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부채는 나쁜 것인가?
‘공공부채는 나쁘다(La Dette Publique C’est Mal)’는 투쟁 연재소설이다. 안토니오 그람시가 신자유주의 헤게모니에 대항한 ‘진지전(陣地戰)’이라 할 법한, 투쟁을 위한 문학적 공헌이다. 지칠 줄 모르고 반복되는 사회의 명증, 시대의 헤게모니적 상투어구를 공격하는 끈질긴 인내의 싸움이다.
무의식적인 연관작용 그 자체를 공격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문제가 되는 소재 자체, 즉 더 이상 깨닫지 못한 채 반복하는 것, 말하고-보고-듣는 여러 사회·정치적 집단이 전파하는 의미의 덩어리로 합쳐진 발화(發話)에서 각성이 이뤄져야 한다.
이런 지각의 혁명을 시도하는 것이 비판적 예술의 쟁점이다. 바로 자동화된 의미의 형성을 겨냥해 시각의 전환을 추구해야 한다. 문화적 융합은 지배관계를 감추기 때문이다. 넓은 의미에서 청각과 영상에 의해 전달되는 가상의 체제로서의 기표(記票, signifiant)인 공동의 언어는 헤게모니 유지에 핵심 역할을 한다. 공동의 언어는 단 한 가지 방식의 의미부여, 즉 ‘당연한’ 의미부여만 허락한다. 언어와 상상의 도구 없이 ‘원래 그런 것’만 존재할 뿐이다.
따라서 정치적 시각의 전환을 위해서는 의미의 기계적인 배포 체계를 같이 교란해야 한다. 물론 자본화된 자본주의의 지배가 단지 언어와 상상 차원에 그치는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이 자본주의 구조의 존재와 작용을 공인하는 것은 언어와 언어의 규범적 상관물임이 분명하다. 이 구조를 식별하고 무너뜨려야 한다면, 이 구조의 법적 유효화 장치도 같이 공격해야 한다. 임시범주(ad hoc categories 특정 기준이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특정 순간에 즉흥적으로 형성되는 범주를 뜻하는 심리학 용어-역주)에서 집단적으로 같은 말을 되풀이하지 않는다면 어떤 지배질서도 지속될 수 없을 것이다. 그람시의 교훈은 다음과 같다.
언어는 공동으로 지휘권을 가진 느낌을 주고 일부가 지배하는 현실을 잊게 한다. 언어가 모든 역할을 한다는 말은 아니다. 언어가 가진 특유한 효과는 언어 외적인 것들에 더해져 나머지를 차단한다. 끊임없이 같은 말을 되풀이하면 특정 사회·정치적 상황에 대한 집단적 인식은 지배를 받는 사람들도 존재한다는 현실을 잊어버린다. 피지배자들은 지배자와 같은 언어를 사용하며 그들이 실제로 느끼는 것을 역전시키는 발화를 이용한다. 이런 발화는 피지배자들에게 자신을 지워버리는 프로그램을 실행시킨다.
프란츠 파농이 『검은 피부, 하얀 가면』(1)과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2)에서 분석한 내용이다. 필자는 새로운 내용을 지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저 이처럼 확인된 사실에서 결론을 도출한 이들의 발자취를 따를 뿐이다. ‘원래 그런 것’은 언어 없이는 존재하지 않으며, 실제로는 한 집단의 다른 집단에 대한 승리를 표현하지만 모든 주체가 승리한 것처럼 말한다. 생산 수단의 사유 재산, 임금 노동자의 종속, 기업의 해외이전, 금융시장의 존재처럼, 자본주의의 ‘원래 그런 것’은 파롤(parole 말하는 사람의 맥락에 따라 가변적인 언어)에 의한 인습화와 뗄 수 없는 관계다.
이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우리도 마찬가지로 닥치는 대로 이야기해야 한다. 문학이 개입할 수 있는 여지가 바로 여기 있다.
이 블로그는 공격의 수단을 제안한다. 필자는 다양한 오디오 녹음분이 삽입된 팟캐스트(podcast)를 통해 우리를 조종하는 담화적 무대라는 분야를 설명하려 노력했다. 이 연재소설은 필자가 다른 저서를 위해 시작한 작업의 일환이며,(3) 자본화된 언어를 식별하기 위한 노력이다. 자본화로 경제적 합리성이 느슨해진 이 언어에는 일관성이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빅토르 클렘퍼러를 모방해(4) 이 언어에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언어(LCN, Lingua Capitalismi Neolibéralis)’라는 이름을 붙였다. LCN은 유동적인 특성을 지닌 주주들의 요구에 맞춰 조정하는 언어적 도구의 총체를 말한다.
공공재정 균형 회복을 주장하는 무의식적인 담화가 그중 한 부분을 차지한다. 이 연재소설은 ‘공공부채는 나쁘다’라고 말하는 LCN를 공격한다. LCN은 모든 무의식적인 담화처럼 옹호자만 있는 발화다. 습관적으로 연결된 요소들로 구성된 형식과 문장으로 얼어붙은 담화다. 필자는 이 형식과 문장을 녹이고 해체하는 시도를 했다. 무의식적인 담화가 대변하는 논리와 그것이 만들어낸 세상을 식별하기 위해서다.
따라서 이 팟캐스트에는 이런 담화의 전달자, 수사법, 즉 사상의 표현법이 등장한다. 방송국 <France 5>의 토론 프로그램 <세 당 레르 C’est dans l’air> 특집편의 놀라운 환유는 이 모든 것을 포착해냈다. ‘공기(air)’라는 단어가 들어간 제목에서부터 이미 대기문제의 인과관계에 대한 참여를 강조하고 있다. 필자의 경우 긴축재정을 외치는 레코드를 들려주는 것이 목표였다. 반복이 만들어낸 ‘당연함’을 없애고 들려주는 것이다.
조지 오웰은 말했다. “하나의 정통을 또 다른 정통으로 대체하는 것이 반드시 진보는 아니다. 진정한 적은 축음기같이 틀에 박힌 정신이다. 이것은 지금 틀어 놓은 레코드에 당신이 동의하든 안 하든 진실이다.”(5) ‘공공부채는 나쁘다’라고 외치는 레코드는 닳지 않고 계속 돌아간다. 코로나19가 한창인 와중에 계획적으로 감축한 병원의 병상 수, 그리스의 해체를 논한다. 언제나 그 자리에서 변함없이 날카로운 소리를 낸다. 귀청을 찢는 듯한 소리를 내며, 반박에도 굴하지 않고 똑같은 소리를 내며 돌아간다. 이 레코드는 다중 내성을 지닌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이제 필자도 이 소리에 대한 공격에 참여하려 한다. 필자의 공격은 문학적 공격이다. 1차 봉쇄 동안 필자는 ‘엄격성’의 담화적 무대를 문학적으로 분석한 이 연재소설을 공유해야 한다는 확신을 가졌다. 과거 수차례, 그리고 이번에는 회계 감사원에서(6) 긴축재정의 화신을 연기하고 있는 피에르 모스코비치와 다시 발령된 봉쇄조치는 이 연재소설을 시급히 재개하는 계기가 됐다.
글‧산드라 뤽베르
저술가
번역‧김은희
번역위원
(1) Franz Fanon, 『Peau noire, masques blancs 검은 피부, 하얀 가면』, Seuil, Paris, 2015.
(2) Franz Fanon, 『Les Damnés de la Terre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 La Découverte, Paris, 2014.
(3) Sandra Lucbert, 『Personne ne sort les fusils 아무도 총을 꺼내들지 않았다』, Fiction et compagnie 총서, Seuil, Paris, 2020. Marina Da Silva, ‘Des morts qui “gâchent la fête” “축제를 망치는” 죽음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20년 11월호.
(4) Victor Klemperer, 『LTI, La langue du IIIe Reich 나치 독일의 언어 LTI (Lingua Tertii Imperii)』, Pocket, 2003.
(5) Georges Orwell, 『Essais, articles, lettres 수필, 기사, 서신』 - 제3권 (1943-1945), Anne Krief & Jaime Semprun 번역, Ivrea, 1998.
(6) ‘셰익스피어 전 작품’을 연기한 배우처럼 피에르 모스코비치는 공공재정의 정통성을 대변하는 모든 역을 맡았을 것이다. 끊임없이 중대한 사건들을 일으키려는 이들 중 한 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