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개 어휘로 프랑스 문화의 은유적 뉘앙스를 이해하다!

파리지엔느 20년차 목수정 작가가 포착한 말들의 풍경

2023-10-02     ilemonde

김유라 |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기자

 

지난 대선 TV 토론에서 윤석열 후보의 손바닥에 쓰인 임금 왕()자를 본 많은 사람들은 대통령이 되고 싶어하는 윤의 욕심을 힐난했으나 지금처럼 공화정 이전의 왕정 체제로 거슬러 오르려는 무의식적 욕망을 읽어내진 못했다. 이보다 앞선 20176, 미국을 방문한 문재인 전 대통령이 백악관 방명록에 대한미국 대통령 문재인이라고 기재했던 사건도 실수냐, 조작이냐의 논란이 일었지만 미국에 대한 그의 무의식적인 미묘한 감정을 읽는 이는 없었다.

목수정 작가의 최신작 파리에서 만난 말들(생각정원)에 제시된 랍쉬스(lapsus)라는 어휘의 뜻을 알고 나서야, 이 두 사람의 뇌리에 감춰진 진실의 일면을 좀더 이해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윤은 왕좌에서 무소불위의 왕 노릇을 하고 있고, 문은 미국의 위력 앞에서 좌고우면하며, 대한민국의 권리를 제대로 주장하지 못했다.

 

 

저자에 따르면 랍쉬스는 본래 하려던 말과는 다르게 툭 튀어나오는 말, 혹은 글을 통해 나오는 실수를 가르킨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 자주 등장하는 랍쉬스는 들키면 안되는 본심, 내면에 꿈틀거리는 무의식이 의식의 통제를 뚫고 나와 마치 주워담기 힘든 물을 엎지르는 것 같은 화자(話者)의 날개없는 추락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런 말실수는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진짜 숨겨진 본심이라는 것이 저자의 설명이다.

우리가 기억하는 역대급 랍쉬스는 2012년 대통령 선거를 앞둔 1125,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대선 후보의 대통령직을 사퇴합니다발언을 꼽을 수 있다. 대통령 선거 출마를 위해 국회의원직 사퇴를 발표하는 자리에서 저질러진 그의 말실수는 대권 의지가 없는데도 주위에 떠밀려 억지로 대선에 출마했고, 대통령이 되고 나서 꼭두각시처럼 행동하다가 감옥에 가게 된 비극을 본다면, 마치 자신의 불운한 운명을 예언하는 듯 했다.

저자는 철학자 장 보드리야의 말을 빌려, “모든 위대한 사고는 랍쉬스다.(Toute grande pensée est de l’ordre lapsus)”라고 말한다.

파리와 서울의 경계선에서 칼리의 프랑스 학교 이야기』 『파리의 생활좌파들등의 도발적 에세이로, 프랑스 사회의 다채로움과 다양성을 소개해온 저자는 이처럼 20년 간 파리생활을 하며 자신의 마음을 일렁이게 했던 프랑스어 34개의 이야기 보따리를 풀었다. 그가 선택한 프랑스어의 기원과 의미, 쓰임새를 읽다 보면, 프랑스 언어의 은유성에 감탄하면서도 일상의 삶 속에서 미세한 언어적 뉘앙스를 포착한 작가의 예리한 시선에 놀라게 된다.

저자가 일상 어휘에서 발견한 프랑스적 가치에는 홀로 그리고 다 함께정신이 있다. 68혁명을 거치며 과거 거대 이데올로기가 보듬지 못했던 개인의 자유와 욕망이 터져나왔고, 이는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프랑스의 단단한 개인주의의 토대가 되었으며 언어 생활에 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 그의 분석이다

파리에서 만난 말들은 총 3부로, 1달콤한 인생을 주문하는 말’, 2생각을 조각하는 말’, 3풍요로운 공동체를 견인하는 말로 구성된다. 1부에서는 견디는생존(survivre, 쉬르비브르)을 넘어 누리는(vivre, 살다)을 추구하는 프랑스인들의 일상을 프랑스어 14개를 통해 들여다본다. 이를테면 한국 사회의 빨리빨리문화와는 반대로 프랑스에선 doucement(두스망: 부드럽게)이란 단어를 시도 때도 없이 사용하며 천천히, 부드럽게살아가는 태도를 지향한다. 태어날 때부터 이 말의 세례를 받고 자랐기에 그들은 “5분 늦을지언정 뛰지 않는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30년 이상 한국에 살면서 빨리빨리에 익숙했던 그가, 파리로 이주해 두스망 문화에 젖어 들어가는 부분에서는 빨리빨리에 익숙한 우리 일상을 돌아보게 한다.

‘Apéro(아페로: 식전주)-일상의 천국을 여는 세 음절장에서는 프랑스의 아페로 문화를 깊이 살핀다. 흔히 식전주로 해석되는 아페로의 주요 요소는 술의 종류와 상관없이 그것을 마시는 시간의 흥겨움·즉흥성·가벼움이다. 너그럽게 여유를 부리며 함께 농담을 즐기는 아페로 시간으로 프랑스인들은 하루 동안 쌓인 긴장을 이완한다. 저자는 아페로를 즐기는 순간, 우린 살아가려 애쓰는 처절한 생존 기계가 아니라, 삶을 즐기는 유쾌한 존재들이란 사실을 서로에게 일깨운다라고 말한다. 아페로에 곁들여지는 안주 사전이 나올 만큼 프랑스인들은 아페로에 각별하고, 이는 삶을 대하는 그들의 태도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아름다움을 포착하고 찬미하는 프랑스적 감각을 나타내는 말도 있다. 바로 ‘Il fait beau(일 페 보: 아름다운 날씨로군요)’. 프랑스인들은 형용사 beau(: 아름답다)를 일상에서 경탄을 느낀 대상을 향해 아낌없이 표현한다. 잘 차려진 음식을 보고 맛있겠다가 아니라 아름답다를 연발하고, 축구 중계 중에 적시에 터진 멋있는 골에 대해 캐스터들은 “C’était vraiment beau(이건 정말 아름다운 골입니다)”라고 탄성을 내지른다. 삶의 마디마다 숨겨진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언어로 표현하는 그들의 습관은 프랑스 사회의 발달한 미의식의 바탕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이 외에도 scrupule(스크뤼퓔: 세심함), bonjour(봉주르: 안녕하세요) 등 일상을 더욱 달콤하고 부드럽게 풀어주는 단어들로 프랑스적 일상의 다양한 면모를 살필 수 있다.

 

2부에서는 프랑스어 11개를 다루면서 공화국을 완성한 프랑스적 가치와, 한국과 프랑스의 문화·정치적 차이에 대해 세밀하게 들여다본다. 먼저 ‘laïcité(라이시테: 정교분리 원칙)-공화국을 완성한 네 번째 가치장에서는 오늘날 프랑스의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기둥인 정교분리 원칙을 탐구한다. 1905년의 정교분리법이 의회에서 어떻게 통과됐는지, 그것이 얼마나 혁명적인 사건이었는지 알려주면서 정교분리 원칙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오늘날 프랑스에서 그것이 어떻게 작동하고, 위협받고 있는지를 저자 자신의 경험을 통해 생생히 증언한다. 광화문 거리에서 십자가와 성조기, 이스라엘기를 들고 빨갱이, 좌파 척결을 외치는 기독교 보수단체의 정치 구호가 귓전을 울리는 우리의 현실이 오버랩 되는 대목이다.

transgénérationnel(트랑스제네라시오넬: 세대를 가로지르는)이란 단어에 얽힌 이야기도 인상 깊다. 오늘날 프랑스인들은 세대를 거쳐 반복되는 심리적 연결성, 조상의 해결되지 않은 트라우마가 전해 내려오는 현상에 관심이 높다. 이는 흡사 조상들과의 인연을 칭칭 쟁이고사는 한국 사회의 그것과 비슷하다고 진단한다. 한국에서는 굿을 해서 조상 등의 영혼을 달래듯이, 프랑스인들은 기 치료사 등을 통해 먼 조상의 트라우마를 인지하고 심리적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한편으로 가계심리학을 통해 가족 내 숨겨져 있던 비사(祕事)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해석하며 화해해 매듭을 풀고자 애쓰기도 한다. ‘드라마 왕국인 한국 사회를 향한 표현도 눈에 띈다. 바로 ‘vie par procuration(비 파르 프로퀴라시옹: 대리 인생)’. 이 말은 한국 영화나 드라마에서 왜 늘 복수극이 나오는지 질문받은 저자가, 한국에서는 법이나 사회적 정의가 드물게 작동하고 개인적 응징이 거의 불가능하기에 드라마가 그 역할을 대신해준다고 답하자 상대에게 들은 말이다. 한국인들이 드라마를 통해 대리 인생을 산다는 것. 같은 맥락에서 한국 드라마에 재벌이 많이 나오는 것도, 현실의 누추함을 가리고 대리 만족하기 위함이라고 저자는 분석한다. 반면 드라마 문화가 거의 없다시피 하고, 더 글로리같은 복수극이 프랑스를 포함해 유럽에서 인기가 시들했던 이유에 대해 살피며 문화적 차이도 논한다.

 

3풍요로운 공동체를 견인하는 말에서는 프랑스어 9개를 통해 모두의 권리를 위해 연대하고 뭉치는 프랑스의 끈끈한 공동체성을 살펴본다. 먼저 ‘grève(그레브: 파업)-풍요를 분배하기 위한 시간장에서는 생존에서 삶으로 프랑스인들을 도약하게 해준 단어인 파업의 역사를 세밀히 살핀다. 이를 통해 그레브가 얼마나 프랑스에서 중요한 말이자 가치이며, 왜 프랑스 공동체를 논할 때 첫째에 놓여야 하는지 알려준다.

그레브만큼 중요한 말인 solidarité(솔리다리테: 연대)에 대한 이야기도 빠지지 않는다. 프랑스 정부나 지자체가 평등에 방점을 두며 만들어내는 모든 정책에는 솔리다리테란 말이 들어간다. 이는 정책에서 시혜적 뉘앙스가 아닌, 그것을 받는 사람도 주체로서 함께하는 것이란 의미를 강화시킨다. 이렇듯 말에 담긴 프랑스 정신을 하나씩 들여다보는 저자의 글은 각박해져만 가는 우리의 일상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고, 어떻게 살아내야 하는지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함께 전한다.

저자는 서문에서 프랑스 사회의 언어 속엔 그 역동적 역사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고 말한다. 책을 읽으면서 작가가 선택한 어휘처럼, 우리 사회에서는 어떤 말이 프랑스어처럼 은유적, 함축적으로 쓰이고 있고, 현실의 어떤 맥락을 담아내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도 의미 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 김유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