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옥의 문화톡톡] 연애의 무게와 썸의 경제학
르몽드 문화 톡톡 | 이정옥(문화평론가)
연애의 분절화, 썸의 발명
연포(연애 포기)를 선언한 지 한참의 세월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연애에 대한 언설이 넘쳐나고 있다. 모두 연애에 대해 매우 친숙한 것처럼 말하고 있지만, 연애는 하나의 머리에서 끊임없이 다리가 생겨나는 괴물, 즉 히드라처럼 다가올 뿐이다. 히드라의 수많은 다리 중 어느 하나를 붙잡고 히드라 전체에 대해 말하는 모순적인 형국과 같이, 연애에 대한 수많은 언설은 통합되지 못하고 끊임없이 미끄러지거나 균열적이다.
썸은 히드라가 되어버린 연애의 대안으로 2010년 전후에 등장했다. ‘썸(some)’은 영어의 썸씽(something)에서 파생된 것으로, 친구보다는 가깝지만 연인은 아닌 모호한 관계를 가리키는 신조어다. 물론 썸이 등장하기 이전에도 썸씽은 연애 초기의 미묘한 감정적 반응 단계를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됐다. 그러나 썸과 썸씽에 내포된 사회적 코드는 현격하게 다르다.
흥미롭게도 썸의 발명 당시 ‘케미’라는 신조어도 함께 등장했다. 케미는 영어의 케미스트리(chemistry)에서 파생된, 두 사람 간의 미묘한 감정적 반응을 가리킨다. 만남의 시작 단계를 의미하는 케미는 썸이 등장하기 이전의 썸씽과 동일한 개념이다. 하지만 썸의 강세와 더불어 케미가 급격하게 사멸화됨에 따라, 연애는 썸과 연애의 두 단계로 분절화됐다.
썸과 연애의 분절화 현상은 세계적인 추세다. 서구에서도 연애(courtship)를 dating과 serious relationship의 단계로 나누고 있다. dating이 케미에서 출발하여 대략 10번 정도의 성관계에 이르는 단계라면, serious relationship은 본격적인 연인 사이로 발전하는 단계다.
문제는, 썸이란 뜻이 모호한 만큼 썸의 단계에 무수한 유형의 관계가 수렴된다는 점에 있다. 따라서 ‘썸탄다’는 새로운 (신)연애시스템을 명료하게 규정짓기란 쉽지 않다. dating으로 대치해도 모호하기는 마찬가지다. 썸과 dating은 모두 무겁고 버거운 과거의 (구)연애시스템에서 벗어나기 위한 대안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연애의 분절화와 썸의 발명은 두 사람이 서로에게 매혹되고 투사적 동일시를 통해 연인관계로 발전하는 연애과정을 매우 특별한 운명적 사랑과의 결혼과정에 통합시키는 과거의 (구)연애시스템에서 벗어나려는 실험적인 대응전략이다. 또한 신자유주의 체제의 불안정한 경제적 조건과 개인화된 사회적 조건에 맞지 않는 성과 사랑, 결혼 등에 관련된 전통적인 규범에서 벗어나 새로운 연애관습을 만들어가는 실리적인 대책인 것이다.
썸, 개인화된 사회의 (신)연애시스템
우선, 연애와 연상되는 장면을 떠올려보자. 아마도 빨간 장미꽃다발이나 반지 등의 선물을 바치며 사랑을 호소하는 남자와 화사하게 웃으며 사랑의 징표를 받아드는 여자의 프러포즈 장면이 연상될 것이다. 또는 미리 예약한 카페나 레스토랑에 가서 어색하게 웃으며 커피나 식사를 함께 하는 동안 몰래몰래 상대를 탐색하고 설레는 감정의 온도를 가늠하는 모습이 그려질 수도 있겠다.
이런 연상은 연애가 사회문화적인 관습이라는 점을 입증해준다. 자유의지에 따라 스스로 선택한 이벤트라 하더라도, 남자는 사랑을 구애하는 능동적인 존재로 여자는 마지못해 구애를 받아주는 수동적인 존재로 모드화되어 있다.
두 번째 장면 역시 별반 다르지 않다. 분위기 좋은 카페나 레스토랑을 예약하고 만남을 주도하는 쪽은 대부분 남자다. 설령 여자가 예약하고 만남을 주도하더라도, 데이트 비용을 지불하며 능력을 과시하는 쪽은 단연 남자다. 여자가 지불하는 경우도 있지만, 남자의 자존심을 자극하지 않는 선에서 품위 있게 행동하는 에티켓을 지켜야 한다.
이런 연애시스템은 다분히 낭만적 사랑에 기초한 구시대적인 연애관의 산물이다. 흥미롭게도 젠더 규범적인 연애시스템은 2010년, 그러니까 썸이 등장하기 바로 직전까지 통용됐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누군가로부터 사랑받는 상상마저 사치가 돼버린 각자도생의 각박한 현대사회에서 여전히 구시대적인 연애관습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이런 모순은 근원적으로 ‘연애’가 서구에서 수입되고 일본을 거쳐 이식된 이래 우리의 사회문화적 변화에 따라 변용과 변주를 거듭해온 역사적인 맥락과 관련이 있다. 19세기에 처음 발명된 ‘연애’는 프랑스식 사랑, 즉 궁정풍 사랑(fine amore)과 19세기 영국식의 낭만적 사랑(romantic love)을 결합한 개념으로 출발했다. 이후 20세기 미국의 데이트문화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연애는 사랑과 분리된 courtship, 즉 결혼에 이르기 전까지의 데이트시스템을 포섭하면서 더욱 복잡해졌다.
이런 경과를 거쳐 연애는 하나의 머리에서 수많은 다리가 끊임없이 생겨나는 히드라가 된 것이다. 그리하여 연애는 영육합일의 지고지순하고 숭고한 사랑이라는 최상의 가치로 미화되는가 하면, 때론 구속적인 결혼제도에 맞서 개인의 자유의지에 따라 자유연애와 연애결혼을 선택하는 해방적인 실천행위로 이상화된다. 또한 연애는 기념 이벤트나 프러포즈와 같은 소비자본주의적 데이트시스템을 포괄함으로써 성과 사랑, 결혼의 가치를 자본으로 환산하는 바로미터가 된다.
썸은 이처럼 무겁고 버거운 연애관습에서 벗어나 시대변화에 걸맞은 새로운 연애시스템을 만들어가는 대안으로 등장한 것이다. 전통적으로 가족주의와 집단주의가 강한 한국은 1997년 IMF 외환위기 이후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로 변화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급격하게 개인화 사회로 이행하고 있다. 때문에 전통적으로 개인주의가 강했을 뿐 아니라 68혁명 이후 개인에게 다수의 선택과 정체성을 열어 놓은 서구의 개인화 사회와는 사뭇 다른 풍경이다.
IMF 외환위기 이후 도입된 신자유주의 체제는 한국사회를 가족이나 집단을 배려할 여유조차 빼앗긴 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오직 살아남기에 올인 하는 무한경쟁의 정글로 만들었다. ‘살아남기’가 생존전략이자 지상목표인 사회에서 남성성과 여성성이라는 성별 구분에 기초한 데이트나 결혼을 전제로 연애를 강요하는 (구)연애시스템은 감당하기 버거운 구시대적 유물로 굳어진 것이다.
썸문화가 낯선 이유는 점진적이고 단계적인 사회변화가 아니라 경제체제라는 요인에 의해 갑작스럽게 개인화 사회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등장한 데 있다. 그러니 썸의 경제학을 추구하는 현대인들을 자신만 아는 이기주의자나 공동체적 윤리의식의 결여자로 진단하는 것은 구습의 연애관에 사로잡혀 시대변화를 외면한 설익은 판단이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친구보다 가깝지만 연인은 아닌 친구와 연인의 경계를 넘나드는 모호한 관계인 썸은 여러모로 경제적이다. 우선, 연애감정은 즐기되 연애관계에 동반되는 책임과 의무 등에 관련된 감정노동을 줄일 수 있다. 첫눈에 반해 사랑의 감정에 휘말린다 해도 곧바로 진지한 연애단계로 진입하기에 앞서 썸의 단계에서 감정을 조율할 수 있다.
또한, 썸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부과된 열정이나 헌신, 친밀감 등 과도한 구속과 의무감을 완화시켜주는 효과가 있다. 썸은 맹목적인 열정으로 뜨거운 태양에 불타버린 이카루스의 날개처럼 쉽게 산화될 수 있는 연애의 위험성을 조절하는 심리적이고 경제적인 안전장치이기 때문이다.
연애의 무게와 썸의 경제학
만일, <광식이 동생 광태>(2005)에서 광식이가 썸문화가 보편화된 시기에 살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아마도 광식이는 그토록 좋아했지만 말 한마디 제대로 건네지 못했던 윤경에게 멋지고 강한 남자가 되어야 한다는 젠더 규범적인 연애강박증으로부터 자유로워졌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윤경과 후배와 연인 사이의 모호한 관계를 유지했을 것이고, 윤경 역시 광식을 좋아했던 점으로 미뤄보면 둘은 분명 연인으로 발전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면 적어도 윤경의 결혼식에서 <세월이 가면>을 청승맞게 노래하며 사랑을 떠나보내는 안타까운 장면은 연출되지 않았을 것이다.
<연애의 온도>(2013)는 가족주의와 집단주의에서 벗어나 개인화된 사회로 급격하게 전환되는 시점을 배경으로 괴물이 되어버린 무거운 연애의 실상을 현실감 있게 담아내고 있다. 영화는 3년간 비밀리에 사내연애를 유지했던 남자와 여자가 재회와 이별을 수없이 반복하는 과정을 세밀하게 클로즈업하고 있다.
하나의 시퀀스마다 인물들이 카메라를 향해 심경을 전달하는 인터뷰 형식은 연애관습과 현실 연애 사이의 분열적인 이중심리를 부각시켜주는 장치로 활용되고 있다. 이런 장치를 통해 이들이 헤어졌음에도 여전히 사랑하고, 재결합하지만 또 다시 이별하는 도돌이표 연애를 반복하는 이유가 연애강박증에 사로잡혀 있다는 점을 선명하게 입증한다.
이별 후 ‘속 시원한 해방감’을 쿨하게 토로하지만, 실상 동희와 영은 슬픔을 주체하지 못하고 본격적인 사랑싸움에 돌입한다. 연애감정을 정리한다는 핑계로 서로의 물건을 주고받으며 상처를 덧내고, 배신감에 치를 떨며 그만큼 사랑이 깊었음을 확인하는 연애감정의 순환 고리에 빠진 것이다.
감정기복의 사이클에 따라 결합과 이별을 반복하는 이들은 왜 자신들이 연애를 하는지, 혹은 연애를 계속 이어갈지 등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조차 생략하고 오직 연애관습에 사로잡혀 있는 시지포스와 같은 존재들이다. 재회기념으로 놀이동산에 가서 또 다시 이별하고 이별기념으로 롤러코스트를 타는 장면에서 보여지는 수시로 변하는 표정만큼이나 이들은 연애강박증에 롤러코스트처럼 습관화되어 있다.
문제는 이들의 연애감정이 개인화된 사회에 맞지 않게 철저하게 (구)연애시스템을 따른다는 데 있다. 동희와 영의 연애는 남편과 아내라는 성역할 구분에 따른 결혼생활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친밀성이라는 이름으로 핸드폰과 메일, SNS를 수시로 체크하며 프라이버시를 침범하고 서로를 구속한다. 뿐만 아니라 이별을 선언한 후 새로 만나는 사람을 스토커 수준으로 괴롭히거나 폭력을 가하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수없이 싸우지만 싸운 이유조차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상습적이다. “연인들이 이별했다 재회할 확률 82%, 그 중 다시 만날 확률 3%에 불과하지만 로또 당첨 확률에 비하면 큰 거”라고 합리화하며 재회와 이별을 반복한다. 그러니 재회로 끝나는 엔딩 장면조차 또 다른 이별의 서곡이거나, 혹은 결혼을 하더라도 지겹게 싸우기를 반복하다 끝내 이혼할 것 같은 예감은 문맥상 충분히 가능한 추론이다.
이들이 보여준 연애관습의 문제점은 일차적으로 개인의 사생활인 연애를 공적인 직장생활과 구분하지 않은 등 개인화 원칙을 지키지 않는다는 데 있다. 무엇보다 두 사람의 연애에 깊게 관여하며 직장 전체 구성원들이 집단주의적인 일체감을 공유한다는 점은 심각하게 문제적이다.
두 사람 사이를 오가며 시시콜콜 소문과 소식을 전하고 화해와 싸움을 부채질하는 박계장은 직장 동료라기보다는 동희의 가족과 다를 바 없는 문제적인 인물이다. 더욱이 동희가 사원연수에서 영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민차장에게 폭력을 휘두르며 연수를 망쳤음에도 동희는 물론 영에게 전보발령이나 치명적인 인사조치를 취하지 않을 만큼 연애에 관대한 직장문화는 치명적인 수준이다.
연애관습의 문제점을 보여주는 영화라는 점을 십분 감안하더라도, 이는 집단주의와 가족주의에 사로잡혀 있는 한국사회의 문제점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이처럼 개인화가 이루지지 않은 한국사회의 집단주의와 구태의연한 연애관습을 보여주는 것이 영화의 취지라면, 인물들의 인터뷰 내용을 영화화한 <그와 그녀의 인터뷰> 시사회에서 동희와 영이 빠져나가 오붓하게 재회를 즐기는 장면은 심각한 서사적 결함이라 할 수 있다. 불편하지만 자신들의 연애관습을 객관적으로 성찰할 수 있는 브레히트 효과가 차단됐기 때문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오늘의 연애>(2015)는 친구도 아닌 연인도 아닌 썸의 관계를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3년간의 연애 끝에 이별과 재회를 반복하는 동희와 영의 무거운 연애와 달리, 18년간 한 집에서 남매처럼 자라온 친구 사이인 현우와 준수의 썸은 가볍고 실리적이다.
현우는 초등학교 때부터 프러포즈를 하며 사귀자는 준수의 고백을 번번이 거부하며 철저하게 친구 사이로 선을 그어 왔다. 현우가 준수를 친구로 대하는 표면적인 이유는 ‘남자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준수가 초등학교시절 함께 자이로드롭을 타러가서 고소공포증으로 바지에 오줌을 지린 이후, 현우는 준수를 줄기차게 친구로 대해왔던 것이다.
제주도 소녀였던 현우는 준수네 집에서 하숙하며 얹혀살았지만 준수는 물론 준수네 부모에게도 당당하다. 반면 소심하고 반듯한 준수는 주인집 아들임에도 살림을 도맡아 하는 아버지를 닮은 듯, 현우의 오피스텔을 드나들며 반찬도 날라다주고 청소도 해주는 등 뒷바라지를 자처한다. 때문에 준수를 남친보다 더 심하게 부리는 현우를 향해 이기적이라 비난할 수 있다. 그러나 현우를 향한 지고지순한 마음과 달리 그간 숱하게 여자를 만나고 번번이 차인 이력으로 따지면, 준수 역시 썸의 실속을 차린 셈이다.
현우가 짝사랑하던 이동진 피디와의 스캔들은 현우의 성장과 썸의 변화에 전환점으로 작동한다. 미모의 기상캐스터로 잘 나가는 현우를 질투한 동료가 퍼트린 이피디와의 스캔들로 현우는 파면되고 이피디는 그대로 자리를 보전하는 선에서 마무리된 것이다. 이로 인해 잠적한 현우가 1년 동안 유럽여행을 떠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준수는 끈질기게 현우를 설득하여 18년간의 썸을 끝내고 드디어 연인으로 발전한다. 현우가 자이로드롭을 타고 강한 남자임을 증명한 준수의 마음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러나 겉으로 보기에 발랄하고 당찬 현우 역시 구시대적 연애관에 사로잡혀 있다는 점에서 <연애의 온도>의 영과 크게 다르지 않다. 현우의 이상형은 다분히 로맨스의 주인공 같은 ‘돈 많고, 잘 생기고, 여자를 지켜주는 힘 있는 남자’다. 이상형에 가까운 직장 상사인 이동진 피디를 짝사랑하지만, 유부남인 이피디는 가벼운 바람 정도로 대했을 뿐이고, 결과적으로 '날씨의 여신'으로 불릴 만큼 최선을 다했던 기상캐스터에서 파면됐던 것이다.
그럼에도 영과 현우는 젠더 규범적인 연애의 문제점을 대하는 방식에서 차별화된다. 영이 젠더 규범적인 연애에 속박되어 있는 여성이라면, 현우는 젠더 규범적인 연애관계를 유예하거나 거부할 수 있는 썸문화를 수용한 여성이다. 만일 처음부터 현우가 준수와 연인관계를 유지했다고 가정하면, 이들의 관계 역시 동희와 영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끝까지 썸의 단계를 유지했던 현우는 영에 비해 실리적이다.
<오늘의 연애>가 섹스가 소거된 친구와 연인 사이의 모호한 관계를 유지하는 한국적인 썸문화를 그렸다면, <친구와 연인 사이(No strings Attached)>(2011)와 <프렌즈 위드 베네핏 (Friends With Benefit)>(2011)은 케미에서 출발하여 친구처럼 편하게 섹스를 즐기는 dating을 다뤘다.
<친구와 연인 사이>에서 MIT 의대생인 엠마는 아담과 만나 섹스를 한 이후, 연인으로 발전하지 않는다는 규칙을 앞세워 섹스만 즐기는 dating의 관계를 유지한다. 역으로 <프렌즈 위드 베네핏>에서는 아트디렉터인 딜런이 헤드헌터 제이미와 고객 사이로 만나는 과정에서 활달하면서도 직업정신이 투철한 제이미에게 dating을 제안한다.
흥미로운 점은 <친구와 연인 사이>에서 엠마와 아담, <프렌즈 위드 베네핏>에서 제이미와 딜런이 dating에 집착하는 이유는 모두 부모의 연애와 결혼에서 비롯된 문제의식에 있다는 점이다. 엠마나 제이미는 공통적으로 낭만적 사랑을 추종하는 엄마로 인해 연애와 결혼에 대한 거부감을 공유한다.
엠마는 어릴 적 아버지의 죽음 이후 아버지에게 전적으로 의존했던 유약한 엄마를 보고 독립심 강한 여자로 살아오면서 연애감정에 빠지는 것을 두려워하게 된 것이다. 반면, 제이미는 낭만적 사랑을 신봉하여 만나는 남자들마다 결혼을 꿈꾸었지만 번번이 실패했고, 그리하여 제이미의 아빠가 정확하게 누구인지도 모를 정도로 숱한 남자를 거쳤음에도 여전히 운명적 사랑을 꿈꾸는 사랑꾼 엄마로 인해 결혼을 전제로 한 연애를 거부해왔다.
엠마와 dating 친구인 아담은 바람둥이 아버지에게 전 여친을 뺏긴 후 사랑을 믿지 않게 됐다. 딜런은 어린 시절 이혼한 부모로 인해 연애와 결혼에 대해 회의를 갖게 됐다. 특히 딜런은 젠더 규범적인 연애에 사로잡혀 있는 로맨스영화와 그런 영화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전 여친의 연애강박증에 강한 거부감을 갖게 됐던 것이다. (<연애의 온도>의 동희와 영이 결혼하여 아이를 낳는다면, 아마도 이들처럼 되지 않을까?)
이들의 dating은 젠더 규범적인 낭만적 사랑의 연애시스템이나 데이트시스템에서 벗어나 쿨하게 섹스만 즐기는 친구관계를 유지한다. 시나리오 작가 지망생이라 상대적으로 시간이 많은 아담은 항상 시간이 부족한 의대생 엠마의 기숙사와 병원 등을 찾아와 스스럼 없이 섹스를 즐긴다. 딜런과 제이미 역시 힘세고 강한 남성다움이나 수줍은 듯 강하게 유혹하는 여성다움 등의 무거운 연애관습을 버리고 오로지 자신들의 본능에 충실한 관계에 심취한다.
자신의 본능에 충실한 이들의 dating은 serious relationship으로 결국 이어지면서 끝이 나지만, 더 이상 젠더규범이나 연애관습에 구속되지 않는 진정한 연애를 펼쳐나갈 것은 너무나 분명하다. 이들의 dating은 연애관계를 망쳤다는 죄책감이나 희생과 같은 감정적 부담을 덜어주는 동시에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심리적인 안정망 기능을 담당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썸은 여성에게 유용한 연애시스템처럼 보인다. 엠마와 제이미처럼 원론적으로 자유와 평등을 누릴 수 있지만 현실적으로 일과 연애를 병행하기 어려운 여성들에게, 썸은 젠더 규범적인 연애관계를 유예하거나 거부할 수 있는 선택권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물론 딜런이나 아담처럼 썸은 남성들에게도 유용한 연애시스템이다. 데이트를 위해 지불하는 비용을 사랑의 크기로 환산한다거나 상품화된 이벤트코스를 남성다움으로 전시하는 데이트관습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대중문화에서 그려지는 썸과 dating은 친구에서 연인으로 발전한다. 따라서 썸과 dating은 연애의 거부가 아니라 누군가와 사랑을 주고 또 받고 싶지만 불가능한 여건상 잠정적으로 미루는 연애의 유예로 그려진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각자 도생의 고달프고 우울한 현대사회에서 사랑하지 않을 권리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점차 높아지면서 연애에 대한 거부의 징후가 강해지는 추세이다. 그러니 썸이 어떤 형태로 정착될 것인지 좀 더 지켜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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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출처 : 구글
<참고문헌>
1) 간노 사토미, 『근대 일본의 연애론』, 손지연 옮김, 논형, 2014.
2) 베스 L. 베일리, 『데이트의 탄생』, 백준걸 옮김, 앨피,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