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대선 후보를 선택하는가?

2021-12-31     알랭 가리구 l 파리 낭테르 대학교 정치학과 명예교수

2022년 대선이 다가오면서, 지역 의원의 추천 절차를 거쳐 후보 출마 선언을 하는 경우가 증가하고 있다. 과거에는 정당들의 전유물이었던 후보자 선택 과정이 약 15년 전부터는 유권자들의 투표 의사를 묻는 각종 여론조사로 인해 혼란스러워지고 있고, 심지어 일부 정당은 여론조사 결과를 전략의 핵심에 놓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이 과연 민주주의를 위한 길인지는 의문이다.

 

일반적으로 평론가들은 여론조사가 증가하는 현상을 정당이 후퇴 또는 실패한 결과로서 해석한다. 그러나 반대로, 오히려 여론조사가 정당의 격을 떨어뜨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

1962년에 프랑스 대통령을 보통 선거로 선출하기로 한 결정은, 결정을 내린 당사자인 드골 장군도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아마도 당시의 입법자들은 1848년에 유럽 최초로 보통선거법을 제정한 루이 드 코르므냉이 했던 “이 모든 것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궁금하다”라는 무책임한 말을 떠올렸을 것이다. 이 법학자의 무책임함을 알렉시스 드 토크빌은 “마치 화학 실험에 관해 말하는 듯 했다”(1)라고 비난했다.

 

역사가 선택한 대선 후보, 드골 장군

1962년 헌법 개정 시에는 후보 자격에 관한 문제를 깊이 다루지는 않았고, 다만 입후보에 필요한 추천인 수를 50명(1958년 헌법 개정)에서 100명으로 늘렸다. 국민투표의 논리에만 집중하면서, 개정 헌법은 마치 후보 선택은 신의 영역이라는 듯이 이 부분은 미해결 상태로 남겨 뒀다. 추천인 제도는 후보자의 수를 제한하기에 충분했을 뿐만 아니라 과거의 선거에서 몇 번 있었던 ‘몽상가’, 즉 선동자나 광인의 입후보를 막는 역할도 했다. 개정된 헌법에는 후보자의 수에 관한 내용도 없었다. 초기에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이, 1965년에 치러진 첫 보통 선거에는 단 6명의 후보만이 등장했기 때문이었다. 

이들이 후보로 나선 연유는 다양했다. 선거를 불과 1개월 남기고 연임을 위해 출마한 드골 장군은 ‘역사에 의해 선택된 대선 후보’라고 할 수 있다. 프랑수아 미테랑은 좌파 정당 연합의 추천을 받아 좌파 대표로 출마했고, 장 르카뉘에는 민주사회당(CDS)의 대표로 선거에 나왔다. 무명인 마르셀 바르뷔는 등장과 동시에 잠깐 주목받았으나, 득표율이 1%에 그쳤다. 무명 후보의 오만에 대한 단죄였다.

결선 투표가 도입되면서 좀 더 눈에 띄는 변화가 나타났다. 그 변화의 범위까지는 제대로 예측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결선 투표는 여론조사 결과가 프랑스 정치에 개입할 문을 열어줬다. 그러나 대선 후보자 결정은 여전히 정당의 추천 시스템에 기반하고 있었다. 다만 대선 후보자의 수가 1965년 6명, 1969년 7명, 1974년 14명으로 계속 증가하자, 1976년에는 입후보에 필요한 추천인 수를 100명에서 500명으로 늘렸다. 주로 지역의원들로 구성된 상원 선거인단에서 추천인이 된 의원은, 정당 가입이나 후견 관계를 통해 정당 내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다. 대규모의 상원 선거인단(2017년 4만 2,000명) 중에서 ‘비주류’ 후보를 추천할 준비가 된 의원은 항상 있었다.

 

여론조사의 범람, 정치권의 대변화

여론조사 결과 1976년 지방 선거에서 승리를 거둔 좌파 연합의 지지율이 계속해서 상승세에 있고 따라서 1978년 총선에서도 승리를 거둘 것으로 예상되자, 여당은 여론조사에서 자기 충족적 예언(Self-Fulfilling Prophecies)의 가능성을 봤다. 이에 여당은 여론조사 위원회의 신설과 그 외 다양한 조치를 포함하는 1977년 7월 19일 법률을 제정함으로써 여론조사를 법적 틀 안으로 들였다. 투표 의사에 관한 여론조사 결과는 투표일로부터 일주일 전까지만 공개할 수 있다는 조치도 이 법률에 포함됐다. 이 조치는 2002년에 여론조사 기관의 요청에 따라 투표 전날과 투표일 당일에만 여론조사 결과를 공개하지 못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각종 여론조사의 범람은 정치권의 대변화를 예고했다.

19세기에 처음 만들어진 정당은 선거에 출마할 정치인을 선택하는 기능을 중심으로 조직돼 있었다. 정당의 공천을 받지 않고 선거에서 승리를 거두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출발점은 모두 달랐지만 도착점은 결국 정당이었다. 정당 활동에 적대적인 것으로 악명이 높았던 드골 장군도 의회에서 과반수를 확보하기 위해 몇 주 만에 신공화국연합(UNR)을 창당해 총선에서 승리했다. 헌법 개정을 주도하면서 헌법에 ‘정당의 합헌적 지위’를 명시한 것도 드골 장군이었다. 프랑스 헌법 제4조에는 ‘정당 및 정치 단체는 선거에 협력한다’는 문구가 있다.

정당의 의회 활동, 발의, 음모, 동맹, 투표를 둘러싸고 극심한 대립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은 1978년 총선에서 좌파가 분열하며 패배하자 사회당 지도부에 대한 반발로 이어졌다. 1965년과 1974년 두 차례의 대선에서 모두 패배한 뒤 대다수의 사회당 의원은 1971년부터 사회당 대표였던 프랑수아 미테랑이 1981년 대선에서는 사회당 후보가 돼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1978년 3월 19일 총선 결선 투표일 저녁에 좌파의 패배가 확실시되자, 사회당 경선 후보 중 한 명이었던 미셸 로카르는 TV 토론에서 카메라를 바라보며 좌파가 패배했다는 제스처를 취하면서, 미래를 이야기하고, 자신이 반드시 대선 후보가 돼야 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로카르, 발라뒤르, 루아얄, 올랑드

그러나 민주적인 정당의 전통적인 당내 경쟁 기준에 따라, 사회당의 대표는 전당대회에서 결정될 것이었다. 1979년 메스에서 열린 전당대회에서 미테랑은 과반수의 표를 얻어 당 대표로 선출됐고, 다음 대선에서 사회당 후보로 나서게 됐다. 미테랑은 자신의 행운을 한 번 더 시험해보고 싶었던 것일까? 그러나 사회당에 쇄신이 필요한 시기가 아니었나? 당시 여론조사에서 인기 1위를 달리고 있던 미셸 로카르는 당시 대통령인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에게 대적하기에 더 나은 후보처럼 보였다. 미셸 로카르는 전당대회 결과와 상관없이, 미테랑이 대선에 출마하지 않는다면 자신이 사회당 후보가 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그것은 지나친 혹은 부족한 가정이었다. 미테랑은 사회당 대표로 대선에 출마했고, 결국 대통령에 당선됐다. 

2차 동거 정부(1993~1995)는 당내 경선에 또 다른 변수로 작용했다. 에두아르 발라뒤르는 공화국연합(RPR) 대표인 자크 시라크가 동거 정부의 혼란을 피하고 다음 대선을 준비할 수 있도록 시라크 대신 총리직에 올랐다. 그러나 평화롭게 유지된 동거 정부에서 발라뒤르 총리의 인기는 빠르게 상승했고, 투표 의사를 묻는 여론조사에서 시라크를 앞지르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발라뒤르가 대선 출마를 선언하자 자크 시라크와 RPR를 배신했다는 식의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당시 우파는 이런 내부적인 경쟁 관계로 시끄러웠다. 시라크는 RPR의 대표로, 발라뒤르는 자신의 소속 정당 RPR이 아닌 UDF의 지지를 받아 대선에 출마하면서 우파에서 2명의 대선 후보가 나온 셈이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1차 투표에서 RPR의 탄탄한 기반을 등에 업은 시라크가 여론조사 결과를 앞세운 발라뒤르를 상대로 승리를 거뒀다. 

2007년 대선을 앞두고 로랑 파비우스, 도미니크 스트로스 칸, 프랑수아 올랑드가 사회당 대표직을 놓고 경쟁 중이던 상황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생겼다. 바로 세골렌 루아얄의 등장이다. 2006년 여름에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인기 순위 내에 갑자기 진입한 것이 그 시작이다. 루아얄은 니콜라 사르코지의 대항마로 급부상하면서, 사회당 경선에서 경쟁자들을 여유롭게 제치고 대선 후보로 선출됐다. 사실 루아얄은 20유로를 지불하고 사회당의 당원으로 등록한 수많은 유권자들의 투표 덕분에 대선 후보 경선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이렇게 사회당의 당원이 된 이들 중에는 사회당에 대해 잘 모르거나 단지 우파 후보를 꺾을 가능성이 높다는 이유로 가입한 경우도 많았다. 결선 투표의 시뮬레이션에서도 루아얄에게 유리한 결과가 나왔다. 그러나 이런 사회당의 전폭적인 지지에도 불구하고 루아얄은 대선에서 결국 패배했다. 여론조사를 앞세운 전략은 그녀를 멀리 데려다 놓기는 했지만, 대통령직까지 갈 만큼 멀리는 아니었다. 

올랑드가 2012년 대선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스트로스 칸이 성폭행 스캔들에 휘말려 대선 경쟁에서 일찌감치 낙마한 덕분이었다. 올랑드는 스트로스 칸의 지지자들을 빠른 속도로 포섭했다. 그리고 여론조사에서 1위 자리에 올랐다. 220만 명의 유권자들이 참여한 경선에서 올랑드는 사회당 대표로 선출됐고, 결국 대선에서 승리했다. 그러나 여론조사에서 압도적인 승리가 예상됐던 것과는 달리 최종 결과에서 2위와의 차이는 크지 않았다(51.7%와 48.3%). 

여론조사 결과는 이처럼 신뢰성을 입증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음 대선에서도 첫 번째로 고려돼 올랑드가 대선 불출마를 선언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됐다. 여론조사에서 올랑드는 어떻게 해도 패배할 것으로 예측됐다. 반면 ‘무소속’ 에마뉘엘 마크롱은 경제부 장관직을 내려놓기도 전에 유력한 대권 후보로 점쳐졌다. 마크롱은 투표를 불과 몇 개월 앞두고 투표 의사에 관한 여론조사에서 선두로 올라섰다.

2022년 대선 레이스는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무소속 후보인 에리크 제무르는 대선 캠페인 초반부터 화제를 일으키며 앞서 있고, 여론조사에 의존하는 자비에 베르트랑, 발레리 페크레스와 같은 후보들은 다소 뒤처져 있는 상황이다. 공화당을 탈당했다가 재입당을 결정하면서 당내 경선 참여 여부를 번복했기 때문이다. 

이런 혼란의 원인은 전통적인 당내 절차, 여론조사, 경선 1차 투표(야니크 자도가 녹색당의 대선 후보로 확정) 등 다양한 대선 출마 경로 때문이다. 그러나 경로가 복잡해질수록 잠재적인 지지자들은 대선 후보의 선택과 후보의 공약 수립에 자신의 기여도가 감소한다고 느끼기 때문에, 정당에 대한 관심도가 떨어지게 된다. 결국 핵심적인 부분은 싱크탱크나 선거 캠페인 팀이 결정할 것이기 때문이다.

 

대출심사, 이슈 생산, 후보 선택까지

정당도 금전적인 부분이 중요한 조직이라, 득표율이 5%를 넘어야 국가로부터 선거 비용을 환불받을 수 있다. 이때 여론조사 결과는 ‘무명 후보’의 금전적 손실 위험을 제한할 수 있는 유일한 측정 도구다. 무명 후보의 정치적 열망이 이성을 압도하려고 할 때, 은행은 여론조사 결과에서 예상 득표율이 7%를 넘지 않으면 대출을 거절함으로써 그에게 냉정한 현실을 상기시킨다. 

그 첫 번째 희생자가 2002년 대선에서 녹색당 후보였던 알랭 리피에츠다. 리피에츠는 소속 정당의 지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론조사에서 더 높은 지지율을 기록한 후보에게 대선 후보 자격을 넘겨야 했다. 그리고 그 덕분에 녹색당은 선거 비용을 환불받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런 이유로 기회를 박탈당한 후보를 위해서 민간 자금을 모을 방법은 없을까? 기자들도 여론조사 결과에 따라 특정 후보의 TV 토론 참여 여부를 결정한다. 

프랑스에서 가장 최근에 치러진 지방 선거에서는 투표소에 투표 참관인이 없다는 사실이 화제가 됐다. 몇 년 전부터 시청과 도청은 직원에게 투표 참관인 역할을 맡기고 있다. 자원봉사자들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참관인 자원자들의 대부분은 특정 정당의 지지자다. 그러나 후보들이 미디어를 통해 유권자를 설득하는 방식을 선호하게 되면서 참관인 자원이 의미가 없어졌다. 활동가들이 투표일에 유권자 집을 방문해 투표를 독려하는 일도 없어진 지 오래다.

역설적이게도, 정당은 정치인이 당 내부 또는 외부의 분위기가 아닌 본인의 능력을 바탕으로 평가받을 수 있게 하려고 여론조사라는 도구를 도입했었다. 그러나 여론조사가 최고 결정권을 갖게 되면서 의원과 당원이 참여하는 당내 경선은 주변으로 밀려나 버렸다. 그리고 기자와 여론조사 기관 등 정치인 선택 권한이 있는 새로운 주체들의 이익이 얽히면서 여론조사의 확산세는 가속화됐다. 기자는 새로운 이슈를 원했다. 그래서 TV 프로그램에 여론조사 코너를 추가했다. 

기자와 여론조사 기관은 TV 프로그램의 시청률이 올라가자 자신의 영향력과 킹 메이커로서의 역할에 도취했을 뿐만 아니라 매우 인간적인 자기중심적 본능에 무릎을 꿇었다. 시민들의 투표 의사를 가시화하기 힘든 (어쩌면 실체조차 없는) 시기인, 선거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선거 6개월 전에 투표 의사에 관한 여론조사를 한다는 것은 더 기이한 역설이다. 이처럼 후보 선정이 인위적인 구조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은 민주선거의 정당성을 위협하는 위험 요소다. 과연 언제까지 이 환상이 유지될 수 있을까?

표본의 대표성이 신뢰할 만하지 않고, 계산이 정확하지 않고, 선거에서 승리할 확률이 높아지지 않을 때, 여론조사의 민주적인 이점에 대한 믿음은 사라질 것이고, 정당의 여론조사 담당자는 지쳐버릴 것이다. 그러나 여론조사에 대한 비판과 품질 하락에도 불구하고 그런 상황이 아직 발생하지 않았다는 것은, 반대 방향에서 어떤 강력한 흐름이 이것을 막고 있음을 의미한다. 

아무리 정당의 메커니즘이 공정하지도 투명하지도 않다고 해도, 여론조사를 통해 후보를 선택하는 것이 더 낫다고 할 수 있을까? 같은 사람에게 ‘투표 의사’를 몇 번이나 물어본 뒤 ‘영업 기밀’이라는 이유로 그 과정이 공개되지 않고, 그 결과가 정확하지도 않은 여론조사를 믿는 것이 말이다. 

 

 

글·알랭 가리구 Alain Garrigou
파리 낭테르 대학교 정치학과 명예교수. 저서로 『La Vote et la Vertu. Comment les Français sont devenus électeurs 투표와 미덕. 프랑스인은 어떻게 유권자가 됐나?』, Presses de Sciences Po, Paris, 1992가 있다.

번역·김소연
번역위원


(1) 알렉시스 드 토크빌, 『Souvenirs, Oeuvres complètes 기억, 전집』, Paris, Laffont, 19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