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산지가 나발니였다면

2021-12-01     세르주 알리미 외

2017년 3월, 줄리언 어산지가 런던 주재 에콰도르 대사관에 은거한 지 5년째 되던 해였다. 미 중앙정보국(CIA) 고위 관료들은 어산지를 잡지 못해 안달이 났고, 살해계획을 세우기까지 했다. 어산지가 공동창립한 기밀폭로 전문 사이트 ‘위키리크스’가, CIA의 전자기기 해킹 수법을 낱낱이 폭로한 것에 대한 분노였다. CIA 지도부는 어산지를 납치할 방법을 찾았지만, 런던에서는 무리였다. CIA가 호주 시민을 납치하려 런던 주재 에콰도르 대사관에 진입한다는 것은, 외교적인 충돌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어 CIA는 어산지가 에콰도르와 러시아 정부의 도움을 받아 러시아로 도주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했고, 첩보영화 수준의 대담한 작전들을 구상했다. “런던 거리 한복판에서 러시아 정보요원들과 총격전 벌이기, 어산지를 호송 중인 러시아 외교 차량을 들이받기, 어산지가 탑승한 모스크바 행 항공기 타이어에 총격을 가해 이륙 막기 등등 다양한 시나리오가 구상됐다. (...) 심지어 어산지가 세탁물 바구니에 숨어 도주할 경우도 계산했다.” 하지만 이 계획들은 모두 법적인 문제를 안고 있었고, 따라서 백악관에서 퇴짜를 놓았던 것으로 보인다.

 

“위키리크스는 러시아 스파이”

이와 관련해 지난 9월 26일, 야후뉴스팀은 전직 미 정보기관 관료 30여 명을 취재했다. 그리고 결과를 바탕으로 당시 정황을 상세히 보도한 장문의 기사를 온라인에 게재했다.(1) 2017년 4월, 마이크 폼페이오 당시 CIA 국장은 위키리크스에 대한 속내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바 있다. “위키리크스는 종종 러시아의 사주를 받는, 미 정부에 적대적인 정보기관이다. 우리는 어산지의 동료들이 표현의 자유를 들먹이며 훔친 기밀정보로 우리를 무너뜨리려는 행위를 결코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보다 훨씬 더 독한 정보기관으로 거듭날 것이다. 가장 위험한 지역에 가장 무자비한 요원들을 급파해 저들을 제거하겠다.” 

분명 야후뉴스의 보도는 수많은 매체들이 재인용하며 폭발적인 관심을 모으기에 충분했다. ‘알 권리’, ‘위험에 처한 민주주의’, ‘반자유주의의 대두’, ‘아직 임신이 가능한 자궁’(브레히트의 작품 <우르투로 우이의 출세>에서 히틀러를 암시한 ‘그 추악한 짐승이 기어 나온 자궁은 아직도 임신이 가능하다’라는 대사에서 나온 표현-역주) 등을 운운하는 온갖 분노에 찬 칼럼들을 쏟아낼 수도 있었다. 더욱이 이 기사의 주 취재자인 마이클 아이시코프는 2018년 3월 『러시아 룰렛: 미국을 상대로 한 푸틴의 비밀스러운 전쟁사』라는 책을 펴낸 바 있다. 즉, 결코 반미주의나 친러시아 성향을 의심받을 수 없는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야휴뉴스의 폭로 이후 2주가 지나도록 <월스트리트 저널>, <워싱턴포스트>, <뉴욕타임스>에는 단 한 줄의 관련 기사도 실리지 않았다.(2) <르몽드>, <르피가로>, <리베라시옹>, <레제코>, 프랑스 AFP 통신이라고 별반 다르지 않았다. 물론 <가디언>, <쿠리에 엥테르나쇼날>, <르포엥>, <메디아파르>, <CNews> 등의 매체에서 관련기사들을 온라인에 게재했지만, 대개 단신에 그쳤다. 블룸버그 통신에서도 28자 보도 뿐이었다.

여기서 잠시 세계적인 후폭풍을 몰고 온 알렉세이 나발니 변호사 암살미수사건을 떠올려보자.(3) 나발니 역시 국가의 위협과 박해를 받는 공익제보자이자, 용감한 반체제인사다. 하지만 그가 수감된 곳은 런던 감옥이 아닌 러시아 감옥이다. 사실 두 인물을 대하는 언론의 상반된 태도는 서구언론들이 종종 들먹이는 가치들, 즉 ‘인권’, ‘언론의 자유’ 등이 얼마나 자의적인지 여실히 증명한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에 대적한다는 사실만으로 나발니는 훨씬 ‘인간적인’ 대접을 받고 있다. 어산지도 나발니와 같은 반체제인사지만, 그는 ‘자유세계’에 대항하고 있기 때문이다.

1988년, 에드워드 허먼과 노암 촘스키는 고전이 된 명저 『여론조작』(4)에서 ‘프로파간다 시스템’이 얼마나 ‘적대적인 국가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은 피해자’와 ‘자국 정부나 그 의존국(Client state)에서 동일한 피해를 입은 희생자’를 서로 차별적으로 취급하는지 입증했다. 두 저자는 엇비슷한 시기에 경찰 혹은 무장조직에 의해 암살된 두 성직자를 대하는 놀랍도록 상반된 처우를 그 증거로 제시했다. 그것이 바로 1980년 3월 암살된 살바도르 대주교 오스카 로메오와 1984년 10월 암살된 폴란드 신부 예지 포피우스코였는데, 두 사람 모두 반체제 인사로 이름이 높았다. 

허먼과 촘스키는 미국의 주요 언론매체들의 기사를 샅샅이 연구한 끝에, “포피우스코와 같은 희생자가 미국의 예속국가의 피해자에 견줘 무려 137~179배나 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는 결과를 도출했다. 당시 폴란드는 소련, 즉 ‘악의 제국’의 휘하에 있던 나라였기 때문이다.

 

“어산지는 인권의 친구가 아니다”

과거 기사를 검색해보자. 2012년 6월 19일 어산지가 에콰도르 대사관에 은거한 이후, <르몽드>에서는 그를 총 225편의 기사로 언급했다. 같은 시기 나발니를 다룬 기사는 모두 419편에 달했다. 하지만 단순히 수치의 차이를 떠나, 두 반체제인사에게는 서로 다른 분석 프레임이 적용됐다. 가령 호주 출신 해커에 대해 <르몽드>가 게재한 사설 5편 중 3편은 ‘줄리언 어산지의 이중적 행적’을 지적했다. 

특히 어산지가 런던에서 영국정보국에 체포된 다음날인 2019년 4월 15일에 게재된 사설은, 아예 그 제목이 ‘줄리언 어산지의 이중적 행적’이다. “국가기밀에 맞서 투쟁 중인 ‘공익제보자들’의 운명에 대해 언급하기에 앞서, 먼저 두 가지 사실을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한다. 첫째, 줄리언 어산지도 다른 이들과 동일한 법적 심판의 대상이다. (..) 둘째, 줄리언 어산지는 인권의 친구가 아니다.” 대체 왜? “이 반미 활동가는 언제나 민주국가의 기밀정보만 공격할뿐, 전제주의 국가를 표적으로 삼는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세계 11위 강국만 표적으로 삼고 세계 1위에 대해서는 눈을 감았어야 했다는 소리다.

1년 뒤인 2020년 2월 26일자 사설에서도 비슷한 견해가 드러난다. 물론 이 일간지는 “줄리언 어산지의 미국 송환은 안 된다”라고 논평했다. 그러면서도 그가 “언론의 수호자이자, 준법정신을 갖춘 시민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민주국가의 기밀정보를 공격하는 데는 그토록 민첩하면서도, 전제주의 국가의 기밀정보를 공격하는 것은 시급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비꼬았다. 게다가, 오랫동안 친서구적 시각의 이중 잣대를 비판해온 <월스트리트저널> 역시 비슷한 논평을 내놨다. “어산지는 투명성이나 민주적 책임의식의 영웅이 결코 아니었다. 그가 표적으로 삼은 대상은 언제나 민주주의 국가나 기관이었지, 결코 전제주의 국가나 기관은 아니었다.”(2019년 4월 12일)

 

“그의 비극은 국적에 기인한다”

그러나, 나발니에 대한 지지는 가히 폭발적이었다. 나발니를 다룬 <르몽드> 사설(나발니를 언급한 기사는 총 13편) 5편 가운데 나발니의 ‘이중적 행적’이나 ‘똑같은 법적 심판의 대상’ 등을 운운하는 글은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나발니는 민족주의 단체에서 활동하고, 외국인혐오주의적인 성격을 지닌 러시아 극우 시위행진에 참가하는가 하면, 카프카스 및 중앙아시아 난민에 대해 인종차별적인 발언을 한 적이 있는 인물이었다. 국제엠네스티는 “2007년과 2008년 그가 했던 증오 찬양에 해당할 수 있는 인종차별적 발언을 우려한다는 이유로” 그에게서 ‘양심수’ 자격을 박탈했다(지난 5월, 국제엠네스티는 최종적으로 나발니에게 양심수 자격을 재부여했다. 그 전까지 이 자격박탈 조치는 러시아 정부가 나발니를 조롱하는 데 애용됐다).

“푸틴의 최대 정적으로 떠오른, (...) 평소 정부 부패를 정조준해온 이 변호사 출신의 유명 블로거”의 경우, 어산지에게 적용되는 엄격함의 잣대는 눈 씻고도 찾아볼 수 없었다. 심지어 <르몽드>지는 나발니를 현대적인 소셜미디어의 대가로까지 칭송했다.(2017년 6월 16일) 그리고 같은 동료 언론인으로도 대우해줬다. “그가 선보인 탐사저널리즘은 높은 조회수를 보여주는 여러 온라인 동영상을 통해, 놀랄 만큼 강렬하게 썩은 세계를 비판하고 있다.”(2020년 8월 22일) 뿐만 아니라 <르몽드>는 이 러시아 반체제인사에게 일면의 지면 일부와 사설, 주례사에 버금가는 기사를 할애하는 한편, ‘부패한 자들의 정신적 지주’로 통하는 크렘린궁의 주인을 비판하는 나발니의 칼럼도 함께 실어줬다. 나아가 유럽 정부들을 향해 “푸틴 대통령에 대한 모든 호의를 버리라”라고 촉구했다.(2021년 1월 15일)

 <프랑스 앵테르> 라디오 방송프로그램 ‘제오폴리티크(지정학)’에서도 비슷한 프레임이 연출됐다. 어산지를 다룬 방송이 나가던 날, 진행자 피에르 아스키는 그를 기소한 미국을 비판하고, 어산지의 미국 송환에 반대했다. 그러면서도 어느새 ‘위험한 인물’이 돼버린 어산지의 ‘정치적, 개인적인 측면의 어두운 면’에 대해서도 청취자들에게 언급하기를 잊지 않았다. 반면 2018년 1월 1일~2021년 10월 10일, 나발니를 다룬 총 7개 방송에서는(어산지를 다룬 방송은 총 2편에 그쳤다), 이런 유보적인 발언은 찾아볼 수 없었다. 더욱이 진행자는 매번 이 러시아 반체제인사의 용기와 투지를 치하했다. 나발니가 그런 자질을 갖춘 것은 사실이나, 위키리크스 창립자도 그런 점에서는 같다.

2019년 자크 디옹 기자는 이 상황에 대해 “어산지의 비극은 그가 러시아인이 아니라 호주인이라는 데 있다”라고 일축했다. “만일 그가 러시아 정부에 쫓기는 신세였다면, (...) 모든 정부가 그에게 망명권을 주는 영예를 잡고자 달려들었을 것이다. 파리 시청 전면에는 그의 얼굴이 걸리고, 안 이달고 파리 시장이 그의 석방일까지 에펠탑에 조기를 게양했으리라.”(5)

처음에 서구 언론은 2010년 <타임>지가 ‘올해의 인물’로 선정한 이 호주 해커에 대해 남다른 애정을 과시했다. 그리고 지금보다 훨씬 더 평화로운 지정학적 상황에서 수많은 특종 기사를 쏟아냈다. 하지만 2016년 CIA가 민주당 이메일을 해킹하고 이를 러시아 소행으로 뒤집어씌웠다는 사실을 위키리크스가 폭로한 이후로는 냉정한 비판자로 돌아섰다. ‘어산지가 표명하는 의견은, 푸틴의 생각일까?’ 2016년 9월 2일, <뉴욕타임스> 국제판에는 이런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하지만 정작 러시아 정부가 수많은 비정부기구(NGO)들에 ‘해외 간첩’이라는 치욕스러운 꼬리표를 붙일 때, 이 서구 언론은 아주 당연하다는 듯 분통을 터뜨렸다.

바이든 정부는 방첩법 위반 혐의로 어산지에 대한 미국으로의 송환 요구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여전히 어산지는 영국 감옥에 있다. 최종적으로 미국의 송환 요구가 좌절된다면, 그때는 어떻게 될까? 우리는 이미 CIA의 서류함 속을 굴러다니는 암살 계획 몇 가지에 대해 알고 있다.

지난달, 러시아 출신의 한 용감한 기자가 위기에 처한 ‘표현의 자유’를 수호한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다음은 어산지 차례가 아닐까? 

 

 

글·세르주 알리미 Serge Halimi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발행인
피에르 랭베르 Pierre Rimbert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기자

번역·허보미
번역위원


(1) Zach Dorfman, Sean D. Naylor, Michael Isikoff, ‘Kinapping, assassination and a London shoot-out : Inside the CIA's secret war plans against WikiLeaks’, YahooNews, 2021년 9월 26일.
(2) John McEvoy, ‘Deathly Silence : Journalists Who Mocked Assange Have Nothing to Say About CIA Plans to Kill Him’, Fairness & accuracy in reporting(FAIR), New York, 2021년 10월 8일.
(3) Hélène Richard, ‘Alexandre Navalny, prophète en son pays알렉세이 나발니는 러시아의 선구자?’,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한국어판 2021년 3월호.
(4) Noam Chomsky, Edward Herman, 『La Fabrication du consentement여론조작』, Agone, Marseille, 2008년.
(5) Jack Dion, ‘Ah! Si Julian Assange avait été russe...줄리언 어산지가 러시아인이었다면’, <Marianne>, Paris, 2019년 4월 19~2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