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급 요리의 사회학
최고의 셰프가 되기 위한 레시피
과거에는 최고의 셰프들이 항상 주방에만 있었으나, 요즘은 다들 대외 무대로 나서는 경우가 많다. 최고의 스타 셰프들은 광고 뿐 아니라 방송에도 출연하며 크게 인기를 끌고, 언론에서도 이들의 실력에 찬사를 보낸다. 그런데 과연 이 모든 게 오로지 요리사로서의 능력에만 기인한 현상일까? 프리미엄 미식계를 살펴보면 누구와 어울리고 누구에게 간택되느냐가 곧 이 세계에서의 능력과 직결됨을 알 수 있다.
2003년 2월 24일 오후, 프랑스 최고의 셰프 베르나르 루아조가 침실에서 스스로 엽총을 쏘아 세상을 마감했다. 부검 결과, 의심의 여지 없는 자살이었다. 하지만 고인이 유언 한 마디 없이 세상을 떠났기에, 업계 동료나 언론은 물론 가족들 내부에서도 고인의 자살 동기를 찾으려 애를 썼다.
여러 가지 추측이 난무하는 가운데 일단 업계에서의 평가 하락이 주된 자살 동기가 아니었겠느냐는 주장에 힘이 실렸다. 고인의 <라 코트 도르(La Côte d’Or)> 레스토랑에 대한 <고&미요(Gault & Millau)> 가이드 평점이 (20점 만점 중) 19점에서 17점으로 내려간 지 얼마 안 돼 일어난 일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프랑스에서 가장 존경받던 셰프이자 루아조의 오랜 친구였던 폴 보퀴즈는 “고&미요, 당신들이 이겼다. 당신들 평가 하나로 사람 목숨이 날아가지 않았나”라며 쓴 소리를 던졌다.(1)
‘별점 하락’이 자살 동기?
당시 프랑스 고급 요리업계 조합장이었던 유명 셰프 자크 푸르셀도 업계 동료들에게 “언론이 루아조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라는 내용의 공개서신을 보내며 비난의 목소리를 높였다. <피가로>지의 요리 평론가 프랑수아 시몽도 라 코트 도르 레스토랑의 미슐랭 가이드 등급이 3스타에서 2스타로 떨어질 위기였다는 말을 흘렸다.(2) <고&미요> 측은 이를 부인했다. <고&미요> 가이드의 파트리크 마에노브 부장은 “평점이 사람을 죽인 건 아니다. 별 등급이 내려간 것에 그 책임이 있지도 않다. (...) 이 최고의 셰프에게는 분명 다른 문제, 다른 고민이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3)
이렇듯 셰프들은 레스토랑 가이드나 미식평론가 쪽으로 비난의 화살을 돌렸고, 비난의 대상이 된 요리비평가 및 가이드북 측은 다시 루아조의 자금 문제를 내세웠으며, 루아조의 금융 설계사는 고인의 자금 상황에 별 문제가 없었다고 반박하며 루아조가 정신적으로 약해져 있었다는 견해를 제시했다. 루아조 계열사의 소유주이자 경영자로서 역시 레스토랑 가이드와 요리 칼럼니스트의 인정이 필요했던 루아조의 아내는 고인이 일에 대해 느끼던 압박감을 내세웠다. 루아조의 자살 동기에 대해 나름의 설명을 내놓은 측근의 모습을 보면 프랑스 요리업계의 축소판이나 다름없다. 미식계의 ‘장(Un champs)’(4) 내부 상황이 단적으로 드러난 일례인 것이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고급 의상업계에 대한 소논문에서 프리미엄 문화 재화 시장의 특징을 정리했다.(5) 그에 따르면 이 시장에서는 일단 생산자와 상품 각각의 희소성에 따라 재화의 가치가 정해진다. 생산자의 희소성 자체도 업계 내에서 그 입지의 희소함에 의해 결정되며, 여기에 이 희소한 생산자의 낙인에 대한 맹신이 더해지면 생산자의 절대적 영향력이 해당 문화 상품에 그대로 이식된다.
이런 논리에 따른 미식계의 분석에서는 일단 셰프의 실력 및 고급 요리의 가치에 대한 믿음이 자리잡는 방식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자면 이런 믿음의 형성에 기여하는 각 주체들을 짚어봐야 하는데, 다양한 레스토랑 가이드와 요리 전문지, 요리비평가와 칼럼니스트, 업계의 단체 및 박물관, 기념물 등을 중심으로 요리의 신화화 과정을 살펴보는 것이다.
미슐랭 가이드의 ‘절대권력’
이 중 프랑스 미식계를 꽉 잡고 있는 주체는 무엇일까? 단연 <미슐랭 가이드>다. 평가의 공신력에서 비롯되는 미슐랭의 절대적 영향력은 요리의 품질을 평가하는 미슐랭의 독점적인 지위를 보여준다. 즉, (누구나 인정하는) ‘최고의 셰프’를 자처하려면 미슐랭의 힘이 필요한 것이다.
자동차가 등장한 1900년, 타이어 회사 미슐랭(Michelin, 한국 지사명 ‘미쉐린’)에서는 자동차를 이용한 새로운 여행 방식을 장려하기 위해 <미슐랭 가이드>라는 책자를 만들어 자동차 운전자들에게 무상으로 배포했다. 창간호는 총 3만 5,000부 발행됐으며, 빨간색 표지의 이 책자 안에는 프랑스 열세 개 도시의 지도와 함께 호텔, 우체국, 기차역, 병원 및 약국 주소가 수록됐고, 휘발유 단가와 함께 주유소 정보도 게재됐다.
처음에는 이렇듯 운전자 및 일반 대중을 위한 실용적인 안내서로 출발했으나, 2차 대전 때부터는 요리 분야의 대표적인 참고자료로 자리잡았다. 1920년대 연간 발행부수는 6만 부에서 9만 부 사이였으며, 이후 꾸준히 증가한 발행부수는 1930년대 내내 10만부를 상회했다. 2차 대전이 끝난 후에도 미슐랭 가이드의 발행부수는 계속 늘어나 1970년대 60만부에 달한 뒤, 이후 50만~70만부 선으로 안정됐다.(6)
이에 모든 차의 내부 수납함에는 항상 미슐랭 가이드가 들어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프리미엄 요리업계에서 미슐랭 가이드가 맡은 제도적 역할은 원래 독자층의 범주 내로 한정된다. 오늘날과 같이 이 가이드 책자의 지위와 영향력이 높아진 건 레스토랑에 대한 평가 시스템으로 설명되는데, 레스토랑의 문화적 영향력은 숙소와 음식점에 대한 정보를 찾는 여행자나 식도락가 수준을 훨씬 뛰어넘기 때문이다. 프랑스 미식계의 광대한 영역에서 미슐랭 가이드와 그 등급 체계는 요리에 대한 가치 평가의 절대적 기준으로 자리잡았다(박스기사 참고).
프랑스 내 고급 요리에 대한 신뢰가 양산되는 과정에서 <미슐랭>이나 <고&미요>, <보탱 구르망> 같은 가이드 책자가 압도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긴 하나, 수적으로는 사실 소수에 불과하다. 음식에 대한 논평은 다른 잡지나 정기간행물에서도 많이 내놓기 때문이다. <피가로>지에서 (2013년까지) 16년 간 음식 칼럼을 쓴 프랑수아 시몽이나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르몽드> 장클로드 리보 둘 다 프랑스의 영향력 있는 요리비평가이며, 미국의 퍼트리샤 웰스 같은 경우는 사실 더 말할 필요도 없다. <렉스프레스>와 이후 파리판 <인터내셔널 해럴드 트리뷴>에 글을 기고하며 적잖은 영향력을 행사한 퍼트리샤 웰스는 25년간 다수의 칼럼을 기고하며 전 세계에 프랑스 요리를 퍼뜨리는 데 일조했다. 특히 고급 레스토랑의 주요 고객인 미국인 사업가와 부유한 관광객의 레스토랑 선택에 영향을 미쳤다.
웰스는 주로 칭찬 위주의 글을 썼다. 특히 ‘스타 셰프’ 조엘 로뷔숑이 은퇴할 무렵에는 그를 ‘세기의 요리사’로 수식하며 칭송했고, 이후 그와 함께 공저로 요리책도 출간했다.(7) 물론 로뷔숑 셰프만을 칭찬한 건 아니었다. 웰스는 그 뒤를 이은 브누아 기샤르, 도미니크 부셰, 프레데리크 앙통 등 수많은 ‘로뷔숑 주니어’의 커리어도 함께 격려하며 이들의 행보를 지켜봤다. 가령 1997년 4월 4일자 <해럴드 트리뷴>에서 그는 “프레데리크 앙통의 이름을 처음 들어봤을 수도 있겠지만 앞으로 이 이름을 또 들을 일이 있을 것”이라며 “앙통은 요리 학교에서 배운 모든 것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요리사로, 이런 기본기에 자기만의 재능을 더해 재료를 살려내고 입안에서 미각을 깨우는 황홀한 조합을 만들어내며 입안을 풍성하게 채워준다”라고 격찬을 아끼지 않았다.
요리사의 계보
요리에 대한 평가는 콩쿠르를 통해서도 이뤄진다. 프랑스 내에만도 수백 개의 요리 콩쿠르가 존재하는데, 요리 대회의 표본으로서 가장 인기 있는 콩쿠르는 프랑스 최고의 국가 공인 명장(MOF, Meilleur Ouvrier de France)을 선정하는 대회다. 1924년 신설된 프랑스 국가 공인 명장직은 프랑스 국립 명장 협회에서 선정하는데, 해당 협회는 폭넓은 직업군에서 수십 개의 다양한 직업적 노하우를 발굴하기 위한 대회를 후원하는 비영리 조직이다.
명장 선발 대회의 ‘음식 및 요리’ 부문 콩쿠르는 수백 명의 지원자 가운데 결선에 오를 40인을 선정한 뒤, 그중 4~5인만 명장으로 최종 발탁한다. 명장으로 선발된 가장 유명한 수상자는 보퀴즈(1961)와 장 트루아그로(1965), 기 르게(1972), 로제 베르제(1972), 알랭 샤펠(1973), 조엘 로뷔숑(1976), 필리프 르장드르(1996) 등으로, 대개 미슐랭 3스타의 레스토랑을 소유한 셰프들이지만 미슐랭 3스타 셰프 중에는 한 번도 명장 직위를 받은 적이 없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이 콩쿠르의 ‘음식 및 요리’ 심사단은 보통 저명한 프랑스 셰프로 구성된다. 1989년과 2011년 무렵에는 당대 최고의 프랑스 셰프 폴 보퀴즈가 최종 심사단을 이끌었다. 수상자에게는 업계 최고의 권위가 부여되며, 최종 결선에 오른 것 자체로도 굉장한 영광으로 여겨지며 높이 평가된다. 이에 결선에 오른 셰프들은 요리 전문지 <르 셰프> 기사로 다뤄질뿐더러 관련 자료와 신상 정보도 공개된다. 프랑스 국가 공인 명장이 되는 것 자체가 워낙 힘든 과업이라 명장만 되면 업계의 주요 기관과 업계로부터 관심을 살 수 있고, 또 결선에 이름을 올리는 것만으로도 신진 셰프로서의 길이 열리는 건 사실이나 이 문턱을 넘은 요리사는 대개 스타 셰프로 이름을 올릴 준비가 돼있는 사람들이다.
가령 1991년 치러진 ‘음식 및 요리’ 부문 콩쿠르에서 결선에 진출한 19인 가운데 12인은 이미 3스타 레스토랑 주방에서 일했거나 수습 과정을 거친 사람이었고, 3스타 셰프 곁에서 직접 주방 보조를 한 경우도 있었다. 심지어 이미 유수의 요리 대회 수상 경력을 보유한 사람도 있었다.
이는 기존의 명성이나 인맥이 심사단에게 영향을 미쳤다는 뜻이 아니다. 다만 최종 결선에 오른 (평균 연령 37세의) 젊은 셰프들은 이미 기성 요리 업계에 발을 들인 만큼 유망한 스타 셰프가 되기 위한 방식과 기준, 기대치, 기술 등에 일상적으로 노출됐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명장 대회의 결선 진출 티켓은 셰프라는 제한적인 소수 집단 내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인시켜줌과 동시에 프리미엄 리그 안으로 진입하는 입장권이 된다.
거의 전적으로 남성들로만 이루어진 이 주류 셰프의 리그 안으로 들어가려면 셰프나 조리사로서 (공공연히 혹은 암묵적으로 요구되는) 자격 요건을 갖추어야 한다. 요리 학교 이수 과정을 통해 받는 학위와 국가 공인 자격증이 대표적이며, 시험을 통해 검증된 이론 능력도 그중 하나가 될 수 있다. 하지만 현장에서의 실습 또한 굉장히 중요하다. 머릿속으로 알고 있는 지식을 실제 조리 과정에서 음식으로 녹여내야 하기 때문이다. 현장 실습의 중요성에 대해 조엘 로뷔숑은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제아무리 요리사로서의 능력과 자질을 갖추었더라도 조리 과정에서의 몇 가지 원칙은 말이나 행동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가령 음식의 맛이 결정되거나 맛이 안정화되는 게 그중 하나인데, 일례로 송로 버섯을 이용한 스튜를 만들 때 -그 향으로 짐작컨대- 어느 한 순간 버섯의 맛이 발산되는 때가 있다. 정확히 바로 이 순간에 내 손이 들어가야 한다. (...) 적절한 타이밍에 셰프의 조리가 이뤄졌다면 제대로 된 맛이 결정된다. 요리를 좋아한다면 스스로 이 방법을 터득할 수 있는데, 그 과정에서는 반드시 수차례의 경험과 시행착오가 수반된다.”(8)
물론 셰프의 개인적인 실전 경험이 전부는 아니다. 이와 더불어 대내외적으로 어떤 인맥 속에서 이런 실전 경험을 쌓았느냐도 고려해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누구’
즉, 요리 지망생이 성공을 위해 알아야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누구’다. 누구 밑에서 실습을 했느냐의 문제는 요리사로서의 이력과 행보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다. 한 유명 셰프의 후계자가 되겠다는 건 곧 그 셰프의 계보 속으로 들어가 이 지극히 배타적인 미식업계에서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인적 자산을 구축하겠다는 뜻이다. 특정 셰프에 관한 글을 쓸 때 그가 어떤 레스토랑에서 일했고, 또 누구 밑에서 요리 공부를 했는지 언급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런 요리사 계보를 밝히는 건 경력이 짧은 신진 셰프 뿐 아니라 기성 셰프들에게도 득이 된다. 가령 로제 베르제에서 알랭 뒤카스로, 그리고 알랭 뒤카스에서 미셸 사랑과 알랭 솔리베레스로, 여기에서 다시 마르크 미레티로 이어지는 셰프의 계보에서, 뒤카스는 -비록 스스로의 명성과 인지도가 그 스승을 뛰어넘었음에도- 일단 베르제와의 인맥 뿐 아니라 그가 멘토로 삼은 미셸 게라르와 샤펠과의 관계를 통해서도 득을 본다. 뒤카스와 사랑, 솔리베레스는 모두 베르제의 후예임을 자처하면서 베르제 계보로 편입되는데, 그 모태가 된 베르제는 뒤카스와 솔리베레스를 키워낸 사실을 알림으로써 자신이 프랑스 요리계에 남긴 유산을 과시할 수 있다.
요리사 계보에 대한 고민을 눈에 띄게 보여준 건 단연 폴 보퀴즈 제자 협회다. 보퀴즈의 제자들은 스승이 50번째 생일을 맞이하던 1976년, 이를 기념해 폴 보퀴즈 제자 협회를 설립했다. 스승의 이름과 그 유산을 길이 보전하기 위해서다. 보퀴즈 본인도 정통성 있는 셰프 계보의 뒤를 잇는 후예로서, 리옹의 라 메르 브라지에와 (자신이 2년 간 수습으로 일했던) 레스토랑 라 피라미드의 전설적인 셰프 페르낭 푸앵의 제자이며, 다섯 명의 프랑스 국가 공인 명장을 키워낸 스승이다.
미식업계에서는 혈연관계도 빼놓을 수 없는 요소다. 1990년대 미슐랭 3스타 셰프 37명 가운데 21명은 요리사나 객주, 카페 점주 집안 출신이었다. 어릴 때부터 손님에게 판매하는 수준의 음식을 접하고 요리의 기본기를 터득한 이들은 음식점의 회전 속도에 친숙한 환경 속에서 손쉽게 요리 실습을 이어갔다. 누군가는 업계의 지식을 조금씩 쌓아가며 본인의 실력을 입증해야 했겠지만, 요식업계 집안에서 자란 이들은 일찍이 물질 자본에 더해, 명성 자본과 기술 자본을 물려받고 일을 시작하는 것이다.
이런 혈연관계는 원래 폐쇄적인 하이 클래스 요리업계로 들어가는 진입로를 더욱 폐쇄적으로 만든다. 예의 37인 중 다수의 요리사 집안 출신 셰프들은 가족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데, 그중 쌍둥이 요리사 자크&로랑 푸르셀이나 주아니 지역의 부자 요리사 미셸&장미셸 로랭, 스트라스부르의 부자 요리사 마르크&폴 에베를린 등이 대표적이다. 1990년대 당시 최소 5명의 셰프가 요리 ‘명문가’ 자손이었으며, 그 중 3개 가문(블랑, 피크, 트루아그로)은 거의 기업 체제였다.
장인인가, 장사꾼인가? 경계가 무너지다
업계의 ‘가족관계’를 좀 더 폭넓게 보면, 세대 간에 영향력을 전수하기 적합한 요리 명문가 체제와 도제 시스템으로 구축된 업계 인맥의 개념을 합쳐서 생각할 수 있다. 미식계는 사실 외부의 평가에 대해 어느 정도 독립적인 상황이었다. 시장 논리나 학위 체제에 따른 평가 및 심사 시스템과 상관없이 좁은 구조 안에서 내부적으로 직위 승계가 이뤄지기 때문이다.
일단 셰프의 직위 승계는 직업적인 선후배 관계와 혈연관계를 통해 동시에 이뤄진다. 가령 (본인 이름을 건 레스토랑으로 미슐랭 1성 및 보탱 구르망 3성을 받은 셰프) 피에르 오르시의 경우, 보퀴즈 밑에서 수련한 뒤 폴 보퀴즈 제자협회 회원으로 활동했다. 이후 오르시는 제라르 비냐, 자크 롤랑시, 스테판 가보리오 등의 셰프를 길러냈으며, 가보리오는 다시 파스칼 카이외와 세바스티앵 샹브뤼, 실뱅 드로, 카츠미 이시다 등을 제자로 양성했다. 이런 직위 승계는 오르시 집안을 통해서도 동시에 이뤄졌는데, 오르시의 아들 4명도 세계 각국의 요식업계에서 활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 중 로랑은 보퀴즈 밑에서 로제 잘루와 함께 수련 기간을 거쳤다.
이름 있는 레스토랑에서 수련했거나, 특정 책임직 또는 파트 셰프로 일했다는 사실은 공인된 스타 셰프 곁에서 일한 것과 동급으로 취급된다. 공인된 기관에 의해 인정받으면 후광이 생기고, 누구나 다 알아주는 레스토랑에서 일한 경력이 있다면 동급의 다른 레스토랑으로 들어가기도 더 쉬워진다. 추천받기도 쉽고, 비슷한 수준의 업무 역량을 보장받기 때문이다.
물론 이 정도 인정을 받을 수 있는 레스토랑의 수는 극히 제한적이다. 영향력 있는 유명 셰프가 운영하는 것이라도 모두 이 정도의 권위를 갖고 있진 않다. 프랑스에는 셰프보다 명성이 더 높은 극소수의 레스토랑이 존재하는데, 그 중 대표적인 곳은 파리의 라 투르 다르장, 르 타유방, 르 그랑 베푸르, 파비용 르두아양 등이다. 그러나 명망 있는 이들 레스토랑 역시 유명 셰프나 사장의 지속적인 쇄신 노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기존의 인지도를 유지하기 어렵다. 베르나르 루아조 또한 부르고뉴에 있는 한 레스토랑의 명성을 되살리려 부단히 노력했다.
사망 당시 루아조는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언론에 노출되는 기회가 많아지면서 상업적 성공 쪽으로 시야가 트였고, 그로 인해 부와 명성을 거머쥠과 동시에 사업 성장의 가능성도 높아졌다. 이런 루아조의 행보는 1970년대에 처음으로 상업적 영역에 발을 들인 1세대 유명 셰프 미셸 게라르의 그것과 정확히 일치한다. 게라르가 프랑스 남서부에서 운영했던 레스토랑 레 프레 되제니는 그 당시 주요 가이드 책자에 수록된 곳들 가운데 가장 등급이 높은 레스토랑이었다. ‘새로운 요리’의 선두 주자로 각광받던 게라르는 1976년『 La Grande Cuisine minceur(날씬해지는 요리)』라는 책의 출간으로 큰 성공을 거뒀고, 그 해에는 네슬레와의 계약도 성사됐다.
<고&미요>는 ‘프랑스 최고의 8대 셰프’ 순위를 선정한 발간호에서 그가 이렇게 ‘금단의 영역’에 발을 들인 첫 요리사가 된 것에 대해 물었는데, 이에 게라르는 “기업과 손을 잡고 타락한 첫 프랑스 셰프”가 된 사실을 순순히 인정했다. 다만 이에 덧붙여 게라르는 “(셰프로서의) 노하우과 상상력, 세련된 기교”를 네슬레 측에 전해주기 위함이었다고 설명했다. 당시 네슬레는 ‘핀두스’라는 상표로 간편 조리 식품 라인을 프랑스 시장에 출시해 미국 쪽 자회사의 행보를 따라가고 있었다.
장인과 장사꾼의 경계는 점점 흐려졌다. 보퀴즈와 뒤카스, 로뷔숑 등 유명한 셰프는 장사꾼의 세계로 빠졌다. 기업과 계약을 맺고 여러 상품에 자기 이름을 빌려줬다. 마트 상품, 프랜차이즈 음식점에 이르기까지 유명 셰프의 이름이 빠지지 않았다. 자연주의를 내걸고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 이색적인 셰프 이미지를 구축한 마르크 베이라 역시 다년간 단체 급식 전문 다국적기업 소덱소의 컨설턴트로 일했다. 오늘날 판매되는 요리용 장갑에는 티에리 마르크스의 이름이 붙어 있으며, 일본산 식도에는 시릴 리냐크의 얼굴이 그려져 있고, 고급 제과용 도구에는 피에르 에르메의 이름이, 친환경 용기에는 크리스토프 미샬라크의 약자가 들어 있다.
글·리크 판타지아 Rick Fantasia
사회학자. 『Gastronomie française à la sauce américaine. Enquête sur l'industrialisation de pratiques artisanales 미국식 소스를 더한 프랑스 음식 : 수공업 방식의 산업화에 관한 연구』(Seuil, ‘Liber’ 컬렉션, Paris, 2021) 등의 저서가 있다. 본 기사는 해당 저서에 수록된 내용을 재구성한 것이다.
번역·배영란
번역위원
(1) Craig S. Smith, ‘Bitterness follows French chef’s death’, <The New York Times>, 2003년 2월 26일.
(2) William Echikson, ‘Death of a chef’, <The New Yorker>, 2003년 5월 12일. 미슐랭 가이드 측 대변인은 루아조가 운영하던 레스토랑의 별 등급이 “적어도 그 해에는 떨어질 상황이 아니었다”라는 점을 언급했다.
(3) ‘La disparition tragique du chef Bernard Loiseau 베르나르 루아조 셰프의 비극적인 사망’, <르몽드>, 2003년 2월 25일.
(4) 사회학적 의미에서 ‘장(Un champ)’은 폐쇄적이고 개별적인 인간 활동영역을 뜻하는 개념이다. 자체적인 역사와 규범, 제도를 갖추고 있으며 내부적으로 합의와 반목의 관계가 나타나고 고유의 자원과 보상 체계가 존재한다.
(5) Pierre Bourdieu, Yvette Delsaut, 『Le couturier et sa griffe : contribution à une théorie de la magie 고급 의상 디자이너와 브랜드 각인-주술 이론에의 기여』, <Actes de la recherche en sciences sociales 사회학 연구집>, 1권 1호, Paris, 1975.
(6) Jean-François Mesplède, 『Trois étoiles au Michelin. Une histoire de la haute gastronomie française 미슐랭 3성 : 프랑스 고급 요리의 역사』, Gründ, Paris, 1998.
(7),(8) 『Cuisine actuelle : Patricia Wells Presents the Cuisine of Joël Robuchon』, Macmillan, London, 1993.
레스토랑 등급의 표준이 된 ‘미슐랭’
“미슐랭 3스타 레스토랑에서는 굉장히 훌륭한 식사를 맛볼 수 있고, 간혹 환상의 맛을 느낄 수 있다. 고품질의 와인도 주문할 수 있으며 서비스도 완벽하고, 우아한 분위기에서 식사가 가능하다.” 미슐랭의 평가 등급은 별 개수에 따라 3개로 나뉜다. 미슐랭 1스타 레스토랑은 ‘해당 범주의 훌륭한 요리’를 제공하는 곳으로, “지나는 길에 한번쯤 들려보면 좋은 음식점”이다. 미슐랭 2스타 레스토랑은 ‘훌륭한 요리’를 제공하는 음식점으로, “길을 우회해서 갈 만한 가치가 있는 곳”에 해당한다. 마지막 미슐랭 3스타 레스토랑은 ‘최고의 식사’를 선사하는 곳으로, “일부러 찾아갈 만한 가치가 있는 음식점”이다. 이런 미슐랭의 평가 체계는 온통 베일에 싸여 있다. 일단 음식점에 대한 모니터 작업 자체가 어떤 방식으로 이뤄지는지 철저히 비밀에 부쳐져 있다. 가이드 작성을 위해 몰래 음식점에 가서 식사를 하고 오는 모니터 요원의 정확한 수도 밝혀지지 않았으며, 현장에서 이 요원들은 직원에게 철저히 신분을 감추고, (매장에 신분을 밝히며 종종 공짜식사를 하는 일부 평론가와는 달리) 식사 후 마지막에 음식값도 직접 계산한다. 이렇듯 철저한 기밀 유지 외에도, 미슐랭 신화를 만드는 요소가 있다. 바로 영리적 속성이 배제된다는 점이다. 미슐랭 등급에 대한 신뢰도가 높아진 건 (다른 레스토랑 가이드와는 달리) 무려 85년 동안 모든 광고가 금지됐다는 점도 대단히 중요한 요소다. 미슐랭 본사에서 가이드 제작비용을 담당하는 안정적인 자금 구조와도 무관하지 않은 이런 제작 방침 덕에 미슐랭 가이드는 (최소한 자금 측면에 있어서는) 이해관계와 관련한 의혹에서 언제나 자유롭다. 따라서 미슐랭 가이드는 그 판매량이 하락하고 인터넷 평가 및 평점 체계가 일반화된 지금도 여전히 프랑스 미식계의 상징적인 기둥 역할을 한다. 미슐랭 가이드의 후광을 만든 세 번째 요소는 영속성이다. 오랜 역사의 유서 깊은 미슐랭 가이드는 발간일도 언제나 고정적이고, 내부 페이지 구성과 소개 문구만 조금 달라졌을 뿐 늘 빨간 표지에 변함없는 형태로 출간된다. 게다가 존경받는 장수 가족기업이 발행하는 가이드북이라는 점도 미슐랭 가이드의 높은 신뢰도와 건실한 이미지에 기여한다. 미슐랭 신화의 네 번째 요소는 앞의 세 가지 성공 비결에 따른 부수적 결과로서, 미슐랭 가이드의 공신력 그 자체다. 미슐랭 가이드의 위력은 언론을 통해서도 자주 보도되며, 요리 분야가 프랑스 문화유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큰 만큼 미슐랭 가이드의 위력도 클 수밖에 없다. 미슐랭 3스타를 획득한 셰프는 상당한 문화적 권력을 부여받으며, 미슐랭 가이드의 발간은 매년 언론에 대서특필된다. 승자와 패자가 공존하는 <우수 레스토랑 명부(Tableau d'honneur)> 역시 (3스타 셰프 대부분이 유명인사인 만큼) 다수의 프랑스인을 설레게 한다. 이렇듯, 미슐랭 가이드를 둘러싼 신화는 ‘음식의 문화적 권력’에 대한 믿음을 지속하는 데 일조한다. |
레스토랑 탄생의 역사
프랑스 요리는 꽤 오랜 기간 동안 길드 중심으로 그 판매가 세분화돼 있었다. 스튜의 판매는 조리식품 상인이 담당했고, 선술집 상인에게는 와인의 판매가 허용됐으며, 고기 요리는 구이 전문 상인이 팔았다. 이후 18세기 중엽 무렵 새로이 ‘레스토랑’이 등장한다. 인쇄본이 처음 나온 15세기 말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최초의 ‘요리책’이 발행된 뒤, 프랑스에서는 1651년 라 바렌이 집필한『 요리사 프랑수아』(1)의 발간으로 프랑스 요리의 제작 환경이 집대성된다. 이 책은 귀족의 요리 절차를 정리해서 설명하고 있으며, 프랑스만의 전형적인 조리 방식에 대해서도 기술한다. 그 시기 새로운 향신료와 양념이 사용되고 혁신적인 조리 기법이 탄생함으로써 중세와 확연히 다른 프랑스만의 식습관이 발달했기 때문이다. 이런 변화 양상은 이후 발간된 다수의 요리책에서도 확인되며, 이에 17세기 후반에 나온 요리책들은 저마다 (조리법이나 조언 및 소견 등을 통해) 고유한 조리 방식을 내세운다. 그런데 이 초창기 요리책들을 통해서만 프랑스 요리의 기원을 찾아볼 수 있는 건 아니다. 물론 이들 저서의 활약으로 프랑스 요리의 주된 요소들이 정의되긴 했으나, 실질적인 관행 또한 제도화될 필요가 있었다. 이런 제도적 기반이 발달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된 건 바로 프랑스 대혁명기였다. 이때 처음으로 레스토랑이란 공간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대혁명과 레스토랑 등장의 선후 관계는 여전히 논란이 분분하다. 참고로 얼마 전 프랑스에서 개봉한 에릭 베스나르 감독의 영화 <맛있는 곳 Délicieux>에서도 이와 관련해 다뤘다. 가장 단순한 설명은 대혁명 이후의 공포 정치기에 상류층 귀족이 망명하거나 처형돼 그 집에서 일하던 요리사들이 부득이하게 음식점을 열어야 하는 상황이 됐다는 것이다. 그런데 스티븐 메넬 등이 지적하는 바와 같이 “레스토랑이란 이름으로 불리며 대중에게 개방된 이 새로운 형태의 식사 공간이 맨 처음 파리에 등장한 건 대혁명이 일어나기 20년쯤 전의 일이었다.”(2) 가장 설득력 있는 주장 중 하나는 대혁명으로 기존 길드 체계가 무너지면서 레스토랑이라는 새로운 시설을 매개로 귀족층의 수제 조리 방식이 부르주아 계급으로 옮겨가는 환경이 조성됐다는 것이다.(3) 원래 자영업자들은 ‘부이용 레스토랑 Bouillon restaurant’이라는 보양식을 만들어 팔았다. ‘부이용 레스토랑’은 ‘원기 회복(Restaurer)’을 위해 만든 맑은 고깃국물로 만든 음식이었다. 그런데 1765년 무렵, 이 부이용 레스토랑을 만들어 팔던 한 빵집 주인이 파리에 간판 하나를 내걸고는 기존에 팔던 보양식에 더해 (길드별로 판매가 제한돼 있던) 다른 음식을 판매했다. 그러자 (음식을 조리해서 공급하는) 조리식품 상인 길드는 그에게 소송을 걸었고, 법원에서는 빵집 주인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는 얼마 후 사라질 길드 체계의 종말을 의미하는 동시에 점내에서 조리 음식을 사먹는 새로운 공간의 발전을 부추겼다. ‘레스토랑’이라는 용어가 자리잡는 데는 이후에도 수십 년의 세월이 더 필요했지만, 대혁명 직후부터 이 새로운 공간이 크게 번성하기 시작한다. 레스토랑의 점포 수는 제정시대에 500~600개로 급증했고, 왕정복고시대(1814~1848)에는 무려 3,000개에 달했다. 대혁명이 군주제를 누르고 승승장구한 것처럼, 레스토랑은 기세 좋게 확산됐다. 레스토랑의 확산세는 파리가 다른 지역에 비해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왕의 거처였던 베르사유와 파리의 구분이 사라지면서 정치, 문화, 상업의 중심축은 다시 수도로 이전했고, 이로써 파리는 명실상부한 국가의 중심이 됐다. 게다가 파리가 레스토랑의 확산세로 유명해지자 레스토랑을 둘러싼 호기심은 파리에 대한 동경을 더욱 증폭시켰다. 이에 레베카 스팽도 자신의 저서에서 “파리 시내 레스토랑의 명성이 높아질수록, 식사는 역시 파리에서 해야 한다는 신화적 믿음이 확산됐다”라고 기술한다.(4) 파리 지역에 자리잡기 시작한 레스토랑은 다른 지역으로도 빠르게 확산됐고, 기존의 주점과 선술집 역시 레스토랑으로 탈바꿈한다. 대신 과거 상류층 고급 요리의 호화롭고 과장된 양상은 (장-로베르 피트가 기술하는 바와 같이) 이제 파리에서 지방의 다른 전초 기지로 옮겨갔다. “과거 상류층의 호화로운 식사는 파리 대로(카페 리슈, 카페 앙글레 등)나 리옹 벨쿠르 광장, 보르도 투르니 길목의 고급 레스토랑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곳에는 제정시대 및 왕정복고시대 (주요 행사가 있을 때 정찬을 준비하던) 특별 요리사 앙토냉 카렘과 그 후예들(뒤글레레, 위르뱅 뒤부아, 에스코피에 등)이 개발해 정례화한 과거의 레시피가 정립돼 있다. 따라서 훌륭한 생선 및 갑각류 요리를 맛볼 수 있으며, 미식의 상징인 스트라스부르 푸아그라도 만나볼 수 있다.”(5)
(1) 재출간본 : 『Le Cuisinier françois 요리사 프랑수아』, Mary&Philip Hyman 서문, Manucius, Houilles, 20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