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외된 자들의 미장센
멜로드라마의 대가, 더글라스 서크
더글라스 서크 감독의 ‘멜로’는 영화팬들 사이에서 뒤늦게 호평을 받으며 대중적으로 큰 성공을 거둔다. 하지만 나치 독일의 망명 예술가로 이름을 알리기 전에 이미 그는 독일 내에서 독특한 사실주의를 추구한 연극 연출가였다.
1958년 가을, 더글라스 서크(1897~1987) 감독은 라나 터너 주연의 영화 <슬픔은 그대 가슴에> 촬영을 마무리한다. 컬러 영화로 제작돼 이듬해 초 개봉된 이 멜로드라마는 서크 감독의 최대 흥행작이 됐고, 그 덕에 유니버설 스튜디오는 파산 상태에서 구제됐다. 하지만 작품이 성공을 거둔 그때, 이 감독은 이미 아내와 함께 미국을 떠난 후였다. 스위스 루가노 호숫가에 거처를 마련한 그는 15년 후에야 미국으로 돌아왔다. 대학에서 그를 영화사의 한 주역으로 초청했기 때문이었다.
서크 감독의 갑작스러운 항로 변경은 이때가 처음은 아니었다. 예술가로서 그는 여러 차례 인생의 전환점을 마련했다. 1937년 12월에도 그는 독일에서 잘나가던 영화감독으로서의 삶을 접고 미국으로 떠났다. 나치 정권의 괴벨스 선전장관이 독일 문화계를 장악했기 때문이다. 이후 수년간 단계적으로 발판을 마련한 끝에 서크 감독은 이 새로운 땅에서 재기에 성공했다.
그는 왜 이렇게 갑작스러운 선택을 했을까? 연극에서 영화로 갑자기 전향한 것도, 독일 영화계의 정점에서 돌연 미국행을 택한 것도 쉽게 설명되지 않는다. 더군다나 미국에서 독립적인 길을 추구하다가 동료들조차 꺼리던 7년간의 ‘노예계약’에 매여 있지 않았나? 그것도 ‘메이저’ 스튜디오 중 제일 작은 곳이었다. 게다가 그는 돌연 영화 일을 접고 은퇴해 스위스로 떠나, 그곳에서 몇 년간 칩거했다. 이후 간간이 연극을 연출하거나 뮌헨 영화학교에서 세 편의 단편 영화 지도를 한 게 전부였다. 뮌헨 재직 시절에는 존 할리데이,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등 영화인들의 인터뷰에 기꺼이 응하며 영화에 관한 주옥같은 자료를 남겼다.(1)
스위스 시네마테크가 보관한 서크 감독 관련 자료를 보면, 그의 굴곡진 인생을 짚어볼 수 있다. 알고 보면 작품 수도 상당한데, 독일에서만 이미 100여 편의 극작품을 무대에 올린 그는 유럽과 미국에서 25년간 40편의 영화를 제작했고, 유니버설 스튜디오에서 지낸 8년 동안 무려 21편의 작품을 만들었다. 중단된 기획이나 미완성 영화를 마무리 짓는데도 여러 번 힘을 보탰다. 말년에 가서야 비로소 팬들과 평단의 인정을 받은 서크 감독은 이후 영화계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하지만 그에 대한 찬사는 1955~1958년 제작된 일부 멜로 작품에 집중됐다.
화려한 거울로 현실을 비추는 ‘마술적 사실주의’
함부르크 출신 더글라스 서크의 본명은 데틀레프 시에르크였다. 그는 1919년 군에서 제대한 후 연극계에 발을 들여 연출가로서 큰 성공을 거뒀으며, 바이마르 공화국 하에서 독일이 문화적 전성기를 누린 14년간 재능 있는 예술가로 승승장구했다. 고향 함부르크에서 무대감독으로 활동한 그는 이후 캠니츠, 브레멘, 라이프치히 등지에서 연극연출가 겸 예술감독으로 활약했고, 1933년에는 베를린에서도 커리어를 쌓았다.
그는 농촌 풍경을 연출할 때 모든 예술 장르를 결합해 종합 예술작품을 선보였다. 물론 극예술의 선구자 베르톨트 브레히트와 에르빈 피스카토어의 나라에서 종합 예술을 추구한 인물은 많다. 하지만 작품을 선정하고 대본 작업을 책임지며 각색을 하고, 때에 따라서는 번역도 맡는 동시에 인물의 역할을 배분하고 무대 장식을 총괄하는 등 그는 마치 훗날 영화를 만들 때와 마찬가지로 연극 무대를 연출했다. 표현주의자도, 그렇다고 (현실의 객관적 묘사에만 치중하는) 신즉물주의자도 아니었던 그는 ‘매직 리얼리즘’, 즉 마술적 사실주의를 추구했다.
비현실적인 동화에서 벗어나 현실이 반영된 시대극을 보여주고, 아울러 셰익스피어식 연극에서 탈피해 음악적 요소가 풍부한 공연을 제공한 것이다. 전쟁을 치른 스스로의 경험과 당시의 시대적 위기는 고전 문화에 대한 그의 확신을 흔들기에 충분했고, 지지 기반이 약했던 독일 제1공화국 시절 열렬한 공화주의자였던 그는 격동의 1930년대에 서서히 현대극으로 선회했다. 1927년 미국에서 처형당한 무정부주의자 사코와 반제티 사건, 그리고 당시 여성들의 시대상과 결혼 등에 관심을 둔 것이다. 이에 서크는 주로 게오르크 카이저, 알프레드 되블린, 프란츠 테오도어 초코르, 에리히 캐스트너 같은 작가들의 작품을 선정했다.
(브레히트가 대본을 쓴 <서푼짜리 오페라>의 작곡가) 쿠르트 바일과 게오르크 카이저의 반 나치 우화 <은의 호수> 초연 당시 나치 조작 스캔들로 이목이 집중되자 그는 신 정권에 충실한 작품을 선보여야 하는 처지가 됐다(<은의 호수>는 특히 의회 화재로 상연 자체가 중단된 작품). 자신이 지지하던 공화정도 실패하고 엘리트 중심의 ‘고급’ 문화도 무너지자 서크는 영화로 관심을 돌렸다. 연극은 곧 나치의 수중으로 들어갔지만, 영화는 그 대중적 속성이 연극과 은근히 대비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영화 작업에 바탕이 된 것은 1924~1934년의 연극 연출이었다. 그는 이후에도 미장센(프랑스어로는 mise en scène. 영화감독이나 연극 연출가가 무대 위의 모든 시각적 요소들을 배열하는 작업)이 드라마의 핵심이라는 점을 잊지 않았다.
멜로의 본질, 음악에 치중하다
유럽 최초의 영화사 우파에는 1933년 이전 독일 영화에 대한 기억이 고스란히 간직돼 있다. 당시 독일 영화계는 유대인의 축출로 거의 초토화됐지만 그래도 연극만큼은 아니었고, 서크는 영화계에서 빠르게 두각을 나타냈다. 첫 작품인 희극 <에이프릴, 에이프릴> 때부터 이미 할리우드 영화의 피가 흐르고 있었고, 이후 현실과의 타협 없이 일곱 편의 작품을 제작한 그는 다섯 편의 놀라운 수작을 내놓았다. 그중에서도 최고는 <9번 교향곡(Schlussakkord)>으로, 자녀를 둘러싼 다툼이나 아내의 부정 등 멜로드라마의 모든 요소가 동원됐다.
감독은 ‘멜로드라마(Mélodrame)’는 선율(Mélodie)이 있는 드라마임을 거듭 강조했는데, 이 작품에서도 음악의 비중이 두드러지는 가운데 미국에 대한 환상과 함께 여러 가지 볼거리가 제공됐다. 이에 더해 더글라스 서크는 1933년 이후 독일에는 없던 세계적 스타를 만들어냈다. 중후한 목소리로 중성적 매력을 뽐내는 가수 차라 레안더가 탄생한 것이다.
유대인도, 공산주의자도, 사회주의자도 아니었던 더글라스 서크는 그때까지만 해도 해외로 이주하지 않았다. 그는 새로운 정권이 오래 지속되지 않으리라 생각했고, 따라서 현실과의 타협 없이 계속해서 작품 활동을 이어갈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신분이나 사상에 뚜렷한 문제가 없었던 만큼 서크는 나치 독일 하에서 몇 년 간 더 지낼 수 있었으며, 작품 활동도 상당히 활발했다. 그러나 이런 그의 자유도 그리 오래 지속되진 않았다. 1937년 괴벨스가 우파 영화사를 장악하면서 이 영화사가 나치의 나팔수로 전락한 것이다. 그해 7월에는 ‘퇴폐 미술’ 전시회가 개최됐고, 9월엔 나치 전당대회가 열리면서 유대인 학살이 가속화됐다.
이후 독일 문화예술계에서는 유명 스타들 또한 아리아인이 아닌 배우자나 연인과 헤어져야 했는데, 문제는 서크 감독의 아내 또한 유대인이었다는 점이다. 서크 감독은 자신의 성공으로 아내를 보호할 수 있으리라 여겼지만, 다름 아닌 본인의 유명세 때문에 아내의 신분이 노출됐다. 결국 두 사람은 차라 레안더 주연의 영화 <라 하바네라>가 크게 대중적 인기를 끈 1937년 말, 미래에 대한 구체적인 전망 없이 독일을 떠나 망명길에 오르는 모험을 감행했다. (이후 서크 감독은 그로부터 5년이 지나고 난 후에야 비로소 미국에서 첫 메가폰을 잡았다.)
캘리포니아로 간 그는 미국식 이름인 ‘더글라스 서크’로 개명하고 아내와 함께 농장을 경영하며 영화와 거리가 먼 삶을 살았다. 서크는 마음속 깊이 이 나라와 국민에 대한 애정을 품었지만, 그렇다고 미국에 대한 맹목적 환상을 갖지는 않았다. 해외 교민들의 지원을 받아 반(反)나치 영화 <히틀러스 매드맨>을 작업하면서 영화계로 돌아온 그는,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채 외길을 걸었다. 시즌 당 15편 정도의 작품을 무대에 올리던 독일에서처럼 유니버설 ‘전속 감독’으로 의뢰에 따라 작업하던 서크 감독은 척박한 환경에서 주어진 한정된 재료로 각 장르에 맞는 다양한 작품을 쏟아냈다.
저예산으로 만들어진 그의 영화는 그 정교한 기술에 있어서나 배경 장식의 활용 면에 있어서나 가히 놀라운 수준이었고, 공간에는 인물의 사회적 무의식이 투영됐다. 뿐만 아니라 그의 작품에선 일정 규칙에 따른 화려한 색이 풍부하게 사용됐다. 바바라 스탠윅이나 잭 팰런스 등 배우의 역량을 끌어내는 탁월한 감독으로서 그는 록 허드슨, 로버트 스택, 도로시 말론 같은 배우들의 재능을 일깨워줬고, 제임스 딘도 은막 위에 데뷔시켰다.
불탄 나무가 불꽃으로 소생하는 아이러니
할리우드에 입성한 더글라스 서크는 일종의 인간 희극을 구상했는데, 소도시가 모여 이룬 대국 아메리카의 모순된 모습을 아래에서 조명해 보여주는 것이었다.(2) 이민자 출신의 이 감독은 여러 작품 속에서 미국의 정신세계와 자화상을 그려냈고, 당시로선 보기 드물게 내부의 편협함이나 여성혐오주의, 물신 숭배 사상, 계급에 대한 멸시, 인종주의에 이르기까지 사회의 어두운 면모를 고스란히 담아냈다.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그의 유명한 멜로 영화들이 탄생한 것이었다.
이런 서크의 작품들은 소위 ‘여성 영화’다. 여기서는 아버지라는 존재가 없거나, 있더라도 자식이 없는 모습으로 그려진다.(3) 아버지가 센트럴 파크에서 과로로 사망한 이후 이야기가 시작되는가 하면(1936년 <9번 교향곡>), 자녀들이 죽은 아버지를 위해 어머니의 사랑을 방해하기도 한다(<거대한 강박관념>, <순정에 맺은 사랑>). 또 게슈타포 장교(<사랑할 때와 죽을 때>의 클라우스 킨스키 분)가 주인공에게 전해준 작은 상자 외에는 그 존재를 찾을 수 없는 아버지도 있었다. 영화 <슬픔은 그대 가슴에>에서도 아버지는 이미 고인이 된 후였고, 이 백인 아버지에게 흰 피부를 물려받은 딸이 흑인 어머니의 혈통을 부정하며 생기는 갈등이 다뤄졌다.
사람이 (사회적으로가 아닌) 인간 대 인간으로서 평등하다는 전제하에 인종주의와 소외 현상을 간접적으로 다룬 서크 감독의 화법은 그 당시 급변하던 미국 사회에서 등장한 소위 ‘경향 영화’보다 더 급진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1945년 승전 이후 베트남전 때까지 미국에서는 반미 운동이나 리틀록 흑인 학생 차별 사건(4)으로 사회적 파장이 일었고, 그에 따라 선전이나 계몽 목적의 경향 영화도 많이 등장했다. 서크는 이런 경향 영화보다도 더 효과적으로 이에 대한 메시지를 우회적으로 설파했다.
그의 작품에서 두드러지던 주인공들은 모두 사회에서 소외된 이들로, 기존 사회 속의 이방인이자 주위로부터 ‘이상’하다는 낙인이 찍혀 있었다.(5) 의도적으로 소외됐건 피치 못하게 주변인으로 살았건 그 삶은 모두 비극적이었다. <순정에 맺은 사랑>에서 헨리 D. 소로의 신봉자 록 허드슨도 그랬고, <빛바랜 천사>에서 퇴물이 된 전투 비행사들이나 <사랑할 때와 죽을 때>의 유대인 불법 체류자 조셉, <슬픔은 그대 가슴에>의 혼혈아 사라 제인과 <바람에 쓴 편지>에서 각각 사랑과 권력에 집착한 오누이 역시 삶이 비극으로 얼룩지긴 마찬가지였다.
영화계에서 은퇴한 후 서크 감독은 그리스 비극의 전형적인 모델들을 끊임없이 곱씹었다. 그의 초창기 영국팬에서부터 최근의 현대 철학자 로버트 피핀에 이르기까지 그를 좋아하던 팬들은 서크가 형식이나 서사를 뒤집는 영화인이라 생각했다. 운명론자처럼 체념하듯 숙명을 받아들이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변화의 가능성을 믿지도 않기 때문이다.(6) 이에 파시빈더도 “서크의 작품은 굉장히 절망적”이라고 쓴 바 있다.
하지만 그에 대한 최근 다큐멘터리 <절망과 희망의 동시 변주자, 더글라스 서크>에서는 서크의 이런 이중성을 강조한다.(7) 그의 작품에서 순간의 덧없는 행복이 고통과 함께 양면적 이미지로 그려지고(<사랑할 때와 죽을 때>), 포탄에 맞아 반쯤 불탄 나무가 활활 타오르며 불꽃으로 소생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글·베르나르 아이젠시츠 Bernard Eisenschitz
영화사학자. 최근 저서로 『Douglas Sirk, né Detlef Sierck 본명 데틀레프 시에르크, 더글라스 서크』(l’Œil, Montreuil, 2022) 가 있다.
번역·배영란
번역위원
(1) Jon Halliday, <Conversations avec Douglas Sirk 더글라스 서크와의 대담>, Cahiers du cinéma, Paris, 1997 / Rainer Werner Fassbinder, ‘Mirage de la vie. Sur les films de Douglas Sirk 인생의 신기루 : 더글라스 커크 감독의 영화에 관해’, <Les films libèrent la tête(원제 : Film befreien den Kopf)>중, L’Arche, Paris, 1985.
(2) Thomas Brandlmeier,『Douglas Sirk und das ironisierte Melodram』, Edition text + kritik, Munich, 2022.
(3) 서크 감독에 대한 다큐멘터리 소설에서는 그의 성장 배경에서 이 같은 이유를 찾았다. Denis Rossano, 『Un père sans enfant 자녀가 없는 한 아버지 이야기』, Allary Éditions, Paris, 2019.
(4) 1954년 미국에서는 대법원 명령에 따라 공교육 기관에서의 인종 분리가 금지됐다. 그럼에도 1957년 아프리카계 미국인 학생 9명의 입학이 거부되자 사회적으로 크게 반향이 일었다.
(5) Hans Mayer, <Les Marginaux 소외된 자들>, Albin Michel, Paris, 1994.
(6) Laura Mulvey & Jon Halliday 제작, <Douglas Sirk>, Edinburgh Film Festival, Edinburgh, 1972. / Robert B. Pippin, <Douglas Sirk : Filmmaker and Philosopher>, Bloomsbury Academic, London, 2021.
(7) <Douglas Sirk, Hope as in Despair>, Roman Hüben 제작 다큐멘터리, 76분,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