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포터즈 칼럼] 혐오를 혐오하는 사람들
얼마 전, 해리포터 시리즈를 쓴 작가 조앤 롤링이 올린 글이 화두에 올랐다. '여성'이라는 단어를 대신해 '월경하는 사람'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글을 리포스팅하며 덧붙인 "월경하는 사람을 부르는 말이 있었는데"라는 말이 질타를 받으 것이다. 이 발언이 논란이 된 이유는 트랜스젠더의 존재를 부정하는 뉘앙스를 띄었기 때문이다. 조앤 롤링의 성기중심적 사고는 일부의 성 소수자들을 향한 혐오라는 질타를 받았고, 트랜스젠더 여성(MTF, Male to Female)의 삶을 그린 영화 <대니쉬 걸>에 출영한 에디 레드메인과 해리포터의 주인공이었던 배우 다니엘 래드클리프까지 트랜스젠더 여성도 여성이라는 성명문을 발표하며 조앤 롤링의 발언에 반박했다. 한 유명 기업은 공식 계정에 조앤 롤링을 직접 태그하여 책이나 읽고 오라는 식의 글을 올려 논란이 되기도 했다. 성 소수자들을 대표하는 단어였던 LGBT는 그 범위를 넓혀 동성애자, 양성애자, 트랜스젠더에 더해 퀴어, 간성, 에이섹슈얼 그리고 이외의 그룹까지 포괄하는 LGBTQIA+라는 개념으로 확장되었다. 이렇듯 변화하는 성 관념의 흐름 속에서 개인을 단순히 생물학적 성을 기준으로 정의내리는 것은 그 존재를 지우는 행위이자 낡고 보수적인 사고방식이 되었다.
그렇다면 조앤 롤링은 성 소수자들을 향한 혐오 발언(Hate Speech)을 한 것인가? 그에 대한 답을 내리기 전에 조앤 롤링의 주장이 무엇에 기저하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갈등은 성을 정의하는 근본적인 방식이 변화함에 따라 일어나고 있다. 조앤 롤링의 발언은 다양한 페미니즘 종파 중에서도 트랜스젠더를 배제하는 터프(TERF, trans-exclusionary radical feminist)와 일치한 주장을 띠고 있다. 터프는 사회적으로 이상화된 여성상으로 인한 억압을 타파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기 때문에 트랜스젠더 혹은 논바이너리와 같은 새로운 형태의 성 정체성과 양립할 수 없다. 실례로 국내에서 일어난 '탈코르셋' 운동을 들어보자. 여기서 '코르셋'은 긴 머리, 치마, 화장 등 보편적으로 정의된 여성성의 상징 요소들을 통칭하는 표현이다. 그리고 이러한 '코르셋'을 이행하도록 강요당하는 일을 '꾸밈 노동'이라 부른다. 이처럼 사회적 성(Gender)을 벗어나려 하기 때문에 자연스레 생물학적 성(Sex)을 성별을 나누는 기준으로 삼는다. 반면 트랜스젠더의 존재를 인정하기 위해서는 성기중심적인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 트랜스젠더뿐만 아니라, 생물학적 성과 사회적 성이 일치한 시스젠더(cisgender)를 제외한 대부분의 성 정체성은 생물학적 성에 기반한 정의를 부정한다.
정의의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의 차이를 알 수 있는 대표적인 예로 부치(Butch)가 있다. 생물학적 성은 여성이지만 남성스러운 취향과 행동을 가진 사람을 부치라 부르며, 터프의 시각에서 부치는 그저 사회적 여성상을 벗어나 스스로 원하는 모습을 한 생물학적 여성일 뿐이다. 사회에서 정의한 전형적인 남성성이나 여성성은 허구의 것이며, 이는 어느 성별이든 관계없이 자유로이 취할 수 있기에 굳이 여성과 남성이 아닌 또다른 개념으로 표현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생물학적 성이 의미가 없다면 동성애자나 양성애자라는 개념도 무의미해질테고, 이는 결국 그들의 성 정체성과 존재를 부정하게 된다는 이유에서도 터프에게는 성립할 수 없는 개념이다. 이러한 딜레마의 또다른 예로는 드랙 퀸(Drag Queen)이 자주 언급되지만, 생물학적 남성이 사회적 여성성을 흉내내는 것을 드랙 퀸이라 부르던 과거와는 달리 지금은 남자냐 여자냐 정의를 따지는 자체가 촌스러운 일이다. 이러한 맥락을 생각해보면, 방향은 다를지언정 터프와 트랜스젠더 그리고 이외의 성 정체성을 가진 이들이 타파하고자 하는 대상은 동일하다. 자신들을 향한 고착화된 정의 그리고 혐오에 저항한다. 즉 '나'를 향한 정의에는 정답이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제가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를 이해와 공감의 차이에서 생각해보았다. 예컨대, 터프와 트랜스젠더는 서로의 주장을 이해할 수 있지만 공감은 할 수 없다. 그들의 상황 그리고 겪어온 삶이 다르기에 그 과정의 고충과 감정을 자신의 경험에 빗대어 어림짐작할 순 있으나, 완전히 동일하게 느낄 순 없기 때문이다. 그 어떤 개인, 공동체 간에도 완벽한 공감을 이루어내기란 어렵다. 하지만 나는 터프와 트랜스젠더 혹은 또다른 형태의 성 정체성이 그들을 규정하는 차별로 이어지는 혐오에 저항한다는 점, 그리고 때로는 자신을 향한 조롱과 핍박을 견뎌내야 한다는 점에서 서로에게 공감하고 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강간당해 집안의 명예를 실추시켰다며 살해당하는 여성, 성 소수자라는 이유만으로 돌팔매질 맞아 죽은 사람들. 사회에서 요구되는 모습을 벗어나 원하는 자신을 찾는 게 유난스럽고 별난 일이 되고 손가락질 받는 상황 속에서 그들이 어떤 집단에 있건 혹은 어떤 성 정체성을 가지건 그저 자신을 향한 혐오를 혐오할 뿐이다.
조앤 롤링을 향한 거세진 질타는 협박과 위협으로 이어졌고, 그는 생물학적 여성으로 겪어야 했던 가정폭력 그리고 성폭행을 고백하기까지 했다. 조앤 롤링은 자신의 입장문에서 트랜스젠더 또는 취약한 존재라고 생각하기에 그들이 안전하기를 원하는 동시에 생물학적 여성들을 덜 안전하게 만들고 싶지 않다고 덧붙였다. 또한 터프라는 정의에 대한 의구심을 제기하기도 했다. 수많은 개인을 하나의 정의로 나타나기엔 주장과 그 주장의 근거가 되는 경험이 제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이와 별개로 같은 시기 미국에서는 트럼프 정부가 생물학적 성만 성별의 기준으로 인정하겠다고 공표함에 따라 사실상 트랜스젠더의 의료 보호를 줄이고 제한하려 했다. 여러 사회적 약자들을 향한 차별 발언을 스스럼없이 이어온 트럼프 대통령은 여전히 미국의 강경 우파들의 지지에 힘입어 재선에 도전한다.
유리가 진정 맞서야 할 대상은 무엇인가? 글을 쓰면서 개인과 집단을 정의하는 방식에 있어 정답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서로 다른 정의를 믿는다 해도 혐오를 혐오하는 사람으로서 공감할 수 있는 접점이 분명 존재할 것이다. 그러한 공감대를 찾는 일에 힘을 보태고 함께 연대할 수 있는 사회를 이룩하는 것. 그것을 목표로 함께 나아가길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