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는 자아(自我)를 지불한다

2019-12-31     뱅상 카우프만 l 사회학과 교수

빠른 시일 내에 문학계에서 성공을 거두려면 몇 가지 조건이 있다. 우선, 작가는 자신의 자아를 ‘지불’하여 대중의 관심을 ‘사야’ 한다. 즉 SNS에서 독자들과 활발히 소통하고, 매체에 반복적으로 등장해야 한다. 그리고 슬픔의 기억, 대중과 공감대를 형성할 만한 경험, 법의 경계를 넘나든 경험 등을 공유해야 한다. 고도의 기술과 노하우를 바탕으로 기획되는 이런 ‘쇼 비즈니스’는, 종종 ‘문학상 수상’이라는 값진 보상으로 이어진다.

 

만일 ‘문학 시즌’이 8월 말에 시작되지 않는다면? 문학 시즌을 겨냥한 소설들이 쏟아지고, 점점 늘어나서 가을이면 길가의 낙엽처럼 쌓이는 문학상을 올해는 과연 누가 수상할 것인지에 대해 각종 예측이 난무하는 그런 문학 시즌이 만일 더 앞당겨서 시작된다면? 그래서 라 플레이아드 총서 편집장 베르트랑 마르샬과 그의 팀원들의 주관으로 스리지라살(Cerisy-la-Salle: 프랑스 노르망디 지역에 위치한 인문학 토론의 장)에서 스테판 말라르메(19세기 프랑스의 상징파 시인-역주)에 관한 토론회가 열린다면? 물론 이것은 가정에 불과하다. 만일 이런 토론회가 사시사철 활발히 열린다면, ‘문학 시즌’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니까. 하지만 존재하지 않더라도, 전혀 나쁠 것은 없다.

말라르메 전문가인 베르트랑 마르샬은 라 플레이아드 총서(Bibliothèque de la Pléiade)에서 출간된 말라르메 작품집의 편집을 담당했으며, 최근에는 말라르메 서신 모음집의 새로운 개정판 편집에도 참여했다.(1) 그는 라 플레이아드 총서의 말라르메 작품집 두 권은 물론, 말라르메 서신의 약 80%를 줄줄 외운다. 그는 평생을 말라르메 작품 연구에 바쳤다. 마르샬로서는 시와 미래 독자들을 위해 일생을 바친 말라르메를 깊이 연구하고, 그가 남긴 짧지만 완벽한 작품들을 읽고 또 읽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마르샬이 말라르메와 함께한 지 벌써 반세기가 흘렀음에도, 그의 말라르메 사랑은 아직도 식지 않았다.

10월,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와 툴루즈의 시네마테크는 기 드보르(마르크스주의 이론가이자 작가, 영화 제작자-역주)의 전 작품을 재상영했다. 파리에서는 영화관에 왔다가 표가 없어 그냥 돌아간 이들도 많았다. 그의 영화를 12~20번 반복해서 감상하려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말라르메의 시처럼 기 드보르의 영화도 볼 때마다 매번 새롭다. 사실 이것이 수많은 대중의 관심을 불러일으킨 행사는 아니었다. 마치 노르망디 지역의 작은 숲속에서 열린 말라르메 토론회처럼, 지극히 소박한 행사였다. 여하튼 우리는 로랑 뤼키에, 티에리 아르디송, 프랑수아 뷔스넬의 TV쇼 어디에서도 마르샬을 보지 못했다. 그렇게 드보르와 말라르메는 우리 곁을 스쳐 지나갔다. 그들은 독서에 전념하고, 독자들에게 삶의 교훈, 통찰력, 거리감, 그림자를 주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부족했다. 그렇다. 그들은 우리에게 무언가를 선사한다.

스리지라살이나 시네마테크에 계속 머물면 좋겠지만, 이제 문학 시즌이 돌아왔으니 집에 가야 한다. 문학 시즌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주지 못한다. 애초에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주기 위해 태어난 게 아니라, 스포츠 대회처럼 우리의 관심을 얻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수많은, 비슷비슷한 스포츠 대회들이 있다. 그리고 다음 대회가 시작되면 이전 대회는 금방 잊힌다. 프랑스어로 ‘관심을 주다’라고 할 때는 동사 ‘Prêter(빌려주다)’를 쓴다. 즉, 우리는 무엇인가에 관심을 잠시 빌려줬다가 곧 회수해 다른 것에 빌려 준다.

영어의 경우 좀 더 명확하다. ‘Pay attention’이라는 표현에도 나타나듯 우리는 관심을 ‘지불(Pay)’한다. 영미권의 정신, 혈통, 언어에는 ‘돈’의 개념이 자연스럽게 녹아 있다. 우리는 관심을 지불하면서, 그 대가를 기대한다. 최근 ‘관심 경제(Attention economy)’라는 표현이 등장한 이유다. 문학 시즌이 되면 관심이 일종의 통화가 되는 거래시스템이 작동한다. 작가는 자신의 자아를 지불하고, 우리는 그 대가로 관심을 지불한다. 작가가 자아를 제대로 지불하지 않으면, 우리의 관심은 바로 멀어진다. 관심의 양은 정확히 측정돼야 한다. 우리의 관심을 원하는 이들 사이의 경쟁은 치열하고, 우리에게는 관심을 지불하는 일 말고도 다른 일거리가 널려있기 때문이다. 

 

말라르메는 관심 경제 안에 들어올 수 있을까

물론 경쟁과 문학상은 문학계에 언제나 존재해왔다. 그러나 관심 경제의 중요성이 높아지면서 새로운 상황이 펼쳐지고 있다. 문학은 더 이상 피에르 부르디외가 말했던 문학계 고유의 법칙에 따라 내부적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부여한 관심 시스템과 타율성에 의해 결정된다. 스리지의 말라르메, 그리고 문학 시즌. 이 두 세계는 모순적 관계인 동시에 불가분의 관계다. 우리는 문학이 비록 관심 경제의 영역에 들어온다 해도, 문학의 본질 자체는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만일 잠시 잃어버린다고 해도 되찾을 수 있다고 믿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그토록 많은 작가들이 대중의 관심을 끌기 위해 하는 행동들을, 말라르메와 드보르가 할 수 있을까?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대중의 관심을 얻으려면, 우선 멋진 스타일로 한껏 꾸미고 끊임없이 여기저기 모습을 드러내야 한다. TV쇼에 부지런히 출연하고, 유튜브나 인스타그램에서 다양한 홍보 활동을 펼치고, SNS에서 독자들과 의견을 교환하는 것까지 작가의 임무에 포함된다. 작가는 언제나 독자 곁에 있는, 친근한 존재여야 하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관심생성 법칙’에 따라 작가 자신이나 가족, 친구나 지인의 고통스러운 내면, 즉 학대나 부당한 대우를 받은 경험을 털어놓은 후, “문학을 통해 이를 극복했다”라고 고백해야 한다. 이는 대중 공감을 이끌어내는 데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다. 한편, 관심 경제를 적극 활용한다는 점에서 저속하게 보일 우려가 있다. 그러나 진심으로 대중의 공감을 얻으려면, 작가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 것이 필수다. 2019년 문학 시즌에서도 ‘공감문학’이라는 새로운 장르가 추가될 만큼, ‘공감’은 큰 화두였다. 여기에 해당하는 두 편의 소설이 있다. 장-뤽 코아탈렘의 『La Part du fils 아들의 몫』과 산티아고 아미고레나의 『Le Ghetto interieur 내적인 게토』는 공쿠르상과 르노도 상 후보에 올랐다.(2)

두 작품 모두 작가의 조부모가 겪은 비극적인 삶을 소재로 한다. 코아탈렘의 작품은 나치 반유대주의 정책의 희생양이었던 할아버지의 기구한 일생을, 아미고레나의 작품은 바르샤바 게토와 트레블링카 나치 수용소 어딘가에서 죽음을 맞이한 할머니로 인해 온 가족이 침묵해야 했던 기억을 털어놓는다. 그 끔찍한 침묵은 독자들에게도 고스란히 전달된다.

오늘날 작가들의 이런 시도들, 즉 대중의 공감과 친근감을 얻어내려는 노력을, 과연 말라르메와 드보르가 할 수 있을까? 이 역시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말라르메와 드보르는 굳이 우리의 관심을 얻고자 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말라르메와 드보르는 경제가 아니라 공여(Don, 말라르메의 시에 등장하는 단어), 포틀래치(Potlatch, ‘식사를 제공한다’, ‘소비한다’는 뜻으로, 재물을 구성원에게 베풂으로써 권위와 통합력을 높이는 북서부 아메리카 인디언 사회의 의식-역주)의 개념 안에 있기 때문이다. 

사실, 문학상 수상을 원하는 작가의 독자들 중 수상작을 50년 이상 연구하거나 암송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코아탈렘과 여타 작가들은 독자가 자신의 작품에 일생을 바치게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그들은 독자들과 자유롭게 작품에 대한 의견을 나누려 할 뿐, 독자들이 그들의 작품을 평생 되새길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반대로, 그들은 자신의 작품들이 ‘프리뷰’되기를, 즉 책을 펴기도 전에 다 읽은 것 같은 느낌을 주기를 원한다. 이것이야말로, 문학의 쇼 비즈니스를 완성하는 필수조건이기 때문이다.

관심 경제의 대가들에 의하면, 특정 대상에 우리가 주는 관심의 양은 우리가 그 관심을 주기 위해 들이는 노력에 ‘반비례’한다. 반복해서 읽을 필요가 없는, 즉 기대할 것이 없는 글을 써야 하는 이유다. 통상적으로 문학이라 불리는 분야, 이제는 어떤 상을 받았는지에 따라 작품의 가치가 매겨지는, 쇼 비즈니스가 돼버린 분야, 이 작은 관심 경제의 분야에서 높은 성과를 올리려면 그래야만 한다. 

 

포틀래치, 매춘과 문학이 만나는 지점

따라서 쇼 비즈니스의 트레이드 마크와도 같은 ‘흥행성’에 이제는 많은 시간을 투자할 필요가 있다. 문학상은 문학을 하나의 쇼로 만드는 데 기여했으며, 각 문학 시즌은 작품의 흥행성을 평가하는 장으로 변모했다. 이 같은 관점에서 봤을 때, 2019년은 꽤 풍성한 해였다. 문학상 수상작들이 쏟아져 나오기 전, 미리 후보작들의 흥행성을 살펴봤을 때 그랬다는 말이다(문학상 결과가 발표된 이후에는 너무 늦다. 수상작으로 발표되면, 그 즉시 걸작이라는 타이틀이 붙기 때문이다).

『Orléans 오를레앙』(Grasset)의 저자 얀 무악스는 관심 경제의 진정한 전문가로서, 쇼 비즈니스화된 문학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 견인차는 하늘을 날다가 폭발해버렸다(견인차가 날 수 있고 또 폭발할 수 있다는 사실은 2019년 문학시즌이 남긴 가장 중요한 교훈이자 이 기간 발생한 거의 유일한 사건이었다). 어쨌거나 그는 온 힘을 다해 자신의 자아를 드러냈고, 어린 시절에 겪은 고통을 우리에게 남김없이 털어놓았다. 

그러나 곧 우리는 그것이 돼지비계인지 아니면 진짜 돼지인지 알 수 없게 돼버렸다. 그는 과거에 저지른 “젊은 날의 실수”(3)에 대해 자신이 패널로 출연 중이던 유명 TV쇼에 나와 해명하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멋진 쇼였지만, 안타깝게도 시의적절하지 못했다. 무악스는 뒤늦은 쇼, 앞으로 펼쳐질 고난의 시기를 예견하는 듯한 쇼를 벌인 것이다.

작가의 자아를 내보이고, ‘흥행성’이 있고, 관심 경제가 요구하는 희생 조건을 만족시키는 문학 카테고리의 대표주자는 르노도 상 후보에 오른 에마 베케르의 『La Maison 집』(Flammarion)이다. 소르본 대학 출신의 젊은 여성 작가, 베케르는 베를린의 사창가에서 2년 반을 머물며 자신이 경험한 바를 토대로 소설을 썼다. 그녀는 창녀들을 소재로 한 에밀 졸라의 나나(Nana)나 모파상의 소설들에 반기를 들면서, 자신의 진짜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베케르의 작품은 진정한 ‘돼지’이고, 쇼 비즈니스화된 문학의 이상향에 가깝다. 

그러나 현실이 되기엔 너무나 이상적이었을까? 그녀의 작품은 결국 수상작으로 선정되지 못했다. 아마 이 돼지를 좀 더 날씬하고 예쁘게 꾸미지 못해서였을 것이다. 실제 매춘경험을 바탕으로 소설을 쓰는 것이 부적절하거나 금기시돼서는 아니다. 오히려 그런 방식은 쇼 비즈니스화된 현대 문학의 취지에 완벽하게 부합한다. 게다가 이 작품이 유발하는 당황스러움은 높은 흥행성을 보장해줄 뿐만 아니라 그녀가 감내한 희생을 보여주는 지표다(그녀는 무모하다, 그녀는 두려움 없이 그 일을 해냈다, 그녀는 한계를 뛰어넘었다!). 이처럼 베케르는 수많은 장점을 갖고 있다. 그러나 9명의 남성과 1명의 여성으로 구성된 르노도 상 심사위원들이, 2년 반 동안 실제로 매춘을 해서 문학 시즌 최고의 작품을 탄생시켰다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려 할까? 

그리고 베케르가 유튜브 영상에서 말했듯, “매춘과 글쓰기는 어떤 점에서 비슷하다”라는 사실을, 다시 말해 사창가나 문학계나 어떤 역할을 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심사위원들이 과연 인정할 것인가? 실상 사창가야말로 포틀래치, 공여, 관심, 교환을 위해 특화된 공간이다. 

그리고 관심 경제의 시대에는, 문학마저도 이런 합법화나 단순한 거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결국, 문학은 약간의 은유가 가미된 매춘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오늘날에는 사실 부르디외의 ‘상징적인 자본’을 대체한 관심 자본, 가시성 자본을 얻으려면 ‘자아를 지불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그러나 르노도 상의 심사위원들이 이런 현실을 인지할 수는 있어도, 인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감히 입 밖으로는 말이다. 작가는 ‘작가다워야’ 하고, 또 문학은 언제나 그래왔던 것처럼 ‘문학다워야’ 하니까 말이다.

여하튼 우리는 문학의 나라 프랑스에 있다. 그리하여 결국 르노도 상은 실뱅 테솔, 자유 낙하와 추운 날씨를 사랑하는 작가 겸 여행가에게 돌아갔다. 낙엽과 문학상의 시기는 이제 끝났다. 잊힌 나무 위로 침울한 겨울이 지나갈 때, 우리에게는 영원히 끝나지 않는 것만이 남을 것이다.

 


글·뱅상 카우프만 Vincent Kaufmann
로잔공과대학 사회학과 교수, 저서로 『Dernières nouvelles du
spectacle (ce que les médias font à la littérature) 쇼에 관한 최신
소식(언론이 문학에게 하는 일)』(Seuil, Paris, 2017)이 있다.

번역‧김소연 dec2323@gmail.com
번역위원


(1) Stéphane Mallarmé, 『Correspondance 서신』, 1854~1898, Gallimard, coll. <Blanche>, Paris, 2019.
(2) Jean-Luc Coatalem, 『La Part du fils 아들의 몫』, Stock, coll. <La Bleue>, Paris, 2019; Santiago Amigorena, Le Ghetto intérieur(내적인 게토), POL, Paris, 2019.
(3) 학생 잡지에 게재한 반유대주의적 글과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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