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자본주의’라는 양날의 칼
에드워드 윌슨의 유전학적 환원주의 이론인 <통섭>이 번역된 뒤, 한국의 학계와 비평계에서 ‘인지과학’은 첨단의 유행을 초래한 바 있다. 통섭, 융합, 학제 간 연구를 둘러싼 담론의 폭발을 전후로 돌연 ‘뇌과학’을 둘러싼 다채로운 담론과 서적이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
자본주의와 사회적 삶의 재구성
인지과학의 서막을 연 것은 <종의 기원>과 <인간의 유래>를 통해 종래의 신학적 인간중심주의를 근본적으로 회의한 찰스 다윈이었다고 볼 수 있다. 다윈은 ‘자연선택’과 ‘성선택’이라는 두 가지 무기로, 인간을 포함한 생명 그물망의 진화 원리를 규명했다고 알려졌지만, 그가 제기한 문제는 실로 심원한 이론적 뇌관을 내부에 간직한 것이었다.
그는 인간과 생명의 본질을 해명하는 과정에서, 인간만이 고유한 이성과 정념을 지닌 존재가 아니라, 실제로는 이 생명계 전체가 그 특성을 견지한다고 간주했고, 그런데도 인간이 오늘의 형태로 진화한 것은 고도의 상징체계라고 할 수 있는 언어의 발명을 통한 문명화의 계승과 축적 능력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문명화 과정이 단지 인간의 탁월한 이성에만 힘입었던 것은 아니다. 진화 과정에서 적응과 생존, 그리고 번식에 성공한 종들의 주체적인 선택도 중요하겠지만, 궁극적으로 선택의 거대 주체는 설명할 수 없는 자연에 있었다. 성선택 역시 결과론적으로는 합리적 외양을 띠지만, 그 선택 과정에서 납득할 수 없는 자동화된 정념의 발산은 신비로운 것이다. 한마디로 ‘마음의 문명화’로 정리할 수 있다.
이 복잡한 마음을 둘러싼 통치·생산·주체 양식의 거대한 전환을 자본주의와 사회적 삶의 재구성을 중심으로 분석한 것이 조정환의 <인지자본주의>다. 조정환이 ‘인지’로 간주하는 새로운 자본주의의 메커니즘은 쉽게 말하면, 오늘의 자본주의가 단지 이성과 정념으로만 설명할 수 없는 사람의 ‘마음’을 완벽하게 장악하려는 단계로까지 진화하고 있다는 견지에서 제출되는 견해인 듯하다. 물론 그 마음은 몸과 분리된 정신을 의미하지 않고, 신체와 정신이 치밀한 복합체로 연결된 ‘체화된 인지’를 의미할 것이다.
조정환의 관점에 따르면, 인지자본주의가 특징적인 것은 문화와 이데올로기같이 과거에는 상부 구조로 간주된 개념이 토대로 전위되며, 자본 작동 원리가 인간의 정념과 정동에 대한 전면적 지배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산업자본주의의 토대를 이루었던 생산력주의와 성장주의는 초시간적 시간의 낙차를 활용한 금융자본주의로 전환되며, 노동 형태 역시 대공장에서의 육체노동에서 비물질 인지노동으로 급격히 바뀌어간다. 인지자본주의는 동시에 정보화 생산양식을 일반화하면서, 종래의 지식노동이나 예술노동 같은 노동과 인지의 적극적 결합 형태를 사회의 거의 모든 직업군으로 확대시킨다.
상부구조는 이제 토대가 되었다
통치양식으로서 민주주의의 문제 역시 인지자본주의의 변화 과정에서 주요한 고찰 대상이 된다. 종래의 부르주아적 통치양식이 대의제를 통한 헤게모니적 통치와 비상상황에서 무력에 의한 치안적 통치 형태를 보여주는 것은 이 시기에도 구조적으로는 동일하다. 그러나 다중의 지적·인지적 역량이 집단적으로 강화됨에 따라 치안적 통치양식에 대항하는 구성주의적 저항과 민주주의의 실질과 다중의 자기지배 역량을 고양하려는 절대민주주의의 요구 역시 급격히 증대한다는 것이 조정환의 생각이다.
이것은 <제국>에서 네그리와 하트가 제기한 제국적 통치양식에 대항하는 다중의 혁명적 저항 영역이 전 지구적으로 확산되는 것과 동시에 저항양식 역시 다변화되고 대의제를 지양하려는 운동이 절대민주주의 형식을 띠고 나타나게 된다는 점에서, 그가 여전히 혁명의 잠재성에 대한 희망을 뚜렷하게 견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최근 중동과 북아프리카의 민주화 항쟁에서도 발견되는 것처럼, 오늘날 자본주의는 신자유주의의 세계화에 따른 노동영역에서의 광범위한 배제를 통해서만 자본 재생산을 꾀할 수 있을 정도로 악화됐다. 그러면서도 자본은 유효수요를 창출해야 한다는 역설에 직면하는데, 이런 역설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는 제로성장의 그늘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불가피하게 아니 필연적으로 자본에 대항하는 다중의 저항을 초래하게 되고, 배제된 자들의 접합적 연대와 실천을 요구하는 사태로 발전하며, 조울증적 자본 운동에 대항하는 다중의 집합적 역능을 강화할 수밖에 없는 방식으로 이행하게 된다. 그러나 인지자본주의로의 구조적 전환 속에서, 종래의 산업주의적 노동자 의식 역시 재고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조정환의 시각이다. 오늘날 한국에서도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을 둘러싼 갈등 상황에서 확인할 수 있는 바대로, 산업화 시기에 강력한 세력을 형성한 노동운동은 노동시장에서의 배제에 대한 공포와 노동자 간 연대성 상실과 함께, 소외된 노동 자체를 물신화하는 경향이 더욱 강화되고 있다.
이는 이제 노동운동이 자본주의를 근본적으로 저항 대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자본의 하위 파트너로 전환되는 징후를 보여준다. 따라서 운동에서 연대와 리더십 형성 모두의 실패를 보여주는 사례로 지적된다. 산업화 시기 자본주의의 성장 방식이란 광범위한 ‘산업노동자’를 근거로 한 저임 노동력과 비용의 외부화를 통한 생태자원 착취를 기반으로 이루어졌다. 그런데 오늘의 자본주의는 더 이상 ‘산업예비군’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실물 생산의 수요 공급에 기반하지 않는 기호화된 금융 시스템이 전면화하고, 자동화와 기계화, 정보화의 인지적 생산양식이 확대됨으로써 ‘인간 없는 노동’이라는 자본의 이상을 더욱 급진적으로 초래하고 있다.
자본주의의 불능과 그악함 앞에서
희망이 있다면 인지자본주의의 구조적 경향 속에서, 다중의 인지적 역량 역시 대항적으로 강화되고 있는 것이다. 인지적 역량 관점에서 보면, 오늘날 다중의 잠재적 역량은 평등하다. 한국의 촛불항쟁이나 중동의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지식정보 커뮤니케이션 수단의 발전은 통치 영역에서는 물론 저항 영역에서조차 위계화되고 차별적으로 배분된 권력의 분산과 해체를 더욱 촉진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인지자본주의는 과거 산업자본주의가 그러했듯, 양날의 칼이다. 그것은 오늘날 자본주의가 인간의 신체와 마음 모두를 전면적으로 포섭하고 장악하는 단계에 이르렀다는 점에서 디스토피아적이지만, 거꾸로 그것을 거스르는 저항과 연대의 형식과 장소 역시 더욱 확대되고 있다는 점에서 포기할 수 없는 혁명적 희망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역시 중요한 것은 이렇게 변화된 자본주의 상황에서 조정환이 다중으로 일컫는 집합적 주체가 어떻게 스스로 역량을 고양하고, 그가 말한 것처럼 ‘공통되기’의 활력을 회복하는 주체를 집단적으로 형성할 수 있는지의 문제다.
글 · 이명원
저서로 <타는 혀> <연옥에서 고고학자처럼> <시장권력과 인문정신> <말과 사람>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