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가 쥔 자유무역이라는 폭탄
세계 최대 규모의 무역협정
모두의 바람과는 반대로 중-미 대립에 있어서 휴전이란 없을 듯 하다. 아시아 14개국이 역사상 전례없는 대규모의 경제동반자 협정을 체결하면서 중국은 미국을 한 발 앞서게 됐다. 이는 경제적인 여파 뿐만 아니라, 아시아가 서로 다른 정치적, 전략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한데 뭉칠줄 아는 힘을 갖췄다는 인상을 준다.
동남아시아 국가연합 즉, 아세안(ASEAN)을 두고 혹자는 분열돼 있으며, 비효율적이고 존재감이 없다고들 말한다. 10개국(미얀마, 브루나이, 캄보디아, 인도네시아, 라오스, 말레이시아, 필리핀, 싱가포르, 태국, 베트남)의 연합으로서 그 인구수가 6억 5,200만 명에 육박함에도, 아세안은 국제사회의 레이더망을 벗어난 지역공동체였다. 37회 정상회담이 지난 11월 12일 하노이에서 개최됐으나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사흘 후, 마침내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사건이 터졌다. 역내 포괄적 경제동반자 협정(Regional Comprehensive Economic Partnership, 이하 ‘RCEP’)이라는 자유무역 협정이 아세안 회원국과 호주, 중국, 한국, 일본, 뉴질랜드 사이에 체결된 것이다. 외국으로 이전한 생산설비를 국내로 다시 들여오고 생산물은 ‘지역사회 내에서 소비’하며 자국시장을 보호하는 정책이 새로운 개발모델의 근간을 이루는 가운데, (인접 국가들과의 경쟁을 우려해 한 발 물러난 인도를 제외한) 아시아 주요 국가들은 세계화를 팽창시키는 방향에 기대를 걸고 있다.
중국 리커창 총리는 “다자주의와 자유무역의 승리”라며 자축했고, 일본 자유민주당의 스가 요시히데 총리는 “8년의 협상 끝에 찾아온 역사적인 날”에 경의를 표하며 협정을 “가능한 빠른 시일 내”에 발효할 것을 요청했다.(1) 전세계 자유무역주의자들이여, 단결하라!
RCEP은 세계 총생산의 30%, 세계무역의 28%를 차지하고, 22억 인구를 아우른다. 동일한 종류의 협정 중에서도 사상 최대 규모다. 미국이 포함되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중국이 과거에 적대관계였던 동남아시아에서 당당히 한자리 차지하는 모습은 전례 없는 역사적 전환점이라 할 만하다.
그도 그럴 것이, 아세안은 냉전이 한창이던 1967년 공산주의를 억제하려는 목적으로 창립됐다. ‘믿을 만한’ 국가들의 공동체로, 공산주의자(로 의심되는 이)들을 색출해 영토에서 추방하곤 했다.(2)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필리핀, 싱가포르, 태국 등의 회원국은 미국의 영원한 우방국으로, ‘악’에 맞서 보호장벽을 구축하고자 한 데 뭉쳤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소련이 무너지고, 이데올로기 논쟁은 잊혀졌다. 이어서 1997~1998년, 중국 경제가 비상하는 사이 아시아는 경제위기에 뒤흔들렸다. 지난날의 적들이 모여 협상했고, 공동체는 더욱 공고해졌다.
광대해지는 아세안의 외교망 구축
그 후 아세안은 점점 뻗어 나갔다. 아시아의 세 강대국(중국, 한국, 일본)과 함께 아세안+3를 만들고, 상황에 따라 변하는 일련의 국제기구를 창립했다. 아세안지역안보포럼(ASEAN Regional Forum)은 아세안+3 회원국, 미국, 북한, 러시아, 인도, 유럽연합 등 27개 회원국을 보유하고 있다. 아세안 국방장관회의(Asean Defense Ministers Meeting Plus)는 18개국(아세안+3 회원국, 호주, 미국, 인도, 뉴질랜드, 러시아)을 아우른다.
아세안은 눈에 띄지 않게 조금씩 광대한 외교망을 구축해 나갔다. 그 결과 남중국해 인근 영토분쟁이 악화되는 것은 피할 수 있었지만, 해결책을 찾은 것은 아니었다. 2018년, 아세안은 파라셀 군도 및 스프래틀리 군도의 영유권을 주장하는 국가 간 협상에서 기본원칙이 될 행동강령 초안을 중국 정부와 공동으로 작성했다. 중국은 가차 없이 영토 전체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했다. 베트남, 필리핀, 말레이시아, 브루나이, 인도네시아는 그만큼 탐욕스러운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으나, 국가별 주장은 한데 얽혀 복잡해졌다.(3) 2년이 흐르고 행동강령 작성은 막다른 길에 이르렀다. 분쟁이 이어지고 원한은 쌓여갔다.
하지만 외교적 긴장감도 RCEP 체결을 막을 순 없었다. 무려 세계경제의 2~3위를 차지하는 강대국인 중국과 일본을 한자리에 모으는 협정이다. 아세안 공식 홈페이지에 의하면, 이 영문 협정서는 자그마치 521페이지에 달하고 20개 항목과 17개 부록, 각 국가의 시장진입 일정을 담고 있으며, 그 목적은 “상품에 대한 관세와 쿼터제도 철폐”다. 또한, 가격과 무관한 표준 관련 장애물 몇 가지도 다루는데, 서비스 업종이나 인터넷 판매, 지적재산권 문제 등을 포함한다. 반면, 농산물이라는 핵심문제는 다루지 않는다.
환경, 보건, 사회적 기준이 전혀 없는 RCEP
사실 규정은 자유로운 편이다. 협약에 서명한 15개국에서 나는 원재료로 생산된 재화는 자동으로 다른 국가에 진입이 허용된다. 덧붙이자면 그 결과로 RCEP 체결국가 중 몇몇 국가(베트남, 한국, 일본)와 이미 자유무역 협정을 체결한 유럽연합에 파급효과가 미칠 것이다. 유럽산 상품 우대혜택을 더 주기 위해, 원산지 추적이 점점 어려워지거나, 혹은 아예 불가능해질 것이다.
RCEP는 환경이나 보건, 사회적 기준은 전혀 제시하지 않는다. 물론 미국이나 유럽이 주도한 협정도 겉으로만 그럴듯할 뿐 더 나은 형편인 것은 아니다. 2018년 북미 자유무역 협정(North American Free Trade Agreement, NAFTA) 재협상 당시 도입된 최저 임금이나 파업권 같은 사회적 조항을 제외하면 말이다.(4) 반면 RCEP에는 정부정책이 다국적기업에 불리할 때, 기업이 국가에 맞설 수 있는 권한을 주는 조항은 전혀 없다. 국제법보다 우위에 위치한 특별 재판소인 국제 투자분쟁 해결센터(International Centre for Settlement of Investment Disputes, ICSID)에 할당된 역할도 전무하다.(5)
일반적으로 자유무역 협정을 체결할 당시엔 경제성장이나, 일자리, 무역에 대한 (지켜지지 않을) 장밋빛 미래를 남발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번엔 경제전문가와 자유주의자들조차 신중한 모습을 보이며 평균 0.2~0.4%대의 성장률을 기대하고 있다. 사실, 협정 체결국 대부분이 이미 두 국가 간의 무역협정, 특히 세 강대국과의 자유무역 협정을 체결한 상태다. 게다가 경제특구(비과세 지역)도 무수히 많다. 동남아시아에 700개, 중국에 2,500개 이상의 경제특구가 존재한다.(6)
한계점이 있을지라도 다가올 변화는 전례 없을 것이고, 이는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은 아닐 것이다. RCEP가 공식적으로 “아시아 경제 통합”을 표방하고 있지만 말이다. 아세안 회원국 내 부의 격차는 여전히 극심하다. 순위권 최상에는 국민 1인당 소득이 6만 4,567달러를 기록하는 싱가포르가 위치한다. 반면 같은 회원국인 미얀마의 국민 1인당 소득은 1,440달러다.(7) 브루나이 인구의 78%가 도시에 거주하지만, 캄보디아에서는 23%만이 도시에 거주한다.
각 회원국의 수요, 그리고 그들이 어느 정도의 저항력을 갖추고 있는지는 별개 문제다. 임금이 싼 곳을 찾아다니는 다국적기업은 실컷 재미를 볼 것이다. 베트남은 이미 중국에 자리한 공장들이 자국으로 이전하면서 덕을 보고 있다. 탈중국 정책을 채택한 일본 정부도 생산을 자국으로 들여오거나 혹은 베트남, 미얀마, 태국에 투자하는 일본 그룹을 지원하고 있다.(8)
경제강국 중 하나로 손꼽히는 일본은 아시아 최대의 투자국으로, 아세안에 투입된 해외 직접 투자기금의 13.7%를 차지한다. 반면 중국은 7%다. RCEP로 해당 지역 내 경제패권이 변화할 것임은 자명하지만, 극적인 변화는 없을 것이다.
“과소평가할 수 없는, 세계 역사상 중요한 전환점”
협정의 근본적인 이권은 전략적 차원에 있다. 중국이 지정학적 핵심이 된 협정이기 때문이다. RCEP는 중국의 부상을 저지하려는 목적으로 오바마 정부가 고안한(그리고 트럼프 정부가 들어오면서 잊혀진) 환태평양 경제동반자협정(TPP)에 대한 대응책으로 중국 정부가 내놓은 협정으로, 지난 8년 동안 지지부진했다. 최근 아세안이 표방하는 “협력 외교”와 협정을 마무리 지으려는 중국 정부의 의지가 만나 마침내 빛을 보게 됐다.
물론 싱가포르 전 외교관이자 공공정책학 교수인 키쇼르 막버바니가 인정하듯 RCEP는 “하위 수준의 무역협정”이다.(9) 그럼에도 막버바니는 “과소평가할 수 없는, 세계 역사상 중요한 전환점”이라 평가한다. “현재까지 아시아 협력에 있어서 최소한 세 가지 잠재적 비전이 존재했다. 아시아-태평양, 인도-태평양, 그리고 동아시아가 그것이다. 미국이 주도한 아시아-태평양은 먼저 아시아 태평양 경제협력체(Asia-Pacific Economic Cooperation, APEC)로 시작해 환태평양 경제동반자협정(TPP)으로 이어졌으나 트럼프 정부 이후 막다른 길에 놓였다. 인도-태평양은 인도가 발을 빼면서 보류된 상태다.”
인도와 미국은 단지 일시적으로 발을 뺐을 뿐이다. 중국이 홀로 무대를 누빌 날은 오래 남지 않았다. 그러나 중국이 최악의 상황으로 우려하는 것처럼 고립상태에 빠지지는 않을 것이다. “RCEP는 중국의 경제패권 팽창에 일조하고 있다.” 미국인 정치경제학자 데이비드 골드먼은 이렇게 설명한다. “중국이 보유한 기술과 무역 기구를 이용해 동아시아 국가들을 중국의 경제모델로 끌어들이는데 사력을 다하고 있다. 이는 중국식 정치모델 전파와는 무관하다. 오히려 중국식 접근법의 강점은 경제모델을 위로부터의 변화가 아닌 아래에서부터 위로 세세한 부분까지 전부 바꿔버린다는 데 있다.”(10)
서구권 국가들은 이와 달리 정치와 무력이라는 패를 사용한다. 미국의 트럼프는 4자 안보 대화(Quadrilateral Security Dialogue, Quad)를 재개했다. 일본, 인도, 호주, 미국이 반(反)중국이라는 노골적인 목적 아래 구축한 연합이다. 필리핀과 인도네시아는 미 국방장관이 공식방문을 했고, 긴밀한 군사동맹을 맺었다.(11) 이어서 베트남과 대만 국방장관과도 접촉했다. 매번 주기적인 무기판매와 “미군과 중국군이 중국해에서 벌인 여러 차례의 무력행사”가 뒤따랐다.(12) 자칫 잘못하면 최악의 사태로 치달을 수 있는 위험을 품고 있었다.
미국과 중국의 대립은 이제 이중협박의 양상을 띠고 있다. 미국 측에서는 공공의 안전을, 중국 측에서는 경제교류를 무기로 내세운다. 세계 각국은 둘 중 한 편을 고르라고, 혹은 상대편을 고르지 말라고 채근당하고 있다. 호주는 코로나 바이러스의 원인 규명을 위한 조사 위원회를 요구하고 화웨이와의 5G협정을 거절하며 공공연하게 미국 편에 섰다.
중국 정부는 “14가지 비난 대상” 목록을 보내며 이렇게 경고했다. “중국을 적으로 돌리면 중국은 당신의 적이 될 것이다.”(13) 어떤 명목으로든 와인에 어마어마한 세금이 붙었다. 석탄, 쇠고기, 보리도 마찬가지였다. 무역분쟁은 세계 무역 기구(WTO)에 회부될 것이다. 호주 생산업체들은 벌써 축배를 들고 있다.
그렇지만 아시아 국가 정부 대부분은 이같은 발언을 꺼린다. 막버바니는 이를 잘못 해석해선 안된다고 경고한다. “인접 국가들이 중국의 부상을 우려한다고 해서 그에 반대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물론 싱가포르나 한국처럼 이를 균형의 유지로 보는 시각도 있지만, 어쨌거나 모두들 두 강대국 양쪽의 존중을 받으려 하기 때문이다.
뉴욕에 자리한 아시아 사회정책 연구소(Asia Society Policy Institute) 부소장 웬디 커틀러는 상황을 완벽하게 요약한다. “국가 간의 격차나 분쟁과는 상관없이 15개국이 한데 뭉치기로 결정했다.” 특히 커틀러는 이 협정이 “아시아 무역 상대국들끼리 같이 일하는데 필요한 상호신뢰를 미국의 도움 없이 구축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14) 이같은 국제관계가 지속 가능할까? 점치기에는 아직 이르다.
한편, 환태평양 경제동반자협정(TPP)이 트럼프 정부에 와서 중단되자 일본의 주도로 새로운 버전의 환태평양 경제동반자협정(TPP-11)이 탄생했다. 성공을 확신한 시진핑은 특별히 중국이 TPP-11에 가입할 준비가 됐다고 발표했다. 경제적 약조라기보단 정치적 술수에 가깝다. 시진핑은 중국이 주도권을 쥐고 있다는 조건 하에 자유무역의 승자가 되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것이 모든 이들이 기대하는 바인지는 미지수다.
글·마르틴 뷜라르 Martine Bulard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부편집장으로 아시아 문제를 담당하고 있다. 경제학자이자 작가, 주요 저서로 『중국-인도, 용과 코끼리의 경주』(2008), 『서구에서의 병든 서구』(공저, 2009) 등이 있다.
번역·정나영
번역위원
(1) 순서대로 <China Daily>, 베이징, 2020년 11월 16일. 외교부 공식 홈페이지, 도쿄, 2020년 11월 15일.
(2) Jean Guilvout, ‘Indonésie : comment le régime militaire règne par la terreur 공포 위에 군림하는 인도네시아 군부 독재’. Patrice De Beer, ‘“Démocratie d’exception” à Singapour 싱가포르의 이례적인 민주주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순서대로 1977년 2월호, 1971년 10월호.
(3) Didier Cormorand, ‘Et pour quelques rochers de plus… 국제법의 중심에 놓인 남중국해 분쟁’,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16년 6월호. 한국어판 2016년 7월호.
(4) Lori M. Wallach, ‘Premières brèches dans la forteresse du libre-échange 베일벗은 트럼프의 자유무역 새 협정안, USMCA의 실체’,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한국어판, 2018년 11월호.
(5) Benoît Bréville & Martine Bulard, ‘Des tribunaux pour détrousser les États 국가를 유린하는 다국적 기업’,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14년 6월호. 한국어판 2014년 7월호.
(6) ‘World Investment Report 2019 - Special Economic Zones’, 유엔 무역 개발 회의 (UNCTAD), 제네바, 2019년 6월, www.unctad.org.
(7) 아세안에 관한 통계치 출처는『Asean Statistical Yearbook 2019』, 자카르타.
(8) ‘Japan starts paying firms to cut reliance on Chinese factories’, <Bloomberg News>, 2020년 7월 18일.
(9) Kishore Mahbubani, 『Has China Won?』, PublicAffairs, New York, 2020.
(10) David P. Goldman, ‘The State Department’s wrong telegram’, <Asia Times>, Hongkong, 2020년 11월 18일.
(11) Aristyo Rizka Darmawan, ‘Prabowo redeemed in Washington’s eye amid China-US rivalry’, <The Interpreter>, 2020년 10월 20일, www.lowyinstitute.org
(12) Daniel Schaeffer, ‘Chine – États-Unis – Mer de Chine du Sud et riverains : En attendant Biden 중국-미국-남중국해 주변: 바이든을 기다리며’, <Asie21>, 2020년 9월, www.asie21.com
(13) Jonathan Kearsley & Eryk Bagshaw & Anthony Galloway, ‘“If you make China the enemy, China will be the enemy” : Beijing’s fresh threat to Australia’, <The Sidney Morning Herald>, 2020년 11월 18일.
(14) Wendy Cutler, ‘PERG Agreement : Another wake-up call for the United States on trade’, <Asia Society Policy Institute>, New York, 2020년 11월 1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