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비 군주국’으로 추락중인 스페인
전 스페인 국왕 후안 카를로스 1세의 방탕한 사생활, 사치, 걸프국 군주들과의 뒷거래가 신문의 첫 장을 장식했다. 오랫동안 감춰졌던 이런 행각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왕실의 평판은 추락했고, 공화정 지지자들의 목소리는 높아졌다.
“죄송하다. 실수를 범했다.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하겠다.”
2012년 4월 당시 스페인 국왕이었던 후안 카를로스 1세는, 퇴원 후 측은한 표정으로 대국민 사과를 하면 해결될 줄 알았던 모양이다. 카를로스 1세는 보츠와나에서 호화 사파리 여행 중 코끼리 사냥을 하다가 엉덩이뼈가 부러져 병원 신세를 졌다. 스페인이 사상 최악의 경제위기에 빠져 유럽 위원회의 재정통제가 강화되는 와중에 일어난 일이다. ‘국민과 함께하는’ 군주의 이미지는 엉덩이뼈와 함께 박살나고 말았다. 이를 계기로, 독일 사업가 코리나 라르젠과의 불륜도 드러났다(코리나 라르젠은 몇 년 후 카를로스 1세를 성희롱 혐의로 고발했다). 이미 시들해진 인기에 결정타를 맞은 것이다. 이렇게 스페인 군주제는 사상 최악의 위기를 맞았다.
법 위에 올라탄 ‘후안 카를로스주의’
1975년 프랑코 장군이 사망한 후, 후계자로 지목된 후안 카를로스 1세는 왕위에 올라 왕정복고를 실현했다. 새로운 통치자 카를로스 1세는 격동의 정치적 과도기를 거쳐, 입헌군주제에 기반한 현행 헌법을 제정함으로써 공화국 전환을 피해갔다. 이후 1981년 2월 23일 실패한 쿠데타를 계기로 민주주의 정당성을 확보했다. 그날, 스페인 헌병대가 의회를 습격했다. 당시 의회에는 전 각료와 의원들이 모여 있었다. 일부 군인들은 쿠데타에 가담해 발렌시아 거리를 점령했다.
공식 기록에 의하면 카를로스 1세는 반란을 주도한 알폰소 아르마다 장군을 비난했고, 각 지역의 주요 사단장들에게 반란에 동조하지 말 것을 촉구해 쿠데타를 좌절시켰다. 카를로스 1세는 그날 밤 스페인군 원수 정복 차림으로(스페인 헌법은 국왕에게 군대의 ‘최고 사령관’이라는 상징적 직위를 부여한다), 텔레비전을 통해 쿠데타를 비난하는 연설을 했다. 다음날, 의회에 있던 인질들은 유혈사태 없이 풀려났고 반란군은 투옥됐다.
하지만 국왕은 왕실 사무총장이었던 반란군 지도자와 가까운 사이였다. 스페인 주요 정당과 카를로스 1세는 바스크 독립 단체 ETA 무장 투쟁에 강경히 대응하기 위해 아르마다 장군이 정부 장악을 시도할 것이라는 소문을 들었을 것이다. 다만, 쿠데타로 이어진 군사적 행동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었고, 직접 승인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아르마다 작전’은 불안정한 시기의 내란 음모들 중 하나에 불과했다. 주동자들은 당시 공산당 합법화를 비롯해 카탈루냐와 바스크 지방 자치권 인정에 배신감을 느낀 극우 프랑코주의자 군인들이었다.
국왕은 무장 헌병군의 의회 침공 6시간 후에서야 쿠데타 공작을 강력히 비난했다. 순수한 민주적 신념 때문이었을까? 작전이 예상대로 진행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까? 어느 쪽인지는 알 수 없다. 쿠데타 공모자들에 대한 군부 지원이 예상보다 약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작가 하비에르 세르카스의 지적대로 이 작전의 ‘군사 시나리오’ 때문일 수도 있지만, 카를로스 1세의 선택은 (외견상으로는 평화로워 보이는) 정권의 교체를 막았고, 국내외 여론에도 유리하게 작용했다.(1) 1981년 2월 23일에 대한 모든 진실을 알려면 시간이 더 필요할 것이다. 반란군 재판 내용이 아직 국방 기밀에 속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공식 버전’ 사태가 가져온 정치적 효과는 분명하다. 프랑코의 뒤를 이은 왕위 계승자 카를로스 1세가 ‘젊은 스페인 민주주의의 수호자’라는 이미지를 굳혔기 때문이다.
카를로스 3세 대학의 파블로 시몬 정치학과 교수는 지난 30년 동안 주요 정당들과 주류 언론들은 왕실의 활동을 자세히 조사하거나 비판하는 법이 거의 없었다고 지적했다(카를로스 1세는 1982~1996년 정부 수반을 지낸 펠리페 곤살레스 총리 집권 시절에 사회당의 보호를 받았다. 비록 공화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었지만 ‘후안 카를로스주의’로 전환했다고도 말했다). 카를로스 1세는 이런 특권 덕에 법의 테두리 밖에서 자신의 지위를 사적으로 남용하기도 했다. 1978년 헌법은 국가 원수의 역할을 국가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임무, ‘국가기관의 일상적 기능의 조정’으로 한정했다. 그러나 언론인 아나 파르도는 “실제로 카를로스 1세는 정치권력을 쥐고 기업 합병 등 경제 분야나 정권교체 시 공공정책 분야에서 의견을 제시하고 영향력을 행사했다”라고 분석한다.
“그 입 다물지 못해?”
카를로스 1세의 권력 남용 사례 중에서는 2007년 이베로아메리카(스페인 주도로 창설된 공동체-역주) 정상회의에서 “그 입 다물지 못해?”라며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 대통령의 말을 가로막았던 사건이 가장 유명하다. 하지만 스페인 국왕의 권력 남용은 막말보다 금전과 더 관련이 깊다. 국가는 스페인 왕실(Casa Real)에 국왕과 일가족의 개인 소득을 포함해 연간 800만 유로가 넘는 예산을 지원한다. 하지만 <포브스>와 <뉴욕타임스>는 카를로스 1세의 재산이 18억 유로에 달한다고 추정하는데, 국왕의 공식 보수만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액수다.
2011년 사위 이냐키 우르단가린이 부패 사건으로 기소되자, 침묵의 불문율이 깨졌다. 언론은 국왕의 문제점들을 들춰내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심각한 문제는 2008년 사우디아라비아 정부로부터 메카 철도건설 수주 대가로 6,500만 유로를 뇌물로 받은 사건이다. 스페인 국왕은 사우디아라비아와 스페인 컨소시엄을 연결해줬다.(2) 이 사건이 폭로되면서 왕실과 재계의 거래가 주목받았다. 레베카 킨탄스나 필라르 에이레 등의 언론인에 따르면, 카를로스 1세는 자신의 국제적인 지명도를 이용해 평소 친분이 있던 사업가들의 해외사업을 도왔고, 그 대가로 고액의 수수료를 받았다. 카를로스 1세는 통치 초기부터 걸프국 군주들과 특별한 관계를 이어왔다. 바레인 국왕에게서 2010년 190만 유로를 ‘제공’ 받았고 아랍에미리트(UAE)의 국왕에게서는 2020년 8월부터 호사스러운 접대를 받았다.
지금까지는 헌법에 명시된 군주의 면책특권에 대한 광범위한 해석 덕분에 형사소추를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각종 추문이 계속 쏟아졌다. 2013년에 스페인 사회문제연구센터(CIS)에서 실시한 공공 신뢰도 여론 조사에서 왕실은 10점 만점에 3.68점이라는 저조한 평가를 받았다. 이듬해 여론의 평가가 계속 나빠지자 카를로스 1세는 아들 펠리페에게 왕위를 양위하기로 했다. 카를로스 1세의 퇴위 발표 한 달 전에 좌파 민중주의 정당 포데모스(Podemos)는 유럽 선거에서 괄목할 만한 결과를 얻어 스페인 정치체제에 위기감을 증폭시켰고, 15-M 운동(또는 분노한 사람들 운동, 2011년 5월 15일에 마드리드에서 일어난 대규모 시위)의 남은 불씨를 살려냈다. 이윽고 왕실에 대한 비판은 군주제를 포함해 1978년에 탄생한 정권 전체로 확대됐다.(3)
스페인 국왕 즉위식, 텅 빈 거리
6월의 어느 날, 갓 즉위한 젊은 국왕 펠리페 6세가 레티시아 왕비와 롤스로이스 컨버터블을 타고 마드리드 시내 한복판을 지났다. 카를로스 1세의 퇴위와 함께 공화주의자들은 잇따라 시위를 벌였다. 시위의 기억을 지우려는 듯, 길목마다 왕실 행사용 스페인 국기가 10만 장이 넘게 걸렸다. 하지만 군중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텔레비전 카메라에 담긴 것은 텅 빈 거리뿐이었다. 스페인의 이런 황량한 광경은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즉위 기념식이나 장례식의 장엄하고 호화로운 모습과는 꽤 거리감이 있다. 영국 사회에 깊이 뿌리내린 영국 군주제의 영향력, 높은 인기와도 뚜렷하게 비교된다. 스페인 군주제는 2014년 간소하게 치러진 펠리페 6세 대관식을 봐도 알 수 있듯, 고유한 상징성이나 개성이 떨어진다.
펠리페 6세 즉위 1주년 시점에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 국민 57.4%가 새 국왕에게 호의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스페인 사회문제연구센터 조사에서 스페인 군주제에 대한 평가는 10점 만점에 4.34점으로 여전히 낮았다.(4) 펠리페 6세 즉위 후 8년의 시간은, 그의 누나 인판타 크리스티나가 남편 이나키 우르단가린의 부패에 연루돼 기소된 사건과 아버지 카를로스 1세의 부정행위에 대한 조사로 얼룩졌다. 이에 따라 펠리페 6세는 전 국왕과 거리를 두었고, 자신이 카를로스 1세가 보유한 두 개의 해외계좌 상속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아버지 유산의 상속을 포기한다고 발표했다.(5)
펠리페 6세는 왕실 행정을 투명하게 관리하기 위해 몇 가지 제스처를 취했고, 전직 국왕인 아버지에게 지급되는 국가연금도 박탈했다. 왕실이 보유한 계좌의 상세 내용이 밝혀지지는 않지만, 주요 언론은 펠리페 6세의 결정을 매우 긍정적으로 보도했다. 카를로스 1세의 권력 남용은 얼마든지 추궁하고 비판할 수 있지만, 아들 펠리페 6세는 봐주자는 합의점이 생겼다. 언론인 알베르토 라르디에는 “언론이 펠리페 6세를 과잉보호하고 있다”라고 말했다.(6) 그러나 펠리페 6세가 두른 이런 방패도, 그의 왕자 시절 신혼여행 비용 26만 9,000달러의 출처에 대한 폭로를 막지는 못했다.(7)
주민투표를 저지한 스페인 정부군
펠리페 6세는 카탈루냐 독립운동에서, 실추된 왕실의 명성을 회복할 기회를 보았다. 2017년 10월 1일 카탈루냐 정부와 다양한 지역 단체 주도로 분리독립 주민투표를 실시해 200만여 명이 투표에 참여했다. 하지만 스페인 헌법재판소는 투표 결과가 위헌이며 법적 가치가 없다고 선언했다. 이처럼 높은 참여율에도(혹은 높은 참여율 때문에) 중앙 정부의 보안군은 프랑코 독재정권을 연상시키는 방식으로 주민투표를 저지했다. 그날 밤, 펠리페 6세는 통일주의를 옹호하는 결의를 보여주려는 듯 강경한 어조로 대국민 연설을 했다. 하지만 경찰의 공격을 받은 수백 명의 주민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도 없었다.
펠리페 6세는 이날을 자신의 ‘23-F(상기 1981년 2월 23일 군사 쿠데타 미수 사건)’로 삼고자 했다. 하지만 1981년 쿠데타를 계기로 카를로스 1세가 공화주의 좌파와 ‘온 국민의 왕’이 됐다면, 펠리페 6세의 10월 1일 연설은 정치 갈등의 빌미를 주는 ‘당파적 왕’이라는 이미지를 심어 줬다.(8) 펠리페 6세는 여러 대기업 대표에게 전화를 걸어 “카탈루냐에서 철수하라”고 권고하기도 했다.(9) 카탈루냐는 물론, 바스크에서도 왕실 지지도가 처참히 낮을 법하다. 헌법학자 헤라르도 피사레요가 설명하듯, 스페인 군주제는 “프랑코주의와 연결돼 있어서, 국가의 영토적 다양성이 분단주의로 귀결되는 것을 절대로 원치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왕좌’는 스페인 국가주의를 구성하는 도구인 셈이다.
펠리페 6세는 아버지에게 그토록 요긴했던 좌파의 지지를 잃고 말았다. 2020년 여론 조사에 따르면, 국민투표가 시행된다면 스페인 사회노동당(PSOE) 유권자의 55%와 포데모스 유권자의 90%가 공화제를 지지할 것이라고 했다. 전체적으로, 공화제를 선호하는 인구 비율은 40.9%에 달하지만 군주제를 지지하는 비율은 34.9%에 그쳤다.(10) 파블로 아셀이나 발토니크 같은 공화파 래퍼와 활동가들이 경험한 억압적인 국가의 대응은 군주제의 인기를 떨어뜨렸다.
펠리페 6세가 즉위하면서 10년 전부터 시작된 위기는 분명히 완화됐지만, 스페인 군주제는 간신히 형태만 유지되는 상황이다. 정치학자 파블로 시몬의 표현을 빌리면, 이제 스페인 군주제는 대중적 지지 측면에서는 생명력을 잃은 ‘좀비 군주제’로 전락할 위험에 처했다.
글·파블로 카스타뇨 Pablo Castaño
언론인, 정치학자
번역·이푸로라
번역위원
(1) Javier Cercas, 『Anatomie d’un instant 순간의 해부학』, Actes Sud, Arles, 2010.
(2) Ángeles Vázquez, ‘La Fiscalía afirma que los contratos del AVE a La Meca eran ‘calculadamente ambiguos’, como los que ocultan comisiones’, El Periódico, Madrid, 2022년 3월 3일.
(3) Renaud Lambert, ‘Podemos, le parti qui bouscule l’Espagne 포데모스, 스페인을 뒤흔들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15년 1월호.
(4) CIS, 2015년 4월.
(5) ‘Felipe VI dice que renuncia a su herencia y elimina la asignación del rey Juan Carlos tras conocerse una cuenta ‘offshore’‘, <Público, Barcelona>, 2020년 3월 15일.
(6) <Felipe VI, el último rey de España>, 2019, <EITB(바스크 라디오 텔레비전)>
(7) ‘Revealed: The King of Spain’s half-a-million-dollar secret honeymoon paid for by disgraced father’, <The Telegraph>, London, 2020년 6월 20일.
(8) Casimiro García Abadillo, <saving the King( Salvar al Rey: Sálvese quien pueda)>, HBO.
(9) Àlex Font, Natàlia Vila, Albert Martín, ‘Así hizo el Estado la guerra económica contra Cataluña’, <Ara>, Barcelona, 2018년 10월 7일.
(10) Mónica Andrade, ‘Si hubiera un referéndum: república, 40,9%, monarquía 34,9%, con un 12,9% de indecisos’, CTXT, 2020년 10월 12일, ctx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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