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하나의 역사, 두 개의 엇갈린 시각

2022-04-04     에릭 오노블 l 역사학자

소련이 해체된 이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정반대의 역사관을 구축했다. 한 편엔 신제국주의, 다른 한편엔 민족주의 역사관이 그것이다. 이는 오늘날 러시아가 자신의 침공을 정당화하는 명분으로 쓰이며 분쟁의 씨앗이 됐다. 그럼에도 양국의 역사 해석에 겹치는 유일한 공통점이 있다면 바로 공산주의 유산에 대한 거부다.

 

 

‘현공’으로 불리던 야로슬라우 1세 키이우 대공(978~1054)은 2022년에 자신의 먼 후손들이 광기 어린 동족상잔을 벌이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오늘날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모두가 자국이 키이우 루시 공국(882년부터 1240년까지 오늘날 동유럽 지역의 키이우를 중심으로 우크라이나, 러시아, 벨라루스 일대에 존재했던 루스인들의 국가-역주)의 후예라고 주장한다. 대공의 이름은 양국이 역사적 정당성을 주장하는 유일한 근거다. 그들의 역사 전쟁은 실제 전쟁보다 훨씬 앞서 시작됐다.

1991년 소련이 붕괴됐을 때까지만 해도 역사관 충돌이 심각한 문제로 번지지는 않았다. 우크라이나는 국제 분쟁을 피하려 애쓰며 과거의 상흔을 치유하는 데 집중했다. 2002년과 2007년, 양국 간 공통되는 역사를 연구하는 연구 지침을 만들고자 러시아-우크라이나 정부 간 역사위원회가 설립됐다. 하지만 이런 시도는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두 신생 국가 모두 자국의 입지를 공고히 할 필요가 있었고, 그로 인해 서로를 온전히 신뢰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때맞춰 발생한 일련의 정치사건들 또한 대화에 실패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이데올로기를 책임지던 레오니드 크라우추크는 소련 시절 자신이 그토록 비난하던 민족주의를 내세워 독립한 우크라이나의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소위 ‘붉은 지도자’였던 그의 후임자 레오니드 쿠치마는 러시아어를 쓰는 우크라이나 동쪽 산업 지역의 표심을 얻어 당선됐다. 그는 1999년 선거에서 공산당이 득세하자 이에 맞서 1933년 ‘홀로도모르’, 즉 소련 시절 우크라이나에서 일어난 대기근의 책임을 물었고, 재선에 성공했다. 이번엔 우크라이나 서쪽 지역 민족주의자들의 몰표 덕분이었다.

국가 통합은 요원했고, 역사 때문에 더욱 분열됐다. 2004년 오렌지 혁명이 일어난 뒤 2006년, 친유럽 성향 대통령 빅토르 유셴코는 홀로도모르가 집단 학살이었음을 인정하는 법안을 표결에 부쳤다. 이 사건은 소련의 스탈린 시절 기근으로 함께 고통을 겪었던 러시아에 파문을 일으켰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은 마치 ‘희생자 경쟁’에 내몰린 듯한 인상을 받았다. 게다가 유셴코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민족주의 운동가에게 경의를 표했다. 2010년 국가 영웅 반열에 오른 스테판 반데라(1909~1959) 같은 인물이 대표적인 예다. 반데라는 파시즘에서 영감을 받아 설립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기구(Organization of Ukrainian Nationalists, OUN)의 수장이자 우크라이나 반군(UPA)의 주동자였다. OUN은 나치의 편에서 유대인을 추격하던 경찰에 협조했으며, 우크라이나 반군은 1943년 볼히니아(우크라이나 서부지역)에서 폴란드인 6만 명을 학살했다.(1)

 

‘위대한 애국 전쟁’에 대한 향수

한편, 득세한 친러 성향의 지역 정당들은 정반대의 시선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돈바스의 지역 정체성을 이데올로기 삼아 정통 슬라브 세계를 표방하며, 파시즘에 맞서 싸우던 ‘위대한 애국 전쟁’을 기억한다. 우크라이나에서 이 두 가지 상이한 기억이 충돌하고 있다. 2014년 러시아 정부가 이 같은 분열을 이용해 돈바스에 분리주의 공화국을 세우면서 우크라이나의 정책이 국가 충성파를 중심으로 급진화됐다. 2015년에는 ‘탈공산화’법이 표결에 부쳐졌지만, 낫이나 망치 같은 공산주의 선전물을 금지한다고 당면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돈바스 지역 분쟁과 과두정치의 영향력 같은 문제가 포진해 있었다. 

이에 맞서고자 2019년 러시아와의 외교적 긴장 완화를 공약으로 내세운 러시아어권 출신 유대인 볼로디미르 젤렌스키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젤렌스키는 은밀한 국수주의 노선을 표방했지만, 과격한 민족주의 세력과 완고한 러시아 사이에서 정치적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했다. 2021년 7월, 러시아 푸틴 대통령은 자신의 역사관을 25페이지에 걸쳐 발표했다.(2) 이에 대해 젤렌스키 대통령은 다음과 같이 평했다. “그토록 강대한 힘을 가진 대통령이 그렇게 세세한 작업에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있다니 부러울 따름이다.”(3) 푸틴은 유명한 역사적 사건을 연결하며 1,000년이 넘는 역사의 “핵심 포인트”를 설명한다.

그의 글은 간결하고 단조롭다. “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 벨라루스인은 핀란드 인근의 라도가 호수에서 체르니히우까지 뻗어있던 중세 키이우 공국의 후예다. 그들은 같은 언어와 같은 정교회 신앙 아래 뭉쳤다.” 이 같은 공동체는 몽골의 침략으로 해체됐다. 키이우가 파괴되자 우크라이나인들은 서쪽으로 밀려났다. “폴란드와 로마식 풍습을 강요당했고 서쪽의 러시아 정교회 사제들은 교황의 권위에 복속됐다.” 이는 오늘날 서부 리비우 지역에 널리 퍼진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교회(귀일교회)의 기원이 됐다. 

푸틴은 ‘재통합의 중심’에 러시아와 서구 세력의 대립구도가 있다고 여긴다. 이들의 분쟁은 몇 세기에 걸쳐 이어졌다. 우크라이나의 카자크 수장국 지도자 보흐단 흐멜니츠키는 폴란드의 지배에 대항하고자 1654년 모스크바 대공국(루스 차르국)과 페레야슬라프 조약을 체결했다. 그 결과로 카자크인들은 “정교회를 믿는 주류 러시아 국민으로 재통합됐으며, 드니프로 강의 좌안 지역은 (…) 소러시아라는 이름을 받았다.” 푸틴은 18세기에 이르러 수장국의 지도자 마제파가 러시아 차르에 대항해 스웨덴의 편에 섰지만 “극히 소수의 카자크인만이 항거를 지지했다”고 기술한다.

푸틴은 세르게이 솔로비요프(1820~1879년)나 바실리 클류체프스키(1841~1911년) 같은  19세기 말 러시아 역사가들의 사상을 종합한다. 그는 20세기 민족주의자들을 배신자 마제파의 연장선상에 놓고 이렇게 평가한다. “모두를 배신한 마제파, (…) 나치에 부역한 반데라.” 마찬가지로 2014년, “서구 국가들은 (…) 급진 민족주의자 집단이 일으킨 쿠데타를 지지하고 있다”며 우크라이나를 “지속적으로 러시아와 분리하는 방향”으로 끌고 간다고 표현한다. 

 

역사에 심취한 푸틴, 중요한 사실을 간과

 

푸틴은 러시아 황제의 연설을 차용하는 등, 크게 두 가지 방식으로 자신의 논고를 펼친다. 하지만 그의 방식은 사적(史的) 연구 방법을 전혀 따르지 않고 있다.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우선 푸틴은 당시의 정세를 고려하지 않은 채 사건을 그 자체만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는 러시아를 키이우 공국의 후계자로 묘사한다. 마치 10세기 군주들이 자신의 후계자를 임명하던 것처럼 말이다. 그의 글에서 16세기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보다 먼저 등장해 우크라이나를 러시아로부터 떨어뜨리려던 세력이다. 마찬가지로 여러 강대국에 시달리던 격동의 지역을 다스려야했던 카자크 수장국의 지도자는 전형적인 파시스트가 된다.

다음으로, 푸틴대통령의 이름에는 프랑스어로 ‘러시아’로 번역되는, ‘루스키(Rousski)’, 즉 루시국(러시아어로는 루스국)에서 파생된 형용사로, 언어와 문화를 공유하는 공동체를 일컫는 의미의 단어와 1721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선포된 제정 러시아에서 유래된 국가를 의미하는 ‘로시스키(Rossiïski)’라는 두 단어의 모호한 개념이 내포되어있다. 푸틴은 이 두 개념을 섞어 사용함으로써 ‘루스 문화권(Rousskimir)’이라는 단일 정치 세력을 만들 정당성을 마련한다. 러시아어(루스키)로 글을 쓰는 우크라이나 작가 안드레이 쿠르코프는 끊임없이 러시아(로시스키) 대통령의 이러한 정책을 고발한다.(4) 

또한, 푸틴의 글은 국가의 정치적, 정신적 단일성을 위협하는 ‘분열’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다. 그가 “대러시아, 소러시아, 벨라루스가 삼위일체를 이루는 단일 국가를 세우지 않고 슬라브 3개국(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체제를 유지한 소련 시절 국가 정책”을 비난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2022년 2월 21일, 공격을 개시하기 이틀 전 연설에서 푸틴은 그 이유를 밝히며 레닌주의에 영향을 받아 제정된 소련 헌법 덕분에 우크라이나가 쉽게 독립할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5) 소련 헌법은 소속된 공화국들이 분리할 권리를 명시하고 있으며, 이 권리는 1991년 공식적으로 적용됐다.(6) 

푸틴은 또한 소련의 제도적 구조를 두고 레닌과 스탈린이 충돌했던 사건을 환기한다. 사학자 모셰 르윈이 “레닌의 마지막 투쟁”으로 부르던 사건이다.(7) 레닌은 소속 국가의 평등한 권리를 주장했고, 스탈린은 중앙집권체제에 기반한 지방자치제를 원했다. 푸틴은 레닌의 손을 들어주던 모셰 르윈과는 달랐다. “레닌의 우크라이나”는 “근대화된 우크라이나(…) 완전히 러시아에 의해,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볼셰비키와 공산주의 러시아의 손에 만들어진 국가”다. 우크라이나인을 포함한 여러 논객들이 이에 분개하며 레닌은 우크라이나의 건국자가 아니라고 외쳤다. 

하지만 그들도 레닌이 우크라이나를 단순한 “행정 단위”에서 “하나의 국가”로 바꾼 공로를 인정한다. 연방국 시절 우크라이나는 독립적이고 지속 가능한 국가의 기반을 마련했고, 소련을 벗어난 후 30년 동안 위기를 넘겨왔다.(8) 러시아 대통령은 “진정한 ‘탈공산화’가 무엇인지 보여주고자”한다며 노골적으로 우크라이나라는 국가 자체의 존립을 위협하고 있다. 볼셰비키, 그리고 특히 레닌의 “유토피아적인 끔찍한 환상”을 비난하는 푸틴은 제정 러시아가 1917년 산산조각 났다는 사실은 간과한다. 차르가 세운 러시아 제국은 전쟁에 총력을 기울일 여력이 없었다. 우크라이나, 핀란드, 캅카스 지방, 중앙아시아 곳곳에서 불만은 커져갔다. 특히 경제난에 허덕이던 노동자, 그리고 더 이상 ‘위대한 러시아’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칠 마음이 없는 군인들의 사회적 불만이 매우 컸다. 

역사에 심취한 푸틴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몇 가지 역사적 사실을 간과하는 위험한 일을 저질렀다. 

 

 

글·에릭 오노블 Éric Aunoble 
역사학자

번역·정나영
번역위원


(1) Grzegorz Rossoliński-Liebe, 『Stepan Bandera: The Life and Afterlife of a Ukrainian Nationalist. Fascism, Genocide, and Cult』, Stuttgart, Ibidem-Verlag, 2014.
(2) ‘De l’unité historique des Russes et des Ukrainiens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역사적 동질성에 관하여’, 2021년 7월 16일(프랑스어판 열람:  www.france.mid.ru).
(3) ‘Zelensky a commenté l’article de Poutine 젤렌스키가 푸틴의 글을 평하다’(러시아어), <Ukrainskaïa Pravda>, 2021년 7월 13일.
(4) Andreï Kourkov, ‘Nous, intellectuels ukrainiens, sommes unis 우크라이나 지식층, 우리는 단결한다’, <르몽드>, 2022년 3월 4일.
(5) ‘Intervention du président russe 러시아 대통령의 개입’, 2022년 2월 22일, www.france.mid.ru
(6) Roman Szporluk, ‘Lenin, ‘Great Russia’ and Ukraine’, <Harvard Ukrainian Studies>,Cambridge, vol. 28, n°1/4, 2006.
(7) 『Le dernier combat de Lénine 레닌의 마지막 투쟁』, Paris, Éditions de Minuit, 1967.
(8) Mikhail Minakov, ‘Un siècle de système politique ukrainien 우크라이나 정치 체계 100년사’(러시아어), <Neprikosnovennyï Zapas>, n°129, 2020.

 

 

역사적 러시아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기 사흘 전인 2022년 2월 21일의 연설에서, 푸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가 이른바 ‘역사적 러시아’에 속한다고 주장했다.

 

“나는 우크라이나가 단순히 우리의 이웃 국가 이상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습니다. 우크라이나는 우리의 역사, 문화, 정신적 공간의 일부로 침해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들은 우리의 동지이자 가장 소중한 이들입니다. 동료, 친구, 함께 군복무를 했던 사람들일 뿐 아니라, 부모이자 혈연, 가족관계로 맺어진 사람들입니다. 

태곳적부터 역사적으로 러시아 영토였던 지역의 남서쪽에 살던 사람들은 스스로를 러시아인이자 정교회 신자라고 불렀습니다. (…) 지금의 우크라이나는 전적으로 러시아에 의해, 더 정확히 말하면 볼셰비키와 공산주의 러시아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이 과정은 실질적으로 1917년 혁명 직후에 시작됐고, 레닌과 그의 동료들은 러시아로서는 극히 힘든 방식, 즉 역사적으로 러시아 영토인 곳을 가르고 나누는 방식으로 진행됐습니다. 그곳에 사는 수백만 주민들에게 그들의 생각을 물어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

소련이 붕괴되기 2년 전만 해도 운명은 이미 정해져 있었습니다. 특히 우크라이나 내의 급진주의자들과 민족주의자들은 현재 독립을 쟁취한 공로를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확인한 바로는,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통일 국가의 해체는 볼셰비키와 소비에트 공산당(CPSU) 지도부의 역사적·전략적 실수에서 비롯됐습니다. 국가 건설과 경제 및 민족 정책에서 서로 다른 시기에 저질러진 실수였습니다. ‘소련(USSR)’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역사적 러시아의 붕괴는 그들의 마음을 괴롭힙니다. (…) 

동시에 우크라이나 당국은 우크라이나에서 살아가는 전 세대 수백만 국민의 정신과 역사적 기억을 왜곡하려 애쓰면서, 우리를 하나로 만든 모든 것을 부정하는 것에서 국가 건설을 시작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