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 환상과 오해의 복마전

2012-02-13     오창섭

1997년 11월의 외환위기는 한국 사회를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충격은 곧 고통으로 다가왔다. 문 닫는 기업들이 속출했고, 강도 높은 구조조정이 이어지면서 실업률은 급증했다. 1997년 2.6%였던 실업률은 1998년 6.8%로 올라, 146만 명이 실업자 신세가 되었다.

1998년 2월, 정권 교체를 이룬 김대중 정부는 실업률을 낮추기 위해 다양한 정책을 폈다. 실업자를 대상으로 재취업 교육 프로그램이 시행되었고, 디자인도 그 교육에 포함되었다. 웹 디자이너나 그래픽 디자이너, 혹은 인테리어 디자이너들이 사용하는 컴퓨터 프로그램을 주로 교육했다. 그런데 이 정책의  이면에는 디자인이 단순히 기술과 같은 것이라는 이해, 따라서 몇 달간의 교육으로 디자이너가 될 수 있다는 이해가 자리한다. 그런 이해는 정책을 펴는 이들만 한 것이 아니었다. 재취업 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한 이들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디자이너라는 상상

하지만 서로가 생각하는 디자이너의 모습은 달랐다. 정책 시행자들은 현실을 직시했을지 모르지만, 재취업 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한 이들은 그럴듯한 디자이너의 모습을 꿈꾸었을 것이다. <별은 내 가슴에>(1997)나 <미스터 Q>(1998), <토마토>(1999) 같은 드라마를 통해 이미 그들은 자신이 될 수 있는 디자이너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 나름 환상이 있었다. 이 드라마들은 당시 최고 스타인 최진실과 김희선을 디자이너로 등장시켜, 기업의 성패를 좌지우지하는 마법사 같은 존재, 화려한 영웅적 존재로 디자이너를 표현했다. 이런 방식의 묘사는 디자이너에 대한 사회의 환상을 반영하면서, 동시에 시청자에게 디자이너에 대한 환상을 증폭시켰다.

디자이너에 대한 환상에 기대어 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한 이들을 기다리는 현실은 어떤 것이었을까? 여기서 ‘국민의 정부’가 경제 활성화를 위해 정보기술(IT) 산업 육성책을 폈고, 벤처 창업을 지원한 사실을 떠올려야 한다. 이에 따라 인터넷 문화가 발전했고, IT 관련 기업도 늘어났다. 취업 프로그램 교육으로 디자이너가 된 이들은 바로 이 영역의 노동인력으로 투입됐다. 그곳에서 그들은 낮은 임금을 받으며 단순작업을 반복했다. 현실과 마주한 이들의 일상은 자신이 상상한 디자이너는 현실에서 찾기 어려운 환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아가는 과정이었다.

단기 실업교육을 통해 디자이너를 양산하는 움직임은 이후에도 계속됐다. 결과론적 이야기이지만 외환위기는 자신을 ‘디자이너’라고 생각하는 이들의 수를 늘렸다. 그들은 환상에 기대어 디자이너가 됐지만, 그들이 기대던 환상을 무너뜨리고 ‘스타 디자이너’라는 새로운 환상을 만들어내는 데 기여했다. 2000년대 중·후반 스타 디자이너에 대한 담론의 증가는 늘어난 디자인 인구가 만들어낸 기형적 현상이라 볼 수 있다. 지금도 만연한 스타 디자이너라는 상상은 대다수 디자이너의 어려운 현실을 감추는 환상의 거울상으로 기능한다는 데 문제가 있다.   

정치와 만난 공공디자인 열풍

2000년대 중반은 한국 디자인 역사에 중요한 분기점으로 기억될 것이다. 이전까지는 일부 기업이나 디자인계를 중심으로 디자인이 이야기돼온 반면, 2005년을 기점으로 디자인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증폭되면서 정부나 지방자치단체가 여러 디자인 관련 정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2003년 7월 시작해 2005년 9월에 마무리된 청계천 복원사업은 분명 이런 변화의 중심적 매개 역할을 했다.

청계천 복원사업은 당시만 해도 크게 주목받지 못하던 한 정치인에게 대중적 인기를 가져다주었고, 급기야 그를 대통령으로 당선시키는 계기가 됐다. 또 청계천 복원사업 이후 이와 유사한 사업을 ‘공공디자인’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청계천 복원사업의 모델은 많은 정치인과 지방자치단체장들을 자극했다. 그들은 어떻게 한 정치인이 대중의 인기를 얻고 최고권력자 자리에 올랐는지 분명히 본 것이다. 그리고 바로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이 본 것을 반복하기 시작했다. 2000년대 후반 공공디자인의 유행은 이런 과정을 통해 이뤄졌다.

2006년 서울시장에 당선된 오세훈은 한강 르네상스사업, 광화문광장 건설 등과 같은 토목사업을 통해 청계천 복원이나 서울시청 앞 광장 조성사업의 맥을 이어나갔다. 그는 디자인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아니 어쩌면 이 역시 ‘디자인’이라는 이름과 그 용어 주변을 감싸고 있는 ‘환상’을 적극적으로 활용했을 것이다. 당시에도 ‘디자인’은 세련됨과 창조적 활동을 의미하는 인기 있는 용어였다. <가치를 디자인하라>(2006), <생각을 디자인하라>(2007), <고객의 경험을 디자인하라>(2007), <인맥을 디자인하라>(2007), <당신의 건강을 디자인하라>(2007) 등과 같이 책 제목에 ‘디자인하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한 사실은 당시 디자인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어땠는지 잘 보여준다.

2007년, 서울시는 ‘디자인서울총괄본부’를 만들어 디자인계 인사를 본부장 자리에 앉혔다. 하지만 디자인서울총괄본부는 하드웨어 중심의 디자인 정책을 펴나갔다. ‘디자인 가이드라인’을 비롯해 야심차게 추진한 사업들은 결과적으로 법과 권위의 이름으로 도시에 하나의 취향을 강요하는 폭력적 움직임이 돼버렸다.

‘디자인 서울’이라는 이름으로 서울시가 펼친 디자인 정책은, 1967년 대통령 박정희가 어느 디자인 관련 조직을 방문한 자리에서 쓴 ‘미술수출’(美術輸出)이라는 휘호의 자기장을 벗어나지 못했다. 실제로 당시 디자인은 ‘수출을 위한 미술’이었다. 이런 인식의 공간에서 디자인은 상품이 팔릴 수 있도록 장식하는 꾸미기 활동으로 이해됐다. 디자인 서울은 소소한 제품에서 서울이라는 도시로 디자인을 적용할 대상 규모만 변했을 뿐, 팔기 위한 상품 장식이라는 40년 전 디자인 이해 방식은 그대로 따랐다. 서울은 상품으로 이해됐고, 따라서 팔리기 위해 꾸며졌다. 관광객들을 위한 토목사업은 디자인이라는 수식어를 통해 그럴듯한 활동이 됐고, 그 과정에 시민과 그들의 삶은 보고서에만 존재했다.

서울시의 디자인 정책은 디자인을 우파의 것이며 복지의 대척점에 자리하는 활동으로 이해하도록 만들었다. 물론 이것은 디자인에 대한 오해라 할 수 있다. 디자인의 본질은 바람직한 삶의 가능성을 상상하고 현실화함으로써, 그 상상을 삶에서 경험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역량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디자인의 매개 없이 삶의 경험을 풍요롭게 만드는 것은 어렵다. 문제는 지금껏 디자인의 이름으로 펼쳐진 많은 정책이 디자인에 대한 환상에 기대며 정치인들의 정치적 욕망이나 이익을 위해 임기응변으로 이뤄져왔다는 데 있다. 그 결과, 해당 정치인과 일부 정치적 디자인계 인사들의 삶은 나아졌는지 모르지만, 대다수 시민의 삶이나 일반 디자이너들의 현실은 그리 밝지 못하다.

열악한 현실, 반복되는 고통

최근 한국고용정보원은 대학에 진학하지 않은 특성화고등학교 졸업자의 76%가 취업에 성공했고, 그들의 월평균 소득이 132만 원이라고 발표했다. 이 내용을 다루면서 한 언론매체는 특성화고 졸업자의 월소득이 적다는 뉘앙스의 기사를 내놓았다. 이 기사를 읽으면서 필자는 현재 대학에서 디자인을 전공하는, 또 대학을 졸업해 디자이너로 활동하는 이들을 떠올렸다. 대학을 갓 졸업한 디자이너들의 월평균 소득이 특성화고 졸업자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물론 분야마다, 혹은 기업에 따라 차이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132만 원보다 적은 월급을 받으며 활동하는 디자이너들도 너무 많다.

이들 디자이너는 미술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비싼 미술학원을 적어도 2~3년 다녔다. 치열한 입시를 통해 대학에 진학한 뒤에는 매학기 500만 원 가까이 하는 등록금을 내야 했다. 디자인학과의 속성상 수업 과제를 진행하면 적잖은 재료비도 들었을 것이다. 그렇게 ‘돈의 잔치’가 끝나갈 무렵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다름 아닌 치열한 ‘취업전쟁’이었다. 사실  대부분의 디자인 대학 취업률은 특성화고 졸업자 취업률(76%)에 미치지 못한다. 좁은 취업문을 뚫기 위해 디자인 전공 학생들은 이른바 ‘스펙’을 쌓기 위해 바쁜 대학생활을 보낸다. 온갖 공모전과 토익점수에 목을 매고 어학연수를 가며, 각종 프로젝트와 인턴 경력을 쌓는다. 그들에게는 우리 사회 현실과 바람직한 삶을 고민할 여유가 없다. 그럼에도 취업문은 뚫기가 쉽지 않다.

운이 좋아 취업했더라도 기업에서 디자이너로서 만족도는 그리 높지 못하다. 디자이너로서 이상을 실현하기에는 이 사회에 너무 많은 한계와 장애가 도사리고 있다. 자본의 논리가 지배하는 현실은 행복한 사회를 위한 창조적 상상력보다는 돈이 되는 상상력을 요구한다. 의미와 가치를 찾을 수 없는 일과 연일 계속되는 야근, 그럼에도 기대에 못 미치는 대우는 디자이너들의 의욕을 떨어뜨린다. 2009년 디자인센서스 조사에 따르면, 취업 디자이너의 66.3%가 3년 이하의 근속연수를 나타냈다.

디자이너의 어려움은 디자인 분야의 어려움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특히 198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한 디자인 전문회사는 현재 구조적 문제로 어려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2000년대 들어 정리해고된 디자이너들이나 기업의 인-하우스 디자이너로 만족할 수 없어 회사를 나온 이들은 앞다퉈 디자인 전문회사를 창업했다. 디자인 전문회사들은 늘어갔고, 이에 따라 디자인 용역을 수주하기 위한 경쟁도 치열해졌다. 용역을 향한 치열한 경쟁은 디자인 단가를 하락시켰다. 정상적 운영을 위해 디자인 전문회사들은 이전보다 더 많은 일을 해야 했고, 그것은 고스란히 그곳에서 일하는 일반 디자이너들의 부담으로 돌아갔다. 밤을 새우는 디자이너들로 가득한 디자인 전문회사의 모습은 지금도 낯선 풍경이 아니다. 이런 열악한 환경에서 좋은 디자인이 나오길 기대하는 것은 지나친 욕심이지 않을까?

한국 사회에 깊숙이 자리한 서구 지상주의는 디자인 업체들의 어려움을 가중시키는 또 다른 원인이 되고 있다. 우리 사회는 서구의 시선이 인정한 것만 인정하는 좋지 못한 습관이 있다. 디자인 유학 인구의 증가, 디자인 관련 국제행사 남발, 서구 디자이너에 대한 무조건적 환호 같은 현상 이면에는 바로 그런 태도가 자리하는 것이다. ‘세계적 디자이너’ 운운하며 그들에게 디자인을 의뢰하는 정부나 지방자치단제들의 행태는 이와 무관하지 않다. 대기업이 서구 디자인 업체에는 국내 디자인 전문회사에 일을 줄 때보다 훨씬 많은 비용을 들여 디자인을 의뢰하는 것도 이와 관계 있을 것이다.

서구 지상주의의 역차별

중소기업을 활성화한다는 명목으로 정부가 펼치는 사업도 디자인 단가 하락의 원인이 됐다. 일정한 예산 아래서 수를 늘려 실적을 향상시키려다 보니 디자인 건당 비용은 낮아질 수밖에 없다. 디자인 전문회사는 회사 운영을 위해 그런 용역이라도 수주해야만 하고, 울며 겨자 먹기로 일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 사업으로 디자인을 접한 기업인들은 그것을 적정한 디자인 용역 비용으로 받아들인다. 이는 자연스럽게 디자인 용역 비용을 낮추는 결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국민의 정부’ 이래 ‘참여정부’, 그리고 현재 이명박 정부도 창조적 지식산업을 강조하고 있다. 아마 다음 정권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창조적 활동이 가능한 사회적 환경이 마련되지 못한다면, 창조적 활동을 정치와 경제적 이득의 도구로만 이해한다면, 그리고 창조적 활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한낮 구호에만 머물 것이다. 우리가 디자인에 자리하는 환상과 오해를 직시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 오창섭
건국대 디자인학부 교수. ‘메타디자인연구실’(Meta Design Lab.)을 운영하고 있다. <디자인과 키치> <이것은 의자가 아니다: 메타디자인을 찾아서> <인공낙원을 거닐다> <9가지 키워드로 읽는 디자인> <제로에서 시작하라> 등을 저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