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국에서 잊힌 범아프리카주의자, 월터 로드니

2020-08-31     엘렌 페라리니 |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특파원

1980년 남미 가이아나의 수도 조지타운, 집권당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암살된 월터 로드니의 장례식에는 무려 3만 5,000명이 운집했다. 그러나 40년이 지난 뒤에 방문한 가이아나에는 월터 로드니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마르크스주의자이자 역사학자였던 월터 로드니는 민족 간 대립이 아닌 계급적 연대성을 바탕으로 가이아나의 정치를 개혁하고자 했다.

 

“오, 저것 좀 보세요!” 우리의 가방을 뒤지던 세관원이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우리는 가이아나의 수도 조지타운에 위치한 조지타운 국제공항을 통해 출국을 하려던 참이었다. X선이 우리의 가방 속에서 직사각형 형태의 무언가를 발견해냈다. 금속탐지기 앞에 앉아 있던 공무원의 눈에 그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코카인 봉지였다. 남미 지역에서 유럽으로 마약을 운반하는 흔한 수법 중 하나였다. 

하지만 정작 세관원이 가방 속에서 마주한 것은 하얀 가루가 든 봉지가 아니라 두꺼운 검은 안경테 속 월터 로드니의 날카로운 눈빛이었다. 아프리카인 특유의 곱슬머리에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월터 로드니의 흑백 초상화가 표지에 새겨진, 가이아나 출신의 역사학자 월터 로드니의 첫 자서전이었다. 직사각형의 책더미 중에는 프랑스어로 쓰인 로드니의 책도 있었다. 세관원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당신들이 어떻게 월터 로드니를 알지요? 여기서는 이제 아무도 그에게 관심을 갖지 않아요.” 사실 우리는 그와 다른 반응을 기대하면서 며칠 전 조지타운에 도착했다.

 

“월터 로드니? 월터 로스 말씀인가요?”

가이아나의 수도 조지타운은 해수면보다 낮은 곳에 위치해 있다. 엄청난 규모의 배수 작업을 거쳐 습지 위에 세워진 도시다. 75만 가이아나 국민의 90%가 거주하는 카리브해 연안 지역을 따라 길게 뻗어 있는 해안 도로를 달리다 보면 영어, 네덜란드어, 프랑스어 등 다양한 언어의 지명이 표기된 표지판들에 모두 펩시 마크가 새겨진 것이 눈에 띈다. 

17세기 이후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경쟁적인 식민지화 작업에서 살아남은 남미 대륙의 유일한 땅은 바로 뱃사람들이 ‘와일드 코스트(Wild Coast)’라고 부르던 기아나 고지 뿐이었다. 유럽인들이 16세기 내내 오가던 아마존강과 오리노코 강 사이 맹그로브 숲에 위치한 기아나 고지는, 그들이 아메리카 인디언들과 교섭하기 위해 잠시 들르는 지역에 불과했다. 유럽 열강은 17세기부터 이 지역을 본격적으로 식민지화하기 시작해 2세기에 걸친 전쟁 끝에 프랑스가 동부(기아나)를, 네덜란드가 중부(수리남)를, 영국이 서부(가이아나)를 차지하게 됐다.

시내에 도착하자 펩시 로고는 사라졌다. 그러나 민간 그룹이 표지판 설치를 지원하는 구조는 여전했다. 조지타운 시내에서 사람들에게 길을 안내하는 것은 통신업체인 디지셀(Digicel)이었다. 디지셀의 로고는 모든 도로 교차 지점에서 아스팔트 도로와 도로 가장자리의 수로 사이에 설치된 표지판에서 볼 수 있었다. 도시 곳곳으로 연결된 이 수로에는 검은 물이 흐르고 있었다. 

우리의 첫 번째 목적지는 국립도서관이었다. 조지타운 거주민들이 조용한 휴식을 즐기는 장소로, 20세기 초에 기업인이자 자선 사업가였던 앤드류 카네기의 지원으로 지어진 웅장한 규모의 목조 건물이다. 서고에는 로드니의 책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서랍 속에서 발견한 저자 색인에는 도서관 내에 로드니의 저서가 분명히 있는 것으로 나왔다. “저자는 가이아나 국민이다” 타자기로 쓰인 빛바랜 문장이 사실을 단순명료하게 알려주고 있었다. 도서관 소장고에서 로드니의 책 몇 권이 조회됐지만 찾을 수 없는 것들도 있었다. 

“혹시 월터 로스(Walter Roth)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우리와 이야기를 나누던 사서가 되묻기도 했다. 사실 우리가 가이아나에 머무는 동안 월터 로드니의 이름을 헷갈린 사람은 한둘이 아니었다. 사서가 말한 월터 로스는 영국 출신의 식민 행정가로 조지타운 시내에 자신의 이름을 딴 인류학 박물관을 세운 인물이다.

우리는 조지타운의 유일한 서점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로드니의 저서 두 권이, 가이아나 국민 평균 일당보다 더 많은 금액의 가격으로 잠재적 구매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이아나의 인간개발지수는 남미에서 가장 낮은 수준이고 카리브해 국가 중에는 아이티 다음으로 낮다. (가이아나의 경우 남미 대륙에 위치한다는 지리학적 조건보다는 과거 영국의 식민지였고 따라서 국어가 영어라는 사실이 국가 정체성에 더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2017년 조사에 의하면 가이아나 국민의 41%가 빈곤한계선을 밑도는 1일 5.5달러(4.9유로)로 생활하고 있다.(1)

 

3만 5,000여 명의 조문객, 잊혀진 무덤

우리는 사전에 로드니의 지인으로부터 설명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지타운 시내의 주요 도로 두 개 사이에 위치한 르 르팡티르(Le Repentir) 묘지에서 로드니의 무덤을 찾지 못해 한참을 헤맸다. 묘지 안의 길을 걷다가 한 남자가 종려나무 울타리 사이에 쪼그려 앉은 채 나뭇가지로 무언가를 만들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월터 로드니라는 이름을 알지 못했다. “무덤의 색깔을 알아야 찾을 수 있을 겁니다.” 그가 퉁명스럽게 조언했다. 각 무덤 주인의 이름은 진흙이 가득한 수로 위로 삐져나와 있는 나무판자 위에 표기돼 있었지만, 대부분은 수풀에 뒤덮여 잘 보이지 않았고, 결국 우리는 월터 로드니의 무덤을 찾는데 실패했다.

1980년 월터 로드니가 세상을 떠난 지 이제 40년밖에 되지 않았는데 그는 왜 이렇게 빨리 잊힌 걸까? 가이아나 대학교 샤를렌 윌킨슨 교수는 그 이유를 이렇게 추측했다. “아마도 사람들이 자유의 의미와 가치를 알게 해 준 모든 것들을 잊어버렸기 때문이 아닐까요?” 월터 로드니의 죽음을 기점으로 가이아나는 과거의 역사와 완전히 등을 돌렸다는 것이다. 

월터 로드니는 1942년 아프리카의 한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자메이카에서 유학한 뒤 런던으로 건너간 그는 지식인이었던 C.L.R. 제임스를 만났다.(2) 그 후 노예 제도의 역사에 관심을 갖게 돼 서아프리카의 흑인 노예무역을 주제로 논문을 썼다.(3) 영국과 북미 지역의 권위 있는 기관보다는 갓 독립한 국가의 신설 대학에서 일하기를 원했던 로드니는 후에 자메이카와 동아프리카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줄리어스 니에레레가 통치하던 사회주의 탄자니아에 머물 당시 로드니는 “식민 지배에서 해방된 아프리카를 위한 사회학을 부흥시키고자 했다”고 베냉의 역사학자 암자트 부카리-야바라는 설명했다.(4) 로드니는 지식이 대학의 테두리를 벗어나 ‘라스타파리 운동’이 일어난 자메이카 킹스턴의 빈민촌과 토착어인 스와힐리어를 쓰는 탄자니아 마을에까지 전달되기를 바랐다. 1974년에 로드니는 가이아나로 돌아가 정계에 입문해 고국의 비정상적인 정치적 갈등 상황을 해결하려고 노력했다.

200여 년 동안 아프리카 노예무역은 가이아나 아메리카 인디언의 땅에 정착한 유럽인들에게 노동력을 제공했다. 1838년 노예 제도가 폐지되자 자유의 몸이 된 노예들은 대부분 사탕수수 농장을 버리고 떠났다. 각종 규제에도 불구하고 해방된 노예 중 일부는 공동으로 땅을 매입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노예나 다름없는 불공정한 계약을 맺고 농장으로 유입된 포르투갈 마데르 섬, 중국, 인도 출신의 노동자들이 과거 아프리카 노예들의 역할을 대신하기 시작했다.

수만 명의 인도인이 가이아나로 오게 되면서 과거 아프리카 노예들의 임금 협상력이 크게 약화됐고, 이는 가이아나 인구를 구성하는 2개 주요 집단 간의 대립이 본격화되는 계기가 됐다. “두 개의 인구집단은 경제적 경쟁에 돌입했다.” 월터 로드니는 그의 사후에 출간된(미완성본으로 남아있던) 가이아나 민중사 제1권에 이렇게 기록했다.(5) 그는 경제 분야에서의 민족적 갈등이, 식민지 시대에 만들어진 규제들로 인해 고착화됐다고 설명했다. 사탕수수 농장 노동자의 다수를 차지하던 인도인들은 점차 쌀을 생산하는 소규모 농민으로 변모했다. 아프리카 흑인의 대부분은 금이나 다이아몬드, 보크사이트를 채굴하는 광산 노동자가 되거나, 도시에서 일자리를 찾았다.

1950년대 초에 일어난 민족주의 운동은 독립을 앞세워 가이아나의 노동자 계급을 결집시키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가이아나가 독립한지 8년 뒤인 1974년에 로드니가 귀국했을 때 해묵은 민족적 갈등은 이미 정계에까지 퍼져 있었다. 한 쪽은 체디 제이건의 필두로 독립투쟁을 주도한 인민진보당(PPP, People's Progressive Party)이었다. 체디 제이건은 냉전 시대에 마르크스주의자로 활동한 인도계 정치인이었다. 다른 한 쪽은 포브스 버넘이 이끄는 인민민족회의(PNC, People's National Congress)였는데, PNC는 사회주의를 표방했지만, 실상은 미국의 지원을 등에 업고 있었다. 아프리카 흑인이 주요 지지층이었고 부정선거를 통해 권력을 유지했다. 이에 로드니는 “정치의식 수준을 높이고 민족 간 대립이 아닌 계급적 연대성을 바탕으로 하는 개혁조직”을 목표로 노동자연합(WPA, Working Pepole Alliance)을 설립했다.(6) 

그로부터 6년 후, 로드니는 당시 집권당이었던 PNC가 계획한 폭발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그의 장례식에는 카리브해 국가들의 지식인과 정치인, 노조 운동가, 노동자, 학생 등 3만 5,000여 명이 참여했다. 조지타운에는 폭발사고 현장에서 몇 미터 거리에 기념관이 세워졌다. 빨강·노랑·초록(가이아나의 상징색)으로 줄기가 칠해진 야자나무들 사이로 아치 모양의 철문이 보였다. 철문의 위쪽에는 월터 앤서니 로드니(Walter Anthony Rodney)의 이니셜 W.A.R.이 쓰여 있고 아래쪽에는 월터 로드니의 저서 8권의 제목과 출간일이 새겨져 있었다.

 

한 시대의 역사, 두 개의 상반된 시각

영국의 사회학자 스티브 가너에 의하면, 가이아나의 두 정당 PPP와 PNC는 오랜 대립 관계에도 불구하고 “소규모 정당들에게 그들이 추구하는 목표는 주요 정당으로 흡수됐을 때 실현될 가능성이 더 높다는 사실을 설득시켜야 한다”는데 뜻을 같이 했다.(7) 조지타운에 위치한 두 박물관을 방문해보면 가이아나의 역사를 바라보는 두 정당의 시각 차이를 즉각적으로 느낄 수가 있다. 포르말린 냄새, 왁스로 칠한 바닥, 호기심을 자극하는 국립 박물관의 역사 섹션은 버넘과 PNC가 이끈 ‘1970년대의 눈부신 성장’에 초점을 맞춘다. 

반면 식민지 시대에 지어진 페르시아 양식의 빨간 지붕 건물 안에 자리한 체디 제이건 센터는 PPP를 창당한 체디 제이건의 정치적 여정, 독립투쟁에서의 활약, 야당에 머문 30년, 그리고 체디 제이건이 1964년 이래 최초로 국제 감시단으로부터 인정받은 공정선거를 통해 대통령에 당선된 과정을 전시한다. 또한 공공 기관인 국립 박물관에서는 1964년 버넘의 집권이 ‘헌법 개혁’의 성공 덕분이라고 소개한다. 반면, 정계와 가까운 민간기관이 운영하는 체디 제이건 센터에는 미 의회의 문서가 액자에 전시돼 있다. ‘미국 정부가 체디 제이건 정부를 불안정하게 만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가이아나의 현대사를 상반된 두 개의 시각으로 다룬 두 박물관은 가이아나 국민들, 특히 전시장 안을 뛰어다니는 유니폼 차림의 학생들이 주요 방문객이다. 적도 우림이나 내륙에 위치한 아메리카 인디언 마을로 가는 길에 조지타운에 잠깐 들러 박물관을 둘러보는 해외 관광객들도 드물게 있다. 그러나 두 박물관 중 어느 곳에도 로드니의 흔적은 없었다. 아무래도 이 지식인은 고국인 가이아나보다 해외에서 훨씬 더 유명한 듯하다. 로드니의 업적은 약 80만에 달하는 가이아나의 인구 중 상당수가 이주해 살고 있는 세계 곳곳 영미권 국가들의 대학과정에서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다. 

비단 월터 로드니의 저서뿐만 아니라, 역사적 이해와 정치적 활동이 똑같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지식인, 범아프리카주의자, 반식민주의자, 마르크스주의자였던 월터 로드니의 삶 자체도 연구 대상이다. “지식의 궁극적인 의미는 사회를 바꾸는 힘에 있다고 믿었던 진정한 지식인 월터 로드니와 같은 빛나는 본보기가 우리에게는 필요합니다.” 『How Europe underdeveloped Africa 유럽은 아프리카를 어떻게 후진화했나』의 개정판 서문을 쓴 앤젤라 데이비스는 최근 이렇게 썼다.(8)

“로드니에 대한 연구가 중단됐다는 사실이 부끄럽습니다. 가이아나 출신의 사회학자 와지르 모하메드가 한탄했다. 가이아나의 역사를 배우려면 일단 학교에서는 불가능하다. 가이아나에는 역사 수업을 들을 수 있는 학생도 거의 없을뿐더러, 설령 역사 수업을 듣는다 해도 대부분은 카리브 제도의 역사만을 공부할 뿐이다. 중학교 교과서에 가이아나에 관한 내용은 몇 줄밖에 나오지 않고 그나마 월터 로드니는 등장하지도 않는다.(9) 

“고교 졸업생 중에서도, 역사수업을 이수한 학생은 극히 일부에 불과합니다.” 조지타운에 있는 가이아나 대학교의 샤만 조세프 교수가 말했다. 그녀는 영국의 한 대학에서 국제관계학 석사과정을 밟던 당시, 해외에서는 월터 로드니를 높이 평가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반면, 정작 로드니의 모국 가이아나에서는 그에 대한 무관심과 몰이해가 넘쳤다. “영국에서, 수업시간 일주일 내내 월터 로드니의 글과 사상을 다룬 적이 있습니다. 시선이 제게 집중됐지요. 제가 가이아나 출신이니 로드니에 대해 많이 알고 있을 거라 생각했던 거지요.” 

월터 로드니를 향한 상반된 시선은 아직도 그녀에게 숙제로 남아있다. 우리는 샤만 조세프의 교수실에서 대화를 나눴다. 그녀의 앞에는 학부에서 역사 전공생들의 책상이 놓여있었는데, 마치 교실이 마치 작은 강의실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그 학생들 전원이 들어와도 공간은 여유로웠다. 역사를 전공으로 선택한 학생은 3명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글·엘렌 페라리니 Hélène Ferrarini
기자.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와 <리베라시옹> 등의 매체에 기고하고 있다.

번역·김소연 dec2323@gmail.com
번역위원


(1) 가이아나 통계청
(2) Matthieu Renault, ‘Le nègre docile est un mythe(한국어 제목: ‘이단적 지식인’ 로버트 제임스의 흑인 해방 투쟁’,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15년 1월호, 한국어판 2015년 3월호
(3) Walter Rodney, A study of the Upper Guinea Coast, Oxford University Press, 1970.
(4) Amzat Boukari-Yabara, Walter Rodney, un historien engagé 월터 로드니, 현실에 참여한 역사학자 (1942-1980), Présence africaine, Paris, 2018년
(5) Walter Rodney, A History of the Guyanese Working People, 1881-1905,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Baltimore, 1981.
(6) Steve Garner, Ethnicity, Class and Gender : Guyana 1838-1985, Ian Randle Publishers, Kingston, 2008.
(7) Steve Garner, <Politics and ethnicity in the Guianas>, Rosemarijn Hoefte, Matthew L. Bishop & Peter Clegg, Post-Colonial Trajectories in the Caribbean : The Three Guianas, The International Political Economy of New Regionalisms Series, Routledge, London, 2017.
(8) Walter  Rodney, How Europe underdeveloped Africa, Angela Davis 서문, Verso, London & New York (2018년 개정판).
(9) Kevin Baldeosingh & Radica Mahase, Caribbean History for CSEC, Oxford University Press,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