틀을 깬 예술가 정현웅
정현웅? 김환기, 이여성, 이중섭 화가의 이름은 많이 들어봤지만, 내게 충격적인 감동을 안겨준 화가의 이름이 몹시 낯설었다. 얼마 전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의 전시회 <미술이 문학을 만났을 때> (2.4.~5.30)에서 정현웅의 작품을 처음 만났을 때 내 심장은 잠시 멈춘 듯했다. 그 자리에서 스마트폰으로 검색해보니, 그는 월북 화가였다. 전시회는 일제강점기에 활동했던 문인과 화가의 공동창작품과, 이들의 작품이 실린 인쇄출판물을 한눈에 보여준다.
『별건곤』 (別乾坤) 제8권 제7호 표지를 그린 황정수 화가의 <모던 금강 만이천봉>을 시작으로 이름을 많이 들어본 시인 이상과 화가 구본웅의 작품들을 눈여겨 볼 수 있다. 그러나, 내 눈에 가장 강렬하게 들어온 그림은 정현웅(1910~1976) 화가의 작품, 그리고 그의 시대를 집약한 문장이다. 1988년 이전까지 남한에서는 그의 이름을 온전히 부르지 못했다고 한다. 이후 2012년 정현웅 기념사회에서 엮은 『만화가 정현웅의 재발견』(현실문화), 『시대와 예술의 경계인 정현웅』 (신수경·최리선, 돌베개), 『틀을 돌파하는 미술: 정현웅 미술작품집』 (정지석 외, 소명출판, 2015) 등이 출간됐으나, 내가 정현웅 화가의 작품과 처음 만난 것은 이번 전시회에서다.
전시 1번 공간 ‘전위와 융합’을 지나 2번 공간 ‘지상의 미술관’에서 나는 벽에 적힌 강렬한 문장을 만난다.
“틀을 깨고 인민 속으로 직접적으로 뛰어드는 가장 새롭고, 가장 강력한 미술 양식에 인쇄미술이 있다.” - 정현웅, 「틀을 돌파하는 미술」, <주간 서울>, 1948.12.20.
예술적인 그림책 장르를 통해 인쇄미술의 중요성과 역할을 인지하고 있던 터라, 위와 같은 생각을 가진 정현웅이 누구인지 갑자기 궁금해졌다. 그런데 3번 공간 ‘이인행각(二人行脚)’ 전시실에서 정현웅 화가의 강렬한 판화 작품 <소몰이>를 만났다.
힘 있는 여성을 그린 화가 정현웅
<소몰이>는 흰 종이에 찍힌 채색판화다. 가운데 있는 건강하고 힘센 젊은 여인이 양옆의 두 소를 잡아끌고 어디론가 가고 있는 장면이다. 왼손은 얌전히 앞을 향해 걷고 있는 검은 소를 잡고, 오른손은 앞으로 나아가기 싫은 듯 버둥거리는 황소의 맨 줄을 잡은 채 중심을 잡고 가는 모습이 강렬하다. 머리엔 빨간 두건을 쓰고 흰 저고리와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파란 치마를 입은 모습도 상징적이다. 빨간색, 파란색, 검은색과 흰색으로 구성된 우리나라 태극기를 상징하는 색을 보여준다. 동시에 외젠 들라크루아(1798~1863)와 오노레 도미에(1808~1879)의 작품을 좋아했다는 정현웅의 작품에서 자유, 평등, 형제애를 상징하는 프랑스기의 삼색이 겹쳐지기도 한다.
하단의 ‘1963’년을 알리는 숫자 옆에 ‘정현웅’이라는 화가의 이름과 낙관이 찍혀 있다. 이 판화 그림은 1968년 독일 화가 케테 콜비츠(1867~1945) 탄생 100주년 기념 전시회에 출품돼 주목을 받았던 작품이라고 한다. (신수경외, 2012 : 295) 전시를 총괄한 김인혜 학예사는 정현웅의 둘째 아들인 정지석 옹이 이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데, 중국에서 샀다고 전했다.
<소몰이> 옆엔 정현웅의 유화 <소녀상>(1928)이 전시돼 있다. 이 작품은 동생 정명은을 모델로 한 것이다. 빨간색 옷고름이 달린 남색 저고리를 입은 소녀는 책 한 권을 옆에 끼고 있다. 여동생을 모델로 한 유화뿐만 아니라 잡지 <여성> 표지를 통해 수많은 여성 초상화를 그렸다. 한복을 입은 여인뿐만 아니라 서양화를 그려서인지 이목구비가 뚜렷한 신여성을 그린 표지도 강렬하다.
여성을 많이 그리고 영화를 많이 보아서 그럴까? 화가 정현웅의 여성관은 <소몰이>에서 보이듯 씩씩하고 진취적이다.
문인들과의 교류와 협업
어릴 때부터 몸이 허약한 탓에 책을 많이 읽고 그림을 독학으로 배운 정현웅은 글도 잘 썼기에 조풍연, 신백수와 함께 동인지 『삼사문학』을 만드는데도 참여했다. 또한 신문사에서 일한 덕분에 시인 백석(1912~1995)을 비롯해 아동문학가 윤석중(1911~2003), 『홍길동』을 쓴 벽초 홍명희(1888~1968), 그의 아들 홍기문과 교류했다. 그래서인지 그는 한 장르에 국한되지 않고 시화집, 그림책, 역사화 등 다양한 장르의 텍스트를 그림으로 해석해 다양한 스타일의 그림을 그린다. 1930~50년대 ‘최고의 장정가’로 평가받는 정현웅은 ‘모던 보이’ 백석과 “조선일보의 사회부장과 (출판부) 신입 기자로 만나 누구보다 지적이고 댄디한 세계관을 공유”했다고 한다.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여성』, 1938) 그림도 ‘지적인 색’이라는 주황색 채색으로 정현웅이 그렸고, 『문장』 (1939)의 <미스터 백석> 프로필도, 『집게네 네 형제』 (조선작가동맹 출판사, 1957)의 백석 초상화도 그렸다. (『미술이 문학을 만났을 때』도록, 224면 참고) 이런 문학과 미술의 만남은 1910년대 파리에서 기욤 아폴리네르와 마리 로랑생, 파블로 피카소가 함께 있는 모습들이 오버랩되고, 1920년대 파리의 앙드레 브르통과 살바도르 달리를 비롯한 초현실주의 그룹 멤버들의 왕성한 예술적 교류와 연대했던 모습이 저절로 겹쳐진다.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 독일의 표현주의 같은 예술운동의 흐름이 일본을 거쳐 조선의 문인들과 예술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 카페 문화와 더불어 시와 표지, 작품 등에서 드러나고 있다.
정현웅의 회화는 ‘뭉크적 표현주의’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식민지의 암울한 현실을 드러내 보이는 한편, 피카소처럼 입체주의적인 그림을 『삼사문학』 표지에 그리기도 했다. 그러나 아이들의 모습은 해맑게 그리며 특별한 화풍에 얽매이지 않는다.
만화가이자 한국 최초(?)의 그림책 작가
정현웅은 『아동문학집』 (1938)부터 이광수의 『사랑』 (박문서관, 1939) 후편 등 여러 책의 장정과 표지 작업을 했을 뿐만 아니라 만화가로도 유명했다. 먹고 사는 문제로 “마감 병에 시달리는” 만화를 그렸다고 한다. 그때도 지금처럼, 대부분의 만화가와 그림책 작가들은 예술보다는 생계를 위해 쏟는 시간이 더 많았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정현웅은 『조광』, 『여성』, 『소년』, 『소년중앙』 등의 월간지에 표지와 삽화 컷 그림을 그리며 초인적인 작업을 했다고 한다. 해방 이후 더욱 활발하게 만화 작업을 해 동문사에서 단행본도 출판했다고 한다(백정숙, 『만화가가 부르고 싶은 작가 정현웅』 참고). 워낙 작업량이 많고 시간을 다투는 일이라 양심의 가책을 느낄 만큼 급하게 그린 것들도 있지만, 삽화의 질적 수준을 높이기 위해 대부분의 작품을 열정적으로 그렸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그가 그린 만화는 당시 대단히 인기가 있었다. ‘어린이그림만화책’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콩쥐팥쥐』 (1946년 또는 1947년 초 발행 추정)를 비롯해 『노지심』 (1948.10.15.), 『베-토-벤』(1948), 『뀌리-부인』 (1949), 『아리·바바』(?) 등의 작품을 남긴 그는 오늘날 그림책 장르의 선구자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 화가는 자녀들이 어릴 때부터 그림책을 만들었는데, 아이들이 커감에 따라 그림의 형식과 이야기 구조를 변화시켰다.『콩쥐팥쥐』는 124컷의 그림으로 구성됐는데 각 그림 칸마다 세로 글이 서사를 설명하고 그림 안 말풍선으로 인물들이 이야기를 하는 형식으로 구성돼있다. 단순화된 그림체와 선과 인물들은 표정과 몸짓으로 유머를 강조한다. 1940년에 발행된 『소년』에서 볼 수 있는 「홍길동」은 칸 그림과 대화체 말풍선만 있는 형식에서, 화자가 직접 발화해 서사를 이야기하는 형식으로 발전시켰다. 이 형식은 『아리·바바』에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수호지 그림 이야기 1. 노지심』은 한 페이지에 그림 3~4컷으로 구성된 그림책 형식을 지녔다. 인쇄된 색(노랑, 빨강, 파랑, 검정)과 형식을 볼 때 프랑스 에피날 인쇄그림과 비슷하다. 『베-토-벤』은 베토벤의 집과 무덤 사진을 통해 추가적인 정보를 담으려고 한 새로운 구성이 눈에 띈다.
시대를 앞서간 화가 정현웅
『그림 위인전 과학자 큐리-부인』의 광고에는 이런 문구가 있다. “리지윰의 발견자로 전 세계의 소학생까지라도 잘 알고 있는 유명한 여자 과학자 - 그는 일생을 통해서 조국 포-란드를 위해, 인류의 행복과 세계 평화를 위해 한 몸을 바친 거룩한 부인이었다.” 과연, 화가 정현웅이 그린 마리 퀴리를 통해 당시 존경받은 여성상을 볼 수 있다. 이처럼 정현웅이 표현하는 여인상은 <소녀상>(1928)에서 보듯 책을 좋아하고, <소몰이>처럼 강하고 진취적이며, 과학자 퀴리 부인처럼 연구하는 여인이다. 또한 그는 아이들에게 관심을 기울이며 유머가 가득한, 어린이를 위한 작품도 많이 그렸다.
정현웅의 진보적 면모는 작품의 주제 뿐 아니라 다양한 장르선택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는 서양화뿐만 아니라 조선화도 그렸다. 1951년부터 고구려 고분 벽화를 모사 복원하는 작업을 열정적으로 해낸 덕에 북한의 숙청 광풍도 피해갈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 그의 이름을, 1987년 월북한 작가와 예술인에 대한 해금 조치가 이루어진 후에야 온전히 부를 수 있게 됐으니... 많은 작업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화가는 너무 빨리 잊혀졌다.
‘표현의 자유’를 가장 큰 덕목으로 가져야 할 예술인들에게 이데올로기의 정치적 올가미를 씌우는 행위는 역사적인 퇴행을 가져온다. 정현웅 화가의 작품세계는 어느 한 틀에 갇히는 법이 없다. 그는 진정 ‘틀을 깨는 예술’을 위해 다양한 장르에서 대중을 위한 ‘인쇄 미술’ 분야를 개척한 선구자다. 분단된 역사 속에서 이데올로기로 인한 고통을 짊어진 예술가의 삶이 아프게 다가온다.
글‧김시아
문화평론가. 파리 3대학 문학박사. 대학에서 문학과 ‘그림책의 이해’를 가르치며 『아델라이드』 등을 번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