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승학의 시네마 크리티크] <안나>: 솔직함의 지옥문
인생이 피폐해 질 때는 솔직해지고자 할 때마다 지옥문이 열릴 때이다. 게다가 그 지옥문은 삶의 절박함과 마주하게 한다. 이건 분명 잘못된 일이지만 우리사회에서 솔직함은 절박함을 늘 마주하게 한다. 쿠팡플레이 드라마 <안나>에서 유미이자 안나(배수지)는 그 절박한 삶이라는 지옥문 앞에 서있다. 드라마를 본 사람은 알겠지만 유미는 한국 판 <태양은 가득히>의 리플리(알랭 들롱)라고도 할 수 있겠으나, 사실 그 내막은 꽤 다르다.
귀하게 자란 유미(배수지)는 사랑에 솔직했다. 하지만 모든 사건은 솔직했던 그 일에서부터 꼬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도입부의 이 사건은 두 가지를 넌지시 말한다. 솔직함은 유미에게 자괴감을 줄 것이라는 것. 그리고 거짓은 유사-성공의 불안을 만들어 낼 것이라는 것.
대학입시 직후 겪게 된 첫 번째 시련은 그동안 준비해왔던 모든 일을 뒤틀리게 만들었다. 입시에서의 낙방. 부모의 기대가 컸던 만큼 이에 대해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던 유미는 거듭되는 낙방 속에서 모든 것을 원래 자리로 되돌려 놓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하지만 최초의 거짓은 시련의 싹을 틔우고 만다. 유미에게 작동되었던 이 경고와도 같았던 불길한 징조는 솔직해지려 할 때 한층 더 모욕적인 방식으로 지속된다. 유미의 솔직함은 마치 머리채를 잡힌 채 어디론가 끌려가듯 계층적 하락을 더욱 가속화 한 것이다. 게다가 거기에서 오는 모멸감은 여전히 엘리트 계층으로의 상승을 포기하지 못하는 마음에 더해 유미의 주변인들은 아무렇지 않게 기득권의 찬란함을 한층 높여 가고 있다는 사실을 목도할 때 더욱 심해진다.
그러다가 솔직함은 기어이 지옥문을 열어젖히는 거짓이라는 열쇠가 되기에 이른다. 거짓은 누군가의 이름을 뺏어버리게 되면서 파국으로 흘러간다. 그런 일이 있은 후 마주한 지옥은 삶의 절박함이 아니라 정서적 고립을 돌려준다. 안나는 완전히 뒤바뀐 삶 속에서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자신을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후회를 안고 사는 유미는 여전히 거짓을 말하고 있다. 유미는 안나라는 이름으로 인해 점점 파괴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더 이상 유미는 유미일 수 없음을 의미한다. 이를테면 안나의 이름으로 시작하게 된 유학입시 전문가로의 역할은 결국 유미의 능력으로 꽃을 피우게 된 것이지만 그 상황이 오래되면 될 수록 유미라는 이름은 더 더욱 내세울 수가 없게 돼버린 것이다. 안타깝지만 사회에서 유미는 여전히 대학입시에 실패한 사람일뿐이다. 안나라는 이름은 그렇게 유미라는 정체성을 버리라고 강요한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이후부터 유미는 너무도 완벽한 안나가 되어간다. 진짜 안나가 사라진 세상에서 유일하게 안나가 된 유미는 오로지 자기만의 상황으로 돌변한 안나의 모든 것을 거짓처럼 마주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런 상황은 면죄부를 받을 수도 있다. 어차피 인간의 내부에는 여러 개의 자아가 산다고 하니 말이다. 정신분석학적 관점으로 볼 때 이런 자아를 충동이나 욕망으로 구분하여 부를 수도 있다고 하니 이참에 유미와 안나를 그 이름에 빗대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오로지 그 상황 속에서만 할 수 있는 선택을 있는 그대로 실행에 옮겼던 유미는 오히려 본능에 충실해 보이기까지 한다. 이렇게 여러 특성으로 분리 될 수 있는 이름의 유미와 안나는 <안나>의 원작이 정한아 작가의 <친밀한 이방인>이라는 점에서 소설 속 안나와 유미 그리고 영화 속 안나와 유미의 관계를 새롭게 바라볼 수 있게도 한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문학에서 들려주는 이야기와 이 드라마로 옮겨진 이야기를 비교해 보는 작업은 꽤나 흥미로운 작업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흥미로운 시도는 시작도 하기 전에 파국을 맞이했다. 드라마의 만듦새를 문학과 비교하기도 전에 감독의 허락도 받지 않고 가위질을 해댄 대참사가 벌어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더욱 절망적인 것은 그런 폭력적인 편집을 가한 당사자가 드라마에 대한 이해도가 극악무도한 수준으로 저급한 사람이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드라마를 보면서 납득되지 않는 부분이 마냥 감독의 실력 탓이라고 생각했던 나의 근시안을 책망하기도 했다.
좋은 드라마의 조건은 그것이 끝나는 순간에도 여전히 삶 속에서 짙은 여운을 남길 때 발견할 수 있는 것이라 들었다. <안나>의 공개 소식을 접했을 때 나는 그런 점에서 이 드라마가 매혹적인 이야기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실상은 달랐다. 폭력적인 편집 사태로 인하여 드라마가 끝나는 순간에도 여전히 중대한 질문을 남기게 되었다는 점에서 <안나>는 좋은 드라마라고 우길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 조건이 제작사의 손익계산서 상에서 발생한 문제라면 상황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건 드라마의 가치, 더 나아가 모든 영상 콘텐츠의 가치를 파악할 수 있는 심미안의 부재에 따른 부작용이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안나>를 통해서 예술적 가치와 상품적 가치의 간극을 조금이라도 매워보려는 노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사실을 관련 분야 모든 사람들에게 피력하고 싶다. K-콘텐츠의 위상은 상품적 가치만으로 끌어 올린 게 아니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했듯 인생이 피폐해 질 때는 솔직해지고자 할 때마다 지옥문이 열릴 때이다. 나는 여기서 솔직함이란 감독이 들인 진정한 노력들 모두라고 바꿔 말하고 싶다. 그러면 드라마 <안나>의 감독은 작품에 진심으로 솔직해 졌을 때 지옥문이 열린 봉변을 당한 것이다. <안나>에서 유미의 운명이 이주영 감독과 닮아 보여서 더욱 씁쓸한 이유는 그 지옥문을 연 사람이 결국 돈이라는 자본권력을 휘두르는 안목없는 자라는 사실 때문이기도 하다. 돈과 권력을 쥔 자들이여, 그런 막무가내식 아집은 이제 그만 부릴 때도 됐다.
글·지승학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