팡테옹의 간략한 역사
소수의 위대한 여성에게만 감사하는 조국
11월 30일, 조세핀 베이커가 팡테옹에 안장됐다. 그녀를 향한 추모와 기념이 끊이지 않았지만, 대선을 몇 달 앞두고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그녀를 팡테옹 안장자로 선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정치적 계산이 엿보인다. 위인들은 어떻게 팡테옹에 안장되고 퇴출됐을까? 2세기 남짓한 팡테옹의 역사를 살펴본다.
시몬 베유에 이어 조세핀 베이커가 팡테옹(Panthéon; 국가유공자가 안장된 프랑스의 국립묘지-역주)에 안장자로 선정됐다. 이것으로 ‘팡테옹의 실패’(1)라는 대중의 혹평을 잠재울 수 있을까? 팡테옹 안장 같은 공화국의 과시적 행사는 낡은 전통으로 비칠 수 있다. 냉소적인 이들은 “보여주기식 쇼”라며 정치적 계산을 비판하기도 한다. 1885년, 빅토르 위고 장례식 때도 왕정주의자 작가 레옹 도데가 “고인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것이 공화국의 전통”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한 바 있다.
사실 모든 정권을 막론한 전통이었다. 그런 점에서, 팡테옹은 여전히 유용하다.
생트주느비에브 언덕에 자리한 이 영묘는, 다소 잊히기는 했어도 파란만장한 역사의 굴곡을 거쳐 왔다. 장엄함과 영원불멸성을 표현하는 것. 웅장한 석조기념물들의 역할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런데 이 건축물은 어떤 의미에서 그런 역할을 능가했다. 루이 15세의 서원(중병에 걸린 루이 15세는 병이 나으면 폐허가 된 생트주느비에브 언덕의 성당을 개축해 신께 헌납하겠다는 서원 기도를 올렸다-역주)을 실행할 적임자로 선택된 건축가 수플로는 종교적인 경건함보다는, 영예로운 위상을 구현하는 데 중점을 두고 기념비적인 성당을 설계하고자 했다.
절대왕정과 계몽주의가 혼재하던 이중적인 시대에, 수플로는 ‘위인의 모습’을 담은 건축물을 짓기를 원했다. 그는 왕과 위대한 장수들(볼테르의 표현에 의하면 ‘도살자들’)에게 적대적이던 계몽주의에서 영감을 받아, 인류와 조국에 공헌한 공직자·과학자·문인을 경배할 공간을 마련하고자 했다. 이후 팡테옹에 새로운 안장자가 들어올 때마다, 이른바 ‘위대함’이라는 개념이 계속 확장됐다.
프랑스혁명기, 본래 성당으로 지어진 팡테옹은 위인들의 묘소로 변모했다. 이어 나폴레옹 시대에는 종교적 기능과 세속적 기능을 양립하며 제국 고관들의 유해를 묻는 묘소로 활용됐다. 그리고 왕정복고 시대에는 성당으로만 기능했다. 그러다가 1830년 7월 ‘시민왕’ 루이 필리프가 ‘영광의 3일’을 거쳐 권좌에 오르자, 영웅적인 희생의 가치를 중시한 그는 혁명 영웅을 기리는 묘소 기능을 부활시켰다. 이어 친카톨릭 정책을 표방한 나폴레옹 3세가 성당 기능을 복원했다.
“조국이 위대한 인물들에게 감사하며”
팡테옹이 최종적으로 공화국 유공자의 묘소로 자리매김한 것은, 브리송 정부의 공이었다. 브리송 정부는 1885년 5월 빅토르 위고의 장례식을 계기로, 팡테옹을 공화국 위인들의 추모공간으로 확립했다. “조국이 위대한 인물들에게 감사하며.” 1791년 처음 새겨졌다 지워진 명문이 다시금 팡테옹 정면 석조를 장식했다.
팡테옹은 단순히 정권의 변천사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죽은 명사들의 운명에 의해서도 숱한 우여곡절을 겪어왔다. 1791년 4월 미라보가 세상을 떠났을 때, 위인들의 유해를 안치할 수 있는 집단 묘소(흔히 ‘엘리제’라는 이름으로 불렸다)를 설치하고 유명한 고대 로마 건축물의 이름을 붙이자는 구상안이 공포됐다. 의원들은 결기에 찬 연설로 혁명의 불씨를 살려낸, 그러나 너무 일찍 생을 마감한 미라보에게 경의를 표하고자 했다. 그러나 얼마 후 미라보가 왕과 내통해 돈을 받았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그의 유해는 일반 공동묘지로 퇴출됐다. 비슷한 시기, 1793년 7월 암살된 마라의 유해도 팡테옹에 안장됐다.
하지만 마라도 팡테옹에서 쫓겨났다. 테르미도르 반동(프랑스 혁명 때 산악파의 혁명정부를 무너뜨린 쿠데타-역주)으로 5개월만에 팡테옹에서 퇴출된 것이다. 혁명 이전의 인물들도 마찬가지였다. 1791년과 1794년 각기 팡테옹에 안장된 볼테르와 장 자크 루소는 왕정복고로 인해 1814년 팡테옹에서 함께 퇴출됐고, 이어 성당 신도들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팡테옹 내 눈에 띄지 않는 장소에 재안치되는 고초를 겪었다. 이런 변덕스러운 결정에는, 속세의 영원성을 기리기 위한 사원을 ‘인간적인 것이 얼마나 허약한지 보여주는 징표’로 뒤바꿀 위험이 있었다.
시인 빅토르 위고는 생전에 자신의 시신을 가난한 자들의 영구차에 싣고 모든 프랑스인이 함께 하는 국장으로 장례를 치러달라는 바람을 남겼다. 실상 그는 생전에 ‘종이로 된 팡테옹’, 교과서에 입성하는 영예를 누린 인물이다. 정부는 위고의 죽음을 깊이 안타까워하며, 1885년 5월 27일 한 번에 두 개 법령을 공포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첫째는 팡테옹을 다시 ‘초기 합법적인 용도’로 활용하겠다는 것이었고, 둘째는 빅토르 위고의 장례를 국장으로 치르고 그의 유해를 팡테옹에 안장한다는 내용이었다.(2)
1871년과 1885년 두 차례 위기를 겪은 뒤 가까스로 다시 얼마 전 확립된 공화정은 무엇보다도 <레미제라블>을 쓴 이 저명한 작가의 죽음을 대대적으로 기념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했다. 사실상 위고는 루이 보나파르트의 쿠데타에 저항해 무려 19년의 망명생활을 했고, <어느 범죄의 역사>를 저술해 1877년 국가의 수반인 마크 마옹에 의한 의회 해산에 반기를 들었다. 또한 사형제도 철폐 등 고귀한 이상을 지지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위고의 적들은 적개심을 드러냈다. 그들은 고인의 인격만이 아니라, 위고의 팡테옹 안장에 얽힌 정치적 속셈까지 맹렬히 비난했다. 카톨릭 언론은 “위고의 팡테옹 안장은, 종교에 대한 공격이자 코뮌 지지자들의 음모”라고 비판했다. 극좌파 진영에서는 카를 마르크스와 쥘 게드의 사위인 폴 라파르그가 위고를 공격했다. “탐욕적인 인간이자, 자본가 계급의 하수인”이라며 말이다. 오랜 기간 성인들을 숭배해온 카톨릭계가 위고의 팡테옹 안장을 “우상 숭배”라고 비난하는 것은 뻔뻔한 일이었다.
마찬가지로, 당시의 극좌파 세력들도 훗날 마르크스주의의 계승자들이 세상을 떠난 선지자들의 영묘를 세계 곳곳에 세워 숭배하게 되리라고는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위고의 장례식에는 백만 명 이상의 인파가 개선문 아래 설치된 운구대 앞으로 운집했다. 그들은 생제르맹 대로, 생미셸 대로를 거쳐 수플로 거리까지 고인의 운구행렬을 뒤따랐다. 1세기 가까이, 프랑스인들에게 ‘군중’의 이미지는 ‘혁명’으로 각인돼 왔다. 하지만 그들은 묵상하며 기념식을 치르는 유순한 군중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물론 장례식을 성황리에 마쳤다고 해서, 비판의 목소리가 잠잠해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 날의 성공은 훗날 대대적인 국가 행사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왜? 지젤 알리미가 아닌 조세핀 베이커인가
팡테옹을 둘러싼 논쟁은 안장자에 대한 호불호 논쟁에 그치지 않는다. 가치관의 대립을 반영한 논쟁이 벌어지기도 한다. 사실상 어떤 인물에게 팡테옹에 안장될 영예를 쥐어줄 것인가라는 문제만큼이나, 시대의 변천에 따라 기존의 안장자와 새 안장자 사이에 서로 논란의 여지는 없는지 확인하는 것 역시 중요한 문제인 것이다. 가령 드레퓌스 사건 이후, 장 란 육군원수의 가문은 고인을 에밀 졸라와 함께 묻히도록 내버려둘 수 없다며 유해 이장을 요구했다. 그런가 하면 1821년에는 성당의 기능이 복원된 팡테옹에 반교권주의자인 볼테르의 무덤을 두는 문제로 논란이 일었다. 당시 루이 18세는 아주 익살스러운 답변으로 응수했다. “볼테르는 그냥 내버려두자. 이미 매일 미사를 들어야 하는 벌로도 충분하니.”
혁명이나 전쟁 등 어떤 비극적인 사건을 겪느냐에 따라, 팡테옹이 경의를 표하고자 하는 위대함의 의미 역시 새롭게 변천을 거듭했다. 가령 이제는 빅토르 위고처럼 위대한 대의에 헌신하고 평화롭게 눈을 감은 인물만이 아니라, 어느새 전쟁터나 바리케이드 위에서 생을 희생한 낭만주의적 의미의 영웅 역시 위대함의 범주에 속하게 된다. 이런 경향은 특히 1964년에 이르러 절정에 달했다. 당시 드골 장군은 장 물랭을 팡테옹 안장자로 선정했다. 앙드레 말로는 추도사에서 그를 여러 훌륭한 영웅적 면모(요컨대 ‘영웅이자 순교자’라는 말로 표현됐다. 이 새로운 표현은 목숨을 잃은 레지스탕스 운동가만이 아니라, 공직자에게도 적용된다)를 두루 갖춘 인물로 미화했다. 이로써 고문으로 일그러진 얼굴은 이제 단순히 한 인물의 위대함(설령 그가 진정 위대한 인물일지라도)뿐만이 아니라, 그 인물이 추구한 이상의 위대함을 상징하게 됐다.
단 몇 줄로 고인의 전 생애를 요약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혼란을 준다. 너무 짧은 약력 소개는 팡테옹 안장자의 자격에 회의를 품게 만든다. 가령 어떤 이들은 고인의 짧은 약력을 보고, ‘일개 뮤직홀 아티스트에게 팡테옹의 영예를 쥐어주다니!’라고 개탄할 수도 있다. 1906년 미국 세인트루이스에서 출생한 조세핀 베이커는 19세에 프랑스로 이주해 ‘흑인 버라이어티 쇼’ 무대에서 춤을 췄다. 그녀는 맨가슴에 바나나 스커트만 걸친 채, 아프리카에 대한 환상을 담아낸 춤사위를 선보인 덕택에 스타덤에 올랐다. 그런 인물을 팡테옹에 안장한다는 것은, 당대 인종차별적 사회 분위기에 면죄부를 주는 처사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반면, 어떤 이들은 연예계에서 명성을 쌓은 뒤 훗날 정치 참여와 인도주의 활동에 투신한 그녀의 이력은 인정받을 만하다고 평가하기도 할 것이다. 가령 인종분리정책이 한창이던 미국에서 태어난 한 젊은 흑인 여성이 양차대전 사이 파리에서 사회적으로 성공을 거둔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고, 생명과 재산을 내걸고 대독 레지스탕스 운동을 벌이며 자신의 성공을 훌륭한 대의 실현에 이용한 그녀의 이력은 찬사받아 마땅하다고 평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조세핀 베이커는 차기 대통령 후보자의 재선에도 어울리는 이력을 갖춘 인물이기도 했다.
안장자 선정이 계산적이라고 해서, 반드시 불공정한 것은 아니다. 사실 조세핀 베이커와 비슷한 시기, 팡테옹 안장자로 지젤 알리미도 거론됐다. 민족해방전선(FLN)과 알제리 독립운동 투사들의 변호를 맡았던 그녀는 수많은 강간·낙태 재판을 통해 여권 신장에 헌신한 여성운동의 선구자다. 결국 현 프랑스 대통령은 현대에 이르러 많은 논란을 낳고 있는 투쟁 이력을 지닌 좌파 성향의 인사 대신, 우익 성향의 드골주의자인 조세핀 베이커를 선택한 것이다. 그러나 뻔한 여론조사 결과에 의존하는 것보다 더 현명한 처세술은 없었을까?
빅토르 위고 유해가 팡테옹에 안장된 지 4년이 흐른 뒤, 정부는 프랑스 혁명 100주년을 대대적으로 기념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했다. 1889년 만국박람회만으로는 부족했고 한층 확고한 정치적 행사가 필요했다. 빅토르 위고의 경우처럼, 파리시는 공화국을 위해 헌신한 위대한 인물에게 경의를 표하는 성대한 행사를 계획했다. 그런 인물이 바로 알퐁스 보댕이었다. 국민의회 의원인 알퐁스 보댕은 1851년 12월 3일 바리케이드 위에서 루이 나폴레옹의 군대에 의해 피살됐다.(3)
‘Homme’는 ‘인물’인가, ‘남성’인가?
그는 자신의 의원 면책특권을 운운하며 무기를 들고 항거하기를 거부하던 생앙투안 마을의 주민들을 향해 다음과 같은 명언을 남겼다. “당신들은 이제 25프랑(당시 의원직 보수-역주)에 어떻게 사람이 죽는지 보게 될 것이요.” 이 ‘숭고한 말’은 1868년 후대에까지 전해지게 되고, 제2제정의 반대자들은 보댕에게 몽파르나스 묘지에 성대한 무덤을 만들어주기 위해 후원금을 모집했다. 하지만 법원은 이 기부금 신청자들을 엄벌했다. 1877년, 제2의 ‘브뤼메르 18일’ 쿠데타(1799년 11월 18일, 프랑스 혁명력으로 ‘브뤼메르 18일’에 쿠데타를 일으켜 군사정부를 세우고 황제가 된 삼촌 나폴레옹 1세를 모방해 나폴레옹 3세가 1851년 일으킨 쿠데타를 의미-역주)에 항거한 저항의 연대기로 통하는 <어느 범죄의 역사>에서 보댕의 죽음에 얽힌 일화가 소개되면서 다시 보댕은 신화적 인물로 관심을 모은다. 당시 의회제의 위기로 몸살을 앓던 프랑스 정부는 당연히 목숨을 바쳐 투쟁한 한 의원의 이야기에 귀가 솔깃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반란분자인 보댕은, 완벽한 후보자라고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정부는 라자르 카르노, 프랑수아 마르소, 라자르 오슈와 같은 다른 혁명의 군사 지도자들을 추가로 선정했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왕정주의자이던 라자르 오슈는 끝내 손자들의 반대로 테오 필 드 라 투르도베르뉴로 교체됐다. 결국 1889년 기념행사에는 무려 4명의 유해가 한꺼번에 팡테옹에 안장됐다. 팡테옹처럼 상징적이고 예민한 사안에 대해서는, 영민한 처신이 특히 중요하다. 그러나 현 정책결정자들에게 영민함은 기대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것으로 게임이 끝났다고는 할 수 없으리라. 후대의 정책결정자들이 영원불멸함으로 명성을 얻은 모든 인간적인 것들을 숭배하는 공간으로 팡테옹을 활용해온 지난 역사의 흐름을 따를 수도 있으니 말이다.
사실 프랑스어로 ‘조국이 위대한 인물들에게 감사하며’라는 문구에서 조국이 감사하는 대상은 오로지 남성(Homme)뿐이다. 마리 퀴리 이래 팡테옹에 안장됐거나 안장될 자격이 있었던 여성들은 이 문구에 포함되지 않는다. 지금까지 팡테옹에 안장된 여성은 총 5명, 조만간 1명이 늘어 6명이 되는 게 고작이다. 이런 여성에 대한 홀대는 바람직하지 않다. 더 많은 여성이 위인의 반열에 오를 때, 비로소 팡테옹 안장자를 둘러싼 논란이 줄어들고, 오랫동안 부당하게 위대함의 영역에서 배제됐던 모든 인간 존재들의 정의 역시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
글·알랭 가리구 Alain Garrigou
파리낭테르 대학 정치학과 명예교수
번역·허보미
번역위원
(1) Mona Ozouf, ‘Le Panthéon 팡테옹’, in Pierre Nora, 『Les lieux de mémoire 기억의 장소』, Paris, Seuil, 1984년.
(2) Avner Ben-Amos, ‘Les funérailles de victor Hugo 빅토르 위고의 장례식’, 위의 책.
(3) Alain Garrigou, 『Mourir pour des idées. La vie posthume d'Alphonse Baudin 이념을 위해 죽다. 알퐁스 보댕의 사후 인생』, Les Belles Lettres, Paris, 201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