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민 대통령’ 모랄레스를 내쫓은 산타크루스
산타크루스 엘리트와 함께한 볼리비아 방문기
<월 스트리트 저널>부터 소수의 경망한 좌파들까지 볼리비아 에보 모랄레스 대통령이 2019년 11월 대선 결과를 조작했다고 주장했다. 그들의 실수는 모랄레스 대통령이 1차 투표에서 승리하지 못하게 만들었고, 산타크루스 출신의 엘리트 반동자들에 이득이 됐다. 이들은 국가 주도권을 잡길 꿈꾸지만 그 희망은 오는 9월 6일 예정된 투표에서 좌절될 것이다.
산타크루스 데 라 시에라를 방문한 것은 기이한 경험이었다. 공항에서 마주친 사람 또한 범상치 않았다. 포마드를 바른 머리에 쓰리피스 정장 차림의 남성들, 붉은 머리의 메노파(기독교 분파) 가족들, 성형수술이 의무이기라도 한 듯한 여성들, 피부색이 밝은 승객만 찾는 택시기사들 등. 시내를 향해 쭉 뻗은 도로를 달리는 차 안에서 이글거리는 열기, 메마른 벌판, 커다란 SUV 차량을 앞지르는 짐수레가 보였다. 그리고 최신식 콤바인 농기계들을 고급 승용차마냥 진열해놓은 판매상들을 보면서 이 지역의 부가 어디서 나오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우리는 외곽의 빈민가, 루프탑 수영장과 헬스장을 갖춘 고급 주택가도 지났다. 그리고 식민지 시절 모습이 남아있는 구시가지에 다다랐다. 볼리비아 동부 평지에 위치한 산타크루스 데 라 시에라는 국내 최대 면적과 최대 인구를 자랑하는 산타크루스 주의 주도다. 독일과 맞먹는 면적으로 볼리비아 영토의 1/3을 차지하며, 인구는 200만을 넘는데 이중 대다수가 주도에 산다. 특히 지하에 묻혀있는 탄화수소와 농산업은 GDP의 30% 이상을 책임지며, 산타크루스를 ‘볼리비아의 경제중심지’로 부상시켰다.
앞서 2018년 12월에 우리는 비행기 안에서 나탈리아 이바녜스를 만났다. 그녀는 우리를 따뜻하게 맞이했다. 그리고 빠르게 증가하는 주택단지들을 가리키며 설명했다. “산타크루스는 볼리비아에서 가장 현대화된 도시에요. 그 많은 콘도를 보셨나요? 산타크루스에서는 그게 일상이에요. 이곳 사람들은 돈을 투자할 줄 알아요. 원주민처럼 땅에 묻어놨다가 ‘파차마마(대지의 어머니)’에게 바치지 않아요.” 당시 이바녜스에게는 소원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몽매한 원주민’ 에보 모랄레스 대통령의 퇴출이었다.
미국스러운 게 최고
그로부터 1년 후 우리는 ‘디바인’이라는 네일숍에서 이바녜스를 다시 만났다. 최근 개업한 네일숍은 대리석과 유리로 장식돼 있었다. 짧은 흰색 블라우스를 입은 종업원들은 웨지힐을 신고 파란색 렌즈를 끼고 있었다. 벽걸이 텔레비전에 틀어놓은 MTV채널에 나오는 가수 같았다. 손님들은 서로 영어만 쓰려고 애썼다(어휘력이 한계에 달하면 결국 스페인어를 썼지만). 이곳 사람들은 미국스러운 게 가장 좋다는 인식이 강하다. 그래서 공항에서도 볼리비아와 미국, 이중국적을 가진 현지인은 내국인 입국심사대로 가면 훨씬 빨리 통과할 수 있는데도, 굳이 긴 줄을 서서 미국 여권을 낸다.
네일케어를 받던 이바녜스는 자신의 염원이 실현됐다며 “볼리비아를 독재자의 지옥으로부터 해방시킨 것은 바로 내 사촌”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ICIJ)에 의하면 현재 활발하게 활동 중인 40대 변호사이자 백만장자인 루이스 페르난도 카마초는 2016년 4월에 역외회사 3곳을 파나마에 설립해 몇몇 인물들과 볼리비아 기업들이 자금을 빼돌려 돈세탁하고 세금회피를 꾀하도록 했다.
2019년 11월 모랄레스 대통령은 군경까지 힘을 보탠 쿠데타로 결국 퇴진 당해 현재 망명 중이다.(1) 앞서 2019년 10월 대선 결과에 의혹을 제기한 총파업이 21일간 지속됐다. 모랄레스 대통령은 1차 투표에서 근소한 차이로 승리했었다. 이 시기 내내 카마초가 이끄는 ‘친(親)-산타크루스 위원회(Comité pro-Santa Cruz)’는 분노의 불씨를 퍼뜨리는 역할을 했다. 디에고 카스텔 위원회 이사는 ‘위원회가 볼리비아에서 가장 강력한 소집’을 실현시켰다고 말했다. 카마초 현 대선 후보는 예수상 광장에 사람들을 불러 모은 뒤 소집 이후의 지시를 전달했다(2020년 5월 3월 예정이었던 대선은 COVID-19 전염병 때문에 9월 6월로 연기됐다).
“원주민을 전복시킬 수 있었던 것은 80%는 산타크루스 덕분이다.” 여기서 ‘원주민’이란 축출당한 에보 모랄레스 대통령을 말한다. 우리가 만난 또 다른 산타크루스 주민, 시르세 미란다가 이를 확인시켰다. 그녀는 친(親)산타크루스 위원회 일원들이 매일 밤 봉쇄지점을 찾아 시위대에게 돈과 식량을 주고 ‘사례’하는 것을 목격했다고 전했다. 도심 한가운데 위치한 캐나다 스트롱기스트 거리에 친산타크루스 위원회 사무실이 있다. 녹색과 흰색의 산타크루스 깃발이 휘날리는, 식민지 시대풍의 아름다운 건물 주변으로 나무가 우거진 넓은 정원이 펼쳐진다. 카스텔 이사는 친산타크루스 위원회를 ‘산타크루스인의 도덕적 정부’라고 표현했다. 위원회의 역할은 ‘정부에 대항해 산타크루스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이다. 1950년 설립된 이래 엘리트 중심의 과두제로 굳건하게 유지되고 있으며, 300여 개의 ‘시민회’로 구성돼 있다.
2011~2013년 위원회 위원장을 맡은 에를란드 바카 디에스 부쉬에 의하면 위원장에 입후보하려면 영향력 있는 기업인의 추천과 캠페인을 열 수 있는 자금력이 필수다. 카스텔 이사는 ‘산타크루스 태생으로 이곳에 15년 이상 거주한 사람’이라는 요건을 추가했다. “그래도 세상이 많이 현대화됐다. 최근까지만 해도 산타크루스 출신자의 아들이어야 한다는 조건도 있었다.” ‘아들’이라니! ‘현대화’의 영향력이, 여성들에게 이 보수적인 도시의 강대한 위원회를 이끌 기회를 줄 만큼 강력하진 않았나 보다. ‘여성부서’가 있기는 하지만 사회관계에 국한된 지엽적인 업무만 담당한다.
마침 우리가 위원회 사무실을 방문했을 때 ‘여성부서’ 직원 마리아 카르멘 모랄레스 데 프라도를 만났다. 60세 생일 때 지역발행지들의 소식란을 장식했던 그녀는 위원회를 ‘정계진출을 위한 등용문’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산타크루스 정치인들 대부분이 위원회 학교에서 교육을 받는데, 역대 위원장 중 시장직을 6번째 연임 중인 인물도 있고, 도지사를 3번 연임한 인물도 있다. 그녀는 “민주주의를 드높일 만반의 준비가 된 청년들과 지난 몇 달을 알차게 보냈다”라며 감격스러워했다. 산타크루스 청소년협회 회원들은 그녀를 ‘이모’라고 부른다. 이 ‘위원회의 돌격대원’들 중 일부는 민주주의에 대한 열정으로 인해 폭행을 저지르고 감옥에 들어가기도 한다.
“내 아이들이 돈맛을 알기를”
청소년협회 사무실은 위원회 1층에 자리한다. 냉방이 잘 된 사무실 바닥에는 담배꽁초가 흩어져 있다. 인원은 약 300명으로 30세 이하 백인, 중산층 이상 가정 출신 학생이 주를 이룬다. 여기에서는 모임 때 아무 거리낌 없이 나치식 경례를 한다. 국제인권연맹으로부터 군대식 조직 취급을 받는 산타크루스 청소년협회는 스페인 프랑코 장군식 군대를 모델로 20년 전에 만들어진 볼리비아 사회주의 팔랑헤당의 당수인 카를로스 발베르데 바르베리가 1957년 창설했다.
청소년협회에 가입하려면 먼저 팔랑헤 당원이 돼야 한다고 가리 프라도 아라우스 변호사가 말했다. 청소년협회의 역사를 담은 영화에서 발베르데 바르데리가 이렇게 설명했다. “산타크루스 청소년협회는 위원회의 ‘집행자’ 격으로 만들어졌다. 거리의 싸움을 담당하고, 대중을 교화하고, 위원회를 군사적으로 지원한다.” 카마초 역시 청소년협회를 시작으로 2002년 23세로 역대 가장 젊은 부회장이 됐다.
바카 디에스 부쉬는 자식, 손주 사진과 산타크루스 역사서로 가득한 개인 진료실에서 자신을 “캄바국가해방운동(MNC-L)의 창립자이자 사상가”라고 소개했다. 그에 의하면 “볼리비아는 아이마라 족, 케추아 족 등 가난하고 시대에 뒤쳐진 민족들로 구성된 남미의 티베트다. 분쟁, 초기 공화주의, 비자유주의, 조합주의, 보수적 문화가 지배하고 있다. 관료주의 중심지(라파스)가 ‘내부 식민지’를 착취하는 끔찍한 식민국가의 중앙집권제를 시행하고, 우리의 경제적 성과를 빼앗고, 저개발 문화와 자신의 문화를 강요한다.” 볼리비아 동부의 ‘캄바’ 주민들은 백인에 가까우며 ‘서구화’돼 있다. 서부에는 ‘코야(colla, 안데스 산맥 원주민을 비하하는 표현)’가 있다.
그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볼리비아는 산타크루스에게 아무것도 해준 게 없다. 내가 태어나던 1948년만 해도 이곳은 아스팔트 도로 하나 없었다. 주민도 4만여 명에 그쳤다. 그런데 지금 얼마나 번영했는가! 이제 인구가 150만 명이 넘는다! 중앙정부는 광산지역 발전에만 신경 쓰고 우리를 버렸다. 우리가 도움을 요청해도 국가가 돕지 않았기 때문에 상수도망, 정보통신망, 전기 시스템 등 모두 우리가 직접 연결했다. 우리는 이런 성과가 자랑스럽다. 산타크루스의 모든 성과는 우리가 흘린 땀의 결과다.”
볼리비아 정부가 산타크루스에 도로와 가스관 등 인프라를 구축하고, 농산업 개발에 대거 투자해 큰 수익을 남긴 부분은 그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은 듯했다. 바카 디에스 부쉬는 지역, 문화, 가치에 대해서만 설명한 것이 걸렸는지 우리에게 주말에 형제인 툴리오와 함께 산타크루스 북동쪽으로 300km 떨어진 작은 마을 콘셉시온에 가자고 제안했다. 그곳으로 가는 BMW 차량에서 두 형제는 매우 들떠 보였다. 우리에게 그들이 사랑하는 ‘그들의 산타크루스’를 보여준다는 생각에 기쁜 듯했다.
“코야는 게으르고 무지한 인종이다. 그들은 남이 도와주기만 기다리며, 스스로 나서는 법이 없다. 나는 내 아이들이 이들처럼 게을러질까 가난한 친구와 어울리지 못하게 한다. 내 아이들이 돈 냄새와 맛을 알길 바라며, 열심히 일해서 성공한 사람에게서 배우기를 원한다. 결국 부가 부를 끌어들이는 법이기 때문이다.”
여성을 고용하는 리스크
그는 BMW의 비싼 옵션을 한참 자랑한 후 말을 이었다. “우리 산타크루스는 더 크게 발전할 수 있었는데 ‘원주민(에보 모랄레스)’이 막았다. 서쪽 사람들은 그처럼 원래 우리를 싫어했고, 방해했다. 사회적 권리, 회사에 대한 공적 지원을 통해 우리 기업들을 망쳐놓았다. 회사에서 여성 직원 3명이 동시에 임신하면, 회사 문을 닫아야 한다. 전 직원에게 더블 보너스(13월의 보너스)를 줘야 하는 마당에 임산부에게 ‘수유 수당’까지 지급해야 한다. 이게 여성를 고용할 때의 리스크다.”
우리는 가는 길에 ‘산 줄리안’이라는 마을에 잠시 들렸다. 30년 전에 돌연 생겨난 이곳 주민 4만8,000명 중 대부분은 볼리비아의 다른 지역에서 이주한 원주민 농부와 소작농이다. 산타크루스 자치독립을 지지하는 두 형제는 이 ‘정글’이 바로 ‘코야의 침략’으로 산타크루스인을 ‘희생자’로 만든 사례라고 설명했다. “이 야만인들은 우리가 차를 타고 지나가면 돌을 던진다. 우리를 침략한 것도 모자라서, 폭행하고 심지어 죽이기도 한다. 이 미치광이들과 분리돼야 한다.”
우리는 마을을 지나면서 드레드 머리를 하고 풍성한 알티플라노 전통 원피스 차림의 여성들을 마주쳤다. 툴리오는 말했다. “그들은 세상에 적응도 못 했고, 여기서 할 수 있는 일도 없다. 동물도 겨울이면 털이 두터워져서 외부세계에 적응할 줄 아는데 말이다. 하지만 그들은 더우면 땀을 흘리고, 악취를 풍긴다.” 실제로 길에서 마주친 원주민 여성들은 산타크루스 모델과는 거리가 멀었다. 매년 9월 개최되는 ‘산타크루스 국제경제박람회(Fexpocruz)’에서 번쩍이는 콤바인 농기계와 호르몬으로 몸집을 부풀린 가축들 사이에서 손바닥만 한 옷을 입고 포즈를 취하는 투명한 피부의 늘씬한 모델과는 전혀 달랐다.
“히틀러의 책은 명작이죠!”
우리는 캄바 출신 대중가수인 알도 페냐와 지나 힐이 ‘라 크루세니다드’, ‘페나 크루세나’, ‘비바 산타크루스’ 등 대표곡을 부르는 감미로운 목소리를 감상하며 광활한 콩밭과 옥수수밭을 가로질렀다. 크루세니다드는 무슨 뜻일까? 두 형제는 이 질문에 꽤 당혹스러운 표정이었다. 그리고 2003년도 미스 볼리비아인 가브리엘라 오비에도가 미스 유니버스 대회에서 자신의 나라에 대한 질문을 받았을 때처럼 장황하게 대답했다.
“안타깝게도 볼리비아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우리가 모두 원주민인 줄 안다. 라파스는 키가 작은 빈민과 원주민을 내세워 이런 이미지를 조장한다. 나는 라파스 반대편 동부 출신이다. 우리는 키가 큰 백인이며 영어를 쓸 줄 안다. 볼리비아가 안데스산맥 원주민의 나라라는 편견은 틀렸다.” 바카 디에스 부쉬는 잠시 생각하더니, 『나의 투쟁』에서 한 구절을 인용했다. 우리는 순간 귀를 의심했고, 그에게 되물었다. “아돌프 히틀러가 쓴 책이요?” “네, 맞아요. 명작이죠! 당신도 아나요?”
차를 타고 세 시간쯤 달리니, 계곡이 많고 울창한 풍경으로 바뀌었다. 우리는 식민지 시대풍의 낮은 주택들이 길게 늘어선 작은 마을을 지났다. 길에서 카우보이 셔츠 차림의 뚱뚱한 백인 남성들이 머리를 휘날리며 할리데이비슨을 타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다. 그들은 피부색이 짙은 가족이 모는, 진흙이 묻은 오토바이를 빠르게 지나쳐갔다. 두 형제는 젊은 시절의 향수에 젖어 있었다. 툴리오가 그의 형제를 향해 말했다. “그들이 저쪽 거리에서 원주민을 자전거에서 끌어 내려서 때린 일 기억나?”
우리는 드디어 산 하비에르에 도착했다. ‘자치주의자’ 동료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시청 앞 광장에 경계표(높이 2.2m 너비 20cm의 나무 말뚝)를 세우려 모였다. 이 행사의 주최자이자 산타크루스 출신 기업가인 호에 누네스 클린스키는 열정과 신념에 찬 목소리로 설명했다. “이 행사의 목적은 볼리비아 도시마다 자치주의 기조를 담은 푯말을 남기는 것이다. 이는 볼리비아 연방 제헌의회로 이어지는 과정으로 산타크루스 자치를 향한 첫걸음이 될 것이다.” 그곳에 모인 약 50명 중 대부분은 60대 남성이었다. 그들은 청바지에 셔츠를 입고 모카신이나 미국식 가죽 장화를 신었으며, 칼집이 달린 허리띠를 매고 있었다. 그리고 모자를 단단히 눌러쓴 채 레이벤 선글라스를 콧등에 걸치고, 큼직한 금시계를 차고 있었다.
바카 디에스 부쉬는 연설 후 참석자들의 박수 속에서 녹색, 흰색의 산타크루스 깃발을 푯말에 달았다. 그리고 연설 중에 자신의 숙부인 헤르만 부쉬 베세라도 잊지 않고 언급했다. 그의 숙부는 1932~1935년 볼리비아와 파라과이 사이에서 벌어진 차코 전쟁에서의 활약으로 유명해진 독일 의사의 아들이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가슴에 손을 얹고 깃발을 흔들며 산타크루스 송가를 불렀다. 산타크루스 엘리트 출신인 이들 대부분이 이 근방에 토지를 소유하고 있다. 우리가 “신기하게도 여러분 모두 저처럼 파란 눈을 가졌네요!”라고 말하자 그들은 이렇게 답했다.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유럽인이라서 그래요. 이곳에는 특히 독일 후손이 많아요.”
행사 후 우리는 다시 콘셉시온으로 떠났다. 그곳에 또 다른 형제가 있는데, 그는 근방 대지주 대부분이 그렇듯 목재, 사탕수수, 축산업 사업권을 소유한 백만장자였다(툴리오는 ‘달러 기준’을 강조했다). 관광책자에도 종종 등장하는 아름다운 마을을 보여주며, 우리의 여행 동반자는 “여기서 위대한 인물이 탄생했다”라고 강조했다. 그 위대한 인물은 우고 반세르 수아레스 장군으로, 그는 볼리비아 대통령을 두 번 역임했다. 첫 번째 임기인 1971~1978년에는 쿠데타로 군사정권을 세웠다. 당시 게슈타포 장교였던 클라우스 바르비가 탄압 전문 특별고문으로 있었다. 두 번째 임기인 1997~2001년에는 민주주의 방식으로 선출됐다.
우리는 근처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했는데 그들은 남은 음식을 비닐봉지에 포장했다. 백만장자 형제의 대농장을 관리하는 ‘원주민’에게 주겠다는 것이었다. 바카 디에즈 부쉬는 이런 자신의 관대한 행동에 대해 설명했다.
“일할 줄 알기 때문이다.” 이런 우애로운 공존은 다음 날 아침 우리가 예수회 선교단의 주일미사에 참석했을 때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한쪽 좌석에는 유럽인의 외모를 지닌 백인 주인들이 앉고, 그들의 자녀들은 부모의 아이폰으로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원주민 농부의 자녀들은 반대편에서 그들을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신부가 입을 열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님들, 우리가 오늘 이곳에 모인 것은 미개한 에보 모랄레스를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세 형제와 함께 이곳에서 20km 떨어진 베를린 대농장으로 떠났다. 농지면적은 1,200만㎡였다. 커다란 정자로 둘러싸인 식민지 시대풍의 웅장한 저택에서 농장주 오스카르 마리오 후스티니아노가 우리와 또 다른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자치주의 행사에 참석했던 사람도 15명 정도 있었다. 이 소모임은 어린 시절부터 지속됐다. 이들은 후스티니아노, 툴리오와 ‘라 사예 데 산타크루스(La Salle de Santa Cruz)’ 학교를 함께 다닌 동창들이다. 그들 중 한 명이 설명했다. “엘리트 가정 자녀들이 다니는 이 사립 종교학교로, 마을에서 가장 좋은 학교인데 학비도 가장 비싸다. 그들은 재산을 늘릴 줄 알았고, 특히 목재와 축산업에 대거 투자했다.”
후스티니아노의 종업원들이 새끼양 한 마리와 돼지 두 마리를 꼬챙이에 꿰어 굽고 있었다. 종업원이 우리에게 시원한 음료수를 가져다줬다. 축제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우리는 식사를 하며 설명을 들었다. “프랑스는 대규모 군사와 핵무기를 가진 강대국이다. 이처럼 군사력이 있어야 선진국이라 할 수 있다.” 그러자 다른 한 명이 말했다. “산타크루스도 프랑스만큼 강하고 부유하다. 우리가 프랑스만한 군사력만 갖췄어도 야만적인 원주민의 침략을 물리칠 수 있었을 것이다.”
식사를 끝내고 해먹에 누워 쉬는 사람도 있었고, 맥주를 마시는 사람도 있었다. 우리는 매년 10월 9일 열리는 이 소모임이 산타크루스 지역에서 체 게바라가 암살당한 사건을 기념하는 것이며, 모임에 참석하는 이들은 모든 공산주의자가 이처럼 불행한 운명을 맞이하길 바란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공산주의는 곧 세금이기 때문이다. 모랄레스 정권 시절에 산타크루스인들은 ‘부당 징세’의 피해자였다고 파블로 멘디에타 오시오 산타크루스 관광·서비스·상공회의소장은 말했다. “볼리비아는 세금 자체가 매우 낮기 때문에 세율이 문제라기보다는 몇 년 전부터 통제가 강화되면서 세무 관련 실수가 잦아졌고 그만큼 벌금이 늘어난 게 문제였다. 그 결과 기업들은 과도하게 쌓인 부채를 상환하려다 위태로운 처지에 놓였다.”
반세르 수아레스 장군은 정권을 잡은 즉시 ‘조세사면’이란 관례를 도입했다. 신임 대통령이 선출되면 엘리트의 부채를 탕감해준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모랄레스 대통령이 취임했을 당시 이런 관행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날 수많은 재력가가 수백만 달러의 부채를 지게 됐다. 그러나 2019년 11월 쿠데타로 ‘과도 정부’를 이끌게 된 자니네 아녜스는 호세 루이스 파라다 재무장관이 발표한 것처럼 질서를 재정비하고, ‘이전 정부가 시행하던 부당 징세를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새로운 사면법을 준비 중인데 일각에서는 이런 법 개정은 과도정부 소관이 아니라는 비판도 일고 있다.
“돈이 없어도 헌금은 해야 한다”
오늘은 미사가 있는 날이다. 성당 앞에 길게 늘어선 SUV 차량들이 신도들의 부유함을 여실히 보여준다. 미사 시작 전에 대기하는 넓은 안뜰에서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풍기는 사람들을 만났다. 여자들은 하이힐을 신었고, 남자들은 근육질 몸매에 들러붙는 브랜드 셔츠를 입었고, 청년들은 청바지에 최신상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대강당으로 들어서자 찬양과 함께 미사가 시작됐다. 드럼 연주자, 베이스기타 연주자, 기타 연주자 3명, 키보드 연주자, 찬양 인도자가 성가를 시작하자, 성도들도 따라 불렀다. 벽에 걸린 거대한 스크린 두 대에 일출, 불꽃, 별밤 등의 배경을 깔고 가사를 띄웠다.
한쪽에서는 기술자가 음악에 맞춰 형형색색 조명을 움직였다. 찬양팀 리더는 노래를 부르다가 레드불(에너지 드링크)을 마시며 기운을 차렸다. 그리고는 갑자기 주문을 외우는 듯한 소리를 냈다. 성도들도 팔을 높이 들고 더욱 큰 목소리로 노래했다. 그들은 무릎을 꿇고 눈을 감은 채 눈물을 흘렸다. 이때 40대로 보이는 신부가 설교문이 저장된 아이패드를 팔에 낀 ‘트렌디’한 모습으로 등장했다. 미사가 끝나자 신부는 신도들에게 ‘하느님께 감사하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돈이 많지 않을지라도 헌금해야 한다. 하느님을 경배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러자 순식간에 강단에 놓인 기타 케이스가 고액지폐로 가득 찼다. 신부는 자신의 페이스북 페이지에 성당 홍보를 했고, ‘환상적인’ 크리스천 록 콘서트에 많은 스타가 초대됐다고 올렸다. 성당의 젊은 여신도들의 모습을 합성한 사진에 ‘자매님들은 아름다워요. 우리와 함께 해요!’라는 문구가 있다. ‘초자연적인 하느님의 능력으로 악에서 해방됐다’는 카마초와 신부가 함께 찍은 사진도 보인다.
글·마엘 마리에트 Maëlle Mariette
특파원
번역·이보미 lee_bomi@hotmail.com
번역위원
(1) Renaud Lambert, ‘En Bolivie, un coup d’État trop facile 볼리비아, 너무 쉬운 쿠데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19년 1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