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재의 시네마 크리티크] <필립 헨리 고스에 대한 오마주>와 <호크아이에 대한 검토> - 오래된 미래와 발명된 우연, 제 22회 전주국제영화제 후기

2021-05-11     이현재(영화평론가)

시간이 지나면 끝날 줄 알았던 시기가 연장되고 있다. 여전히 영화관에 가는 일은 어느 정도의 위험과, 방역수칙 등 신경써야 하는 일들을 굳이 감수해야 하는 일이다. 이미 많은 이들이 영화관을 떠났다. <극한직업>(2019)처럼, 여름시즌이 오기 전에 깜짝 천만영화가 등장하기를 기대하는 일은 불가능해졌다.

영화관의 추락은 이미 수치로 드러나는 중이다. 2021년 5월까지, 천만은 고사하고 백만을 넘긴 영화조차 찾아보기 힘들다. 올 해 1월에 개봉한 <소울>과 <귀멸의 칼날>이 각각 190만 여명과 185만 여명을 기록하고 있고, 윤여정의 한국 최초 아카데미 배우상이라는 호재를 등에 업은 <미나리>가 95만 여명으로 백만을 목전에 두고 있다.

이런 시기에 영화제를 간다는 것은 어떤 여정일까. 많은 관계자들이 영화제를 ‘필름마켓’으로 이야기하지만, 그 말을 하는 그들의 머릿 속에도 영화제와 영화관을 온전히 분리시키기는 어려워보였다. 마음 한 켠에 영화관은 영화의 집이라는 생각을, 그리고 결국 영화가 돌아갈 장소는 영화관이라는 생각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런 시기에 굳이 영화제를 간다는 여정을 영화관을 가는 일로 생각하기로 했다.

 

밀실의 시혜, 영화제에서만 볼 수 있는 영화들에 대하여

왜 하필 영화관일까. 그 이유는 복잡한 듯 단순하다. 영화제는 말그대로 ‘영화 축제’다. 그것도 혹자가 멋지게 지적했듯, “영화도 트는 축제가 아닌, 영화를 트는 축제”다. 우리는 이 말을 빌려서 영화제를 “영화를 틀기 위한 축제”로 바꾸어 생각해볼 수 있다. 이 때 영화를 틀기 위한다는 조건은, 다른 환경과 사건이 틈입할 틈새를 차단하고 순수하게 영화에 필요한 요소만 남겨놓는다는 조건일 것이다. 그것이 “영화를 틀기 위한 축제”이다. 즉, 영화관은 오직 영화만을 위한 장소로서, 영화가 없다면 네모반듯한 직방면체의 공간 이외의 어떤 공간도 아니다. 이러한 공간을 만들기 위해서는 영화관이라는 방을 일종의 밀실로 만들 필요가 있다.

밀실이란 밀폐된 방이다. 외부에서 무언가가 침입할 수 없다는 뜻이다. 굳이 사람이 아니더라도, 영화관에는 다양한 사정이 침입된다. 가장 쉽게는 최소비용과 최대이윤을 따지는 자본의 사정이 침입될 것이고, 멀게는 참여자들을 통해 합의된 검열이 영화를 밀어낼 수도 있다. 그러나 영화제에서 영화를 튼다는 행위는 이러저러한 사정들로부터 최대한 영화를 밀폐시킨다. 일단 영화제라는 커뮤니티의 문턱을 넘은 영화라면, 그게 어떤 영화든 영화관의 주인이 될 수 있는 기회를 갖는다. 이러한 영화제의 보편적 정책이 시혜하는 대상은 대게, 보통의 상황에서는 상영의 기회조차 갖기 어려운 영화들이다. 가령, 대중들을 상대로 공감대를 형성하기 어려운 실험영화, 너무 짧아 자본의 사정을 충족할 수 없는 단편영화들이 시혜의 대상에 속한다.

전주국제영화제는 이러한 시혜가 다른 영화제들에 비해 비교적 잘 이루어지는 영화제이다. 올해도 다양한 실험영화와 단편영화가 전주를 찾았다. 이러한 영화들은 대게 시혜없이 만나기 어려운 대상으로, 종종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고는 한다. 그 중에서도 인상적이었던 영화들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다. 아르헨티나 출신의 감독 파블로 마르틴 위베르의 <필립 헨리 고스에 대한 오마주>(2020, 이하 <헨리 고스>)와 2018년 전주에서도 소개된 <랫 필름>(2016)을 통해 주목받기 시작한 미국의 신예감독 테오 안소니의 <호크아이에 대한 검토>는 차단과 밀실이 권장되는 시기에 밀실에서 무언가를 보는 것에 대하여 되돌아보게 해주었다.

 

화석과 창조된 과거, <헨리 고스>의 글리치에 대하여

파블로 위베르가 주목한 ‘필립 헨리 고스’는 잘 알려지지 않은 다윈의 동료이자 화석과 박물관학에 매진하던 자연주의 과학자로서, 창조론자였다. 위베르의 설명에 따르면, 필립 고스는 자신이 발견한 화석과 오랫동안 믿어온 신앙의 거리를 좁히고자 대담한 아이디어를 기획했다고 한다. 창세기에 따르면 6천년 전 창조되어야 했던 화석과 6만년 전이라는 시간을 지목하고 있던 화석의 시간은 필립 고스에게는 딜레마였고, 딜레마를 돌파하고자 “6천년 전, 신은 6만 년 전이라는 시간도 함께 말들었다”는 주장을 펼쳤다. 그의 아이디어는 과학계와 신학계 모두의 비웃음을 샀을 뿐, 후대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한편 파블로 위베르는 좀 더 자세히 관찰하기 위해 3D 모핑을 통한 시뮬레이션이 자신의 관찰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을 발견한다. 자세한 관찰을 위해 시뮬레이션 된 대상을 확대할수록 글리치(하드웨어 시스템의 일시적인 오류)가 발생하여, 더 이상 대상을 확인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는 것이다. 이는 사진기라는 기계가 보장해야할 대상에 대한 냉혹한 투명성을 위반하는 현상이었고, 관찰자의 목적을 배반하는 현상이기도 했다. 위베르는 자세히 관찰하기 위한 노력이 시스템 오류의 원인된 아이러니에 대한 성찰을 <필립 고스>에 압축적으로 풀어놓는다. “가까이 볼수록 모호해진다. 하지만 멀리서 보는 것은 의미가 없다”라는 그의 토로는 어쩌면 200년전 필립 고스의 고민과 동일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떤 대상을 확대한다는 것은 프레임 안에 들어오는 대상을 다른 배경으로부터 밀폐시킨다는 의미와 같다. 그리하여 인간의 시아가 가진 한계를 기계의 힘을 빌려 극복하겠다는 기획이 클로즈업, 나아가 사진이라는 현상의 원령일 것이다. 그러나 웨베르가 발견했듯, 인간을 넘어선 수행자가 여전히 해결할 수 없는 신비의 영역은 존재한다. 위베르는 이 지점에서 그렇다면 어째서 필립 고스의 시도는 묵살된 것이냐고 되묻는다. 물론 <필립 고스>는 답을 가지고 있지 않다. 대신 영화의 마지막에 이어지는 글리치 현상들을 모아놓은 몽타주들을 통해 인식과 시각에 대한 포착의 강박을 버리고 고르기아스의 매듭을 되려 묶는 것 같았다.

 

경계라는 공간, <호크아이에 대한 검토>

그렇다면 고르기아스의 매듭을 다시 묶어야하는 이유는 무엇이 있을까? <랫 필름>을 통해 평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미국 실험영화의 신예 테오 안소니의 <호크아이에 대한 검토>는 그럴 듯한 답변을 내놓는다. 호크아이 또한 테니스 경기에서 인간이 미쳐 포착할 수 없는 순간을 위해 발명된 기계-소프트웨어이다. 하지만 그는 기계-소프트웨어가 문제를 온전히 해결할 수 없음을 지적한다. 인간의 한계를 기계장치가 대신 극복해줄 수 없는 것이다.

테오 안소니는 호크아이가 도입된 계기를 2004년 있었던 [세레나 윌리엄즈 VS 제니퍼 캐프리아티] 경기의 오심 때문이었다고 보고 있다. 느린 화면으로도 세레나 윌리엄즈의 공격이 ‘IN’임이 분명했지만, 주심은 OUT을 선언했다. 이후 TV는 주심의 판정이 제니퍼에게 대단히 유리했음을 지적했고, 주심은 결국 경기장에서의 권한과 권력을 잃어버리는 결말을 맞이한다. [세레나 윌리엄즈 VS 제니퍼 캐프리아티]의 오심이 매수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심판의 아집 때문이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이는 분명한 인간의 한계였고, 이 한계를 극복하고자 기계의 냉혹함을 빌려왔다는 것이 안소니의 생각이다.

이후, 호크아이는 사실상 테니스 경기에 대한 절대적 권력을 획득하게 된다. 호크아이가 IN이라고 하면 IN이 되고, OUT이라고 하면 OUT이 되는 사태가 지속되었고, 현재까지 진행중이다. 이 지점에서 안소니는 테니스라는 시스템이 어떻게 구성되는지 되돌아본다. 테니스장은 직선을 경계로 삼은 그리드와 같다. 그리고 그 그리드를 구성하는 직선 경계 안에도 공간이 존재한다. 이 조그마한 공간은 결국 해석의 여지를 남긴다. 이 조그마한 공간이 존재하는 한, 테니스는 논란을 일으키는 번거로운 우연을 수용해야만 할 것이다.

안소니는 이 우연의 영역에서 인간을 발견한다. 안소니는 말그대로 테니스장의 ‘여지’가, 테니스장에서 인간이 필요한 이유를 제공해준다고 주장한다. 인간인 심판은 테니스장 안의 다른 인간(선수)에게 결정을 선언해주는 역할을 하며, 그 책임 또한 결국 인간에게 귀속된다. 그 이유는 인간만이 책임을 질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안소니는 이것이 긍정적인 것인지, 아니면 부정적인 것인지 결론 내리지 않지만, 이 ‘여지’가 발명된 우연이자 게임에 즐거움을 부여하는 엔진이지 않느냐고 되묻는다.

 

밀실에서 밀실로, 시혜를 향하여

차단과 밀실이 권장되는 시기에, 권장되지 않는 밀실로 굳이 찾아가는 이유는 거기에 영화가 있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영화는 굳이 필요하지 않은 사건일 수 있다. 영화관이라는 공간도 그 필요를 잃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무용해보이는 그 ‘신비’가, 혹은 규정할 수 있는 그 ‘여지’가 필요하기 때문이 아닐까. 어쩌면 영화관의 필요는 비어있음 그 자체가, 그래서 어떤 무언가를 채워넣을 수 있는 가능성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시기에 굳이 영화제를 간다는 여정은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가는 것이다. 그 가능성을 찾아가는 이유란, 이렇듯 복잡한 듯 단순하다.

 

 

글・이현재

영화평론가. 2020년 동아일보 영화평론부문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경희대 문화콘텐츠연구소 연구원으로 있으면서 『한류 스토리콘텐츠의 캐릭터 유형 및 동기화 이론 연구』(2018) 등의 다양한 연구를 보조・수행했다. 평론으로는 「보이(지 않)는 폭력」(2020, 창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