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혜의 문화톡톡] 노년이라는 '성'(性), 노년을 구분짓는 ‘선’ 영화<69세>(임선애,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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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젊게 살수록 좋은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젊음의 기준은 어디에 있을까. 나이일까, 몸일까. 타자의 시선일까.
지난 10월,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임선애 감독의 신작 <세기말의 사랑>이 공개되었다. 상영까지 시간이 남아 커피를 사기 위해 처음보는 카페에 들렀다. 모든 주문을 키오스크로 받고 있었다. 앞선 할아버지 한 분이 키오스크를 제대로 사용하시지 못해 한참을 기다려야만 했다 상영시작 시간을 되짚으며 '어쩔 수 없지, 기다리자'라고 안일하게 생각했다. 순서가 다가오고 키오스크 앞에 섰다. 한두번 만져보는 키오스크도 아닌데 주문부터 결제까지 꽤나 복잡했다. 당황스러웠다. 낯선 동네, 처음 만져보는 기계앞에서 손가락이 버벅거렸다. 뒤로 늘어선 줄을 가늠하며 식은땀이 흘렀다. 누가 눈치를 주는 것도 아닌데 몸이 제어가 안되고, 일상이 버거워지는 상황이 매일같이 반복된다면 어떤 심정일까. 그제서야 어렴풋 아까의 무신경함에 대한 죄책감과 공포가 몰려왔다. 순간 감독의 전작인 <69세>(2020)가 떠올랐다.
2020년에 개봉한 다양성 영화 <69세>는 ‘여성노인강간’이라는 실화를 소재로 삼았다. 주인공 효정은 관절 문제로 병원 치료를 받던 중 29살의 물리치료사에게 성폭행을 당한다. 실화 소재의 영화이지만, <69세>는 관객에게 사건을 보여주고 고발하는 방식을 택하지는 않는다. 사건을 유추하고 짐작하게 하는 방식을 택한다. 예컨대 카메라는 불안하게 흔들리는 병원 침대의 일부와 적외선 조사기의 붉은 조명이 산발적으로 빛나는 찰나만 관객에게 제공한다. 이러한 장면들은 사건의 피해자인 69세 효정이 기억하는 순간을 그대로 재현한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관객은 자연스럽게 효정과 같은 입장이 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그녀가 단편적으로 떠올리는 기억을 함께 체험한다.
사건 이후에도 일상은 이어진다. 효정은 평소처럼 장을 보고, 수영을 한다. 또래의 남성노인인 동인이 운영하는 헌책방의 일도 돕는다. 화면에 모습을 드러낸 백발의 그녀는 썩 강단있고 우아해 보인다. 아무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보인다. 오프닝 씬에서 환자복을 걸친 채 멍든 손목으로 옥상 난간을 붙들고 있던 파리한 옆모습이, 새벽녘 창공을 바라보던 그녀의 얼굴을 비추던 장면이 환상처럼 느껴질 정도로 다른 외양이다.
노년기를 자연현상에 빗대어 통상적으로 ‘황혼의 시기’라고 말한다. 효정과 동인이 등장하는 장면에도 황혼을 말하는 듯 노란 불빛이 위치한다. 그들은 자주 가로등의 금빛 조명 밑에서 대화한다. 하지만 이 빛은 자연의 순리에 의해 나타난 빛이 아닌 기계가 만들어 낸 인위적인 빛이다. 따라서 그들의 관계도 타자의 시선에는 인위적으로 보이는 듯 하다.
동인은 고소장을 적어 내려가는 효정의 곁을 묵묵히 지킨다. 그런 둘을 보고 경찰은 둘이 무슨 관계냐고 묻는다. 경찰은 69세인 효정이 진술하는 피해를 진지하게 대하지 않는다. 경찰 뿐만 아니라 동인을 제외한 모든 인물은 효정이 겪은 ‘성폭행’이라는 사건을 믿지 않는다. 믿지 않는 것을 넘어 모욕적인 말을 하기도 한다. 69세인 효정의 수영하는 뒷모습이, 드러난 다리가 너무 ‘처녀’같이 보였기 때문에 벌어진 사건이라고 말한다. 기억을 확신할 수 있는지 자꾸만 되묻는다. 이렇게 반복되는 상황과 질문들은 사건이 진실임을 아는 관객조차도 효정을 의심하게 만든다.
“젊은 남자가 뭐가 아쉬워서”
“할머니가 꼬신 거 아니야?”
“정말 피해자 맞아?”
6을 뒤집으면 9처럼 보인다는 사실처럼, 상황은 언제나 반전될 수 있다. 젊은이에게 닥쳐오는 사고가 노인에게만 닥쳐오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물 위에 떠오른 효정이, 수영을 하는 효정의 뒷모습이 젊은 여성처럼 보이는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나이에 비해 빛나는 그녀의 아름다움을, 사건을 인정받을 수 있는 사회적 편견의 정당성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생애주기의 반전을 꾀하고, 다양한 관점에서 삶을 바라보자고 주장하는 지극히 의도된 장면이라고 볼 수 있다.
동인과 효정은 늘 함께다. 그들은 한집에 산다. 그러나 그들은 부부도 친구도 아니다. 그들은 서로의 사이를 쉽게 정의하지 못한다. 효정과 동반자가 되고 싶은 동인과 달리, 효정은 매번 동인을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선을 긋는다. 이러한 선이 사고 이후 발생한 선 같지는 않다. 효정을 봤으면서도 동인에게만 예의 바르게 인사하는 동네 사람들의 태도에서, 치약이 얼마나 남았냐고 묻는 동인에게, “내 건 많이 남았다”고 대답하는 효정의 행동에서 오래전부터 그들 사이에 선이 있었음을 알게 한다. 이러한 선은 장면에서도 드러난다. 효정과 동인이 한 프레임 안에서 온전히 잡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유리창, 유리문, 헌책, 또는 건물의 안과 밖을 나누는 온갖 종류의 벽이 둘 사이에 자리 잡아 공간을 구분한다. 이를 증명하듯 둘은 같이 살면서도 각방을 쓴다. 각방을 쓴다는 것은, 어엿한 성인인 이들 관계에 성이 부재한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왜 하필 ‘69’세일까?
69는 서로를 전복한 숫자다. 수학적 관점으로 보았을 땐, 부족수의 나열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제일 먼저 비속어로서의 ‘69’를 떠올렸다. 삽입 위주의 섹스가 보편적으로 젊음과 정력의 상징이라면, ‘69’는 삽입하지 않아도 눈과 입이 위치한 얼굴을 위주로 사용하는 체위를 뜻하는 성적은어이기도 하다. 이것은 체력이 부족한 효정과 동인이 성을 나눌 수도 있는 사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하는 설명은 아니다. 말하자면 요양보호사로 일하는 효정에게 치근덕거리는 전신불구의 남성노인에게도 성욕이 있는 것처럼, 29세에게 가능한 일이 69세에게 영 불가능한 것은 아니란 반증이다.
노인이란 어떤 존재인가. 69세 효정은 타자들의 편견 속에서 무성이어야만 하는 대상이다. 그녀는 노년기임을 증명하는 병 중 하나인 관절염의 치료를 위해 찾아간 병원에서 객관적으로 수치화 된 늙음을 인정 받았다. 따라서 타인의 기준에 병원은 효정에게 회복을 도모하는 공간이어야만 했다. 이러한 공간에서 심지어 젊은 남자에게 성적으로 대상화되고, 성범죄에 휘말린 효정의 존재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이다. 강간은 어린 여자, 젊은 여성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오인하는 것이다.
이러한 편견 속에서 효정은 아무도 받아주지 않는 고발문을 써내려 간다. 그리고 푸른 창공에 고발문이 내던진다. 이 고발문은 사실 고백서에 가깝다. 효정은 잘 움직여지지 않는 손가락으로 펜을 움켜쥔 채 자신이 당한 피해를 가만히 꿋꿋하게 적어 내려간다. 사람들의 의심이 틀렸다는 것을, 편견으로 그어진 빗금들 사이 명백한 틈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꾹 눌러쓴다. 효정이 쓴 비뚜름한 글자가, 단어와 단어 사이 여백이 모여 한 편의 글을 이룬다. 그러므로 효정의 고발문은 아무것도 미루어 장담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모든 명제에는 틈이 있다는 것을 알린다. 틈은 무한하고, 명징한 뜻밖의 증거다.
글·이지혜
문화평론가. 제16회 <쿨투라> 영화평론부문 신인상으로 등단, 2023 전주국제단편영화제 전북부문 심사위원, K-컬처 스토리콘텐츠 연구원(A)으로 경희대에서 강의를 하고 있으며, 영화평론가 및 문화평론가로 활동중이다. 대중문화와 기술인문(AI,NFT,메타버스,챗GPT)을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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