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열을 팔아야 먹고 사는 언론
돈을 벌고 싶으면, 중도나 온건파를 고수하면 안 된다. 한때 높은 광고수익을 누리던 온건파 언론들은, 폭넓은 독자층을 유지하고자 객관성을 가장한 채 대중에 영합했다. 하지만 이제는 수익창출 방식이 변화했다. 오늘날 언론은 양극화된 대중 사이에서 문화전쟁을 부추기며 돈을 번다. 좋든 싫든 선택의 여지가 없다. 독자들은 이런 언론을 견제하고 감시하기도 하지만, 당파주의에 빠지기도 한다.
언론과 출판사(미디어 그룹 비방디, 에디티스 출판사, 프리스마 미디어)를 차례로 인수하고, 라디오 방송국 <유럽 1> 인수를 호시탐탐 노리며, 인력 감축과 지출 삭감을 감행하고, 극우를 겨냥해 호객 저널리즘을 부추기고(<C뉴스>), 여러 신문사 편집진을 불안과 공포 속으로 몰아넣는다(<르몽드 디플로마티크>도 그의 아프리카 활동을 취재했다는 이유로 고소 협박을 당했다). 이와 같은 미디어 자본주의의 폐해에 실체를 부여한다면, 누구보다 제일 먼저 떠오를 그 이름은 바로 뱅상 볼로레 비방디 그룹 회장이다.
이 브르통 출신 억만장자의 만행이 언론에 자주 오르내리기는 하지만, 2020년대 언론지형을 뒤흔드는 새로운 변화를 가장 잘 보여주는 지표는 아니다. 점점 커지는 이 세력의 움직임은 언론 소유 지형도나 광고주 목록에는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1) 기사 내용에 불만을 제기하는 독자들에게 편집진이 열과 성을 다해 사과하는 모습을 보면 그 실체를 어느 정도 가늠해볼 수 있다. 언론 시장에서 오랜 세월 가장자리에 밀려 있던 이 새로운 축은 다름 아닌 구독자다. “구독자의 영향력이 향상될수록, 편집진은 우리 사회의 소란과 분열에 귀를 열고 더 가까이 들여다보게 된다.” 그런 언론은 아직 소수지만, 이런 격렬한 움직임은 본질적인 변화를 암시한다.
광고주마저 SNS에 빼앗기다
물론, 의사소통의 거대한 모노폴리 게임판은 어김없이 사적 소유라는 결과로 재편되곤 한다. 그러나 사적 소유가 오래전부터 시장 논리가 지배한 언론의 판도를 뒤집기는 어렵다. 언론의 경영진은 허리를 졸라매고 바짝 긴장해야 한다. 영상매체가 사람들의 시간과 대화를 더 많이 빼앗아갈수록, 정보를 창출해내는 힘은 점점 약해진다. 프랑스에서는 언론인 수가 점진적으로 감소하는 추세이며(2008~2019년 6% 감소), 미국에서는 거의 1/4이 줄었다. 그런데 이 평균치가 감추는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다. 미국 인쇄매체에서 일자리 3만 6,000개가 줄어든 반면, 비 인쇄매체에서 1만 개의 일자리가 새로 생겼다는 것이다.(2)
익히 예상해온 결과지만, ‘부익부 빈익빈’이라는 정보의 양극화 현상이 우리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다. 정보 양극화는 교육과 문화적 불평등의 현주소를 보여주기도 한다. 나이, 정보, 소비 방식을 고려하면, 온라인매체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층을 주로 보유한 지역 언론들은 매출과 기능이 축소되거나, 미국 경우처럼 시장에서 사라질 수밖에 없다. 2004년부터 지역 일간지와 주간지 2만 1,000개(전체의 1/4에 해당)가 폐간됐다. 그 자리를 채운 것은 당파적 웹페이지다. 대체로 신문의 형식과 모양을 버젓이 갖추고 지역 소식을 다루긴 하지만 사실은 정당 자금 지원을 받아 일선에서 우호적인 기사를 전파하는 역할을 한다.(3) 지역 언론 생존은 일반 광고와 개인 간 거래 광고에 좌우된다. 그런데 기사를 제공하지도 않는 페이스북과 구글이 과거에는 광고주를 빼앗아가더니 급기야 이 두 재원마저 집어 삼켜버렸다.
인쇄매체의 광고비는 노출 건수에 비례해 산정되지만, 인터넷 광고는 완전히 다른 법칙을 따른다. 광고가 도달하는 양이 아니라 광고 대상의 질이 가격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분야에서는 아무도 실리콘 밸리의 거대 IT 기업을 뛰어넘지 못한다. 이들 기업은 일반 언론의 디지털 공간을 낮은 가격에 사서 광고를 게재한다. 2000년(구글이 광고 프로그램을 발표한 시점)부터 2018년까지, 언론의 광고수익은 1/3로 감소했다.(4) 코로나19 대유행은 최후의 일격이나 다름없었다. 2020년 2/4분기 경제 침체로 <르몽드>는 광고수익이 20%, <뉴욕 타임스>는 44% 감소했다(2020년 8월 6일 기사).(5)
광고수익을 신문 수입의 또 다른 축으로 삼는 경영 모델은 1836년에 에밀 드 지라르댕이 고안해냈다. 이 방식을 도입하면서 구독료를 낮춰서 독자를 확보하고, 신문에 광고를 게재하려는 기업에는 잠재 고객인 독자를 팔아서 수입을 올린다. 이 방식은 경기가 좋을 때는 광고주에게, 경기가 나쁠 때는 주주에게 투자를 요청해야 한다. 그래서 언론이 광고주와 주주 양측에 의존하게 된다. 언론 광고는 1960~1970년대에 황금기를 누렸고, 2000년에 IT버블이 꺼지기 전까지 광고 시장도 활황을 탔다. 광고 요청이 연일 쇄도하던 이 시기에 <리베라시옹> 편집팀 간부들은 판매 부수는 없어도 되겠다는 농담을 심심찮게 했을 정도다. 2002년에 소위 ‘무가지’로 불리는 신문들은 이런 기발한 전략을 실천으로 옮겼지만, 디지털 경제가 등장하면서 자취를 감췄다.
20세기 후반의 광고주 지상주의는 노동계를 보는 독자들의 시각을 바꿔놓았다. 미국 컬럼비아대학에서 저널리즘을 가르치는 니컬러스 리먼 교수는 “노동 문제에 관한 보도가 줄었다. 단결된 힘을 보여주던 노동조합 활동은, 소비자에게 불편을 끼치는 활동으로 인식이 바뀌었다”라고 설명했다.(6)
주류 언론에의 신뢰, 절반 이하로 추락
언론 광고 시대의 등장은 언론사 직원들의 임금과 지위, 교육 수준이 눈에 띄게 높아진 상황과도 궤를 같이한다. 하지만 언론계의 고용 불안정, 미디어에 대한 대중의 불신, 대중과 지식층 간의 뿌리 깊은 적개심이 팽배한 분위기 속에서 광고 호황기는 결국 막을 내린다. 어느 자문 업체는 지난 1월, “사상 처음으로 주류 언론을 신뢰하는 미국인의 비율이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라면서 당혹감을 드러냈다.(7)
2016년, 도널드 트럼프의 예상을 깬 대선 승리는 교육과 소통이 시장 중심 사회를 평정한다는 <뉴욕 타임스> 독자들의 허상을 깨트렸다. 광고 부족과 분열된 사회 현실에 더 잘 부합하는 새로운 모델이 부상하고 있다. 극도로 당파적이고 대중적이면서 틈새를 공략하는 매체다. 이 모델은 탄탄한 독자층이 내는 구독료를 재원으로 활용한다.
구독자는 “미래 지향! 탁월한 비전!”에 만족하고, 언론은 나락에서 벗어날 수 있다. 과거 IT 천재들은 인터넷으로 제공되는 정보는 무상이 아니면 존립할 수 없다고 봤지만, 15년이 지나자 이 간행물은 세상의 부러움을 받게 됐다. 유료 채널, 영상·음악 스트리밍 플랫폼은 무료 콘텐츠와 불법 복제물이 범람하는 시대더라도 다른 곳에서 구할 수 없는 특화된 서비스라면 이용자들이 비용을 치른다는 것을 입증했다.
콘텐츠를 무료에서 유료로 전환하려면 경쟁력과 전문성을 갖춘 신문이어야 한다. 인쇄매체로 탄생한 신문이 경제적으로 성공하려면 종이와 인쇄, 유통 비용을 점진적으로 줄여나가야 한다. <르몽드>는 연초까지 온라인 구독자 36만 명을 확보했고 2025년에는 100만 명까지 구독자를 늘리겠다는 목표를 세웠지만, 종이 신문 구독자는 10만 명에 불과하다. 지난 10년간 디지털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한 <뉴욕 타임스>는 “처음으로 디지털 구독 수익이 종이 신문 구독 수익을 넘어섰다”라며 자축했다(2020년 11월 5일 기사). 해당일 기준, 온라인 구독자 470만 명을 통해 얻는 수입은 종이 신문 구독자 83만 1천 명보다 조금 더 많은 수준이다. 온라인 구독자만으로 경제 이익을 높이려면 어떻게 해서든 구독자를 더 많이 확보해야 한다. 생략과 요약을 선호하는 요즘, 노르스케 스코그처럼 원래 신문지를 만들던 제지회사들은 이제 아마존 종이상자 생산을 위해 기계를 개조한다.(8)
언론인이자 민주당의 좌파 활동가인 로스 바컨은 “인터넷이 생겨나기 전에도 <뉴욕 타임스>는 여타 신문들처럼 광고로 수입을 올렸다. 오늘날처럼 정부나 비영리 재단 등의 보조금에 기댈 수 없을 때, 출판물의 생사를 결정하는 것은 바로 독자다. 이런 점은 대중에 새로운 힘을 부여한다”라고 설명한다.(9) 언뜻 생각해봐도 이런 변화는 언론의 독립으로 나아가는 발걸음이다. 광고주들은 광고를 보는 뇌와 시간만 요구하지만, 독자들은 최고의 정보를 요구하지 않던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언론계는 독자층을 서로 이질적이고 영향력을 행사할 수단이 없는 집단으로 간주했고, 그들은 편집 방향에도 거의 영향을 주지 않았다. 신규 출판물은 정체성과 정치 성향(프랑스), 지역(미국)을 규정하고, 해당 세계관에 부합하는 독자를 구분했다. 한편, ‘품격’있는 출판물을 발간하는 경우, 구독자 편지로 독자의 성향을 반영하곤 했다. 이를테면, 자유주의 신념을 가진 지식층이면서 당파성을 혐오하고, 상식과 시사에 관심이 있으며, 사실에 근거한 추론만 받아들이는, 이른바 “날마다 조간신문을 읽는 것은 현실주의자의 아침 기도”라고 했던 프리드리히 헤겔의 유명한 말에 딱 들어맞는 ‘교양인’의 모습이다. 저널리즘은 신이 될 만한 추종자를 만들어낸 것이다.
이제 이런 허상은 사라졌다. 모든 형태의 재정 지원은 편집 방향에 영향을 줄 위험이 있다. 구독자 모델도 마찬가지다. 1990~2000년대는 사회 양극화 심화와 주류 미디어의 상대적 동질성이라는 모순으로 요약된다. 언론계의 시장점유율은 선거 결과처럼 중도 성향에 집중됐다. 브렉시트-트럼프 시대에 엘리트 언론은 정치(특히 문화적) 분열이 심해지면 청중에게 이야깃거리가 되고, 독자의 참여를 유도하며, 수익을 가져다준다는 점을 배웠다. 미국 언론인 맷 타이비는 “과거에는 기업들이 되도록 많은 인원을 동원하는 데 힘을 썼다면, 오늘날에는 되도록 다양한 부류를 동원하고 유지하려고 한다”라고 설명했다.
“노골적으로 말하면, 예전에는 보편적인 현실관을 주력상품으로 삼던 언론이 이제는 ‘분열’을 팔아서 먹고산다는 것이다.”(10) 이제 <뉴욕 타임스>의 관심은 신문을 하나의 완결된 총체적 매체로 간주하는 ‘오래된’ 독자가 아니다. 이제 그들은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단편적인 기사 링크를 소셜미디어를 통해 받아보는 ‘커뮤니티’(공동체)를 유혹하는 데 골몰한다. 이 소규모 집단들은 대개 관심을 가지는 주제에 대해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는 내용이 나타나면 분노의 폭풍 트윗으로 일일이 대응한다.
이처럼 언론은 과거 여론의 화합을 통해 평화를 추구하던 데서, 어느새 여론의 분열을 통해 쏠쏠한 이윤을 챙기는 쪽으로 변화하고 있다. 이런 변화는 때마침 소셜미디어의 기능과도 한데 결합했다. 예전에는 본인이 읽거나 듣고 싶은 내용만 사용자들에게 전달하는 일명 ‘메아리 방(에코 룸)’ 모델은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같은 소셜미디어에나 적합한 것으로 간주됐다. 하지만 이제는 똑같은 모델이 전통적 매체에까지 확대되고 있다. 단, 차이점이 있다면 독자들이 마음에 쏙 드는 뉴스를 보려 돈까지 낸다는 점이다. 기자들은 깨어 있는 시간 대부분을 트위터에서 보내는 탓에 트위터가 사람들의 공적 생활(public life)을 주도한다고 굳게 믿는 경향이 있다.
그런 만큼 매일 열심히 자판을 두드리는 인터넷 논객들, 수백 명의 열혈 백인 ‘트위터리안’의 비평이 곧 수십만 독자들의 생각과 일치한다고 착각하곤 한다. 온라인상에 쏟아지는 분노의 폭풍으로 한바탕 곤욕을 치른 많은 언론사 편집진은 가능하면 ‘인터넷 논객들’의 심기는 건드리지 않으려 한다. 니콜라스 레만은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독자 수에 비례해 돈을 벌 수 있는 인터넷 신문은 한층 이념적인 뉴스 콘텐츠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독자들의 견해에 반대되는 기사보다는 독자들의 생각을 재확인해주는 기사를 더 많이 싣는다. 케이블 뉴스 채널도 비슷한 방식으로 운영된다.”(11)
2019년 말 미국 여론조사 기관 ‘퓨리서치센터’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폭스뉴스>를 주요 정치뉴스 채널로 이용하는 사람은 93%가 공화당 지지자였다. 반면 케이블 뉴스 채널 <MSNBC>를 선택한 사람은 95%가 민주당 진영이었다. 물론 인쇄매체의 경우, <뉴욕 타임스>의 독자도 91%가 민주당 색채를 띤다.(12) 문화 장벽을 사이에 두고 양분된 두 부류의 대중은 각자 자신들만의 ‘메아리 방’에 갇힌 채, 본인들의 신념을 더욱 강화하고, 이를 온라인상에서 퍼뜨린다. 그러면서 조금이라도 자신들의 견해와 어긋나는 주장이 보이는 순간, 자신들이 가장 좋아하는 미디어에 다시 조준을 맞추거나, 탈선자를 제거하라고 가차 없이 요구한다.
하지만 정말 온라인상에서 논쟁을 주도하는 폭풍 트윗들이 뉴스 생산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사실일까? 한 연구 보고서에 의하면, 실제로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13)
트위터 인기주제가 곧 언론의 인기주제
소셜미디어에서 처음 논란이 제기된 이후 전통적 매체에 의해 사후 보도된 수많은 ‘사건들’을 살펴본 결과, 연구원들은 트위터에서 인기를 끄는 주제일수록 결국 언론매체의 1면을 장식하는 경향이 강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일정한 주제를 다룬 트위터 게시물의 수가 1% 증가하면 관련 기사의 수도 8.9% 증가한다.” 특히 해당 언론사의 편집진이 이 280자 단문 메시지 서비스를 열성적으로 사용하는 매체일수록 이런 현상은 더욱 두드러진다.
왜냐하면 언론인들은 대개 자기도취적이고, 단호하며, 맹목적인 성격을 지닌 이 소셜미디어서비스에서 자신들과 비슷한 세계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트위터는 세계 뉴스를 보여주는 창이다. 그런 연유에서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는 트위터 계정의 주인은 대개 언론인이다.” 잭 도시가 설립한 이 그룹의 ‘우수사용 사례’가 실린 홍보문은 이렇게 자화자찬한다.(14) 사실 이것이 바로 일명 ‘라르센 효과’(‘하울링’, ‘오디오피드백’이라고도 불리며, 어떤 장치의 출력이 입력 장치로 들어가서 증폭돼 다시 출력되는 일이 반복되는 현상을 뜻하며, 이로 인해 스피커에서 ‘삐’하는 소음이 발생한다-역주)라고 불리는 현상은 아닐까.
한 마디로, 다른 수많은 동료들이 동시에 소란스럽게 떠드는 사회관계망 안에서 가장 격앙된 목소리를 내는 기자가 결국 자신의 신문 칼럼에 그 전자환경의 소음을 고스란히 옮겨오는 현상 말이다. 오늘날 언론계는 점점 고학력 부르주아들의 점유지가 되고 있다. 심지어 <뉴욕 타임스>나 <월스트리트저널> 편집진은 절반 이상이 미국 명문대 출신이다.(15) 그런 만큼 언론인들은 트위터에서 활동하는 이들이, 주로 가방끈이 꽤 길고 부유한, 젊은 좌파 도시민이라는 사실을 종종 잊어버린다.
요컨대 그들이 말하는 ‘창’은 왜곡됐다. 사실상 오늘날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는 ‘트위터리안’ 10%는 전체 트위터 게시물의 80%를 올린다.(16) 그런 의미에서, 앞서 언급한 보고서를 집필한 연구원들은 “트위터 사용자가 언론사의 모든 독자층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라고 강조했다.
그럼에도, 트위터를 세계의 반영으로 바라보는 것은 얼마나 달콤한가. 또 얼마나 이득인가.
글‧세르주 알리미Serge Halimi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발행인. 미국 버클리대 정치학 박사 출신으로 파리 8대학 정치학과 교수를 지냈으며, 1992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에 합류한 뒤 2008년 이그나시오 라모네의 뒤를 이어 발행인 겸 편집인 자리에 올랐다. 신자유주의 문제, 특히 경제와 사회, 언론 등 다양한 분야에 신자유주의가 미치는 영향과 그 폐해를 집중 조명해 왔다.
피에르 랭베르Pierre Rimbert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기자
번역‧이푸로라, 허보미
번역위원
(1) ‘Médias français : qui possède quoi? 프랑스 언론: 누가 무엇을 소유하나?’, www.monde-diplomatique.fr/cartes/PPA
(2) Elizabeth Grieco, 『10 charts about America’s newsrooms』, 퓨 리서치 센터, 2020년 4월 28일, www.pewresearch.org
(3) <뉴욕 타임스>, 2020년 10월 19일
(4) ‘Séries longues de la presse éditeur de 1985 à 2018 – presse d’information générale et politique française, nationale et locale 1985~2018년까지 언론출판 기록-프랑스의 국가 및 지역 내 일반 정보매체 및 정치매체’, ministère de la culture, www.culture.gouv.fr
(5) ‘La Lettre A 글자문자 A’, 2020년 7월 30일.
(6) Nicholas Lemann, 『Can journalism be saved?』, The New York Review of Books, 2020년 2월 27일.
(7) www.axios.com, 2021년 1월 21일.
(8) <L’Usine nouvelle 새로운 공장>, Antony, 2020년 6월 17일; <Les Affaires>, Québec, 2018년 6월 30일.
(9) Ross Barkan, «The gray zone lady», The Baffler, 2020년 3~4월호, https://thebaffler.com
(10) Matt Taibbi, ‘The post-objectivity era’, TK News, substack.com, 2020년 9월 19일.
(11) Nicholas Lemann, ‘Can journalism be saved?’, 앞의 책.
(12) Elizabeth Grieco, ‘American's main sources for political news vary by party and age’, Pew Research Center, 2020년 4월 1일.
(13) Julia Cagé, Nicolas Hervé, Béatrice Mazoyer, ‘Social media and newsroom production decisions’, Social Science Research Network, 2020년 10월 20일.(정식 발행 전 사전 발표)
(14) Jennifer Hollett, ‘How journalists cans best engage with their audience’, Twitter, http://media.twitter.com.
(15) 하원, 상원, 연방판사, 미국 500대 기업(Fortune 500) 내에서 높은 비율을 보인다. (참조) Zaid Jilani, ‘Graduates of elite universities dominate the New York Times and Wall Street Journal, study finds’, The Intercept, 2018년 5월 6일, http:// theintercept.com.
(16) Stefan Wojcik, Adam Hughes, ‘Sizing up Twitter users’, Pew Research Center, 2019년 4월 24일.
<르몽드 디플로마티크>는?
언론이 회원구독료로 재원을 조달하면, 부정적인 결과가 발생할까? 프랑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가 재정 건전성을 유지하는 주된 비결은, 다름 아닌 약 12만 5,000명의 구독자들이다. 게다가 최근에는 이례적으로 많은 구독자들이 <르몽드 디플로마티크>를 애독하고 있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가 본문 기사에서 언급한 부정적인 결과를 예방할 수 있는 것은, 다음의 세 가지 요인 덕택이다. 첫째,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분량이 긴 기사, 국제 뉴스, 월간 발행이라는 특징은 소셜 네트워크에서 흔히 분출되는 분노와 흥분에 우리 독자들이 함몰되지 않게끔 해준다. 둘째, <르몽드 디플로마티크>는 논란을 부채질하는 ‘진보적 자유주의’와 ‘권위주의적 포퓰리즘’ 사이의 당파적 논쟁에 치중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분열이 종종 뒤덮는 수렴점을 밝혀낸다. 셋째, 지난 20년간 논의를 거듭했음에도 내부에서도 의견이 분분한 코소보 전쟁, 유럽 통합, 종교의 역할 같은 주제나, 좀 더 최근에 거론된 탈성장 등의 기사 내용에 반대하는 독자들이 없지 않다. 그러나, 현재까지는 추론이라는 도구를 통해 의견을 개진해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