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윤미의 문화톡톡] 그대들이여, 부디 숨지 말길
<나는 숨지 않는다>(한겨레 출판, 박희정, 유해정, 이호연 지음, 2020)는 이혼, 장애, 홈리스, 탈북, 탈가정, 조현병, 학교 성폭력 등을 이유로 사회적 차별의 가장 끝에 놓인 열 한 명 여성들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이들의 삶은 버팀과 저항의 연속이다. 이른바 비빌 언덕도 없고, 그렇다고 실천할 만한 배움도 부족하여 할 수 있는 일도 마땅치 않다. 이들은 우리가 말하는 흔히 말하는 인생 실패자 또는 사회 소수자들이다. 이들은 이 사회에서 어느 위치에 놓여 있는지 스스로 알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주류 사회의 진입을 목표로 갱생하라는 요구를 거부하고 대신 다수/정상/성공의 그늘에 가려진 차별의 본질과 진실을 적나라하게 지적하며 자신의 존재를 저항의 목적이자 수단으로 삼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이들이 다짐은 하나다. 더는 숨지 않겠다는 것.
자본주의가 본격적으로 도입된 순간부터 한국 사회는 개인들에게 각자도생을 생존 원칙으로 삼으라고 요구했다. 남보다 열심히 일하면 부자가 될 수 있다고 속삭였고, 당신이 가난한 것은 남들보다 더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비난했다. 남을 밟고 성공하는 것도 실력이라고 인정했고, 착한 것은 무능한 것이라고 비웃었다. 능력에 따른 차별은 당한 것이니, 차별당하기 싫으면, 차별이 억울하면 너도 성공하면 되지 않으냐고 반문했다. 길거리에서 폐지를 줍는 노인들은 젊었을 때 열심히 살지 않았기 때문이며, 장애인이 된 이유는 그 부모가 몸을 함부로 굴렸기 때문이거나, 그것도 아니면 그냥 타고난 팔자가 더러워서 그런 거라고 체념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사회 소수자는 다수에 의해 끊임없이 평가당하고 규정당하는 것을 넘어 배제와 혐오의 대상으로 취급받으며 정상의 공간에서, 정상의 바운더리에서 눈에 띄지 않기를 요구받았다. 한 존재가 배제에서 혐오로, 혐오에서 제거의 대상으로 옮겨지는 과정은 대개 이러한 과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정상인을 주류로 하는 사회는 이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방외자, 소수자, 부적응자를 가두거나 숨기기 위한 공간, 한곳에 몰아넣고 관리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는데 중세 시대 구빈원, 정신병원, 장애인 시설, 요양 시설을 그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다. 주류 계층은 구성원의 안전과 행복을 명분으로 최대한 멀리 떨어진 곳에 시설을 만들고 소수자들을 모두 한곳에 밀어 넣는다. 가장 좋은 수용 격리 시설이란 소수자들이 쉽게 빠져나올 수 없는 멀고 먼 곳이며 타인과의 접촉이 최대한 적은 곳이다. 그러다 보니 이런 시설들은 도시에서 최대한 멀리, 그리고 최소한 접촉이 불가능한 곳에 세워지게 마련이다. 그래야 정상인의 안전을 영원히 보장받을 수 있으니까. 이렇게 차별의 이유는 곧 처벌의 근거가 되고, 한 개인은 비정상을 이유로 밟히고 짓이겨져 납작해지고 마는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가 오랫동안 지속‧유지되면서 이제는 정상으로부터 배제된 사람들이 숨는 건 타인과 공동체를 위한 미덕이자 암묵적 규칙처럼 느껴진다. 오히려 눈에 띄지 않도록 행동함으로써 정상인들로부터 혐오를 유발하지 않는 것이 공생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자 생존 법칙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지경이다. 몸이 불편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지 않기 위해서 되도록 집에서 나오지 말아야 하고,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은 자신을 컨트롤할 수 없기에 언제든 잠재적 범죄자가 될 수 있으므로 되도록 타인과 어울려선 안 되고 가능한 격리 되어야 한다. 성폭력 범죄의 피해 여성은 성폭행을 당할만한 원인을 제공했기 때문에 수치심과 부끄러움을 깨닫고 자숙해야 하며, 유전적 질병을 앓고 있는 사람은 사회적 손실을 끼칠 수 있기 때문에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다. 이렇게 말하고 나니 이들이 숨는 건 어디까지나 자발적인 선택으로 느껴진다. 게다가 이들의 선택이 마치 여러 선택지 중 원하는 것 하나를 고른 것은 아닐까 하는 착각마저 든다.
‘숨다’라는 행위는 잘 살펴보면 어떠한 감정에 관한 결과일 가능성이 크다. 다시 말하면 주체는 ‘(어떠한) 감정 때문에’ 숨거나 숨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에 기반하여 ‘숨다’와 연결되는 감정이 무엇인지 찾아 올라가다 보면 수치심과 두려움이란 감정과 만나게 된다.
먼저 수치심은 존재 내에서 발생하는 자의적 감정이 아니라 나와 타인이 관계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다소 복잡한 감정이다. 수치심을 느끼는 경우는 다양하지만 대표적인 경우를 꼽자면 나와 상대가 다르다는 것, 그 다름이란 상대에게 있는 것이 나에게는 부재(없음)하다는 것, 그리고 이 부재가 생존의 질을 판가름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는 것을 감지하는 경우다. 나의 ‘없음’은 개인의 의지로 바꿀 수 없는 선천적인 것 혹은 지금까지 살아온 것에 대한 인과물이라는 사회 분위기, 나의 ‘없음’을 채우기 위해서는 때때로 타인의 희생에 기대게 마련인데 이것은 오히려 역차별, 또는 불공정한 것이라고 규정하는 분위기는 당하는 주체로 하여금 수치심을 느끼게 만드는 데 충분하다. 자신의 ‘없음’으로 인해 내 가족이, 친구가, 주변이, 그리고 공동체가 피해를 본다고 생각하면 존재가 선택할 수 있는 건 별로 없어 보인다. 기껏해야 내 존재를 숨는 것.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 정도다. 그러면 정상인들은 말한다. 이것을 보아라. 이들이 숨는 건 어디까지나 스스로 원해서 숨는 것이라고. 물론 숨는 건 그들이다. 하지만 그들을 숨도록 만드는 진짜는 ‘있음’을 공정의 디폴트로, ‘없음’을 차별의 근거로 삼는 이기적이거나 무지한 우리들이다.
또 하나의 감정인 두려움은 내 존재를 위협하는 것들로부터 느끼는 두려움이다. 오래전부터 우리 사회를 지배해왔던 담론은 불안이다. 우리는 언제 불안을 느끼는가. 위험하다는 신호를 받는 순간이다. 이 불안을 해소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위험에 빠질 수 있는 요소를 아예 만들지 않는 것이다. 예를 들어 여자는 밤늦게 돌아다니면 범죄의 표적이 되기 때문에 밤에 돌아다니지 않는 게 맞는 것이고, 장애인들은 되도록 바깥으로 나오지 않는 게 다치지 않는 최선의 방법이다. 비정상적인 가족은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 데 방해가 되기 때문에 남녀 간의 결혼, 혈연관계를 제외하고는 가족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런 상황에서 내 존재를 지키는 방법은 뻔하다. 원칙과 질서의 바운더리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 기를 쓰고 노력하거나 자신이 없다면 아예 누구의 눈에도 뛰지 않게 숨어버리는 것.
각종 매체는 이혼율이 매년 급증하고 있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한부모 가정의 부모와 자녀들은 끝까지 숨기거나 다른 사람에게 들킬까 염려하며 전전긍긍하고, 장애인이동권 투쟁이 시작하고 벌써 이십여 년이 지났지만 휠체어를 타고 버스에 올라타는 장애인을 보는 건 여전히 어렵다.
정말로 숨고, 숨기는 것이 진정한 답일까, 이게 정말 최선일까? 묻고 또 묻는다. 이것은 무엇에 대한 해답이고 누구를 위한 최선인가. 다수는 누구이고 소수는 누가 결정하는가. 분명한 건 소수는 자신을 결정하지 않는다. 오로지 결정될 뿐이다. 그런데 소수를 결정하고 이들을 부정하는 것보다 더 나쁜 건 이들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아예 없다고 생각하는 것. 이 세상에 존재하는 않는 것으로 여기는 것. 존재를 들키지 않기 위해 침묵을 요구하는 것. 이런 방식으로 수많은 장애인, 정신적 질환을 가진 환자, 이혼 여성, 홈리스, 탈가정 여성들은 지금도 점점 깊은 곳으로 숨어 들어가고 있는 중이다.
이 책의 주인공들은 더 이상 숨지 않고 세상에 나와 다수에 저항하며 자신의 존재함을 알리는 데 최선을 다한다. 들어줄 사람이 없어도 상관없다. 존재를 부정당하고 괄호 넣기를 당하는 것보단 차라리 욕을 먹고 싸우며 상처받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었을까. 그것이 무엇이든 여기까지 오는 게 얼마나 힘들었을지 다수의 끄트머리에 있는 나는 감히 상상하기 어렵다. 다만 정상인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이들에게 잘살아내라고, 져도 좋으니 다만 사라지지 말라고, 제발 숨지 말라고, 가슴으로 응원하는 일밖에.
글 · 장윤미(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