 것을 방치하고 있다.

프랑스 교통부 장관은 “향후 몇 년간 약 3만 명의 운전기사가 필요해질 것으로 전망합니다. 높은 가치를 부여하고 청년들의 진출을 장려할 수 있는 직업이지요”라며 자신이 맡은 분야에 유망한 직업이 있음을 기뻐해 마지않는다. 더 많은 운전자가 더 많은 ‘마크롱 버스(Cars Macron: 마크롱 대통령이 경제장관 시절 만든 저가 고속버스 운행제도)’에 오를 것이며, 환경보호는 저절로 이뤄지리라는 추측이다. 그렇다면 철도기관사나 국영철도(SNCF) 노동자는 어째서 미래의 유망직업이 아닌가? 공공기업의 과잉인력을 타파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정부가 보기에 공공철도 분야는 논외 거리다.

2010년 12월의 튀니지 민중 봉기는 ‘아랍의 봄’ 물결의 신호탄이 됐다. 이듬해 5월에는 스페인에서 ‘광장시위’가 일어났고, 6월에는 칠레 학생들이 거리로 나섰으며, 9월에는 월가 점령 시위가 시작됐다. 바야흐로 다가오는 2020년은 이 모든 대규모 반정부 민주화 시위가 일어난 지 10주년이 되는 해다. 이미 그 당시에 사람들은 젊음의 힘, 자발적 참여, 적극적인 소셜네트워크 활용, 체제 편입 거부, 금융에서 비롯된 피해를 은폐하기에 급급한 세계 공통의 경제정책을 향한 분노를 보여줬다. 

9년이 지난 지금, 튀니지에서 독재정권이 붕괴했기에 ‘아랍의 봄’은 유일한 성공사례로 꼽히지만, 당시 봉기를 초래한 사회적 요구는 아직도 해결책을 찾지 못한 채 답보 상태다. 다른 나라의 상황도 그리 밝지 않아, 단비 같은 희소식이 절실한 시기다. 그래서 우리는 ‘국제적 책임감’이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현실을 높이 평가하려는 욕망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실상 자기 위안에 가깝다. 국제적 책임은 복합적이고 불안정한 형태로 표출돼 서로 무관한 산발적인 방식으로 이뤄지고 있을 뿐이다.

지난 세기말부터 자본주의의 종말, 투쟁의 수렴, 세계화의 패권적 질서 종식과 같은 주장이 꾸준히 제기돼 왔다. 우리는 빈사지경의 적을 1백 번 찾아냈고, 1백 번 무찔렀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적은 매번 다른 얼굴로, 매번 다른 담론을 가지고 다시 나타났다. 마거릿 대처가 집권한 지 40년 만에 적은 영국에서 다시 한번 승리를 거뒀다. 대서양 반대편에서 2020년 11월에 치러질 선거(미국 대선을 뜻함-역주)에서도 적이 패배하리라 장담하기 어렵다. 비록 실패(혹은 브라질, 그리스, 볼리비아에서 연이은 실패)에서 눈을 돌리는 것이 마음 편하더라도 이 사실만은 직시해야 한다. 실패를 맞닥뜨리는 바로 그 순간, 어딘가에서 또다시 불씨가 타오른다는 사실을.

오늘날에는 분노의 불길을 촉발하는 불씨가 분야를 가리지 않고 산재해 있다. 2008년 금융위기는 위기를 초래한 이들에게 득이 됐으며, 좌우를 막론하고 거대 정당들은 잇따라 국민에게 부당한 선택을 강요했다. 불가피하게 ‘제도’의 당위성이 고비를 맞았다. 10년이 지난 후, 제도의 당위성은 땅에 떨어졌다. 그러나 이런 실패는 독이 돼 정반대의 이데올로기에 힘을 실어주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우리가 실패했다고 지적하는 ‘제도’가 반드시 자본계급에만 유리하게 작동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이 ‘제도’가 극빈층이 아닌 경제적 차상위계층, 외국인, 보조금 수급자들을 과잉보호한다고 비난한다. 지배계급 특권층은 이런 분노를 자신들의 이익을 취하는 데 교묘히 활용한다. 

가장 가까운 예로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의 연금 ‘개혁’을 들 수 있다. 연금개혁은 “모든 프랑스 국민에게 예외 없이 똑같이 적용되는” ‘보편적 제도’를 표방한다. 그러나 실상, 이 제도는 세대 간 단절을 조장한다. 1975년 이전에 출생한 세대는 혜택이 줄어든 신규 연금제도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아울러, ‘형평성’을 핑계로 소득상한액을 둬 상한선을 초과하는 소득분에 대해서는 퇴직연금을 지급하지 않는다. 

이런 결정은 연금 보험료를 더 내고 노후에 더 많은 연금을 받고 싶지만 방법이 없는 고소득층(예를 들면 고위직 간부)이 주식형 ‘펜션펀드(Pension fund, 연금기금)’로 눈을 돌릴 것이라는 판단을 전제로 한다.(1) 한편 프랑스 정부는 경찰이 국민을 보호하는 특수직이라는 이유로 경찰 연금제도에 대해서만 예외적으로 현상 유지를 결정했다. 

 

경제적 요구와 정치적 욕망, 
불가분의 관계

수니파, 시아파, 카빌리, 카탈루냐를 겨냥해 다툼과 분열을 조장하는 시도에도 시위대는 여전히 의연하게 단결하는 모습이다. 장소를 불문하고 눈에 띄는 시위대의 요구와 비방이 있다. ‘부당한 대우를 받지 않고 존엄하게 살아갈 권리’, ‘사회복지 제도 축소 반대’, ‘기본요금(교통, 전기, 통신비) 인상 반대’, ‘나쁜 일자리를 늘려 실업률을 낮추는 상황에 만족하지 말 것(스페인에서 신규 고용계약의 40%가 1개월 미만에 해당하며, 불안정한 일자리는 주로 주택임대료가 폭등한 대도시 지역에 집중돼 있다)’,(2) 결국 골자는 높은 물가와 빈곤, 그리고 불평등이다. 수단과 에콰도르, 레바논과 칠레 등 국가를 막론하고 예외가 없다.

신자유주의가 국가와 자본의 관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세계 어디서든 경제적 요구는 정치적 욕망을 표출하기에 이르렀다. 부패와 추문은 비단 언론이 집중적으로 부각하는 공직자 개인의 일탈(근무시간을 자신의 개인 정치 활동에 할애하는 국회의원 보좌관, 내빈들에게 바닷가재를 제공하는 국회의장 등)에 국한되지 않는다. 분노에 찬 트위터 글, 폭로성 연재기사, 특별보도…. 회전목마는 돌고 또 돈다. 더 근원적으로 신자유주의 국가가 부패와 결탁해 공공서비스를 파괴하고 사익추구에 자금을 지원한다는 것은 이제 주지의 사실이 됐다. 그 필연적인 결과로 정부가 추진하는 ‘개혁(민영화, 세금, 연금)’ 또한 사익추구의 도구로 활용되는 실정이다.

부패는 곧 세계화된 엘리트들이 국부를 횡령하거나 잠식하고 자유무역과 조세 회피처를 이용해 불법 자금을 은닉하도록 조장하는 정치제도다. 레바논의 경우, 오물이 악취를 유발해 숨통을 틀어막고, 수질을 오염시키고, 식물이 자라지 못하게 하며, 공중보건을 위협하는 지경이 돼도, 위정자들은 도시를 정화해 이 문제를 해결할 생각조차 없다. 이런 부류의 직무유기 또한 부패다. 아울러, 이라크의 경우처럼 16년에 걸쳐 국내총생산의 두 배에 달하는 나랏돈이 정치인과 악덕 기업가의 주머니로 흘러 들어갔지만, 그 사이 교육기관이 기능을 상실하도록 마냥 내버려 둔, 본연의 임무를 포기한 자격 미달의 정치권력 역시 부패다.(3) 

끝으로 오늘날 프랑스의 상황은 도대체 어떻게 형언해야 할지 난감할 지경이다. 에두아르 필리프 총리는 사뭇 상냥하게 이런 말을 내뱉었다. “프랑스 공공병원이 양력(유체 속의 물체가 수직 방향으로 받는 힘)을 잃어갑니다. 고장으로 양력을 잃은 기체가 궤도를 이탈하는 것처럼요.”(<프랑스 앵테르>, 2019년 11월 21일) ‘양력을 잃는다’라는 말은 주로 비행기가 선회강하하다 이내 땅에 곤두박질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필리프 총리가 과연 내년에도 총리직을 유지할지, 그렇게 된다면 궤도이탈 사고의 경위를 설명하고, 피해자 가족들에게 몸소 위로의 말을 건네게 될지 의문이다.

이라크 국민은 “나라를 원한다”라고 외치고 있다. 정부의 탄압으로 450명에 달하는 희생자가 발생했지만, 이라크인들은 무력에 굴하지 않고 외세의 간섭이나 종교주의를 일절 거부하며, 연대의 힘으로 나라다운 나라, 당당한 국가를 건설하겠다고 주장했다(15면 기사 ‘이란의 지배에 맞서는 이라크인들’ 참조). 유혈 독재로 세운 신자유주의의 요람인 칠레에서도 무장 헌병대의 무력(부상 1만 1,000여 명, 실명 200여 명, 사망 26명)이 시위대를 진압하지는 못했다. 이런 칠레에서도 여전히 시위대는 국기를 내걸고 거리에 나선다. 수백만 명에 이르는 알제리 시위대가 권력, 석유, 폭력, 그리고 국가 상징마저 군부가 모조리 독점하는 상황을 규탄하고 나섰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노란 조끼’ 시위대도 내부의 정치적 분열을 막겠다는 의지와 희망을 담아 국기를 고수했다. 분노와 절박함으로 노란 조끼를 입은 시민들이 각 지역 광장에 모이기 전까지 이 나라는 갈래갈래 분열돼 있었다. 그리고 노란 조끼 또한, 그동안 독재정권의 전유물이라고 믿었던 탄압을 겪었다.

개인주의와 시장의 탐욕을 거부하는 시기, 금융시장이 희생양들의 사이를 이간질하는 시기에는 국가의 역할이 강조된다. 국가주의와 대립하는 세계화가 자유무역 조약이나 우리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염탐하고 막대한 수익 규모를 은폐하는 거대 디지털 기업의 모습을 하고 있을 때, 사람들은 더욱 국가를 두둔하기 마련이다. 세계화가, 차기 금융위기를 꾀하는 상업은행들(이들은 다시금 위기가 불어 닥쳐도 아무 탈 없이 살아남아 책임을 피할 것이다)이나 레바논, 이집트, 에콰도르, 아이티, 그리스, 볼리비아, 아르헨티나에서 구제금융을 실시하는 국제통화기금(IMF)의 모습으로 나타날 때도 마찬가지다.

세계화의 장점은 지배층끼리 서로가 얼마나 닮았는지 여실히 보여준다는 점이다. 젊은 은행가가 이 나라를 통치하고, 억만장자가 또 다른 나라를 통치하고 있다. 설령 두 지도자가 모든 면에서 서로 판이하더라도, 이들이 가장 우선적으로 달성한 성과는 같다. 다름 아닌 부유층을 위한 세제 혜택이다. 훗날 권력을 떠난 두 사람은 과연 누구의 이익을 대변하는 데 힘을 쏟게 될까? 

 

과거 2010년에 프랑수아 피용 전 프랑스 총리는 연금개혁을 설계했고 연금 수령액을 삭감하는 점수식 산정 방식을 지지했었다. 그런 피용 전 총리의 현 직장은 바클레이즈은행(Barclays Bank)이다. 언론이 (매우 우호적이며) 이미 우파의 유력한 차기 대권 주자로 점찍은 프랑수아 바루앵도 피용 전 총리와 같은 직장에서 일한다. 언젠가 바루앵이 극우세력 ‘방어’에 나서리라 예상하지만, 적어도 당분간은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외국인 바이어들을 자문하는 은행 업무에 매진할 것이다.

포르투갈의 총리와 유럽집행위원장을 역임한 조제 마뉘엘 바로소(José Manuel Barroso)는 골드만 삭스를 선택했다. 몇 주 전, 우버 사(社)는 유럽집행위 디지털 담당 공정위원을 지낸 네덜란드 출신 정치인 네일리 크루스를 영입한 바 있다. 프랑스 사회당원인 파스칼 라미 전 세계무역기구 사무총장은 브런즈윅(Brunswick) 사(社)의 로비부서에서 업무를 갓 시작했다. 물론 이 회사의 주요고객은 실업수당 지급 기간이 만료된 실업자들이 아니다. 또한, 페이스북은 1년 전 니컬러스 클레그 전 영국 부총리에게 홍보 전략 부사장직을 제안했다. 페이스북에서 그가 받는 연봉은 450만 유로로, 의원 시절 연봉의 60배에 달한다. 

이런 상황에서 현직에 있는 통치자들이 향후 어떤 기업의 이익을 대변할 것인지에 시위자들의 관심이 쏠리는 현상을, 편집증적 집착이라고 할 수 있을까? 게다가 지난 9월, (억만장자 사업가 출신 피녜라 대통령이 임명한) 재무장관은 식료품 가격 상승에 불만을 표하는 시위대를 향해, “‘낭만주의자’라면 항상 싼 가격에만 꽃을 사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정치인의 이런 발언에, 과연 칠레 국민이 분노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칠레의 예는 사뭇 의미심장하다. 군사독재가 종식되고 우파 정부와 좌파 정부를 두루 거쳤지만, 국유화를 금지한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장군 시절 제정된 헌법이 1980년 이후 거의 바뀌지 않은 채로 남아있다. 금융 자본화된 연금제도, 유료 도시고속도로, 사립대학교, 수자원 주식형 펀드 판매 등 각종 금융이익에 맞춤화된 신자유주의 코르셋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대변인도 없이 민중이 주도하는 칠레 대중운동에서 좌익반대파(4)는 비난을 피할 길이 없다. 

좌익반대파는 대체로 ‘자유주의’ 우파와 직접 대치해 불안과 공포를 증폭시키게 될까 봐 노심초사했고, 그 결과 대중시위는 ‘단결된 국민은 정당 없이 전진한다(El pueblo unido avança sin partido)’라는 구호로 귀결됐다. 그래서 칠레 대중시위에는 정치색을 띠는 깃발이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칠레 국기와 정부 탄압의 주된 표적이 되는 마푸체족 깃발이 나부끼고 있다.

어느 곳이든 비슷한, 그리고 특히 아랍 국가에서 두드러지는 현상을 보면 의구심이 생긴다. 시위대가 강경노선을 고수하거나 지도자나 통치자 지명을 거부하는 경향은 실망과 패배, 배신이라는 과거 오랜 경험에 뿌리를 두고 있다. 대중의 압력이 정치적 분출구를 찾지 못한다면 사회적 고립과 무기력, 그리고 압력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사법, 경찰, 군사 탄압이 격화되고 자본과 국가가 서로 긴밀히 결탁하는 상황이 이런 논의를 재촉하는 촉매제가 되고 있다. 이에, 프레데리크 로르동은 “어디로 나아갈지를 알고 조직적으로 움직여야 한다”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상대는 이미 어디로 향할지를 잘 알고 있으며, 조직적으로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5)

지난 30년간 정권이 여러 번 교체됐지만, 근본적으로 신자유주의 논리대로 짜인 각종 구조개혁(자유무역, 단일시장, 민영화, 금융규제 완화)에 대한 문제의식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하지만 최근 대중운동은 불과 몇 달 만에 괄목할 만한 가시적인 결실을 거뒀다. (레바논과 이라크에서) 총리가 사임했고, (알제리에서) 거동이 어려운 대통령은 연임을 포기했다. 그리고 곧 새 헌법이 케케묵은 규정들을 타파할 수 있게 됐다(특히 칠레 헌법은 한 자도 빠짐없이 다시 써야 한다). 

무엇보다 의미심장한 점은 대다수가 학자금 대출에 짓눌려 궁핍한 삶을 견디고 있는, 모든 것이 불확실한 미래에서 확실한 것이라곤 토막 난 퇴직연금과 오염된 환경뿐인 오늘날의 젊은 세대가 공동의 투쟁과 연대로 승리감을 맛봤다는 사실이다. 앞날의 가능성은 물론 모두 열려 있다. 하지만 더 강해지고 의연해진 수천만의 시위대가 몸소 체험한 단 하나의 경험으로 (불가능하다고) 확신하는 바가 한 가지 있다. 

이제 더 이상, 어떤 정치제도도 신자유주의를 정상으로 되돌릴 희망을 제시하지 못하리라는 것이다.

 

 

글·세르주 알리미 Serge Halimi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발행인. 미국 버클리대 정치학 박사 출신으로 파리 8대학 정치학과 교수를 지냈으며, 1992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에 합류한 뒤 2008년 이그나시오 라모네의 뒤를 이어 발행인 겸 편집인 자리에 올랐다. 신자유주의 문제, 특히 경제와 사회, 언론 등 다양한 분야에 신자유주의가 미치는 영향과 그 폐해를 집중 조명해 왔다.

번역‧이푸로라
번역위원


(1) Serge Halimi, ‘Contre l’équité 공정성에 반대하여’, <르몽드 디플로마티크>(프랑스어판·한국어판), 2010년 12월호.
(2) Daniel Michaels, Paul Hannon, ‘Europe’s new jobs lack old guarantees – stoking workers’ discontent’, <The Wall Street Journal>, 2019년 11월 25일.
(3) ’Pour Washington, l’Irak doit répondre aux revendications des manifestants 미 백악관, 이라크 정부에 시위대의 개혁요구를 받아들이라고 주문‘, <Le Figaro>(AFP 공동 보도), 파리, 2019년 11월 29일. 
(4) 좌익반대파(Left Opposition): 노동자민주주의와 혁명적 국제주의를 위해 1923년 트로츠키에 의해 소련공산당 내부에 결성된 분파로서 국제적 차원에서 국제 좌익반대파(1930), 국제 공산주의자동맹(1933), 제4 인터내셔널(1938)에 의해 계승됐다. 필자는 여기서 이를 계승한 칠레의 좌익반대파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역주)
(5) Frédéric Lordon, ‘Le capitalisme ne rendra pas les clés gentiment 자본주의가 순순히 열쇠를 내놓지는 않을 것’, <La pompe à phynance>, 2019년 11월 22일, https://blog.mondediplo.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