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치용의 시네마 크리티크] 스탈린 시대 고문기술자 '볼코노고프'가 천국에 가는 법
영화평(영화리뷰) <볼코노고프 대위 탈출하다>
<볼코노고프 대위 탈출하다>가 디스토피아 영화라는 데에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1938년 러시아를 배경으로 스탈린 공포정치와 대략 100만 명 목숨을 앗아간 피의 숙청을 그렸다. 이런 소재를 다루는 데는 진지하게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방법이 아마 정공법일 테지만, 공동 연출ㆍ각본한 나타샤 메르쿨로바, 알렉세이 추포프 부부는 극화를 택했다. 그렇다고 역사를 왜곡하지는 않았다. 소련 역사의 끔찍한 정치적 악몽인 당시 숙청을 극영화 형식으로 소화하면서 극적 장치를 최대한 활용함에 따라 역사성을 극대화한다.
역사를 소재로 한 우화
영화 <미스터 존스(Mr. Jones)>(2019년)는 <볼코노고프 대위 탈출하다>와 비슷한 시기의 ‘홀로도모르(Holodomor)’로 불리는 우크라이나 대기근을 소재로 한 극영화이다. 우크라이나가 당시 소련 영토에 속했고 홀로도모르가 <볼코노고프 대위 탈출하다> 속 스탈린의 대숙청과 비슷한 역사적 맥락에 위치한 만큼 두 영화를 비교하는 게 무의미하지 않다.
<미스터 존스>는 영국 저널리스트인 '가레스 존스'(1905~1935년)라는 실존인물을 모델로 비극적 역사를 다룬 만큼 독지하게 접근해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인상을 준다. <볼코노고프 대위 탈출하다>는 실제 사건을 다루면서 볼코노고프 대위(유리 보리소프)라는 가상의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며 고증에 크게 신경 쓰지 않은 채 발랄하게 극화한다. 장식이 들어가긴 했지만 확실한 주류 상업영화이다. 둘 다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극영화로서 판이한 두 가지 접근법 사이에 우열은 없다. 다만 이 대조가 <볼코노고프 대위 탈출하다>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볼코노고프 대위 탈출하다>의 볼코노고프 대위는 스탈린 대숙청의 주구인 비밀경찰 조직 엔카베데(영어로 NKVD) 일원이다. 내부 숙청의 바람이 불어 칼날이 볼코노고프가 속한 팀으로 향하자 위험을 직감한 볼코노고프는 엔카베데 청사를 탈출한다. 자신이 몸담은 조직의 동료들에게 쫓기는 처지가 된 그는 신비한 체험을 한 뒤에 자신이 저지른 만행의 희생자 유가족들을 하나씩 방문한다. 용서를 받으면 천국에 갈 수 있다는 황당한 계시를 받아서이다.
설정이 흥미롭다. 볼코노고프가 조직에서 벗어나 망명한다든지 어디 오지로 도주한다든지 하는 게 아니라, 옛 조직의 집요한 추격을 힘들게 따돌리면서 희생자 유가족을 찾아가 용서를 빈다. 이런 행보에서 관객은 결말을 예상할 수 있다. 영화는 구생이 아니라 구원의 발걸음을 보여준다. 감독이 말한다.
“<볼코노고프 대위 탈출하다>는 영적 스릴러의 요소를 지닌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우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사형 집행인이 갑자기 자신에게도 영혼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어두운 이야기입니다. 이제 그의 영혼은 구원되어야 하지만, 그러기에는 시간이 거의 남아있지 않습니다. (…) 시스템이 결정하면 그 누구나 잠재적으로 사형 집행인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후에 용서받을 수 있을까요? 과연 사형집행인들을 위한 천국이 있을까요?"
‘영적 스릴러’에서 ‘영적’이란 표현은 불필요해 보인다. 우화의 형식을 취했기 때문이다. 귀신 혹은 환상을 보아서라기보다는 구원의 문제를 다루기에 ‘영적’이란 표현을 쓴 듯하다. 우화를 스릴러물의 형태로 구현한 재능이 칭찬할 만하다. 긴 논의가 될 것이기에 생략하지만, 포스트모던한가에 관해서는 논란이 많을 듯하다. 영화가 1938년의 소련을 배경으로 하지만 의상 등 많은 디테일이 그 시대에 맞지 않고, 영화 속의 배경도시가 화면으로는 상트페테르부르크가 분명하지만 확인해 주지 않는다. 무시무시한 엔카베데 요원의 유니폼이 빨간 추리닝 비슷한 것이어서 재미있다.
이 영화는 사람들이 말하기 좋아하는 ‘악의 평범성’과는 무관하다. ‘악의 평범성’은 사회학 또는 사회과학의 설명 범주에 속한다. <볼코노고프 대위 탈출하다>는 악인의 구원을 말하는 우화여서 다른 방식의 이해가 필요하다.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와 프란츠 카프카의 『법 앞에서』를 읽을 때 다른 독법이 필요한 것과 동일하다.
영화에서 주인공에게 부여한 시간은 24시간. 감독이 말한 사형집행인을 위한 천국이 존재할까. 볼코노고프가 목적을 달성한 것 같기는 하다. 영화 막판의 씻김굿 같은 제의를 통해 주인공은 아마도 천국행 티켓을 거머쥔다. 하지만 대미에 자신이 있을 곳은 천국이 아니라는 느낌이 든다는 볼코노고프의 대사를 배치해 조용하지만 거대한 반전을 꾀한다. 영화에서 내내 볼코노고프를 쫓은 추격자에게 살해당하는, 모종의 ‘해피엔딩’을 거부함으로써 이 우화는 묵직한 울림을 전한다. 『법 앞에서』의 마지막과 닮았다. 볼코노고프의 고맙다는 마지막 대사는 종교적이고 실존적인 문맥을 동시에 고려하는 게 좋겠다.
영화가 볼코노고프의 ‘해피엔딩’ 다음에 도시를 내려다보는 천사상을 보여준 게 인상적이다.
역사와 개인을 동시에 보여주다
<미스터 존스>와 <볼코노고프 대위 탈출하다> 모두 역사 속의 한 인간을 묘사한다. 실존인물을 모델로 한 <미스터 존스>보다 가상의 인물을 주인공으로 한 <볼코노고프 대위 탈출하다>가 우화의 형식을 취했음에도 뜻밖에 역사의 비극성이 더 생생하게 다가왔다. 사건 자체의 성격이 다르긴 하다.
또한 <미스터 존스>보다 <볼코노고프 대위 탈출하다>에서 한 인간의 실존과 고통이 더 뚜렷하게 두드러졌다. <미스터 존스>처럼 비극적 역사에 초점을 맞추면 어떻게 해도 해피엔딩은 불가능하다. 반면 비극적 역사 속 개인에, 그것도 우화의 형식으로 초점을 맞추면 말 그대로가 아닐지 모르지만 ‘해피엔딩’이 가능하다. 인간은 살아야 하고 역사는 어쨌든 전진해야 하니까. 부부인 각본ㆍ연출가는 시나리오를 27번 고쳐 썼다고 한다. 노력이 결실을 거뒀다.
스탈린의 대숙청
<볼코노고프 대위 탈출하다>가 주목한 역사는 1930년대 스탈린의 대숙청이다. 극중 볼코노고프가 소속된 조직은 구 소련의 내무인민위원부(러시아어: Наро́дный комиссариа́т вну́тренних дел, НКВД 나로드니 코미사리아트 브누트렌니흐 델, 엔카베데, 영어: NKVD)로 1934~46년 소련의 내무부이자 최고 정보기관이었다.
스탈린은 1934년 12월 1일 레닌그라드에서 레닌그라드 당서기이자 그의 절친인 세르게이 키로프가 트로츠키 추종자에게 암살당하자 이 사건을 빌미로 반대파 제거에 나섰다. 이때 당원 등 스탈린의 정적과 반대파를 없애고 학살하는 데 앞장선 게 엔카베데이다. 숙청의 광풍은 1937~1938년에 가장 심하게 불었다. <볼코노고프 대위 탈출하다>는 1938년을 시대배경으로 삼았다.
영화에서 보여주듯 엔카베데는 재판이나 절차 없이 사람들을 끌고 가서 수용소에 가두고 권총으로 뒷덜미를 쏘아 죽였다. 숙청 대상은 농민부터 고위 당직자까지 전 계층에 걸쳤으며 당시 300만 명 소련 공산당 당원 중 약 3분의 1이 희생됐다. 1937~38년에 대략 95만~120만 명이 처형된 것으로 추정된다. 스탈린은 “고발 내용 가운데 10%가 진실이라 하더라도 고발 내용을 사실로 간주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글 안치용 영화평론가, 사진 (주)슈아픽처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