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신흥 재벌 올리가르히의 화려한 성공
소련 붕괴의 잔해 위에서 푸틴의 측근들이 쌓아올린 부
1990년대 초 러시아가 도입한 경제 자유화의 첫 수혜자였던 ‘올리가르히’는 경제 제재 속에서도 여전히 부를 누리고 있다. 그러나 서방 강대국들이 푸틴 대통령과의 유착관계를 비난하고 러시아가 매국행위를 의심하는 상황에서, 이들은 더 이상 지난 세월 누렸던 관용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미국의 경제전문지 <포브스>가 매년 발표하는 세계 부호 명단에 따르면, 2022년 10억 달러 이상을 보유한 러시아의 억만장자는 83명이다. 작년에 비해 34명이 줄었고 1년 만에 러시아의 신흥재벌, ‘올리가르히’의 자산은 평균 27% 감소했다.(1) 전쟁 때문에 자산 손실이 발생했고, 2월 24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서방의 고강도 대러 제재가 효과를 발휘했기 때문이다. 루블화 가치도 급락했다. 그러나 <포브스>는 미국, 영국, 유럽연합이 러시아 억만장자 25명의 재산을 몰수하기 위해 제재를 단행했으나 나머지 50여 명은 여전히 호화로운 생활을 누리고 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녹록지 않은 올리가르히 제재
3월 1일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은 국정연설에서 미 법무부가 ‘러시아 올리가르히의 범죄 추적 전담 태스크포스 팀’을 창설한다고 발표했다. 바이든 미 대통령은 의원들의 갈채를 받으며,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지원하는 러시아 부호들에게 “미국은 유럽 동맹국과 공조해 당신들의 요트, 고급주택, 전용기를 찾아낼 것이다. 불법으로 쌓은 부를 용납하지 않겠다”라고 경고했다.
하지만 이 제재조치를 시행하기는 쉽지 않다. 첼시 구단주가 되면서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올리가르히가 된 로만 아브라비모치의 경우만 봐도 알 수 있다. 유럽연합과 영국은 아브라모비치에 대한 제재에 착수했지만 미국은 아무런 압박을 가하지 않았다. 사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직접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중재자 역할을 하고 있는 아브라모비치를 당분간 보호해 줄 것을 요청했기 때문이다.
러시아, 이스라엘, 포르투갈 3중 국적자인 아브라모비치는 언제든 상황이 급변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가 소유한 것으로 알려진 4척의 요트 중 이클립스와 마이 솔라리스, 2척은 튀르키예의 마르바리스 항에 정박했다(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비난했지만, 러시아 기업인에 대한 제재는 반대한다). 나머지 2척은 카리브 제도의 안티구아로 보냈다. 이전에 보유했던 것으로 알려진 1척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직후 비밀리에 매각한 것으로 보인다.(2)
러시아 부호들이 이미 재산의 절반 이상을 조세 피난처로 불법 반출한 상황에서 자산을 압류, 동결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3) 올리가르히는 소련 붕괴 후, 특히 1990년대 신속한 시장경제 도입과 재산 사유화를 목적으로 추진했던 민영화 과정에서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당시 미국 경제 자문과 IMF가 부추겼던 ‘충격요법’은 러시아에 밝은 미래를 약속했다.(4)
공산주의 몰락의 주도자로 추앙받던 보리스 옐친 당시 러시아 대통령은 민영화를 통해 ‘극소수가 백만장자가 되는 게 아니라, 수백만 국민이 재산을 사유하게 될 것’이라고 장담했다.(5) 그러나 마르크스주의를 역행하는 이 시도로 인해, 일부만 부자가 됐고 대다수의 러시아 국민은 훨씬 가난해졌다. 빈부격차가 심화된 것이다. 구소련 시대에 가장 부유한 사람의 자산이 가장 빈곤한 사람보다 6배가 많았던 반면 2000년에 이 격차가 무려 25만 배로 벌어졌다.(6)
이후 옐친의 지지율은 급락했지만 1996년에도 기업인 보리스 베레좁스키를 비롯한 1세대 올리가르히의 지지를 받아 재선에 성공했다. 그 다음해 바로 러시아 억만장자 4명이 <포브스>의 부호 명단에 들어갔다. 1998년 경제 위기와 러시아 모라토리엄 선언 이후 올리가르히는 재정상태가 악화된 정부의 보호자 역할을 하게 됐다. 소설가 조지 오웰의 말을 빌리면, 혼돈과 금융범죄는 평등, 개혁, 시장과 같은 허울 좋은 말로 포장된다. 프린스턴 대학 스티븐 F. 코헨 교수는 미국 경제 자문들이 러시아 신흥 엘리트 집단(정부, 싱크 탱크, 대학 등)에 끼친 악영향에 관한 연구에서 바로 이 ‘말장난’이 눈을 가렸다고 지적했다.(7)
러시아에서 국부를 거덜 낸 사기는 ‘개혁’으로 평가받았고 마피아 조직 같은 시스템을 ‘시장’이라고 불렀으며 화폐개혁, 물물교환, 지하경제는 ‘통화주의’ 정책이, 그리고 돈세탁 기지는 ‘은행’이 됐다. 그리고 이 은행이 헐값에 공공 자산을 넘겨받는 독특한 조건으로 정부에 제공하는 대출을 ‘민영화’라고 칭했다. 러시아는 국제금융권에서 ‘가장 성공적인 이머징 마켓’으로 칭송받았다. 1999년 병세가 악화된 보리스 옐친은 소련 국가보안위원회(KGB) 간부였던 블라디미르 푸틴을 후계자로 지명했다.
대중에 잘 알려져 있지 않았던 푸틴은 2000년 집권하자마자 공개적으로 ‘올리가르히 숙청’을 단행했다. 푸틴 정부는 첫 법령을 통해 전임 대통령과 그의 가족에게 완전 면책 특권을 부여하기는 했지만 이 신임 대통령은 정부의 권위를 회복시키고 권력을 증명하는데 주력했다. 이를 위해 푸틴 정부는 국가 차원에서 전략적이고 상징적인 가스, 석유와 같은 에너지 산업을 재국유화 했다. 뿐만 아니라 너무 독립적인 올리가르히를 몰아내고 대신 충성심이 높은 측근들을 비호해주며 이들과 새로운 계약 관계를 맺었다. 이 심복들은 납세의 의무를 준수하고 정부가 요청하는 경우 (수익이 보장되지 않더라도) 대규모 국가투자 사업을 지원하겠다는 약속을 지키면 당국의 제재 없이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물론 정치개입, 특히 대통령 비난은 금지된다.(8) 이 요구조건을 거부한 올리가르히는 망명을 선택했다. 이 중 한 명이었던 베레좁스키는 2013년 영국에서 사망했다.
2003년 푸틴 대통령이 러시아 재계서열 1위였던 미하일 호도르콥스키에게 내린 처벌은 모든 올리가르히에 대한 경고장과 같았다. 과도한 권력과 독립을 누렸던 이 석유 재벌은 탈세, 자금세탁을 비롯한 각종 범죄 혐의를 받았다. TV로 중계된 공개 재판에서 이 거물은 피고인용 철창 안에서 침묵을 지키며 앉아 있었고 검사는 그에게 죄명을 조목조목 나열했다. 이 재판 결과 호도르콥스키는 재산을 몰수당했으며 10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복역 후, 그는 은퇴를 선언했고 이후 런던으로 이주했다. 그러나 러시아는 호도르콥스키를 ‘외국에서 파견한 첩자’라는 혐의를 씌워 다시 고소했다.
클렙토크라트와 올리가르히
동시에 푸틴 대통령은 대외적으로 재계를 안심시키려 노력했다. 그래서 2003년 뉴욕을 방문했을 때 러시아는 ‘정상적인 유럽 국가’의 가치에 동의할 뿐만 아니라 경제 자유화와 감세 정책을 차질 없이 시행하겠다고 호언했다. 그러나 경제 범죄는 여전히 고질병으로 남아있다. 종이 위에 적힌 법은 강력하다. 그러나 법의 적용은 일관성이 없고 심지어 돈으로 피해갈 수 있다. 말단, 고위 공무원 할 것 없이 모두 자신의 주머니를 채우려 하기 때문이다. 많은 공무원들의 생활 수준을 보면 급여 외에 다른 수입원이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게다가 2013년 러시아 의회 ‘두마’는 일반 사면법을 채택했고 이후 돈세탁, 탈세를 비롯한 각종 경제 범죄를 저지른 기업인 수천 명이 석방됐다.
2013년 4월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ICIJ)가 기자 10여 명과 협업해 조세 피난처에 재산을 은닉한 부호들을 고발하는 ‘오프쇼어 리크스(Offshore Leaks)’를 보도했다. 이를 계기로 세계 경제에 뿌리박힌 불법 금융거래의 실태를 파악할 수 있었는데 전 세계 13만 개 계좌의 상세 내역에서 탈세가 포착됐다. 이후 이와 유사한 프로젝트가 이어졌다. ‘스위스 리크스(Swiss Leaks)’(2015), ‘파나마 페이퍼스(Panama papers)’(2016), ‘핀센 페이퍼스(FinCen pagers)’(2020), ‘판도라 페이퍼스(Padora papers)’ (2021), ‘스위스 시크릿츠(Swiss Secrets)’(2022)는 조세 회피를 이용해 막대한 재산을 반출하는 그림자 금융(Shadow Banking)의 다양한 행태를 보여줬다.
금융기관, 변호사, 페이퍼 컴퍼니, 자금 운용 전문가, 바지사장, 중개인 등이 재산 은닉과 반출을 돕고 있어 자산의 출처 및 이동에 대한 추적이 어렵다. 그래서 ‘도둑 정치’로 부와 권력을 독점하는 전 세계 클렙토크라트(도둑 정치)가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고 국민들의 재산을 약탈할 수 있다. 물론 러시아와 소련에서 독립한 공화국(박스 기사 참조)의 올리가르히도 이런 탐욕의 세계에서 ‘활약’하고 있다. 물론 이런 부정부패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러나 국제경제 관계에 큰 변수가 생겼다. 바로 금융 세계화다. 이제 클렙토크라트는 자국 경제개발에 필요한 재원이 심각하게 부족한 상황 속에서도, 불법적으로 국가재산을 탈취하는 즉시 이 범죄행위를 숨기고 당국의 조사를 피할 수 있다. 간단히 문서 조작만 하면 막대한 자금을 숨긴 다음 ‘더 관대한’ 나라로 옮겨놓을 수 있다.
그런데 올리가르히의 재산에만 초점을 맞추다 보면 이와 같은 불법적 재산 반출을 돕는 지원 조직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있다. 부정부패퇴치 비정부기구 소속 전문가 프랭크 보글은 이 ‘공모자들’의 해악에 대한 연구에서 런던, 뉴욕 등 전 세계 금융 중심지에 있는 금융과 법률 자문, 부동산 중개인, 호화요트 판매업자, 예술품 거래상, 경매업자, 다이아몬드와 금 도매업자, 회계사, 컨설팅 회사로 구성된 조직이 클렙토크라트가 그간 착복한 재산을 은닉하도록 부추기고 지원하며 그 성과에 대한 사례금을 받는다고 설명했다.(9) 세계 자산가들이 ‘수십억 재산을 숨기기 위해 수백만 비용을 지불하는’ 자산관리산업은 구소련 해체 후 올리가르히가 등장하면서 급속히 발전했다.(10)
‘황금비자’로 쌓아올린 ‘런던그라드’
탐사보도 기자 케이시 미셸은 ‘미국 클렙토크라시’에 관한 저서에서 미국 내에도 상장기업 절반 이상이 모여 있는 델라웨어주(조 바이든이 오랜 기간 연방 상원위원으로 재직한 주)와 같은 조세 피난처가 있다고 비난했다. 미국의 법은 매우 엄격해 보이지만 부동산 중개업자등을 대변하는 로비스트가 뚫어놓은 구멍들이 있다. 그래서 부동산 업자들이 뉴욕이나 마이애미 등지에서 고급 아파트를 매수할 때 러시아 올리가르히 같은 부호들도 정부가 강조하는 거래 투명성에 대한 규정을 무시하듯 ‘공모 조직’을 통해서 신분을 숨기고 부동산을 매입한다.(11)
1994년 영국 존 메이저 총리가 이끌던 보수당 정부는 외국인이 투자금 100만 파운드를 예치하면 영국 국적 취득을 위한 첫 번째 단계인 체류증을 발급해주는 ‘황금 비자’ 제도를 도입했다(지난 2월 17일 이 법은 폐지됐다). 안전한 데다가 영국 경제로 흘러들어오는 자금의 출처를 엄격히 따지지 않는 런던은 올리가르기가 가장 선호하는 행선지가 됐다. 할리우드처럼 런던에서도 ‘런던그라드(Londongrad)’라고 불리는 나이츠브리지와 메이페어와 같은 부촌을 돌아볼 수 있는 가이드 투어가 있어서 관광객들은 직접 올리가르히와 클레토크라트의 화려한 저택들을 구경할 수 있다.
이런 ‘클렙토 투어’를 직접 운영하는 기자 올리버 벌로우는 최근 저서에서 1956년 수에즈 위기 이후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쇠락한 대영제국의 수도가 어떻게 점차적으로 국제 금융 허브가 됐다가 아예 온갖 종류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세계 부자들의 유능한 집사’로 전락했는지 설명한다.(12) 이곳에서는 금융과 법의 허점을 이용해 불법 자금 세탁을 할 수 있고 보디가드, 정원사, 가사도우미, 보모와 같은 각종 서비스를 이용하기가 쉬워서 클렙토크라트는 안락한 생활을 유지할 수 있다. 게다가 ‘공모자’들이 영국으로 도피한 부호들에게 상당한 대가를 받고 상류층에 편입될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올리가르히는 구호단체, 자선단체, 대학, 박물관에 재정 지원을 하는 방식으로 ‘신분을 세탁’하고, 정치계에도 호감을 주면서 인맥을 쌓아간다.
벌로우에 따르면 영국 정부는 순진하게도 ‘러시아 기업인들이 영국의 바람직한 지배구조, 투명성, 윤리의 원칙을 배우게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이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고소인에게 유리한 명예훼손에 관한 법은 영국의 자랑 중 하나다. 하지만 러시아 부호들은 그들의 신분을 포장하는 방법을 배움과 동시에 이 법을 이용해서 호기심이 많은 기자들을 쉽게 따돌리는 방법도 배웠다. 그래서 이들 자산의 출처와 푸틴과의 관계가 밝혀진 경우가 거의 없고 구린 냄새가 나는 과거는 오랜 기간 드러나지 않았다.
러시아 억만장자들이 영국으로 몰려들자 언론과 명예훼손 사건을 전문으로 하는 변호사들은 횡재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이 업계에서 일인자로 꼽히는 카터록(Carter Luck) 로펌의 변호사 니젤 타이트는 2021년 러시아 석유회사 로스네프트(Rosneft)를 대변해 탐사보도 기자 캐서린 벨튼에게 소송을 제기했다. 이 기자는『 푸틴의 사람들, KGB가 어떻게 러시아를 되찾고 서쪽을 차지했는가(Putin’s People. How the KGB took back Russia and then took on the West)』에서 푸틴과 그의 측근에 대해 심층 보도했다. 이 카터록 로펌은 홈페이지에 “니젤 타이트 변호사는 전화 한 통화, 공문서 한 장으로 고객에 대한 수많은 기사 게재를 차단했다”고 성과를 자랑했다.(13)
결국 올리가르히와 푸틴과의 관계를 파헤치고 있는 기자들의 열정을 식히는 것이 어렵지 않다는 말이다. 우크라이나 침공 후 영국 노동당 의원 밥 실리는 마치 이 상황을 몰랐던 것처럼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다는 말인가? 자유언론은 클렙토크라트와 범죄자에게 위협적인 존재여야 한다. 그런데 왜 우리와 같은 자유주의 사회에서 오히려 클렙토크라트, 범죄자, 올리가르히가 자유언론을 협박하는 지경에 이르렀단 말인가?”라며 당혹스러워했다.
영국 상원에 입성한 러시아 언론재벌
2014년 크름반도 합병 이후 러시아에 대한 서방의 제재가 이어지던 당시 올리가르히와 푸틴의 관계가 드러났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 이후 서방 민주 국가에서 러시아인들의 영향력에 대한 우려가 만연해졌다. 이제 올리가르히 재산의 의심스러운 출처보다 푸틴과의 관계가 더욱 심각한 문제로 제기됐다. 2020년 7월 20일 보안과 공공 정보를 담당하는 영국 하원위원회는 러시아에 대한 상세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 보고서는 “영국 내 러시아 세력이 침입했다. 푸틴의 측근들이 그들의 부를 이용해 영국의 경제, 사회 전반에 침투해 영향력을 확산시키고 있다. 이제 이로 인해 발생하는 손실을 막아야 한다”라고 경고했다.(14)
하지만 러시아의 눈에, 올리가르히는 믿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언제든지 서방국가에 동화돼 배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이런 불신은 절정에 달했다. 그래서 3월 16일 푸틴 대통령은 ‘미국 마이애미나 프랑스 라 리베리아에 고급 저택을 사두고 매일 푸아그라와 굴을 먹는 자들’이 첩자 역할을 하고 있다며 비난했다. 그는 “이들의 마음과 정신은 우리 국민, 러시아와 함께하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 있다. 그곳의 호화생활을 상류층의 상징처럼 여긴다. 이들은 상류층이 되기 위해 자신의 부모 팔 수 있다. 그곳에서 상류층이 되고 싶겠지만, 그 상류층은 러시아에 타격을 가하기 위해 러시아 사람들을 이용할 뿐”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제재를 통해 푸틴의 측근에게 타격을 가하고 결국 푸틴의 행동을 자제시킬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그런데 사실 로비활동을 할 수 있는 서방 국가나 약소국가와는 달리 러시아에서 부호들이 정부의 결정에 미치는 영향력은 미미하다. 그래서 서방 국가는 다양한 기준에 따라 제재 대상을 선택한다. 예를 들어 러시아에서 처음으로 인터넷 은행을 설립한 자수성가 기업인 올렉 틴코프는 푸틴 대통령과의 유착관계가 전혀 없고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우크라이나 전쟁을 강력하게 비난했다. 하지만 그의 이름은 영국 재무부의 제재 명단에 올라가 있다. 영국인이 되기에는 너무 러시아인인 틴코프는 러시아에서도 정권의 보복을 당했다. 은행을 국유화하겠다는 협박을 받은 틴코프는 어쩔 수 없이 금속업계 거물 블라디미르 포타닌에게 ‘몇 푼도 안 되는’ 헐값에 자신의 주식을 매도했다.
반면 <포브스>지가 발표한 러시아 최고 부자 포타닌이 푸틴의 측근이라는 사실을 모두가 안다. 그는 푸틴 대통령과 아이스하키 경기를 하고, 2014년 소치 동계 올림픽과 같이 푸틴 대통령이 크게 관심을 두는 사업이 아니라도 막대한 자금을 투자했다. 그런데 포타닌이 소유한 기업이 반도체의 핵심 원료인 팔라듐 총 생산량 중 40%를 생산하고 있어 국제 거래에서 전략적으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래서 미국, 영국, 유럽 연합은 함부로 제재를 가하지 못하고 주저한다. 하지만 포타닌은 이런 봐주기 식의 태도가 오래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안다. 그래서 그는 푸틴의 협조를 받아 투자금을 러시아로 회수하고 있다. 일례로 러시아 시장에서 철수하는 프랑스 금융그룹 소시에테 제네랄(Société générale)은 포타닌에게 러시아 국영기업 스베르방크의 지분을 매각해야 했다.
이제 진영을 선택해야 하는 시점이다. 2020년 7월 영국 하원위원회가 ‘러시아의 침투’를 우려하는 보고서를 발표한 지 몇 주가 채 지나지 않아, 보리스 존슨 총리의 제안에 따라 대부호 예브게니 레베데프가 영국 상원인 귀족원의 의원으로 지명될 것이라는 소식이 들렸다. KGB 전 요원이자 재벌 은행가였던 아버지 알렉산드르 레베데프는 이미 오래전부터 영국 상류층에 진입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본국에서 멀어진 이 올리가르히는 서구와 공조해서 러시아에서 수십억 달러를 유출시켰다.
이런 노선 변경이 그의 아들이 영국의 귀족 지명 위원회에서 ‘국가 안보에 대한 위험’이라는 비난을 받을 만큼 가치가 있었을까? 영국의 진보적인 일간지 <인디펜던트>와 보수적 성향이 짙은 타블로이드 신문 <이브닝 스탠타드>를 포함한 언론사 회장 예브게니 레베데프는 오랜 기간 보리스 존슨을 후원했고 덕분에 전 총리는 자리를 고수할 수 있었다. 결국 2020년 11월 예브게니는 상원(귀족원)에 입성했다. 그의 새 직함은 햄프턴과 시베리아의 바이런 레베데프 경(Lord Baron Lebedev of Hampton and Siberia)이다.
글·이브라힘 워드 Ibrahim Warde
미국 터프스 대학교 플래처 스쿨 교수
번역·정수임
번역위원
(1) David Dawkins, ‘Here’s how big a hit Russia’s billionaires have taken in the past year’, <Forbes>, Jersey City, 2022년 4월 5일, www.forbes.com
(2) ’Abramovich-linked yacht in Netherlands changed hands on day of Ukraine invasion’, <The Guardian>, London, 2022년 4월 8일.
(3) Gabriel Zucman, 『La richesse cachée des nations : Enquê̂te sur les paradis fiscaux 숨겨진 국부 : 조세 피난처에 대한 조사』, Edition du seuil, Paris, 2010년.
(4) Ibrahim Warde, ‘Les faiseurs de révolution libérale 자유 혁명의 주모자’,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1992년 5월호.
(5) Mark Hollingsworth, Stewart Lansley, 『Londongrad: From Russia with Cash; The inside Story of the Oligarchs』, Fourth Estate Ltd, London, 2010년.
(6) Bill Bowder, 『Red Notice : A true story of high finance, murder, and one’s man fight for justice』, Simon and Schuster, New York, 2015년.
(7) Stephen F.Cohen, 『Failed Crusade : America and the Tragedy of Post-Communist Russia』, W.W.Norton&company, New York, 2002년, David Mc Clintick, ‘How Harvard lost Russia’, <Institutional Investor>, 2006년 1월 13일, www.institutionalinvestor.com
(8) Catherine Belton, 『Putin’s People: How the KGB Took Back Russia and Then Took on the West』, Farrar, Straus and Giroux, New York, 2020년.
(9) Frank Vogl, 『Eht Enablers: How the West Supports Kleptocrats and Corruption – Endangering Our Democracy』, Rowman and Littlefield, London, 2022년.
(10) Chuck Collins, 『The Wealth Hoarders : How Billionaires Pay Millions to Hide Trillions』, Polity, Cambridge, 2021년.
(11) Casy Michel, 『American Oligarchs : How the US created with world’s greatest money laudering scheme in history』, St. Martin’s Press, New York, 2022년.
(12) Oliver Bullough, 『Butler to the World : How Britain Became the Servant of Tycooms, Tax Dodges, Kleptocrats, and Criminals』, Profile, London, 2022년.
(13) www.carter-ruck.com
(14) http://isc.independent.gov.uk
우크라이나의 올리가르히
올리가르히는 러시아 출신이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따라서, 구소련 연방의 다른 공화국에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어렵다. 하지만 조지아, 몰도바, 카자흐스탄, 아제르바이잔, 심지어 우크라이나에도 러시아 올리가르히처럼 1990년대 민영화 과정에서 불투명한 방식으로 급속히 부를 쌓은 억만장자들이 있다. 러시아에서는 블라디미르 푸틴 집권 이후 올리가르히가 직접 정치에 관여할 수 없었다. 반면 우크라이나의 자산가들은 고위관직을 맡거나, 의원직에 선출되거나, 언론사를 장악하는 방식으로 권력의 중심에 머물렀다. 2014년 친 러시아 정권을 반대하는 ‘오렌지 혁명’이 발발하자 유혈 진압으로 결국 100여 명의 시위대와 경찰이 사망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때 부패한 시스템을 발본색원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를 모은 한 올리가르히가 급부상했다. 유명한 초콜릿 회사를 소유하고 있는 페트로 포로셴코는 대선 1차 투표에서 득표율 54.7%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됐다. 국민들은 이 거물이 막대한 부를 가지고 있어서 더 이상 개인 재산을 불리기 위해 권력을 이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쁜 습관은 금방 고칠 수 없다. 부정부패가 오히려 더욱 심각해졌다. 결국 2019년 국민은 정치경력이 전무했던 코미디언 볼로디미르 젤렌스키를 지지했고 전임자 포로셴코가 24%의 저조한 득표율을 얻은 반면 젤렌스키는 73%의 득표율을 기록하면서 대선에서 승리한다. 지지자들은 올리가르히의 지배체제를 종결시키겠다고 약속한 신임 대통령을 구원자로 여겼으나 반대 세력은 그를 대부호 이호르 콜로모이스키의 꼭두각시라고 비방했다. 2021년 9월 우크라이나 의회 라다(Rada)는 ‘반(反) 올리가르히’법을 제정했다. 그리고 두 달 뒤, 대통령은 올리가르히 제재에 대한 법안에 서명했다. 이 법안은 올리가르히를 구분하는 4가지 기준을 정한다. 바로 대중 매체에 대한 영향력, 독점적 지위를 누리는 기업 소유, 정치 개입, 사유재산 8900만 달러(7700만 유로)이상 보유다. 이 기준에 해당하는 자들은 재산을 공개해야 하고 정당 후원, 고위 공무원과 사적 모임, 민영화 참여가 금지됐다. 그런데 2021년 12월 21일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ICIJ)가 ‘판도라 페이퍼스’를 폭로하자 파문이 일었다. 이 문서의 명단에는 조세 피난처에 계좌를 보유한 우크라이나 정치인이 38명이나 있었다. 공직자가 이렇게 많은 해외계좌를 보유한 경우는 처음이었다. 게다가 젤렌스키 대통령과 그의 공연 산업계 동업자들(특히 오랜 동료이자 현재 대통령 보좌관으로 임명된 세르이 셰피르)도 영국령 버진아일랜드, 사이프러스, 벌리즈에 회사를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 중 한 회사는 런던 중심부 부동산 매입에도 관여했다. 대통령 대변인은 2012년 친러 성향의 빅토르 야누코비치 전 정부 하에서 공연 사업을 하면서 젤렌스키와 그의 동료들이 벌어들인 수입을 ‘보호’하기 위해 해외재산을 매입한 것이라고 황급히 해명했다.
글·이브라힘 워드 Ibrahim Warde |
아랍에미리트, 은신처
아랍에미리트연합(UAE)은 러시아 제재 원칙에 반대하면서도 (편들기와 의사 표명은 더 큰 폭력을 초래할 뿐이라고 핑계를 댄다) 미국, 유럽연합, 영국과 맺은 우호적 관계를 지키려 한다. 지난 2월 25일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군의 ‘즉각적인 철수’를 요구하는 결의안에 대한 유엔 안보리 투표에서 아랍에미리트는 중국, 인도와 함께 기권했다. 또한 러시아의 유엔 인권이사회 퇴출에 대한 총회 투표에서도 마찬가지로 기권했다. 아랍에미리트는 7개 토후국으로 구성된 연방 국가로 아부다비가 수도다. 그리고 예멘과 전쟁, 인권침해, 그리고 사우디아라비아, 러시아와 결탁해 유가 하락을 초래하는 원유 증산 거부 등 모든 사안에 대해 독자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다. 아랍에미리트의 인구는 1000만 명밖에 되지 않는데 이 중 단 10% 정도만 ‘자국민’이다. 그리고 최근 군사력을 급속히 강화하고 있어 ‘뉴 스파르타(New Sparta)’라는 별명도 붙었다. 이 석유 왕국과는 모든 나라가 친분을 맺으려 한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첫 임기 때부터 프랑스의 핵심 군사기지가 있는 아랍에미리트를 아랍-이슬람권의 외교 거점으로 삼았다. 그리고 2021년 12월 아부다비의 왕세제이자 현 UAE 연방 대통령 모하메드 빈 자이드 알 나흐얀(MBZ)과 회담에서 무기 구매 계약을 성사시켰다. 무려 13년간이나 이어진 긴 협상 끝에 체결한 160억 유로 규모의 라팔 전투기(다쏘 제작) 24대 판매 계약과 8억 유로 규모의 카라칼(에어버스) 군용헬리콥터 12대 판매 계약이었다. 5월 13일 할리파 빈 자이드 알 나흐얀 UAE 연방 대통령이 서거했다. 사실 할리파 대통령은 2014년부터 뇌졸중 병력으로 정치계에서 물러난 상황이었다. 그리고 곧 7개 토후국의 통치자로 구성된 연방최고위원회는 모하메드 왕세제를 차기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마크롱 대통령은 서방 국가 중 가장 먼저 조문하고, 대통령직 승계를 축하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초기부터 올리가르히들은 서둘러 UAE의 쇼핑과 관광의 중심지 두바이로 피신했다. 이들 중에는 이미 수년 전부터 이곳에서 생활 터전을 준비해 둔 경우도 있었다. 러시아인들이 대거 입국하면서 호화 저택과 아파트에 대한 수요도 폭증했다. 미리 대비를 했던 약삭빠른 올리가르히는 이곳에 은신처를 마련할 수 있었다. 그런데 제재, 경제 침체, 그리고 금융거래 금지의 효과가 가중되면서 올리가르히는 난관에 빠졌다. 이들이 숨겨둔 전용기의 상황을 보면 이들의 처지를 짐작할 수 있다. 러시아 부호의 전용기 10여 대가 공항 터미널에 착륙했지만 영국, 미국, 유럽에 있는 회사에 보험료와 유지보수비를 지불할 수 없어 이 전용기는 무용지물이 됐다.(1) 게다가 지난 3월 국제자금세탁방지기구(GAFI)가 아랍에미리트를 시리아, 예멘, 남 수단, 말리와 같이 자금세탁 위험이 있는 국가로 지정해 ‘그레이 리스트’에 포함시켰다. 올리가르히의 상황이 더욱 악화된 것이다. 이제 자금세탁퇴치 기관이 아랍에미리트로 유입되는 자금을 더욱 철저히 감시하게 될 것이다.
글·이브라힘 워드 Ibrahim Warde (1) Rory Jones, ‘Russian oligarchs’ private jets find refuge in Dubai but can’t leave’, <The Wall Street Journal>, 2022년 4월 9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