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주의 문화톡톡] 액시스 문디
생명나무와 선악과
액시스 문디: 생명나무와 선악과
에덴동산에 아름답고 먹기 좋은 실과들이 즐비하다. 그 가운데 생명 나무와 선악과가 들어있다. 두 나무는 에덴동산 이야기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 고대 근동에서 새로운 생명, 또는 영원한 삶을 상징하는 생명 나무는 잘 알려진 주제다. 예컨대 수메르 신화 길가메시에서 영원한 생명을 주는 ‘불로초’는 바다 깊은 곳에 있어 쉽게 접근할 수 없다. 길가메시는 심연의 공포와 수호자들의 방해, 그리고 가시의 찔리는 고통을 무릅쓰는 영웅적인 여행을 통하여 마침내 생명 나무를 획득한다. 득의양양한 그가 잠시 쉬는 중 뱀이 나타나 어렵사리 얻은 불로초를 물고 사라진다. 영원한 삶에 대한 염원과 노고가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1
이렇듯 생명 나무는 여러 종교와 신화의 토대이자 원형이며 세계 도처에서 확인할 수 있다. 나무의 기둥은 하늘을 향하고 뿌리는 땅속에서 단단히 버틴다. 가지는 물결처럼 뻗고, 뚫고,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 뒤엉키는 등 복잡한 삶을 보여준다. 이처럼 나무는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동시에 태어나 성장하고 다시 땅으로 돌아오는 생명의 순환 과정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따라서 우뚝 서 있는 나무는 우주의 축이며 세계의 기둥이다. 아래 그림 이그드라실은 북유럽의 거대하고 신성한 나무다.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세상의 중심이며 이른 바 우주수 액시스 문디(Axis Mundi)다. 지역에 따라 물푸레나무, 반얀트리, 용화수, 천도, 생명 나무, 무화과, 불로초 등 다양하다.
‘액시스 문디’는 엘리아데에 의해 학술 용어로 제안되었다. 즉 우주의 축, 우주수라고 번역할 수 있으며 하늘과 땅의 연결과 세상의 중심을 지칭하는 신화적 개념으로 자리 잡았다. 액시스 문디라는 용어로 포괄할 수 있는 명칭은 세계 곳곳에서 산재한다. 고대 사회의 옴팔로스, 지구라트, 아라랏, 피라미드, 오벨리스크, 등대, 신단수(神檀樹), 환구단(圜丘壇), 당산나무 등이며 현대에서는 각종 첨탑. 초고층 빌딩, 심지어 로켓 등이 대신한다. 엘리아데에 따르면 사람이 거주하는 모든 공간의 중심은 신성하며 그 대표적인 상징을 액시스 문디라 칭한다.2
창세기에서 에덴동산은 우주의 신성한 공간이다. 그 한가운데(כְּחוֹךְ) 생명 나무와 선악과가 있다(창세기 2:9;3:3,8). 화자가 에덴동산, 또는 동산을 거듭 언급하고 또한 동시에 ‘한가운데’를 몇 차례 더 명시한 이유는 명백하다. 즉 에덴이 우주의 중심이자 세상의 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창세기 본문의 ‘한가운데’가 고정된 공간인지 아니면 세상의 출발점인지 분명하지 않다. 더구나 한 번은 생명 나무가 에덴 중앙을 차지하고, 다음에는 선악과, 그리고 마지막에는 무화과나무가 차례로 등장하여 더욱 복잡하다. 보통 액시스 문디는 중심에 자리한 (생명) 나무로 인식되지만, 창세기에는 선악과와 나중에 잠깐 무화과가 등장하기 때문에 논의가 분산되기도 한다. 우리의 논의는 생명 나무와 선악과를 함께 다룬다.
선악과(עֵץ הַדַּעַחe)의 역할과 의미를 밝히는 것은 꽤 어려운 작업이다. 창세기 2-3장 본문에서 확인된 것은 선악과가 생명 나무와 함께 에덴동산에서 중요 대상이라는 점이다. 그러면 액시스 문디가 둘이라는 뜻일까? 우선 선악과를 따라간다. 선악과를 분석하려면 히브리 수사법 메리즘을 이해하지 않고 불가능하다. 대체로 ‘선악(善惡),’ 흠정역의 ‘good and evil’은 잘못된 번역이다. 사전적 의미는 ‘좋은 것’과 ‘나쁜 것’이다. 악과 evil이 나쁜 것이긴 하지만 나쁜 것의 일부이지 나쁜 것을 총칭하지는 않는다. 중세 유대교 철학자 마이모니데스에 의하면 본래는 선악(טוֹב וָרָצ)이 아니라 ‘참과 거짓’(אֱמֶח וֶשֶׁקֶר)이었다.3 아담과 하와가 그 열매를 따 먹음으로써 ‘참과 거짓’의 절대적 가치가 ‘선과 악,’ 곧 상대적인 진리로 바뀌었다고 보는 것이다. 히브리어 ‘선과 악을 아는 지식’이 라틴어 scientiae boni et mali로 번역되었다. 라틴어 malum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하나는 형용사 ‘나쁜’(bad)이고 다른 하나는 일반명사 ‘사과’(apple)다. 이처럼 라틴어 성경 때문에 선악과가 마치 창세기 본문에 언급되지 않은 사과나무인 것처럼 알려졌다. 남성의 목에 튀어나온 뻐를 가리키는 Adam’s apple도 여기에서 기인한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면 선악과에는 상반되는 두 개념(טוֹב וָרָצ) 사이에 접속사(w)가 연결된 형태다. 하느님의 우주 창조에서 ‘땅과 하늘’(אֶרֶץ וְשָׁמָיִם,)이라는 묘사가 나온다(창세기 2:4). 선악과와 똑같은 형식의 표현이자 수사법이다. ‘선’과 ‘악’의 대조 사항을 등위 접속사 ‘그리고’로 연결하여 그 사이에 있는 모든 것(everything)을 지칭하는 대극법(merism)이다. 따라서 ‘선악과’란 문자적으로 선과 악의 두 개념이 아니라 그 가운데 들어있는 모든 지식을 의미한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먹은 뒤 눈이 밝아져 ‘벌거숭이’(עֵירֻמִּם)를 인식하고 무화과로 가렸다. 이제 생명 나무 열매를 취하면 하느님처럼 불멸에 이를 것이다. 그러자 하느님은 사람이 ‘우리 중 하나처럼 되었다’고 실토하며 에덴동산에서 그들을 추방하였다. 영원한 삶, 곧 불멸의 길은 멀어지고 그들이 태어난 땅을 경작하고 땀을 흘리며 살게 되었다(창세기 3:19, 22-24).
르네상스 시대의 인문주의자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인체의 비율을 과학적 예술적으로 정밀하게 탐구하였다. 이른 바 ‘비트루비우스의 인간’이다.4 그는 정사각형의 밑변 중앙에 원을 둔 상태에서 팔과 다리를 벌리고 서 있는 자세의 남성을 두 겹으로 그렸다. 그의 배꼽은 세상의 중심처럼 그림의 중앙에 위치한다. 인체가 곧 액시스 문디와 같이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형상이다. 이와 같은 견해는 다빈치의 독특한 이론이 아니다. 이미 유대교의 카발라, 인도의 요가, 불교 사상에도 사람을 세상의 중심에 놓고 사유하는 전통이 있다. 이를테면 인간은 땅과 하늘, 그리고 천체의 움직임에 영향을 서로 주고받는다는 사상에 뿌리를 둔다. 비트루비우스 인간의 섬세한 피부 선과 응시하는 눈동자, 그리고 헝클어진 듯 날리는 머리카락은 나무처럼 생생하게 살아있다. 기둥과 가지가 곧게 서서 좌우로 뻗어 나가고, 그의 중심은 안정적이며 흔들리지 않는다. 사람이 곧 세상의 중심이며 축이다. 다빈치의 비트루비우스 인간은 얼핏 이상적인 인체 비율로 한정하기 쉽지만 사람, 곧 각각의 인류가 세상과 우주의 중심이라는 르네상스 인문학이며 창세기 인간학의 재발견이다.
에덴동산 한가운데 생명 나무와 선악과가 있다. 한편 동산의 또 다른 축은 사람이다. 그는 땅의 ‘흙’(עָפָר)과 하느님의 ‘숨’(נְשָׁמָה)이 어우러진 ‘생명체’(נֶפֶשׁ חַיָּה)다(창세기 2:7). 다시 말해서 사람은 물질과 비물질의 결합이 질적 변화를 일으킨 융합체라는 뜻이다. 하나 없이 다른 하나만 있지 않고 반대도 마찬가지다. 사람은 기계적 중용이나 결합이 아니라 물질과 비물질 사이의 무한이다. 세상의 모든 지식을 습득한 사람은 태고의 동산에서 추방되었으나 ‘생명 나무’에 대한 열망은 더 커진다. 두 발을 땅에 딛고 머리는 하늘을 향한 채. 비트루비우스 인간에서 보듯 그의 두 팔은 공중을 자유롭게 휘젓지만, 배꼽은 우주의 중심에서 벗어날 수 없다. 무한을 추구하나 유한에 매여있고, 영원을 얻으려 하지만 지금을 떠날 수 없는 불연기연(不然其然)의 연속이다. 각 사람은 ‘참과 거짓’의 가운데, ‘선과 악’ 사이에 있다. 그는 세상의 중심이며 우주의 축이다.*
1. Gilga는 늙은이를 mesh는 젊은이를 뜻하며 ‘늙은이가 젊어지지 못하고 젊은이가 늙은이가 되는 운명’을 암시한다. Gilgamesh Epic, XI, 266-295.
2. 미르치아 엘리아데, 『이미지와 상징』 이재실 옮김 (까치글방, 1998) 45,48.
3. Mose Maimonides, The Guided of the Perplexed, I.2.
4. 기원전 1세기 로마의 건축가 비트루비우스는 건축의 강도, 유용성, 아름다움을 강조하며 이를 위한 이상적인 건축물을 인체의 신비한 비율에서 찾는다.
글·김창주
한신대 신학부 교수. 히브리 유산을 인문학으로 푸는 글을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