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승의 시네마 크리티크] 포지티브와 네거티브가 공존하는 필름의 역사, <바빌론>

2023-02-13     김현승(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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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 21> 송경원 평론가는 <라라랜드>(2016)에 대해 “영화보다 뮤지컬에 방점이 찍혀있다.”고 평했다. 데미언 셔젤 감독의 신작 <바빌론>에도 유사한 지적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극 전체의 유기성보다 각 넘버에 전념하는 뮤지컬처럼, 영화 전체의 기승전결보다 시퀀스 각각의 기승전결이 부각된다. 이따금 대놓고 뮤지컬의 리듬을 차용하기도 한다. 레이디 페이 주(리 준 리)의 무대와 파티에 심취한 넬리(마고 로비)의 단독 시퀀스가 대표적이다. 이 같은 구성이 영화로서 단점일 수 있지만, 덕분에 기억에 남는 장면이 많아진 것도 사실이다. 고속도로에서 펼쳐지는 <라라랜드>의 오프닝 시퀀스나 세바스찬(라이언 고슬링)과 미아(엠마 스톤)의 환상적인 댄스 씬처럼 말이다.

<바빌론>의 인상적인 장면들은 대개 세 가지 방식으로 구성된다. 공간 전체를 한 호흡에 담는 롱테이크, 한 인물에 집중적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는 단독 시퀀스, 마지막으로 다수의 사건을 병렬적으로 교차하며 빠른 패닝과 음악으로 리듬감을 유지하는 연출이다. 빠른 패닝이 <위플래시>(2014)를 상기하듯, 세 방식 모두 감독의 개성이 강하게 묻어난다. 개별 장면들의 독립성이 두드러지며 강한 몰입감을 선사한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그런데, 장면 구성 방식을 정리하면서 문득 의문이 생겼다. 셔젤 감독은 왜 이토록 많은 연출을 반복해가면서까지 긴 러닝타임(188분)을 채택했을까? 최근 개봉한 영화들은 상영 시간이 점점 길어지는 추세다. 그러나 단순히 유행을 따랐다고 하기엔 각각의 장면이 다분히 개성 넘친다. 시퀀스가 개별적인 기승전결을 갖추게 되면, 이후 결합되는 장면에서 ‘완료’된 리듬감을 다시 쌓아 올리는 작업이 요구된다. <바빌론>은 같은 방식의 연출을 반복함으로써 리듬감에 숨을 불어넣으려 하지만, 전반부와 후반부의 몰입감 차이가 여실히 체감되었다.

이처럼 분명한 단점에도 감독이 장황한 러닝타임을 채택한 것은 결국 ‘영화 역사 전체의 재현’이라는 목표가 우선시되었기 때문이다. 상영 이후 관객의 반응은 순수한 열정에 대한 감탄과 정돈되지 못한 서사에 대한 혹평으로 나뉘었다. 호불호가 갈린 양측의 반응 모두 영화가 재현하고자 한 ‘수많은 이야깃거리’에서 비롯될 것이다. 영화가 하나의 흐름으로 정돈되지 않았다는 비판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동의한다. 하지만 무수한 인간이 교차하는 시대를 하나의 일관된 관점으로 정리하려는 것 자체가 역사 외적인 관점을 요구하는 그릇된 욕망일 수도 있다. <바빌론>은 눈부시게 화려하면서도 지독하리만치 부정한 시대의 상을 몇 개의 큰 덩어리로 제시할 뿐이다. 심지어 과감하게 선악의 판단을 유보한다. 따라서 영화의 핵심을 파악하기 위해선 사건의 연쇄 속에서 나타나는 반복에 주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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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를 ‘죄악의 도시’에 빗댄 영화의 제목처럼 영화인들은 서서히 몰락을 향한다. 영화의 막을 올린 ‘코끼리’는 자본의 최정점에 선 그들의 부정함을 가장 잘 보여준다. 무분별한 쾌락이 넘쳐흐르는 파티에서 미성년자 배우가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때 파티의 흥을 돋우기 위해 준비된 코끼리는 그녀의 죽음을 감추는 눈속임으로 활용된다. 심지어 많은 남녀가 코끼리조차 신경 쓰지 않고 마약에 취한 채 섹스를 이어 나간다. 소녀의 죽음은 이후 짤막한 기사로 수습될 뿐, 이내 새로운 스타의 등장을 알리는 기사에 자연스레 잊혀진다. 흥겨운 연주가 끊이지 않는 파티장에서 잊어서는 안 될 것을 잊기란 너무나 쉬운 법이다. 해당 파티가 관객에게 환상을 선사하는 영화인들에 의해 개최되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카메라가 넬리의 자극적인 춤사위를 가리킬 때 모든 눈과 귀는 그녀의 육감적인 몸을 향한다. 꿈의 공장 할리우드, 그 중심에 소녀의 죽음을 감추기 위한 코끼리 한 마리가 우뚝 서 있다.

이후에도 비슷한 사건이 몇 번이고 반복된다. 첫 번째 영화 촬영장에서 엑스트라가 창에 찔리는 사고가 발생하지만, 카메라는 결코 멈추지 않는다. 넬리의 첫 유성 영화 촬영장에서도 상황은 매한가지다. 카메라 감독 빌리가 장비가 내뿜는 고온을 이겨내지 못해 사망에 이른다. 하지만 스크린은 삽시간에 ‘사운드 만세’로 시작되는 또 다른 파티의 흥겨운 연주로 전환될 뿐이다. 심지어 콘래드(브래드 피트)가 소중한 동료를 잃었을 때, 영화인들의 관심은 오로지 영화의 흥행 여부만을 향해 있다. 이처럼 예술의 그림자에서 인간은 빈번히 소외되었다. 안타까운 희생이 죽음의 방식으로만 자행된 것은 아니다. 유성 영화의 등장으로 적절한 발성을 갖지 못한 넬리는 ‘목소리 끔찍하고 헤픈 걸레’로 전락한다. 조명 장비는 흑인 배우(조반 아데포)에게 블랙 페이스를 강요한다. 인간의 가장 고차원적인 활동인 예술이 인간의 존엄성을 해치는 역설적인 상황이다. <위플래시>에서 한 명의 드러머에 한정되어 있던 인간 소외 서사가 <라라랜드>의 배경이 되는 영화업계 전반으로 확장되었다.

더욱이 안타까운 사실은 수많은 무덤을 벽돌 삼아 쌓아 올려진 ‘영화’라는 바벨탑이 기울어간다는 사실이다. 시장의 규모가 커질수록 인간의 가치는 곤두박질친다. 짧게 등장한 시위대의 모습처럼 영화계는 여전히 고용윤리와 최소임금조차 지키지 않는 것이 관례로 여겨진다. 바벨탑 신화에서 인간들이 파멸을 맞이한 것은 언어의 장벽을 넘지 못했기 때문이다. 콘래드와 수많은 전처의 결혼 생활이 파국으로 향했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과연 그들의 결혼 생활이 비극으로 귀결된 것을 언어의 탓으로만 돌릴 수 있을까? 프랑스 이름을 가진 넬리와 멕시코 출신의 매니(디에고 칼바)는 진실된 교감에 성공했다. 마찬가지로 ‘Talkie Film’ 시대의 문제는 ‘언어’라는 영화 기술의 발전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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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맥케이(토비 맥과이어)는 돈만 주면 무엇이든 하는 ‘괴수’를 영화계의 새로운 스타로 추천한다. '괴수'는 말초적인 쾌감과 더 많은 자극만을 요구하는 시장 논리의 의인화로 ‘코끼리’의 진화된 형태이다. 새로운 자본의 질서에 부응하지 못한 예술인들은 꾸준히 도태된다. 그들을 위로하는 것은 “미래에 한 아이가 나를 스크린에 부활시킬 것”이라는 말뿐이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영원하다는 격언 아래 인간은 무기력하다. 언젠가 누군가 나를 스크린에 현신시켜주리라는 수동적인 기대뿐이다. “미래는 자네 것이야.” 세대교체가 임박했음을 깨달은 스타는 쓸쓸히 무대를 퇴장한다. 그들의 죽음 역시 ‘테크니 컬러’라는 새로운 기술의 등장을 알리는 기사에 묻히게 된다.

1952년, 영화계를 떠난 매니는 오랜만에 영화관을 방문한다. 운명처럼 그에게 다가온 영화는 <사랑은 비를 타고>(1952)로, 유성 영화 전환기 고군분투하는 영화인들의 모습을 그렸다. 영화는 매니에게 사랑했던 여인과 그를 촬영장으로 처음 이끈 인물들을 상기시킨다. 과거 한 평론가(진 스마트)의 대사처럼 그의 눈앞에 그토록 그리워하던 사람들이 되살아난 것이다. 극중극의 서사가 극중 인물의 전기였음이 밝혀지며 한 인물의 생애와 영화의 역사 전체가 교차한다. 영화는 꾸준히 발전을 거듭해왔고 개인은 그 흐름을 거스를 수 없다. 씬보다 큰 아티스트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스를 수 없는 것은 예술의 발전이지, 인간 소외가 아니다. <사랑은 비를 타고>의 대사를 인용하자면, "Dignity, always dignity." 예술가는 인간 보편의 품위에 기여할 수 있어야 한다. 마지막 시퀀스가 돋보인 것은 단순히 화려한 색의 향연이 눈길을 끌기 때문이 아니다. 영화의 발전 너머 스크린에 드러나지 않는 수많은 희생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글·김현승
영화평론가. 2022 영평상 신인평론상으로 등단하였다.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이론과 예술전문사에 재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