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셰비키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미군들

100년 전, 미국의 첫 번째 패전

2021-07-30     마이클 M. 필립 | <월스트리트 저널> 기자

미군과 러시아군의 유일한 직접 대결은 1차 세계대전 말, 1세기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전투는 미군의 패배로 끝났다. 수천 명의 군인이 독일의 공격에 맞서 군수 창고를 지키고자 러시아로 파병됐다. 그들이 도착한 후 전쟁은 끝났다. 그러나 볼셰비키에 대항한 또 다른 전쟁이 시작됐다.

 

1919년 2월 말, 미육군 보병 B중대는 한계점에 이르렀다. 부대원들의 불만이 극에 달해 반란 직전의 상황이었다. 장병들은 독일과 서부전선에서의 전투를 예상했다. 이보다 3~4개월 전인 11월 11일 휴전협정이 체결되면서 1차 세계대전은 그 막을 내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보병 중대는 러시아 서북부의 동토에서 볼셰비키 혁명군과 싸우고 있었다. 러시아의 아르헨겔스크 항구에 도착했을 당시, 이미 수십 명의 미군이 독감에 희생된 상태였다. 그리고 그 지역을 훤히 알고 있는 적군에게 죽어나갔다. 부상당한 미군은 눈보라치는 숲속에서 구조를 기다리다 얼어 죽었다. 그해 가을과 겨울 미군은 이미 끝난 전쟁에서 미국 정부에 의해 잘못된 길로 들어섰고 장교들에게 속고 동맹국에 혹사당했으며, 적과 싸우기에는 태부족이었다. 수많은 미군들이 아르헨겔스크의 얼어붙은 늪지대에서 용기와 인내심을 보여줬다. 그러나 일부는 반란의 유혹에 넘어갔다. 

 

“벼룩, 배고픔과 싸울 이유는 없소”

장병들의 불만은 B중대의 보급품을 나눠주는 날 터져 나왔다. 장병들은 배급된 식량을 보면서 다음 보급품 지급까지 버틸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빌 헨켈맨 이등병이 동료들에게 “한판 붙어야겠다”라고 소리쳤다. 헨켈맨과 3명의 병사는 연대장에게 최후통첩을 썼다. “1919년 3월 15일까지 전선에서 철수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러시아 적군들과 싸우지 않겠다는 것을 분명히 밝혀둔다.”

헨켈맨 이등병은 입대 전 디트로이트의 ‘아메리칸 오토 트리밍’사의 도색공이었다. 그는 대원들에게 혼자 백기를 들고 전선을 넘어가 볼셰비키 군인들을 송별회에 초대하겠다, 전장을 떠나겠다고 외쳤다. 4일 후 미육군 장교들이 헨켈맨 이등병과 그 일당의 모의를 듣고는 그를 붙잡아 사형까지 가능한 반역 및 탈영, 반란 혐의로 군사재판에 넘겼다. 재판정에서 헨켈맨은 자신의 군복상의를 찢으며 판사들에게 항변했다. “내 몸에 붙은 벼룩과 진흙과 오물을 보시오, 우리는 아사 직전이었소. 여기 있는 그 누구도 벼룩, 배고픔과 싸울 이유는 없소.”

미국과 러시아는 연합군으로 또 냉전의 적수로 지내왔다. 100년 전 양국 사이의 유일한 군사전쟁이 벌어졌고, 그것은 헨캘맨 이등병을 분노케 한 아르헨겔스크 전투였다. 미국 역사의 불편한 기록이며 1차대전 종식 1백주년의 선택적 기억 속에서 사라진 패전사였다. 1차대전 초기 러시아 제국은 프랑스, 영국, 미국과 함께 연합군으로 독일과 싸웠지만 1917년 혁명으로 아군에서 적군의 관계로 바뀌었다. 러시아혁명군은 모스크바를 장악했고 이듬해 3월 3일 독일과 평화조약을 체결했다. 이로 인해 독일은 서부전선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블라디미르 레닌이 이끈 혁명군은 프랑스와 영국의 지지를 받던 반혁명세력(White Russian, 제정러시아군)과 전투를 벌였다. 1918년 늦여름에서 초가을 사이,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군사적 충돌상황이 벌어질 수 있는 러시아 북부지역으로 5,300명의 미군을 파병했다. 그러나 미정부의 의도는 불투명했고 모순투성이었다. 1918년 아르헨겔스크 전투와 관련한 1백년전 군사기록과 비밀해제된 정부자료, 장병들의 편지와 일기, 사진과 필름 자료를 통해 당시 상황을 살펴보겠다. 모든 자료는 국가기록원과 문서청, 미시건주립대 벤틀리 역사도서관, 그리고 장병들의 기억을 통해 찾아냈다.

보병 339연대는 미시건 주 디트로이트 출신으로 구성된 부대였다. 3,800명 중 대다수가 자동차공장 노동자였고 세법 변호사, 농부, 점원 그리고 미시건 주 여러 곳에서 징집된 장병들이었다. 이들은 미시건 주 바틀 크릭의 커스터 신병 훈련소에서 한 달 동안 훈련을 받은 후 뉴욕으로 보내졌고 1918년 7월 영국행 배에 올랐다. 장병들은 스위스에서 북해까지 720km에 이르는 서부전선의 철조망 참호 속으로 간다고 생각했다. 다른 곳으로 간다는 소문도 돌았다. 월터 매킨지 이등병은 여자친구 커니 러브데이에게 편지를 썼다. 그는 검열 때문에 커니만 알 수 있는 암호로 자신의 목적지를 남겼다. A는 벨기에, B는 영국, E는 러시아 등. 매킨지는 여자친구에게 암호를 외우고 편지는 버리라고 했으나, 그녀는 그 편지들을 끝까지 간직했다. 편모 슬하에서 자란 매킨지는 9세 때부터 농장에서 과일 따는 일을 했고 공장노동 허가를 받았다. 미시건주립대에 입학할 때까지 일하면서 공부했고, 법을 전공해 국세청(IRS) 변호사가 됐다. 시력이 아주 나빴지만 징집을 피할 순 없었다. 

 

스페인 독감, 악취, 굶주림 속에서

영국으로 향하는 배에서 병사들은 선실 천장에 매달린 해먹에서 자다 바닥에 떨어지기도 했다. 매킨지는 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에 “죄송스러운 말씀인데, 욕이 입에 붙었습니다”라고 썼다. 영국에 도달했을 무렵 장병들은 독일 잠수함의 어뢰를 걱정했고 군복과 구명대를 입고 휴대품을 옆에둔 채 자야 했다. 1918년 8월 4일, 장병들은 리버풀 항구에 도착했다. 그들은 기차를 타고 헨리 스탠리 경(아프리카 탐험가로 유명했으나 당시 고인이었던) 소유의 부지에 마련된 캠프로 이동했다. 8월 18일 일요일, 매킨지는 교회를 가려던 중 상관의 명령으로 줄을 서서 양모로 만든 재킷과 장갑 그리고 두툼한 가죽장갑을 지급받았다. 그는 “우리가 어디로 갈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따뜻한 이탈리아가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라고 어머니에게 편지를 보냈다. 일주일 후 339연대는 공병대와 구급차 그리고 의무병들과 함께 뉴캐슬 항에서 군용 증기선 3대에 나눠타고 8일이 걸리는 아르헨겔스크로 떠났다.

출항 후 여러 날이 지났다. 일부 장병들에게서 스페인 독감 증세가 나타났다. 전 세계적으로 2,000만~4,00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바로 그 전염병이었다. 장병들은 미처 의사들이 손쓸 틈도 없이 고열로 쓰러졌다. 약은 부족했고 병실은 환자들로 넘쳤다. 북극권 항로를 따라가던 배가 북극곰과 눈덮힌 언덕을 뒤로 백해(White Sea)의 좁은 해협을 지나 마침내 드비나강 항구에 도달했다. 

1918년 9월 4일 장병들은 마침내 초승달 모양의 아르헨겔스크 항구에 내렸다. 항구는 지저분했고 진흙투성이 길과 파란색 바탕에 황금빛 별이 그려진 성당이 그들을 맞이했다. 도시는 한 달 전 프랑스, 영국 그리고 제정러시아 연합군이 볼셰비키 혁명군을 물리치고 접수했다. 미군장병들이 너덜너덜한 널판지를 밟으며 하선할 때, 미해군 USS 올림피아함 밴드가 미시건주립대 응원가 ‘승리자’를 연주하고 있었다.

 

씩씩한 승리자에게 만세!
정복하는 영웅에게 만세!
만세 만세 미시건!
서부의 챔피언!

 

굶주린 러시아인들이 배에서 쓰레기를 뒤지며 먹을 것을 찾고 있었다. 회계사 출신인 찰스 라이언 소위의 일기다. “신에게 버림받은, 지구상에서 가장 비참한 곳이다. 이렇게 다양한 악취는 평생 처음이다. 사람들은 더러웠고 아사 직전이었다.” 아르헨겔스크 도착 2주가 되지 않아 339연대 소속 장병 40명이 스페인 독감으로 죽었다. 라이언 소위는 “친한 친구를 포함해, 상당수의 군인들이 죽었다”라고 일기장에 적었다. 

윌슨 대통령이 아르헨겔스크 파병을 결정할 즈음, 그는 별도의 파병명령을 내렸다. 그것은 아르헨겔스크항 동쪽 5,600km 떨어진 시베리아에 미군을 보내는 것이었다. 임무는 연합군 소속 체코병사 약 4만 명의 러시아 탈출을 돕기 위해서였다. 윌슨의 아르헨겔스크 작전 명령은 이처럼 불분명한 점이 있었다. 339연대 미군은 러시아에서의 임무가 독일군으로부터 식량창고를 보호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한편 윌슨 행정부는 미국이 러시아 내전과 관련해 “미국의 개입은 문제를 더 혼란스럽게 만들 뿐”이라며 간섭하지 않겠다는 점을 분명히 했었다.

윌슨대통령은 미군이 영국군의 지휘를 받게 했으나, 영국군은 생각이 달랐다. 영국은 프랑스, 미국 그리고 나머지 연합군과 함께 아르헨겔스크 남쪽으로 치고 내려가 체코군과 합류해 러시아혁명을 좌절시키려는 작전을 품고 있었다. 339연대가 도착하자마자 영국 육군의 프레더릭 풀리 중장은 2개의 미군 대대병력을 볼셰비키와 싸우는 자신의 군대에 합류할 것을 명령했다. 도착 직후 전투에 투입된 미군들은 겨울용 보급품을 챙길 틈도 없었다. 그들은 10월 첫눈이 내리는 상황에서도 양모 재킷을 받지 못했다.

한 육군 전투부대는 드비나강을 따라, 남동쪽 480km 이상 떨어진 곳으로 이동했다. 코틀라스 지역에서 작전 실패 중인 영국군을 돕기 위해서였다. 또 다른 부대는 화물차를 타고 아르헨겔스크 남쪽 736km 떨어진 교통 요충지 볼로그다로 이동했다. 그리고 이곳을 침공하려다 멈춘 영국군과 합류했다. 이런 작전은 윌슨 대통령의 명령과 배치되는 것이었지만 339연대장은 영국 장군의 명령을 묵묵히 따랐다. 미국도 반대하지 않았다. 전투경험이 전무했던 미군병사들은 육지에 발을 디딘 지 며칠 지나지 않아 전투기와 대포와 기관총으로 무장한 볼셰비키 혁명군과 일전을 벌여야 했다.

9월, 전투가 시작됐다. 기관총부대소속 미장병들은 일주일 동안 무릎까지 빠지는 늪지대에 처박혀있어야 했다. 동트기 직전 볼셰비키혁명군의 포탄세례가 날아들었다. 첫 전사자 1명이 기록됐고 3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한 장병은 혁명군의 소총 쇼크로 드러누웠다. 찰스 라이언 소위는 여자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 “나를 위해 기도해줘”라고 적었다. 최전선의 미군들 중 소지 중인 콘비프 캔과 굳은 빵 덕택에 죽음을 면한 경우도 있었다. 행운이 따른 병사들도 있었다. 라이언 소위는 드비나 강가의 수녀원에 들어가 채소 수프와 끓인 감자, 꿩구이와 과일통조림을 먹을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밀가루 배급품을 가지고 수녀들과 빵을 만들어 먹기도 했다.

339연대 소속 한 전투부대가 아르헨겔스크 후방에 머물렀다. 병사들은 찰리 채플린 무성영화를 보고, 적십자 간호원들과 춤을 추고, 여성주민들에게 이발을 부탁했다. 병사들은 강당을 깃발과 상록수 가지로 장식했다. 증기탕과 냉탕이 있는 목욕탕도 사용했다. 미시건 주 머스케곤 출신의 프레드 쿠이어스 상병은 “에스키모 소녀와 드비나 강가에서 순록을 타며 사진을 찍었다”라고 일기장에 썼다. 며칠 후, 그의 상관 소령이 성병을 경고했다. 

 

“우리는 왜, 무엇을 위해 피를 흘리는가?”

339연대가 아르헨겔스크에 도착한 후 2개월, 프랑스의 숲에 정차한 화물차 내에서 1차대전 휴전협정이 체결됐다. 몇 시간 후 서부전선의 총성이 멎었다. 다음날, 매킨지 이등병은 어머니에게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아요”라고 편지를 썼다. 하지만 339연대 장병들은 휴전협정이 자신들과 무관함을 알게 됐다. 칼튼 포스터 중사는 휴전협정 2주 후 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에 “우리는 전쟁을 한 것으로 아는데, 왜 우리가 러시아에 있는지 모르겠어요”라고 썼다. 미군장교들은 답을 해야 했다. 아르헨겔스크의 미군장교 제임스 루글스 대령은 사병과 장교들 모두 왜 아직도 싸우는지 이해하지 못한다“라는 우려의 메시지를 본부에 보냈다. 루글스 대령의 메시지는 ‘블랙 잭’이라 불린 러시아 파병 미최고사령관 존 퍼싱 대장에게 전해졌다. 동시에 워싱턴의 육군참모총장에게까지 전달됐다. 

12월이 되자 아르헨겔스크의 낮은 4시간으로 줄었고 기온은 화씨 -50도로 떨어졌다. 이런 추위 속에서 외곽경비로 한 사람이 버틸 수 있는 시간은 15분에 불과했다. 루글스 대령은 영국군 장교들의 지휘하에 놓인 미군 장병들의 생각을 보고했다. 미군장병들은 영국의 이기적인 정책 때문에, 그들이 러시아 땅의 용병으로 남았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리버풀의 미군검열관들은 장병들이 보내는 편지를 낱낱이 살폈으며 아르헨겔스크로 미군장병들의 반영국정서에 대해 불만스런 메시지를 보냈다. “군인답지 못하다.” 한 검열관은 12월 토머스 모런 중사가 쓴 편지를 읽었다. “우리를 즉각 철수시키지 않는다면, 미국은 현 상황에 대해 무개념한 것이다. 미국인인 우리가 영국의 이익을 위해 죽어가고 있다. 우리 정부는 우리가 무엇 때문에 싸우는지도 모르고 있다.”

이렇게 타오르는 미군의 불만에 볼셰비키 선전부는 기름을 끼얹었다. 12월 위스콘신 라인랜더의 집으로 보내는 브래들리 테일러 중령의 편지에 의하면 러시아혁명군은 전선에서 “젊은 미군들이여, 무엇을 위해 싸우는가?”, “영국군은 후방의 따뜻한 숙소에서 쉬는데, 왜 너희들이 늪에 누워있는가”라고 소리쳤다. 미군검열관이 테일러중령의 편지를 중간에서 가로챘다. 볼셰비키 선전지 <더 콜(The Call)>이 미군들의 손에서 돌았다. <더 콜>의 모토는 “전 세계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였다.

러시아 북부지역에 주둔한 미군 사이에서 <더 콜>은 볼셰비키 전단과 함께 돌아다녔다. “썩은 자본주의 전당을 너의 강한 팔로 부숴 끌어내려라!”, “집에 가자고 외쳐라” 등의 문구가 적혀있었다. 미군장교들은 장병들의 사기진작을 위해 노력했다. 크리스마스가 되자 K중대 전 장병들에게 자두 푸딩을 사 먹이고 아르헨겔스크의 영국군 매점에서 쇼핑하라며 50센트를 지급했다. 적십자는 모든 장병들에게 건포도, 대추, 사탕, 담배 등이 가득 담긴 크리스마스 선물을 나눠줬다.

1919년 1월 19일 볼셰비키 혁명군이 전투의 전환점을 가져온 공격을 개시했다. 지난 가을 미군은 주로 훈련이 미흡한 혁명군과 전투를 벌였지만 339연대는 이제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4,000여 명의 혁명군 정예부대의 공격을 받고 있었다. 혁명군은 처음 미군이 겨울을 보내기 위해 주둔중인 바가 강가의 마을 우스트 파뎅가를 습격했다. 포격과 기관총 사격이 3일 동안 계속됐다. 이 전투 도중 제임스 체셔 상병의 기관총이 대포에 맞았다. 그는 기관총을 다시 일으켜 팔이 떨어져 나갈 때까지 사격을 계속했다. 조셉 프랭크작 상병은 길 한복판에서 쳐들어오는 혁명군 보병을 맞아 총알이 손을 뚫고 나갈 때까지 육박전을 벌였다.

오하이오 주 앰허스트 출신의 의무병 랄프 파워스 중위는 혁명군의 직격 포격으로 부상당할 때까지 세 차례나 위치를 바꾸며 장병을 지원했지만 자신이 돌보던 3명의 부상병들은 살아남지 못했다. 러시아 의사가 파워스 중위의 팔과 다리의 상처를 응급처치했고 장병들이 그를 썰매에 뉘여 32km를 끌고 후퇴해서 북쪽 센쿠르스크에 도달했다. 중위는 팔절단 수술을 받았지만 끝내 숨지고 말았다. 우스트 파뎅가의 남겨진 미국 캐나다 코사크 연합군 보병대 역시 센쿠르스크로 후퇴했다. 그들은 혁명군에게 거의 포위된 채 공격을 받았지만, 이틀 동안 방어하면서 센쿠르스크를 지켰다.

미군은 파워스 중위의 시신을 인적 없는 마을의 병원 창고에 두고 떠나야 했다. 연합군은 적군에 쫓기며 80km 눈길을 걸어 후퇴했다. 약 700명의 민간인이 후퇴하는 연합군을 따라왔다. 이 전투에서 미군은 전사자 29명, 부상자 58명, 실종자 19명을 냈다. 연대장은 “실종자들 대다수가 부상당했거나 동사했을 것”이라고 본부에 보고했다. 미군연락장교인 루글스 대령은 아르헨겔스크 지역의 비관적인 상황을 보고했다. “미군장병들은 그 수에 비해 너무 넓은 지역에서 적을 상대하고 있다. 적들은 그 수와 무기와 사기에서 우리를 압도한다.” 대다수 장병들의 고향인 미시건 주에도 비관적인 전투상황이 알려졌고,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부상당해 돌아온 장병들은 현지사정의 열악함을 알리고 있었다. 파워스 중위의 전사소식을 들은 그의 부친, 해리 파워스 박사는 아르헨겔스크의 미군연락장교에게 편지를 썼다. “아들의 시신이 미국 땅으로 돌아오기를 희망한다.” 

2월이 되자 수천 명의 미군 가족들과 지지자들이 북부러시아 철수 및 최소 보충부대 파병과 급식 개선을 요구하는 탄원서에 서명했다. 가족들은 국가에 대한 “확고한 충성심”을 선언하면서도 북부 러시아의 미군장병들이 “엄청난 고통을 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였다”라고 주장했다. 339연대를 지휘하는 조지 스튜어트 대령은 아들의 생사여부를 묻는 편지세례를 받았다. 대령은 “편지 때문에 임무수행이 어려울 정도”라며 디트로이트와 시카고 언론을 움직여 아르헨겔스크 상황이 나쁘지 않다는 것을 알려달라는 메시지를 본부에 보냈다.

 

그해 겨울 첫 반역행위는 제정러시아 군대에서 터져나왔다. 1918년 12월 18일, 아르헨겔스크 연대 소속의 두 부대가 전투명령을 거부했다. 반역군인들은 알렉산드라 네브스키 막사 주변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제정러시아군을 향해 총을 쏘며 몰아냈다. 미군들에게 상황을 통제하라는 명령이 떨어져 기관총 사격을 가하자, 반역군은 백기를 들고 항복했다. 러시아 지휘관은 반역군을 세워놓고 리더를 지목하라고 명령했다. 한 사람씩 물어보는데 말하지 않을 경우 10번째 질문을 받는 장병은 즉결처분 당한다고 위협했다. 반역군인으로 지목된 13명을 찾아냈고 그들은 모두 총살당했다. 

3월, 드비나 강가의 영국군대에서 떨어져 나온 한 부대가 마을에 불을 지르라는 명령을 거부했다. 1918년 여름 격렬한 전투를 벌였던 영국군이지만, 미군에 의하면 “신뢰할 수 없다”라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고조되는 불만이 불복종으로 이어지는 것은 미군도 마찬가지였다. 339연대 A중대 병사들이 전선을 넘어 볼셰비키 혁명군 부대를 방문해 휴전협상을 시도했다. 문제의 미군장병은 동유럽계나 러시아 이민계였다. 

 

“볼셰비키 지지자들을 비난할 수 없다”

그는 미숙한 러시아어로 미국 국기가 그려진 콜럼버스 기사회(국제자선조직) 편지지에 휴전을 제안하는 글을 썼다. 영국군 장교들의 거짓말에 속았으며, 전선에는 영국군도 없다는 내용이었다. “우리는 당신들과 싸우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살기 위해서다. 우리는 당신들이 왕정과 그들의 사교계를 처단하는 것을 지지한다. 우리는 노동자를 위해 싸우는 당신들을 돕겠다.” 서명인은 “미국 장병들(The Soldiers of the United States)”이었다. 이어지는 내용은 “제군들이 2개월 반 동안 공격하지 않으면, 우리도 공격하지 않을 것이며 러시아를 떠나 집으로 돌아가겠다”라고 써 있었다. 이 문서가 혁명군에게 전달됐는지는 알 수 없다.

339연대 스튜어트 대령은 본부에 듣기 좋은 소식만 전했다. 1919년 2월13일 그가 보낸 메시지에 의하면, “보병대의 건강상태는 매우 좋으며 사기도 충천했고 군복과 장비상태도 훌륭하다”라면서 미시건에서 나도는 소문에 대해서는 “중상모략에 가깝다”는 정반대의 보고를 했다. 사실 전투에서 영웅담이 많이 나왔다. 미군장병들은 용감히 싸워 프랑스, 제정러시아, 영국으로부터 최고훈장을 받았다. 하지만 일부 미군지휘관들은 상황을 낙관할 수 없었다. 아르헨겔스크에서 미군연락장교에게 보고하던 유진 프린스 대위는 병사들의 사기가 땅에 떨어졌음을 알리는 보고서를 제출했다. 

프린스 대위의 보고 후 몇 주가 지나 헨켈맨 이등병과 B중대가 반기를 들었다. 65명 이상의 장병들이 3월 15일까지 최전선으로부터 철수하라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이는 사실 반란을 주도하던 장병들의 계략이었다. 그들은 최후통첩을 들은 동료들 중 과연 얼마나 많은 이들이 반란에 참여할 것인지 가늠하고자 했다. 반란세력이 지지자들을 확인하자 그들은 지휘관을 무장해제시켰다. 그리고 B중대를 장악해 전선에서 이탈했다. 

반란 모의자였던 실버 패리쉬 병장은 아칸소 주 제니 린든 태생으로 10대 때부터 오하이오 주 탄광의 광부로 일했다. 나중에는 디트로이트 피셔 자동차 바디샵에서 금형제작부로 일하다 징집됐다. 그는 독일과의 1차대전이 끝났음에도 자신과 동료들이 왜 일터를 나와 러시아의 젊은 군인들과 계속 싸워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패리쉬는 일기장에 썼다. “대다수 동료들이 볼셰비키 혁명군을 내심 지지한다. 나는 그들을 비난할 수 없다.”

몇 달 전 패리쉬 병장 소속 부대는 혁명군 저격병을 보호했던 마을을 불태웠다. 마을 여성들이 패리쉬 병장의 다리를 붙들고 자비를 구했지만, 병사들은 집들을 모두 불태워버렸다. 패리쉬의 일기장에는 “명령은 명령일 뿐”이라고 적혀 있다. 그러나 2월이 되자 패리쉬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그는 일기장에 “끔찍한 일이 끊이지 않는다”라고 적었다. 지휘관은 불만이 고조되는 상황을 수습하고자, B중대를 전선에서 빼내 최후통첩을 모의한 군인들을 처벌하지 않았다. 그리고 없던 일로 하는 대신, 빌 헨켈맨 이등병에게 그를 따르는 동료들을 잘 달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1919년 3월 30일. 아르헨겔스크 외곽에 주둔한 I중대는 후방에서 쉬고 있었다. 병사들이 화로 주위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모두 러시아 노동자들의 불만이 점차적으로 강하게 표출된 것처럼 자신들도 회의를 품고 있었다. 비와 우박과 폭설을 버텨냈다. 늪지대를 통과했고 물을 건넜고 전장에서 동료들을 잃었다. 장병들이 받은 편지에는 디트로이트 신문에서 오려낸 기사가 들어있었다. 미상원의원이 339연대를 러시아에 보낸 것이 현명한 결정이었는지를 묻는 내용이었다. 중사가 장병들에게 장비를 썰매에 싣고 전선으로 복귀하라고 명령했지만 이미 화살은 시위를 떠났다. 장병들은 부대를 떠나지 않겠다고 항명했고 정부가 철수일자를 결정하지 않는다면 폭동을 일으키겠다고 위협했다. 

중사는 곧바로 대위에게 보고했고 스튜어트 대령에게까지 반란 직전의 상황이 보고됐다. 스튜어트 대령은 정통육군 장교로 1899년 필리핀 폭동에서 물에 빠진 동료를 구해 미군 최고훈장까지 받았다. 미시건 주의 <그랜드 래피즈 해럴드>지는 스튜어트 대령을 “뼛속까지 미국장교이며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지휘관”이라고 칭찬했다. 스튜어트 대령은 장병들을 불러 폭동을 일으킬 경우에 사형까지 가능한 처벌을 상기시켰다. 한 장병이 물었다. “우리는 왜 러시아에서 싸우는가?” 스튜어트 대령은 “나도 모르겠다”고 말하며 “여하튼 우리가 지금 싸워야 하는 이유가 있다. 지금 싸우지 않으면 우리 모두 죽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대령은 누구든지 항명하겠다면 앞으로 나오라고 했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장병들은 이미 투옥된 동료 이등병을 풀어주면 전선으로 돌아가겠다고 했고 지휘관은 그 조건을 받아들였다. 장병들은 무기와 장비들을 마지못해 썰매에 실어 얼어붙은 드비나 강을 건너 기차에 올라 전선으로 향했다. 그들은 곧 혁명군의 포격과 함께 사기가 오른 적의 급습을 받았다. 

 

“우리는 언제 집으로 돌아가는가?”

검열관들이 장병들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내용의 편지를 계속 막을 수는 없었다. 결국 <그랜드 래피즈 헤럴드>지에 기사가 나왔다. 그 제목은 다음과 같다. ‘러시아 파병 미군 반란 사태, 곤혹스런 백악관: 339연대 총체적 반란 위협; 언제 집에 가는가, 장병들은 알고 싶다.’

윌슨 대통령도 이제 충분히 사태를 파악했다. 3월 그는 파리에서 북부 러시아 미군을 통솔하기 위해 새로 임명한 와일즈 P. 리처드슨 중장을 만나 백해의 얼음이 깨지는 대로 아르헨겔스크에서 미군을 철수하라고 명령했다. 1919년 4월 8일 스튜어트 대령은 장병들에게 마침내 집에 간다는 사실을 통보했다. 하지만 동시에 돌아가는 날까지 전투명령에 복종할 것을 전달했다. “미군복을 입고 활동한 자네들의 평판은 살아있는 내내 따라다닐 것이며 절대로 잊히지 않을 것”이라고 그는 경고했다. 

미군 대다수가 1919년 6월 말까지 러시아 북부 지역에서 모두 철수했다. 그들 중 144명이 전투에서, 또는 부상으로 사망했고 100명이 질병, 자살, 사고로 사망했다. 305명은 포탄, 총알, 사고로 부상당했으나 살아남았다. 영국군은 1919년 10월에서야 아르헨겔스크에서 철수했고 이듬해 2월 볼셰비키 혁명군이 남은 제정 러시아군으로부터 도시를 접수했다. 미국의 시베리아 탐험도 1920년 모두 끝났다. 

미 육군은 1919년 가을, 러시아 북부에서의 전사자 120명의 시신을 넘겨받았다. 전사자들이 디트로이트에 돌아왔을 때, 그들의 마지막 가는 길을 위해 조용한 거리에 나팔수가 동원됐다. 러시아 전투에 참가했던 한 전사자의 동생 시어도어 맥페일은 이 행진을 보며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억했다. “우리들의 불쌍한 형제들을 죽음으로 이끈 어리석은 원정싸움과 신도 저버린 비참한 장소에서 숨을 거둔 장병들을 생각했다.”

미군이 수치스럽게 철수하자 비난이 이어졌다. 국가기록원에 숨어있던 군사메모는 당시 상황을 선전포고 없이 벌어진 전쟁 중의 전쟁으로 묘사하고 있다. 휴 S. 마틴 대위는 아르헨겔스크의 미군연락장교에게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는 러시아혁명과 전쟁을 한 것이다. 모두들 알고 있는 진실이다. 하지만 연합군 소속 어떤 국가도 러시아혁명에 개입한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그 결과 병사들이 들었던 이야기는 다를 수도 있고 서로 모순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은 끊임없이 질문했다. 서부전선에서 전투가 끝났음에도 왜 이곳에서 계속 전투가 벌어지는가. 무슨 이유로 볼셰비키와 싸우는가, 왜 러시아 스스로 자기들 문제를 처리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가 등등의 질문들이었다.”

러시아 북부 참전용사들은 이 전쟁을 ‘북극곰 탐험’으로 불렀다. 1922년 이들은 북극곰협회를 만들었다. 그들은 여전히 러시아 북부지역에 묻힌 120명의 동료 전사자들을 고향으로 데려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북극곰 탐험대’로 불렸던 아르헨겔스크 참전용사들과 미시건 주 정치인들이 연합해 의회 로비를 벌여 후원금을 모았다. 1929년 7월, 5명의 북극곰협회 멤버가 러시아를 향했다. 그들은 참전용사들이 직접 남긴 메모(‘발라드 중위가 죽은 곳’, ‘6구의 시신이 묻힌 곳’)등을 토대로 지도를 만들었다. 

이들은 러시아에서 86구의 미군 시신을 찾아냈다. 이때 고향으로 돌아온 전사자 시신들 중에는 우스트 파덴가의 병원창고에 남겨졌던 오하이주 출신의 의무관 파워스 중위도 포함됐다. 시신은 특별열차편으로 디트로이트에 돌아왔다. 대다수가 1930년 현충일에 묻혔고, 일부는 미시건 주 트로이시의 북극곰 동상 인근 묘지에 묻히기도 했다. 1934년엔 12구의 시신이 러시아에서 돌아왔다. 그러나, 아직도 미군 20명 이상이 실종된 상태다. 

 

 

글·마이클 M. 필립 Michael M. Phillips
기자. 이 글은 <월스트리트 저널>에 ‘The one time American troops fought Russians was at the end of World War 1 – and they lost’라는 제목으로 실린 기사다.

번역·이정필
번역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