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에게 바람직한 것이란?

2023-12-29     에블린 피예에 l 작가

믿거나 말거나, 프랑스 문화부 웹사이트를 둘러보는 일이 ‘언제나’ 시간 낭비는 아니다. 물론, 시간을 낼 법한 이유가 필요하다. “문화는 인류의 가장 숭고한 양식”이라는 프랑스 문화부 장관 리마 압둘 말라크의 발언은, ‘굳이 문화라는 것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의문이 든다. 문화부 장관은 이런 말도 덧붙였다. 문화는 “예술가와 지역 주민들 간에 새롭고 감각적이고 풍부한 연결고리를 만들어 줍니다.” 그렇다. 자고로 위톨드 곰브로비치가 말했듯 ‘우스꽝스러운 문화(Cuculture)’라는 것도 좋은 것이다.(1) 그리고 문화에 흠뻑 ‘몰입’하게 되면, 그리고 그 문화가 메타버스(Metaverse) 안에서 빛을 발하면(조만간 1억 5,000만 유로 규모의 사업제안서 공모가 있을 예정), 우리 모두 풍부한 교양을 갖추게 될 것이며, 여러 관련 산업도 크게 융성하고 번창하지 않겠는가?

그래도 문화부의 웹사이트가 이렇게 어리석은 말로만 도배된 것은 아니다. 일종의 ‘나눔’이라는 현대적인 기치를 내세우기도 한다. 문화부는 웹사이트를 통해 국민과 “함께하고” 국민에게 “기여한다”라고 끊임없이, 셀 수 없이 강조하면서도, 공공 서비스의 역할을 후원(을 가장한 통제)으로 변질시켜, 재정 지원이 필요한 대상을 엄선해 보조금을 주는 ‘후원자’ 역할을 자청한다. 

하지만 소위 창조산업이라는 부문에 공적 자금을 투입할 때 초점은 ‘지원’이 아닌 ‘혁신’에 맞춰진다. 그리고 혁신은 곧 수익성을 뜻한다. 설상가상 ‘문화 민주화’라는 모호한 개념까지 가미된다. 그렇게 하면 모두가 문화에 몰입할 수 있을 것이라 여기는 것이다. 이렇듯 직접적이고 감각적이며 재미있는 것들을 추구한다. 문화부 장관이 예시로 든 문화 프로그램은 ‘비블리오케트(Biblioquête, 도서 탐구)’다. “이 사업은 8~12세 아동들이 프랑스 문학의 위대한 고전을 읽도록 장려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증강현실 프로젝트입니다. 독자들이 독서와 비디오 게임 사이를 오가며 꿈같은 가상의 세계에 몰입할 수 있도록 해 줄 것입니다.” 

 

“우리 문화 프로그램에는 마케팅 혁신이 필요합니다.”

어차피 8~12세에는 ‘위대한 고전’을 잘 읽지 않는다는 사실만 빼면(물론 어느 고전 작품이 채택되는지 궁금하지만), 이런 접근방식에는 분명히 장점도 있다. 독서는 어렵지만, 비디오 게임은 편하니까 말이다. 달리 말하면, 독서가 엘리트적이라면 비디오 게임은 대중적이다. 

“우리의 문화 프로그램에는 마케팅 혁신이 필요하다”라는 생각은 결국 평등의 문제에 대한 걱정에서 나온 것이다. 문화부가 제공하는 프로그램이 민주적이어야, 즉 팔릴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이런 발상은 오늘날 주요한 흐름이 됐고,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일이 됐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은 최근 사례다. 매년 10월 파리 마레 지구에 있는 공간 ‘알 데 블랑망토(Halle des Blancs-Manteaux)’에서는 프랑스뿐 아니라 아마 전 세계적으로도 흔치 않은 ‘잡지 박람회(Le Salon de la Revue)’가 열린다. 이 행사는 앙트르뷔(Ent’revues) 협회가 주관하며 프랑스 문화부 산하에 있는 국립도서센터(CNL)의 지원을 받는다. 

하지만 이 박람회나 잡지들의 앞날은 위태로워 보인다. 문화부 웹사이트에서 박람회 안내 공지가 올라올 때 외에는 앙트르뷔 협회에 관한 언급을 찾을 수 없다(2023년에는 아예 없었다). 따라서, 해당 기관의 현황을 파악하기 어렵고, 관련 지원금 정보는 더욱 알기 어렵다. 웹페이지에 명시된 내용에 따르면, 국립도서센터의 ‘지원 대상’은 ‘폭넓은 대중’을 대상으로 하며, ‘전문 지식이 없는 일반인’도 쉽게 접할 수 있고, 창의적인 내용이나 고품질의 기사를 제공하는 ‘잡지’다.

 

전문지 생존을 외면하는 ‘엘리트주의’ 공적 자금

이는 곧 잡지들이 ‘전문 지식이 없는 일반’ 독자에게 어필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런 용어의 선택은 놀랍다. 전문지의 필진과 독자들은 ‘엘리트주의자’라는 뜻인가? 그 발상 또한 놀랍다. 전문지는 재량껏 지원처를 모색해야 하며, 설령 자금을 조달하지 못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는 것인가?

결국, 공적 자금으로는 특정 잡지들을 더 이상 ‘지원’하지 않겠다는 의도로 비친다. 인쇄 부수나 연간 발행 부수가 너무 적거나, 판매가 부진한 잡지에 대한 정부 지원은 점차 줄거나 끊길 것이다. 틀에 박힌 이야기지만, 살아남으려면 눈에 띄어야 하고 주목받아야 한다. 하지만 누구의 눈에 띄어야 하는가? 수단과 방법은 불문하고 가치 있는 것은 곧 돈이 되는 것이라고 확신하는 사람들?

이런 논리대로라면 잡지라는 매체는 모조리 사라지고 말 것이다. ‘주변적인’ 잡지들이 먼저 사라질 테고, 그러고 나면 그보다 덜 주변적이지만 ‘쉽지’ 않은 잡지들이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독자가 많지는 않아도 이런 잡지들은 우리들의 삶을 윤택하게 한다. 호기심, 지식, 의문, 지적 탐구는 공식 정보망이나 판매량 순위권에 머물지 않아도, 경계의 테두리 밖에서 조금은 신비로운 방식으로 순환되고 전달되기 마련이다. 이제 인공지능, 즉 사상과 관념의 알고리즘이 우리 인간을 대신해 사유하고 상상할 일만 남았다. 우리, 요컨대 일반 대중은 미지의 것에 대해 추호의 호기심도 가져서는 안 된다. 그리고 그 한계를 규정하는 것은 속인들이 존경해 마지않을 ‘식견이 높은’ 자칭 전문가들이라고 한다. 이렇듯, 사용된 단어들부터가 하나하나 기가 막힐 지경이다. 

재미 삼아 잡지 몇 개의 제목을 살펴보자. <그 무엇도 정확지 않음(Rien de précis)>, <불안정한 하늘(Ciel variable)>, <별-압생트(L’Etoile-absinthe)>, <스폰지(L’Eponge)>. 그밖에 <이단적인 위선자(Le Cafard hérétique)>, <위뷔(Ubu)>, <니켈 코팅지(Papiers nickelés)> 같은 제목도 보인다.

자, 그래도 독자들의 뉴런을 자극하는 잡지도 있다. <샤를 푸리에 평론(Cahiers Charles Fourier)>, <유럽(Europe)>, <슬라브 연구지(Revue des études slaves)>, <18~19세기 문화사 리뷰(Revue d’histoire culturelle XVIIIe — XIXe siècles)>, <사유(La Pensée)>, <아덴(Aden)>, <장 폴랑과 배경 연구(Cahiers Jean Paulhan et ses environs)>.

‘잡지 박람회’와 박람회의 기본 정신을 지키고 전파하려는 안 마티외(<아덴>)와 프랑수아 알베라(<1895>)의 주도로 시작돼 수많은 잡지가 동참하는 이 릴레이 칼럼은 <아덴>, <뤼마니테>, <AFRHC>에서도 읽을 수 있다.(2) 

 

 

글·에블린 피예에 Evelyne Pieiller
작가

번역·이푸로라
번역위원


(1) Jean-Pierre Salgas, ‘Witold Gombrowicz, en finir avec la cuculture(비톨트 곰브로비치, 문화에 마침표를 찍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16년 11월호.
(2) ‘Le Salon de la Revue est-il en danger ?’, <L’Humanité>, https://www.humanite.fr/en-debat/edition/le-salon-de-la-revue-est-il-en-danger <Aden>, https://www.paul-nizan.fr/2-non-categorise/121-le-salon-de-la-revue-est-il-en-danger <AFRHC>, https://afrhc.fr/le-salon-de-la-revue-est-est-il-en-dang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