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와 패권, 요동치는 중동의 지정학
이집트, 시리아, 예멘, 바레인 등 아랍 국가에서 시위가 계속되고 있다. 1년 전 불붙은 민중봉기가 끝나려면 아직 멀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민주주의를 향한 열기 말고도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부분이 있다. 수많은 분쟁으로 얼룩진 이 지역이 국제 지정학적 질서 측면에서도 문제가 되고 있다는 점이다.
“사자는 외부 침입자가 자기 집 안으로 들어오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사자는 야밤에 새끼들이 사라지는 걸 원치 않는다. 사자는 저들이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사자의 집에 함부로 들어가서는 안 된다.” ‘외부 침입자’란 누구를 가리킬까? 물론 가택침입을 일삼으며 의심스런 인물을 체포하는 국제안보지원군(ISAF) 병사를 말한다. 그런데 장내의 사람들에게 박수갈채를 받으며 이런 말을 한 사람에게서는 위대한 맹수다운 면모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하미드 카르자이 아프가니스탄 대통령이 2001년 정권을 잡은 것도 미국의 지원사격 덕분이었고, 그의 정치적 생존 또한 후견인에게 빚지고 있었으며, 2009년 8월 대선에서는 ‘국제사회’의 후원이라는 눈속임을 했다.(1) 그런 그가 민족주의적 발언을 한 이유는 대규모의 미군 부대와 그 보충 부대가 철수하는 2014년 이후를 대비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이런 감언이설이 부역자의 운명을 구제해줄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원문 보기>>
친미 정권들, 미국 떠난 뒤의 고민
같은 시기, 미국은 역사상 가장 대대적인 군사 및 물자의 본국 송환 작업에 착수했다. 연말이 되면 이라크에는 몇백 명 정도의 자문위원밖에는 남지 않는다. 마지막 순간까지 미국은 몇만 명의 병력을 이라크에 남겨두기 위해 애써봤지만, 이라크 국민의 반대가 너무 거센 바람에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동맹 세력까지 이 계획을 거부했다.
미국은 독재자가 축출된 이라크라는 유산을 남기고 떠나지만, 이라크가 중동 민주화 모델이 되기는 어려울 듯하다. 현재 이라크는 나라 전체가 황폐해지고 분열됐으며, 정부는 와해됐다. 과부나 고아, 실종자, 신체가 잘려나간 사람이 수만 명에 이른다. 종교적 성향은 더 강해졌고, 알카에다 게릴라 부대는 여전히 활발하게 활동한다. 2003년 이라크 침공 당시만 해도 이라크에서는 알카에다 게릴라 부대를 찾아볼 수 없었다. 이같은 범죄와 관련해, 미국의 어떤 책임자도 국제형사재판소에 소환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당연히 미국과 연계돼 있을 바그다드의 현 정부는 역설적이게도 이웃의 강대국인 이란과 우호적 관계 이상을 유지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에서든 이라크에서든 외부 지배에 대한 국민의 거부가 극명히 드러나는데, 식민지 시절로 되돌아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두 지역에서의 실패는 중동 내 미국의 취약성을 잘 나타내주며, 이는 아랍 혁명과 튀니지 진 엘아비딘 벤 알리 정부의 축출, 그리고 미국의 아랍 전략에서 주춧돌로 비호되던 이집트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의 퇴진으로도 확인된다.
아랍권에서 미국이 약세를 보이자, 불안정하고 유동적인 정세 속에서 당사국들의 좀더 활발한 역할이 부각되고 있다. 중동은 두 개의 진영으로 나뉘어 있었다. 하나는 이란과 시리아, 그리고 이들의 팔레스타인 하마스 동맹 및 레바논 헤즈볼라 동맹으로 구성된 ‘저항’ 진영이고, 다른 하나는 이집트와 사우디아라비아를 주축으로 한 친서방 진영이다. 일단 상황이 유리한 건 저항 진영이다. 튀니지와 이라크라는 친서방적 정부 2곳을 시위대가 장악했기 때문이다. 이는 바레인과 예멘 등 다른 나라에도 파장을 미치고 있다. 요르단과 모로코에서도 변화의 바람이 일고 있으며, 레바논의 베이루트에서는 아예 헤즈볼라와 기독교 동맹 세력인 미셸 아운 장군의 자유애국운동이 이끄는 정부가 합법적으로 수립됐다.
아랍 내 동맹 세력을 잃어버린 미국의 ‘세력 약화’를 우려한 사우디아라비아는 아랍 지역에서 이는 혁명의 바람이 자국까지 미칠까 불안해하며, 그간의 수동적 태도를 버리고 본격적으로 전투에 뛰어들었다. 그 일환으로 사우디아라비아는 일단 2011년 초, 불과 몇 주 만에 (포르투갈의 국가 부채와 맞먹는 수준인) 2140억 달러를 자국 국민에게 쏟아부으며 불만의 목소리를 잠재웠다. 그동안 소수 시아파뿐 아니라 젊은 층에서도 불만이 들끓었고, 이는 블로그와 소셜 네트워크를 통해 표출됐다. (2000년 실업자의 18%가 대졸 출신인 데 반해, 2009년에는 44%까지 올라간다.)(2) 내무부가 만들어낸 일자리 6만 개는 반발 세력에 대한 일종의 경고였다. 이어 정부는 지리적 위치와 상관없이 요르단과 모로코를 걸프협력회의(3)에 통합시키자는 제안을 내놓고, ‘대오 유지’를 위해 이 군주국 및 이집트 신정부에 재정 지원을 감행했다.
넓어지는 사우디의 오지랖
결국 사우디아라비아가 주축이 된 걸프협력회의의 병력은 지난 3월 중순 바레인을 침공해 민주주의 저항 세력을 진압하고, 입헌군주제에 위배되는 그들의 요구를 짓밟았으며, 이는 다시 아랍권 전역에서 시아파와 수니파 사이의 갈등을 부추겼다. 이 침공은 미국의 입장보다 ‘이란의 위협’을 저지한다는 명분으로 이뤄졌는데, 걸프 지역 국가의 지도자들에게는 이스라엘의 위협보다 이란의 위협이 훨씬 크다.
1979년 이란 혁명 이전부터 오랜 숙적 관계인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는 과거 둘 다 미국의 동맹국이었다. 1980~88년 전쟁 기간에, 당시 이란의 최고 지도자인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가 사우디아라비아 국민을 쓰러뜨리자고 호소하고, 사우디아라비아는 또 그 나름대로 이란에 대한 이라크의 공격을 지원하면서 두 나라의 관계는 심각하게 악화됐고, 이는 1990년대 들어서야 진정되기 시작한다.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 시아파 성향(즉, 친이란 성향)의 이라크 정부 수립, 이란 지역 내 세력 강화, 바레인에서의 항의 등 일련의 상황은 걸프 지역 내 두 열강인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의 경쟁을 다시금 부추겼고, 이는 시리아 문제를 통해 구체화됐다.
아랍연맹 인권 개입, 미국 향한 구애?
지난 11월, 시리아의 회원 자격을 박탈하기로 한 아랍연맹의 결정은 미국과 유럽 국가들의 환호를 받았다. 오랫동안 미온적 태도로 비난받아온 아랍연맹이 결국 움직이면서, 말로만 부르짖는 게 아니라 실제 행동으로 인권을 보호했기 때문이다. 1975년부터 막강한 내무부 장관으로 군림해온 나이프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 새 왕세제가 종교 경찰 활동을 재개한 사우디아라비아가, 시리아에 반대표를 던진 것에 의아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반대파를 붙잡아 고문한 바레인의 표결도 마찬가지였고, 반인류범죄 및 전범죄, 대량학살죄로 국제형사재판소에 기소된 수단 대통령의 표결에도 사람들은 마냥 흐뭇해했다. 아랍동맹도 이제 ‘아랍의 봄’에 합류하게 될 것이었으니까 말이다.
다만, 레바논의 지식인 아스아드 아부칼릴의 다음과 같은 예상이 적중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아랍연맹이 그렇게 표결한 이유는 아랍권의 민중봉기라는 현재의 난국과 무관하다. 이는 미국이 제시한 방향에 부합하며, 아울러 카타르 왕국의 점점 커져가는 야심으로도 설명된다. 카타르 왕국은 사우디아라비아나 요르단과 마찬가지로 자국 또한 미제국주의의 이해관계에 순순히 복종하고 따를 수 있으며, 이를 위해 충성을 다하겠다는 뜻을 워싱턴에 증명하고 싶어 한다. 그리고 시리아에 반대하는 표결로써 미국(및 이스라엘)에 대한 자국의 효용성을 확인시키고 싶은 것이다. 아랍동맹은 조직이 철저히 미국의 결정에 따를 때만 그 역할 발휘가 허용된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중략) 차라리 아랍동맹이 모든 역할에서 손을 떼는 편이 낫다.”(4)
‘이란 핵’보다 위험한 종교 내전
중동 지역에서는 민주주의라는 미래뿐만 아니라 중동의 독립도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이 아니더라도, 가말 압델 나세르의 전 자문위원으로 영향력 있는 이집트 언론인인 모하메드 하사네인 헤이칼의 견해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서구 열강들 사이에 영토를 나눠갖기로 약속한 신 사이크스-피코 협정(5)을 언급한다.(6) 과거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비밀 협약인 이 협정이 체결된 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을 탄압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문제로 아랍동맹에서 심각한 반발이 초래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걸로 시리아에 대한 헤즈볼라의 지지가 정당화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숨겨진 이면을 살펴보고 나면 헤즈볼라가 왜 시리아를 지지했는지 설명된다. 헤즈볼라 지도자인 하산 나스랄라의 말에 따르면, “시리아의 정권 유지는 팔레스타인의 명분이 살아남기 위한 필요조건”이다.(7)
시리아에서 바샤르 아사드 정권은 폭력만이 ‘외부의 음모’에 대한 유일한 대응법이라고 결론지었다. 아사드 정부는 전투 현장에 군대와 민병대를 파견하고, 고문과 암살, 대량 검거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아사드 쪽은 시아파의 분파인 알라위파에도 근거지를 갖고 있었고, 기독교인이나 드루즈족 등 소수계파에도 기반을 두고 있었으며, 심지어 수니파와도 손잡고 있었다. 아사드 대통령에 대한 이들의 지지 표명이 이를 증명하는데, 이는 서구권 방송에서도 <알자지라>에서도 전혀 보도된 바 없다. 아사드 정권은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이를 이용하고 있지만, 종교를 둘러싼 내전의 위험은 실질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는 인접 국가들의 우려를 사고 있는데, 터키가 대표적 경우다.
시리아와 900km의 국경을 맞대고 있는 터키는 일단 아사드 대통령에게 개혁 추진을 권유했으나 아사드 대통령이 완강히 거부하자,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총리는 아사드 정권에 적대적인 진영으로 합류했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원국인 터키는 이스라엘에 대한 거센 비난과 중동 지역에서 이란을 제치고 높아지는 인기, 그리고 시리아가 1990년대처럼 쿠르드노동당(PKK)을 지원하면서 새로이 쿠르드 카드를 쓰며 반격해올 우려 등과 관련해 고지를 점하려고 한다. 터키는 시리아 정부군에 대항하는 시리아 자유군 부대가 자국 영토에 주둔하는 것을 허용했고, 분쟁이 확대될 경우 시리아 영토에 자국민 보호구역 설치까지 고려할 것으로 보인다. 이 지역의 여러 당사국들과 마찬가지로 터키 역시 종교를 둘러싼 내전이 레바논에서 이라크에 이르기까지 주변국들로 확산되며 지역 전체를 타오르게 할까 우려하고 있다. 이는 이란의 핵 ‘위협’보다 더 심각한 위험이다.
지역 분쟁은 민주화에 큰 걸림돌
언론의 대대적인 보도에도 불구하고, 11월에 발간된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보고서는 이란의 핵무기 제조에 대해 전혀 확언하지 않은 채 의혹만 제기했다. 서구권 국가들과 이스라엘 안보국은 이런 의혹을 더욱 증폭시키고 있다. 정작 IAEA에는 자신들이 갖고 있는 ‘정보’ 출처의 제공을 한사코 거부하면서 말이다. 1984년 4월 24일 처음 제기돼 수십 년째 반복되는 핵무기 개발 의혹의 당사자인 테헤란 쪽은 이에 아무런 답변도 내놓지 않았다.(8)
미국 플로리다대학 하미드 세리의 지적처럼, 이런 구도는 이상하게도 2000년대 초 이라크의 경우를 연상시킨다.(9) “이라크 전쟁이 발발하기 사흘 전인 2003년 3월 17일, (한스 블릭스가 이끄는 유엔 무기사찰단의) 한 보고서는 ‘이라크가 대량살상무기 은폐 혐의를 완전히 씻어내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왜 이렇게 어설픈 ‘실수’를 저지른 것일까? “문제는 정보가 아니라 감시단의 전제였다. 감시단은 결코 뒤집어질 리 없는 이론에 사로잡혀 있었다. (중략) 이라크를 신뢰할 수 없다는 원칙에 동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증거가 없다는 것으로는 아무것도 증명할 수 없었다. 무언가를 감추고 있지 않다는 걸 어떻게 증명할 수 있겠는가.”
1990년대 말 이라크와 마찬가지로 이란은 그 ‘불순한 의도’에 맞서는 자신을 보게 될 것이다. 이 과정에서 목표는 이란 핵 프로그램의 진실을 밝혀낸다는 정당한 목표가 아니라, 이란 정권 자체를 언제나 의혹의 대상으로 유지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계속 주장한다. 이란의 목표는 핵무기로 이스라엘을 파괴시키는 것이라고. 에후드 바라크 이스라엘 국방부 장관도 이토록 정세가 불안한 지역에서 테헤란이 무기를 보유하려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고 설명하지 않았던가.(10)
그렇다면 내일 당장 전쟁이 터지는 걸까? 예단하기는 어렵다. 이 나라에 대한 공격이 미칠 엄청난 파급효과는 중동 지역에 하나의 재앙이 될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하지만 1라운드는 미국과 이스라엘의 승리다. 팔레스타인 문제에서 관심을 돌리고, 다른 온건파 아랍 국가와 이스라엘 사이의 동맹을 꾸릴 수 있게 하는 적을 하나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이는 1980년대에 이미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의 오랜 꿈이었다. 레이건 대통령은 ‘소비에트연방의 위협’에 맞서 아랍권 국가들과 이스라엘을 하나로 묶으려 했다.
아랍 혁명은 역내 갈등의 지정학적 측면을 가리는 요소로 작용했다. 이라크의 내전, 쿠르디스탄의 불안정, 레바논에서의 조용한 내전, 팔레스타인의 분열, 남수단 독립, 수단 내 분리주의 운동, 사하라의 불안한 정세, 서사하라 분쟁 등 중동 지역과 마그레브 지역의 분열 양상은 2011년 이전에도 이미 감지됐다. 이 지역에서 새로운 전쟁이 터지면 이는 민주화운동에 제동을 걸 수 있을 뿐 아니라 유럽에 인접한 ‘근동’ 지역이 대혼돈의 정국에 빠지는 시발점이 될 것이다.
글 / 알랭 그레슈 Alain Gresh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기자
주요 저서로 <중동 문제를 푸는 100가지 열쇠>(Cent Clés du Proche-Orient·Hachette·Paris·2006) 등이 있다.
번역 / 배영란 runaway44@ilemonde.com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역서로 <미래를 심는 사람> 등이 있다.
(1) Alissa J. Rubin, ‘Karzai details vision for longterm partnership with US’, <International Herald Tribune>, Neuilly-sur-Seine, 2011년 11월 16일.
(2) Edit Schlaffer & Ulrich Kropiunigg, <Saudi youth: Unveiling the force for change>, Center for Strategic and International Studies, Gulf Analysis Paper, Washington DC, 2011년 11월.
(3) 사우디아라비아, 바레인, 아랍에미리트연합, 쿠웨이트, 오만, 카타르 등 아랍-페르시아만 주위의 6개국으로 이뤄진 지역 협력 기구.
(4) ‘Syria and the Arab League II. The motives’, <Al-Akhbar English>, 2011년 11월 18일, http://english.alakhbar.com.
(5)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전, 프랑스와 영국은 오스만제국과 아랍 지역을 나눠 가졌다. 이 조약으로 오늘날 같은 이 지역의 대략적인 국경이 정해졌다.
(6) Muhammad Hassanein Heikal on the ‘newSykes-Picot’, <The Arabist>, 2011년 11월 13일, www.arabist.net.
(7) Amal Saad-Ghorayeb, ‘Why Hezbollah supports the Assad regime’, <Al-Akhbar English>, 2011년 11월 5일.
(8) Cf. Nima Shirazi, ‘The phantom menace: Fantasies, falshoods, and fear-mongering about Iran’s nuclear program’, <Wide Asleep in America>, 2010년 12월 29일, www.wideasleepinamerica.com
(9) Hamid Serri, ‘Iran’s UN inspectors are repeating the Iraq mistakes’, Informed Comment, 2011년 11월 18일, www.juancole.com.
(10) M. J. Rosenberg, ‘Iranian nuclear programme not about Israel’, <Al Jazeera English>, 2011년 11월 20일, www.aljazeer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