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치용의 시네마 크리티크] '삶의 자리'에서 새로운 영화의 가능성이 꽃필 수 있을까
영화평(영화리뷰) <괴인>
영화 <괴인>의 영어 제목은 ‘A Wild Roomer’이다. 한국어 제목과 영어 제목의 결이 다르다. 한자가 없어 명확하지 않으나 한국어 제목은 기이한 사람을 뜻한다. 영어 제목은 ‘거친 세입자’이다. 영어 제목은 인물의 특성을 포함하긴 하되 공간을 강조한다. 한국어 제목은 캐릭터의 특성을 강조한다.
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이 영화에 기이한 사람은 등장하지 않는다. 캐릭터의 평범성. 일반적으로 소설과 영화의 인물은 평범하지 않다. 비범하지 않아도 특이하기 마련이다. 캐릭터가 특이하지 않으면 특이한 상황이 주어지곤 한다. 그러나 <괴인>에는 특별한 캐릭터가 나오지 않고, 특별한 상황이 주어지지 않는다. 영화 문법을 파괴하지는 않지만, 보편적 상업영화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극장을 나서며 “이게 뭐지”, “뭔 말을 하려는 거야”라는 말을 주고받을 법하다.
삶의 자리(Sitz im Leben)
부산국제영화제 초청작 <괴인>의 주인공인 목수 기홍은 작은 인테리어 공사를 하며 생계를 유지한다. 공사 중인 피아노 학원에서 술에 취해 밤늦게 잠드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빈 공간에 사람의 흔적 같은 게 느껴지지만, 기홍은 같이 일하는 친구와 달리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잠든다.
처음의 분위기로는 이후 스릴러가 펼쳐져도 될 것 같으나, 영화는 관객의 예상을 무참히 짓밟는다. 사소한 우회를 시도하다가 영화는 주요 무대인 단독주택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기홍이 세 들어 사는, 셋집과 주인집이 각자인 듯 하나인 듯한 독특한 구조의 단독주택에서 이야기인 듯 아닌 듯한 모호한 이야기가 흘러가다가 그 공간에서 느닷없이 이야기가 끝난다. ‘A Wild Roomer’라는 영어 제목이 이 대목에선 조금 더 설득력을 보인다.
부산국제영화제가 ‘뉴 커런츠’ 후보작 선정 이유에서 밝혔듯, “<괴인>은 어려운 장면이 한 군데도 없는데, 설명하자면 어렵다.” 또한 “모든 인물은 예상에서 조금씩 비켜나 있다.” 어렵지 않지만 설명하기는 힘들고 특별히 특별하지는 않지만 항상 예상대로인 것은 아니다는 말. 예상에서 벗어난다고 하여도 그것은 살짝 벗어난 수준이다. 사실 이것은 인간 삶에 대한 진술이다. 일상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 대부분이 자신들의 삶에 관한 진술이라고 동의할 만한 진술이다.
그렇지만 이 영화를 보고 만족할 만한 영화라고 말할 관객이 많지는 않을 듯하다. 영화는 전술하였듯, 영화의 문법과 맥락 안에서 대중에게 뭔가 특별한 것을 제공하려고 노력했고, 관객 또한 영화를 통해 특별한 경험을 하기를 원했기 여전히 대체로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관객은 영화에서 ‘삶의 자리(Sitz im Leben)’를 떠난 경험을 원하고,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은 따라서 ‘삶의 자리’를 떠난 텍스트를 만드는 데에 몰두하게 된다. 그리하여 영화 제작자들은 ‘삶의 자리’를 떠나 ‘영화의 자리’로 들어간다. 들어간지 오래다. ‘삶의 자리’라는 말은 원래 신학에서 사용된 말이나, 여기선 <괴인> 같은 영화를 설명하려는 의도로 차용되었다.
‘삶의 자리’에서 ‘영화의 자리’로 옮아온 영화는 항상 더 특별한 자극과 더 참신한 구성을 요청받는다. 새로운 영화인은 선배들의 영화를 넘어서려고 노력하는데, 그것은 예술 분야의 특성이기도 하지만 상업적 추동 아래 놓인 영화산업의 숙명이기도 하다. 관객이 남다른 결말, 남다른 반전을 원함에 따라 ‘영화의 자리’는, 반도체가 그러하듯 집적도를 높이게 된다.
어렵사리 한계를 넘어서는 이러한 집적의 경쟁에서 아예 새로운 활로를 모색한 그룹이 말하자면 ‘삶의 자리’ 영화이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갔다가 디지털이 심화하자 아날로그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내듯 ‘삶의 자리’ 영화는 반전 경쟁에서 반전 자체를 반전하는 도발을 감행한다. <괴인>이 말하자면 대표적인 사례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독립영화 혹은 홍상수 류 영화의 계보를 잇는다고도 평가할 수 있겠지만. 독립영화라는 말이 너무 많은 것을 포괄하기에 독립영화보다는 선명하고 홍상수보다는 사회적 전망이 구체적인 게 <괴인>이자 <괴인> 같은 ‘삶의 자리’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잔잔한 수면 아래에 무엇이 있을까
<괴인>이 강이라면 잔잔하게 흘러갔다. 격류가 없지만 수면 아래 상황은 다르다. 나는 이정홍 감독에게서 사회성이 버무려진 영화적 감성을 읽었다. 정색하지 않고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 비판의식을 영화에 녹여버렸다. <괴인>은 얼핏 민물처럼 보이지만 소금이 잔뜩 녹아있는 짠 바닷물이다.
스릴러의 경로를 배제하지 않은 초반 의문의 흔적은 살인자가 아닌 프로거(phrogger)로 이어진다. 정해진 주거지가 없다 보니 빈집 등 남의 집에서 몰래 사는 프로깅(phrogging)이 일상이 되고, 수입이 없지만 정규직 취업이 어렵거나 원하지 않아 알바로 삶을 살아가는 이가 그이다. 가출청소년이 아닌 성인으로 설정한 것도 보통 청년의 삶의 모습, 삶의 자리를 설명하려는 의도였다.
부부가 살아가는 모습, 부모와 자식 사이의 관계, 사회적 계급, 부에 따른 구분, 자본주의에서 자연스럽게 배태된 욕망과 같은 우리 삶의 자리를 채우는 다양한 요소를 보려고 하면 영화에서 볼 수 있다. 불륜도? 아마도. 정확히는 알 수 없다. 그것이 불륜인지 아닌지 명확하지 않게 그리는 게 이 영화의 특징이다. 나아가 영화의 사건이나 구성, 등장인물의 역할 등 모든 게 명확하지 않다. 사실 우리의 삶이 그러하지 않은가.
확 넘어가지 않지만 쉴 새 없이 오락가락하는 우리의 삶을 영화는 추적하여 신중하게 보여준다. 그렇다고 어떻게 하라는 제안 같은 것은 없다. 그렇긴 하지만 어쩌라고. 그 정도에서 그친다. 일단 졸리니까 자고 나서 생각하자는 엔딩 장면처럼 많은 것을 유보로 남긴다. ‘삶의 자리’라는 원래 많은 유보로 채워진다.
‘영화의 자리’에서 ‘삶의 자리’로 귀향한 영화가 실제 ‘삶을 자리’ 관객의 마음을 흡족하게 할지는 의문이다. ‘삶의 자리’가 하다못해 리얼리즘 같은 것도 아니다 보니, ‘삶의 자리’를 극장에까지 연장해야 하는 불평이 가능하고, ‘영화의 자리’ 문법에 길든 관객이 낯설어할 것이기 때문이다. 극장은 도시의 분주한 거리에 특정한 의도로 설계되어 건립된 공간이어서 셋방과는 완전히 다른 공간이다. 그러든지 말든가.
이정홍 감독은 첫 단편 영화 <반달곰>(2012년)으로 부산국제단편영화제 국제경쟁에서 우수작품상을 받았다. 두 번째 단편 <해운대 소녀>(2012년)로 서울독립영화제 대상을 받았다. 다수의 독립영화 감독과 배우들이 참여한 단편 영화 옴니버스 <서울 연애>(2014년) 중 한 작품인 <군인과 표범>을 연출했다. <괴인>은 첫 번째 장편 연출작이다.
글·안치용
영화평론가
사진·BIF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