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케인스인가, 굿바이 케인스인가?
인간은 노동에만 최적화된 채로 진화하지 않았다!
전문 직업인의 일 중독, 가짜 노동에 대한 열정, 대다수 노동자의 희망 없는 고역, 멈추지 못하는 낭비적 소비, 영원히 청산될 수 없는 가계부채, 파괴되는 환경이 왜 옹호되어야 할 삶인가? 내가 보기에 지금은 오히려 케인스의 편견이 필요한 때이며, 그 고결한 편견 없이는 인류세를 넘어 지속가능한 발전을 이루어낼 수 없을지도 모른다.
케인스의 철학적 질문 : 호모 라보란스? 호모 루덴스?
논의를 인문학으로 좁혀 보자. 인문학 가운데에서도 철학은 경제학의 전제는 물론 모델과 정책마저 결정한다. 존재론, 인식론, 본성론, 윤리론 등 경제학 모델 및 정책과 관련되지 않는 주제가 없지만, 오늘 다룰 케인스의 1930년 에세이 ‘우리 손자 손녀들이 누릴 경제적 가능성’은 그중에서도 특히 윤리론과 관련된다. 윤리론은 ‘사람은 무엇을 위해 사는가?’에 관한 철학적 질문이다. 예수와 사탄 사이에 벌어진 ‘사람은 떡으로 사는가, 아니면 말씀으로 사는가?’에 대한 논쟁은 철학에서 한편으로 유물론과 관념론으로 자리 잡았지만, 다른 한편 공리주의와 의무론의 모습을 취했다. 곧, 인간은 쾌락과 공리를 위해 사는가, 그렇지 않으면 정의, 연대, 공동선에 입각하는 ‘좋은 삶’을 지향하는가?
그런데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본성론으로부터 시작될 수밖에 없다. 곧,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인데, 이는 우리에게 익숙한 도덕적 본성, 곧 ‘인간은 선한가, 악한가’에 관한 주제는 물론 ‘기능적’ 본성에 관한 주제도 포함한다. 가령, 인간은 노동하는 ‘호모 라보란스’(Homo laborans)인가, 유희와 여가를 즐기는 ‘호모 루덴스’(Homo Ludens)인가? 이 짧은 에세이에서 케인스는 이 두 가지 철학적 질문을 정면으로 다룬다.
그리곤 그는 먼저 인간에게 노동은 필요하지만, 그것이 삶에서 전부를 차지해선 안 되고, 그것보다 오히려 여가를 즐겨야 한다고 본다. 호모 라보란스보다 호모 루덴스가 본성에 가까우며, 그렇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말이다. 더욱이 인간은 쾌락과 공리보다 ‘좋은 삶’을 지향하며, 더욱이 여가를 선용해 그런 삶을 사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제레미 벤담의 헤도니즘(쾌락주의)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에우다이모니아(좋은 삶) 전통을 따른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케인스가 이런 강력한 본성론을 염두에 두고 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인간은 그러한 가능성을 충분히 지니고 있으며, 일정한 조건이 주어지면 그 가능성은 현실에서 자연스럽게 구현될 것으로 믿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 경우, ‘일정한 조건’이란 물적 조건이 충분히 확보될 경우, 곧 경제가 충분히 성장해 ‘경제 문제’가 궁극적으로 해결된 상태를 말한다.
인간에겐 노동보다 여가가 필요하다
그의 주장을 종합해 보면, 경제가 성장해 ‘희소성’의 문제가 해결되면, 인간은 노동보다 여가를 선택함으로써 여유롭고도 좋은 삶을 살 수 있는데, 이 에세이를 쓸 시대를 기준으로 100년이 지나면 그의 손자와 손녀들은 이런 세상을 맞이할 텐데, 문제는 우리가 이런 삶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주장이다. 2030년이 바로 그 시기인데, 지금부터 6년 후가 된다.
케인스의 주장을 하나씩 확인해 보자. “앞으로 100년 후에는 선진국의 생활 수준이 지금보다 4배에서 8배는 높아질 것”(p.51)이며, “일주일에 15시간만 일해도 아주 오랫동안 경제적 문제에서 해방될 수 있다. 하루 3시간 정도의 일이면 우리 대부분이 내면의 세속적 본능을 충분히 만족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p.55) “내 결론은... 경제 문제는 앞으로 100년 안에 해결되거나 그 해법이 적어도 가시권 내에 들어온다는 것이다. 즉, 미래를 조망해 보면 경제 문제는 인류가 처한 영구적인 문제가 아니다.”(p.52)
“만약 경제 문제가 해결된다면, 인류는 오랫동안 품어 온 목적을 잃게 될 것이다.”
이런 상황이 우리에게 이득이 될 것인가? 그럴 수도 있다. “만약 우리가 삶의 모든 진정한 가치를 믿는다면 경제 문제의 해결은 적어도 이득을 가져올 가능성의 문”을 열어 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을 가로막는 요소가 있는데, “일반인이 수많은 세대에 거쳐 물려받은 습관과 본능”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를 “몇십 년 안에 재조정한다는 것은 두려운 작업이 될 것이다. 요즘 표현을 빌리자면 ‘신경쇠약’ 같은 증세를 겪지 않겠는가? 우리는 이미 영국과 미국의 부유층 부인들 사이에서 흔히 목격되는 신경쇠약을 조금씩 겪고 있다. 그들 다수는 부유함 때문에 원래 해왔던 많은 직업과 임무를 빼앗긴 불운한 여성들로, 경제적 필요성이라는 동인을 잃자 요리하고 청소하고 수선하는 일에 그다지 재미를 느끼지 못하면서 그보다 더 즐거운 일도 찾지 못한다. 일용할 양식을 얻기 위해 땀 흘려 일하는 사람들은 달콤한 여가를 고대하지만, 원하는 것을 얻으면 간절함은 사라진다.”(p.53)
“따라서 사람들은 인류의 역사가 창조된 이래로 처음으로 실질적이고 영구적인 문제에 봉착할 것이다. 경제적 압박에서 벗어나 얻은 자유를 어떻게 누릴 것이고, 과학과 복리가 안겨줄 여가를 어떻게 채울 것이며, 어떻게 하면 인생을 더 현명하고 알차게 잘 살 수 있을까?”(p.54) 이런 실질적으로 영구적인 문제를 케인스의 손자 손녀들은 과연 해결할 수 있을까? 케인스는 “우리가 경험을 조금만 쌓으면 새롭게 발견한 자연의 혜택들을 오늘날 부유층과는 상당히 다른 방식으로 활용할 수 있고 삶의 계획 또한 그들과 전혀 다르게 세울 수 있다고 확신한다.”(p.55) 우리는 충분히 해낼 수 있다!
그와 더불어 우리는 “다소 혐오스럽고 심지어 범죄나 질병과 같은 특성까지 있어서 정신과 전문의에게 맡겨야 할” 가짜 도덕에서 벗어나 ‘좋은 삶’을 찾아 나설 것이다. “우리는 이제 확실한 종교적 원칙과 전통적 미덕으로 홀가분하게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즉 탐욕은 악이고 고리대금 행위는 악행이며, 돈에 대한 애정은 혐오할 만하며 내일을 걱정하지 않는 사람이야말로 온전한 지혜와 미덕의 길을 가장 참되게 걷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다시 수단보다 목적을 더 가치있게 여기고 유용한 것보다 좋은 것을 더 선호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매시간, 그리고 하루하루를 어떻게 더 고결하고 값지게 보낼 수 있는지 가르쳐 주는 사람을 존경하게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자신의 경제적 안위를 위해 사는 것은 더 이상 합당하지 않고, 타인의 경제적 안위를 챙기는 일이 합당하게 여겨질 것이다.”(p.58~59) 우리의 본성은 좋은 삶이라는 진짜 도덕에 맞게 진화되었다!
좋은 삶을 향한 수단으로서 『일반이론』
케인스의 주장을 이처럼 상세히 나열하는 이유는 우리가 그의 또 다른 명저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일반이론)(1936)에 지나치게 몰두한 나머지 케인스가 가슴에 품었던 진정한 철학과 비전에 대해서는 대부분 정작 모르기 때문이다. 도대체 그는 『일반이론』을 집필하면서 어떤 세상을 예상하며 기대하고 있었을까? 이 책이 다루고 있는 그의 에세이 ‘우리 손자 손녀들이 누릴 경제적 가능성’(1930)을 읽지 않고서는 『일반이론』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고, 그동안 그의 제자들이 쌓아 온 업적의 가치도 적극적으로 평가해 낼 수도 없을 것이다. 나는 케인스의 1930년 이 에세이를 그가 세운 ‘목적’으로, 1936년의 저서를 이 목적에 대한 ‘수단’으로 이해한다.
케인스의 이러한 주장에 대해 16명의 세계적 석학이 『다시, 케인스』(존 메이너드 케인스, 조지프 스티글리츠 등 공저, 김성아 옮김, 2024, 포레스트 북스)에서 제각기 자신의 견해들을 제안했다. 케인스가 예측한 성장수준에 대해선 대체로 모두가 동의하는 편이다. 그러나 그가 품은 윤리론과 본성론, 또 그로부터 예측되는 삶의 방식에 대해서는 생각이 갈린다. 윤리론, 본성론, 삶의 방식을 기준 삼아 대략 세 집단으로 분류할 수 있다. 모든 이가 케인스의 오류를 지적한다. 석학들이 볼 때 지적할 만한 오류가 있다는 것은 오히려 다행이다. 오류 가능성에 직면한 이론이야말로 진정한 과학이기 때문이다. 이제 하나씩 살펴보자.
케인스의 윤리론을 지지하는 첫 번째 집단
첫 번째 집단은 케인스의 오류를 지적하면서 그의 본성론과 윤리론을 발전시키고자 하는 집단이다. 피브리지오 질리보티 취리히대 교수(2장), 조지프 스티글리츠 노벨경제학상 수상자(3장), 악셀 레이욘후부드 UCLA 교수(7장), 레오나르도 베체티 로마 토르 베르가타대 교수(14장), 윌리엄 보몰 뉴욕대 교수(15장) 등 5명은 경제성장과 소득은 케인스가 전망한 수준에 많이 근접했으므로, 이제는 성장보다 분배에 초점을 두면서 그가 예상하고 염원했던 세상에 가까워지도록 노력하자고 한다. 불평등, 과시 소비, 일 중독, 기후위기로 드러나는 작금의 상황은 케인스의 좋은 삶을 가로막고 있다.
먼저 2장 ‘우리 손자 손녀들이 누릴 경제적 가능성: 75년 후 글로벌 관점에서 따져보기’에서 질리보티 교수는 케인스의 좋은 삶에 동의하면서도, 그것이 실현되지 못하는 현실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그럼 케인스가 예측한 변화의 증거는 확인될 수 있을까? 나는 그럴 가능성은 낮다고 생각한다. 점점 더 심화되는 비만 문제는 우리 식습관의 양적 (질적) 특징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또 다른 요인은 의료 서비스, 녹지, 노인 돌봄같이 일상생활의 질에 영향을 미치는 공공재공급의 축소에 대한 압력이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 사적 부가 위협받는 상황, 그리고 공적 빈곤까지 더해진 사회에서 이렇게 공공재 투자를 줄이면 결국 사적 소비만 더 늘어난다.”(p.80)
좋은 삶은커녕 나빠지고 있는 세상을 구원하는 방법은 없는가? “성장의 문화적 함의에 관한 케인스의 예측은 더 문제가 있고, 물질적 욕구가 충분히 만족되고 있음을 확실히 보여주는 징후도 아직 보이지 않는다. 나는 경제성장이 모든 개발도상국으로 퍼지길 바란다. 하지만 성장이 좋은 소식만 물고 오지는 않는다. 환경의 지속가능성이 풀리지 않는 숙제로 남아 있듯이 말이다. 이 문제에 있어서 나는 많은 경제학자가 말하는 낙관론에 동의할 수 없다. 세계적인 차원에서 ‘공유지의 비극’을 막을 수 있는 효과적인 자정 장치나 제도적 장치가 아직 없기 때문이다. 나는 기술발전이 천연자원을 절약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바란다. 하지만 이런 기대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실현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보다는 오염물질 배출을 규제하고 천연자원의 사용이나 남용에 더 높은 비용을 부가하는 강력한 정치적 의지에 달려 있을 것이다.”(p.82) 교육과 공공정책을 통해 그 이상을 구현할 것을 권유하는 것이다.
조지프 스티글리츠 컬럼비아대 교수는 3장 ‘소비주의의 일반이론을 향해’에서 케인스의 예측과 달리 잘못된 노동주의와 소비주의에 빠진 미국을 설명하기 위해 ‘경제학 모델’이 재구성되어야 하며, 이를 시정하기 위해 불평등을 해소하고 문화정책을 수립하기를 조언한다. “문화가 주는 기쁨처럼 마음을 충만하게 하는 즐거움은 쉽게 얻을 수 없다. 훈련이 필요하다. 이는 비록 육체적인 훈련은 아닐지라도 음식을 만들고 거주지를 제공하기 위해 필요한 노력과 다를 바 없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이런 필수적인 교육을 제대로 제공하지 못했고, 그 때문에 너무나 많은 사람이 로마시대 서커스의 현대 버전인 TV 프로그램과 스포츠 경기를 보며 즐거움을 찾는다.”(p. 115) 케인스의 윤리론은 정부의 개입에 의해 지금 바로 구현되어야 하는 것이다.
“비만이 팬데믹 수준으로 만연하고, 가족에게 기본적인 생활 여건을 마련해 주기 위해 너무 일만 하다 보니 정작 가족과 함께할 시간이 없어지는 것은 문제 있는 행동이다. (…) 사람들이 마땅히 누려야 할 여가는 덜 즐기고 소비는 필요 이상으로 많이 하는데도 경제학자들이 명확한 판단을 내리길 꺼린다면, 이는 뭔가 잘못됐으며 설명이 필요한 부분이다.”(p.91)
악셀 레이욘후부드 UCLA 교수는 7장 ‘버터 위에 빵을 얇게 펴 바르기’에서 케인스의 좋은 삶을 우호적으로 평가하면서 높은 생활비, 과시 소비, 바쁜 일상 등 현재 미국적 방식의 삶을 우회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그러면서 케인스가 우리에게 “생각할 거리”(p.228)를 많이 제공했다고 평가한다. 동시에 주류경제학자들에게 ‘겸손’을 요구한다. 개인적 생각으론 좀 더 강하게 자신의 관점을 표명해 주면 좋겠다.
레오나르도 베체티 로마 토르 베르가타대 교수는 14장 ‘어떻게 경제학의 종말이 사회적 책임의 경제학이 떠오르는 계기가 됐을까?’에서 ‘사회적 책임의 경제학’, 그리고 ‘윤리적 소비자’와 ‘시장 사회적 기업’에 의한 새로운 견제와 균형의 체제를 통해 사회적 포용과 의미있는 노동을 달성하고자 한다. 이런 사회적, 윤리적 경제체제는 케인스의 ‘좋은 삶’을 미래가 아니라 지금 구현하는 방법이다. 조지프 스티글리츠가 불평등 해소를 최우선 과제로 내세우면서 케인스의 좋은 삶을 점진적으로 구현해 나가는 것과 똑같다.
두 번째 집단: 의심스러운 케인스의 윤리론, 그러나 바람직하지 않은 불평등
두 번째 집단은 케인스의 후예들이 먼저 해결해야 할 과제로 분배와 불평등을 내세우지만, 그의 윤리론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윤리론만 아니면 첫 번째 집단과 같은 입장이다. 하지만, 이 문제를 해결하는 수단으로 경제성장을 더 전면에 내세운다는 점에서 첫 번째 집단과 약간 다르다. 이는 경제문제, 곧 희소성의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케인스의 입장과도 다르다. 곧, 분배문제가 중요하긴 하지만 소득수준이 아직 거기에 충분히 미치지 못했다는 생각이다. 이럴 경우, 분배와 불평등 문제는 그저 립서비스로 남용될 소지가 크다. 로버트 솔로 노벨경제학상 수상자(4장)와 벤저민 프리드먼 하버드대 교수(8장)가 이 집단에 속한다.
가령, 솔로 교수는 4장 ‘케인스가 말한 손자 손녀는 누구인가?’에서 케인스의 좋은 삶을 비꼬면서, 인간의 노동과 탐욕의 본성을 찬양한다. 나는 이처럼 케인스의 윤리론을 부정하는 이들을 케인지언 경제학자에 포함시키는 것이 좀 고민된다. 적어도 이 에세이의 핵심을 통해 밝혀지는 케인스의 미덕은 그의 윤리론이기 때문이다.
벤저민 프리드먼 하버드대 교수는 8장 ‘역사적 맥락으로 본 경제적 행복’에서 이전보다, 그리고 남보다 더 부유해지려고 하는 욕망은 인간에게 본질적이라고 본다. 곧, 인간에게 절대적 만족 수준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본성론에 따르면, 어느 시점에 이르면 인간은 물질에 대해 과유불급의 행복을 누린다는 케인스의 윤리론은 통하지 않게 된다. 이로써 경제문제도 영원히 해결되지 않는다. 무한한 욕망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소득분배와 성장이 필요한데, 그중에서도 성장은 제일 중요하다. 왜냐하면 “경제성장을 추구하는 것은 정치, 사회적으로 중요하고 긍정적인 외부효과를 일으키는 원천”(p.248)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은 케인스의 ‘좋은 삶’보다 분배가 필요하고, 더욱이 특별히 성장이 시급하다고 본다.
세 번째 집단: 케인스는 허튼소리를 한다
세 번째 집단은 철저히 반(反)케인스적이다. 에드먼드 펠프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5장), 리 오헤니언 UCLA 교수(6장), 리처드 프리먼 하버드대 교수(9장), 로버트 프랭크 코넬대 교수(10장), 장 폴 피투시 유럽대학연구소 교수(11장), 미켈레 볼드린 및 데이비드 레빈 워싱턴대 교수(12장), 게리 베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및 루이스 라요 시카고대 교수(13장) 등 무려 9명은 케인스의 본성론과 윤리론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며, 심지어 조롱한다. 동시에 케인스의 전망과 다른 현상들, 곧 ‘늘어난 노동시간’, ‘줄어든 여가’, 곧 ‘일 중독 사회’와 ‘소비지상주의적 행복’을 부각하면서 그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앞에서 본 것처럼, 첫 번째 집단도 케인스가 이런 현상들을 예상하지 못한 사실을 지적했다. 하지만 그들은 이것들을 비판적으로 조명하면서 이것들을 극복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이들에게 불평등과 광고의 융단폭격은 이 모든 ‘나쁜 삶’의 경제적, 문화적 근원이다. “미국 사회에서 점점 더 심화하는 불평등 또한 ‘소비주의’와 그에 상응하는 낮은 여가 수준의 원인이 될 수 있다. 낮은 생산성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소비를 덜 하는 사람들도 부유한 이웃과 자신의 소비 사이에 관찰되는 격차를 줄이려 고군분투하게 되기 때문이다.”(p.100)
세 번째 집단처럼 두 번째 집단도 케인스의 윤리론과 본성론 자체를 부정하지만 적어도 불평등을 옹호하진 않았다. 로버트 솔로는 불평등을 해소할 방안으로 자본 소유의 민주화를 제안하기까지 한다. “우리의 손자 손녀, 혹은 그들의 손자 손녀들이 진정으로 생존가능한 세상에서 살려면 자본의 소유가 민주화되어야 한다. 만약 자본이 주된 수입의 유일한 원천이 된다면 중요한 이들 모두가, 즉 모두가 자본 소득에 대한 적절한 청구권을 가져야 한다.”(p.172)
그러나 세 번째 집단에겐 두 번째 집단의 ‘소박한’ 진보성마저 조롱의 대상이 된다. 이들의 경제학적 관점을 정치적으로 해석하면 보수를 넘어 실로 극우적이다. 이른바 신자유주의의 전사들인 셈이다. 이 집단의 첫 번째 주자인 에드먼드 펠프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5장)는 ‘협동조합주의와 케인스: 그의 성장철학’에서 케인스의 협동조합주의, 연대주의, 반(反)물질주의를 집중적으로 비난한다. 그의 윤리론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협동조합주의 문화의 하나인 연대주의는 그런 개인의 발전 과정을 저해한다. 반물질주의가 부의 가치를 평가 절하하고 소유한 재산을 증대하려는 개인의 가시적 노력에 눈살을 찌푸린다면, 연대주의는 공동체를 벗어나려는 개인의 시도를 용납하지 않는다. 연대주의 사회에서 눈에 띄려 하거나 공동체를 벗어나려고 애쓰는 사람은 미움을 받는다. 안타깝게도 케인스는 직업 경력에서 개인의 열정과 발전을 북돋는 혁신의 역할에 대해서는 전혀 일깨워주지 못했다.”(p.188)
그러면서 펠프스는 노동주의, 곧 일 중독과 혁신주의를 찬양한다. 하지만 그는 무익할 뿐 아니라 해롭기조차 한 ‘불쉿 노동’, 곧 가짜 노동의 현실을 외면한다. 데이비드 그레이버는 그의 저서 『불쉿잡』(2022, 민음사)에서 이런 가짜 노동이 무려 40%에 이른다고 추산한다. 더욱이 금융과 부동산업종에서 ‘돈 놓고 돈 먹는’ 투기에만 전념하는 비도덕적 직종의 일 중독 전문가를 혁신주의와 실용주의에 기대어 찬양한다. 하지만 그가 인용한 존 듀이의 프래그머티즘 철학(실용주의)은 그러한 낭비와 부도덕을 찬양한 적이 없다.
리 오헤니언 UCLA 교수(6장)도 ‘케인스와 함께 백 투 더 퓨처’에서 미국 사회의 일 중독을 옹호한다. 케인스는 “미래에는 부유함이 비생산적인 여가생활과 불행을 낳을 수 있다는 두려움 속에 경제학자의 권위를 빌려 청교도적 미래상을 제시한다. 오늘날 우리는 그의 전망처럼 경제적 부유함 속에 살고 있지만, 미국 같은 선진국 국민은 그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오래 일한다. 게다가 유럽 사람들의 노동시간이 지난 40년에 걸쳐 짧아진 이유는 부의 증대 때문이 아니라 세금 인상과 노동시간에 대한 다양한 제약 및 급여 프로그램 때문이다. (…) 나도 우리 사회가 충분히 부유해져서 개인이 원하면 여가를 더 쓸 수 있는 사회가 되기를 원한다. 하지만 여가의 선택이 노동과 저축의 유인을 억누르는 정부 정책에 의해 결정되지는 않았으면 한다.”(p.209)
이와 함께 그는 케인지언 복지정책에 맹공을 퍼붓는다. “선진국들이 궁극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1920년대와 1930년대에 추진되었던 최악의 정부 정책들이 개정되거나 폐지되었기 때문이다. (…) 만약 이런 정책들이 계속됐다면 오늘날 영국과 미국은 케인스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가난했을 것이다.”(p.293) 하지만 펠프스는 단순한 노동 대신 기술혁신이 성장을 촉진하였으며, 케인지언 국가개입정책과 서구 사회의 복지국가가 자본주의 경제를 침체에서 구했다는 사실에 애써 침묵하고 있다.
“끝없는 소비, 무의미한 노동, 쌓여가는 가계 빚, 훌륭한 비물질적 가치에 대한 혐오, 돈의 노예로 전락한 인간, 더욱이 심각하게 파괴되는 환경을 목도할 때, 인간의 삶이 어떠해야 좋은 삶이 될 것인지에 대한 케인스의 생각은 충분히 되새겨 보아야 할 내용이다.”
리처드 프리먼 하버드대 교수(9장)의 에세이 ‘우리는 왜 케인스가 예견한 것보다 더 많이 일할까?’는 진보경제학자인 내게 무척 유감스런 글이다. 그는 내가 집필한 『진보집권경제학』(2020, 생각의 길)에서 즐겨 인용한 노동경제학자다. 하지만 그는 미국식 경제체제, 불평등, 세계화, 기술발전이 야기한 과잉노동을 지적하면서도, 그것들을 본성론으로 정당화하며 오히려 찬양하고 있다.
“어쩌면 우리는 케인스가 바랐던 것처럼 탐욕과 경제적 실익, 무의미한 경쟁을 거부하고 더 여유로운 세상을 위해 정진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이런 규범경제학의 관점은 그것이 케인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과 비슷한 이유로 오늘날 여러 사회학자와 분석가의 관심을 받고 있다. 흥을 깰 수도 있겠지만, 나는 노동과 여가에 대한 규범적 시각에 반대한다. 목적 지향적 행동을 탄식하기보다는 오늘날의 소비와 행복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우리를 앞으로 더 정진할 수 있도록 해 주는 내적 조장 메카니즘을 칭송하는 편이다. .... 짐작하건데, 진화는 에덴동산의 존속이 아닌 인간의 생존을 위해 우리에게 직업윤리를 주입했을 것이다. 나는 이런 점에 대해서는 이의가 없다.”(p.264~265).
그의 노동주의와 쾌락주의적 윤리관에는 ‘좋은 삶’에 대한 성찰이 전혀 없고, 이런 논의를 조롱할 뿐이다.
하지만 ‘호모 라보란스’라는 그의 일방적 본성론은 석기시대에 관한 인류학적 실증연구결과와 어긋난다. 마셜 살린스의 『석기시대 경제학』(2023, 한울)에 따르면, 우리 종 진화사의 90%를 차지하는 석기시대의 인간은 호모 라보란스의 삶을 살지 않았다. 오히려 네덜란드 문화인류학자가 호명한 호모 루덴스, 곧 놀이하는 존재에 더 가까웠다. 가령, 호주 안헴랜드 원시 부족을 연구한 결과에 따르면 “원주민들은 열심히 일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식량의 획득과 준비를 위해 사용하는 1인당 1일 평균 노동시간이 4~5시간에 지나지 않았으며, 게다가 매일 지속적으로 그렇게 일하지도 않았다. 남는 시간은 대부분 수다를 떨거나 먹고 자며, 이웃을 방문하는 데 소비하고 있었다. 보츠와나지역의 부시맨도 이런 호모 루덴스의 생활 태도를 취했다. 이들의 1일 평균 노동시간은 2시간 9분이었다. 인간은 노동에만 최적화된 채로 진화하지 않았다!
로버트 프랭크 코넬대 교수(10장) 역시 리처드 프리먼 교수의 견해를 어느 정도 공유하고 있다. 다만 프리먼이 ‘노동하는 존재’로부터 노동과 소비를 옹호하는 것과 달리 프랭크는 그의 에세이 ‘케인스의 생각보다 상황이 더 중요한 이유’에서 ‘상황’과 ‘새로움에 대한 무한한 욕망’을 근거로 이것들을 옹호한다. “품질에 대한 요구는 보편적이며 사그라들지 않는다. 따라서 언젠가는 주당 2시간만 일해도 사람들 대부분이 원하는 모든 것을 살 수 있게 된다는 케인스 같은 사람들의 상상에는 심각한 오류가 있다.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p.275) 프랭크에 의하면 새로운 품질 자체에 대한 선호는 끝이 없을 것이며, 이런 소비에 대응하기 위해 끝없이 일할 것이다!
우리의 선호가 상황에 좌우되며, 새로운 품질에 대한 욕망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는 품질에 대한 욕망 역시 불평등, 광고, 과시와 모욕이라는 ‘또 다른 상황’의 산물일 뿐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외면한다. 새로운 품질에 대한 욕구가 불변의 본질이라고 단정할 순 없다. 새로운 품질에 대한 욕망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채 1세기도 안 된다. 더욱이 끝없이 등장하는 새로움이 끝없는 고역과 가계부채를 강화하고, 더욱이 우리의 생존기반인 생태계를 파괴하는 현실을 직시할 때, 그런 욕망이 얼마나 바람직할지는 의문이다. 케인스는 강조했던 “겸손”(p.60)의 미덕은 바로 이런 경제학자들을 향하고 있다.
장 폴 피투시 유럽대학 연구소 교수(11장)는 자칭 진보주의자다. ‘(경제적) 역사의 종말’에는 리처드 프리먼 교수처럼 민중주의자로서 소위 ‘브라만좌파’와 ‘강남좌파’ 등 엘리트 진보주의를 혐오하는 모습이 눈에 띈다. 그러다 보니 진보경제학자로서 그는 리처드 프리먼만큼 케인스의 본성론과 윤리론에 적대적이다. “(…) 세상에는 많은 도덕원칙이 있고, 케인스가 선호하는 것으로 보이는 원칙들이 실제로 그렇게 우월하지 않다. 케인스가 에세이에서 목적의식이 강한 사람들, 유대인, 부자 계층의 아내를 포함해 너무나 많은 유형의 사람들을 경멸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이런 식의 오만함은 거의 동정심에 가깝다.”(p.299) 더욱이 “자본주의가 가진 도덕적 힘은 세대 사이에 이타주의를 이끄는 결과주의에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에드먼드 펠프스가 노벨상 강연에서 역설했듯이 기업가적 자본주의를 통해 좋은 경제가 좋은 삶을 가져올 수도 있을 것이다.”(p.298)
리처드 프리먼과 장 폴 피투시 두 진보경제학자의 ‘노동자주의’와 ‘민중주의적 진보론’이 최종적으로 자본주의적 윤리와 그 체제를 옹호하는 것은 매우 아이러니하다. 더욱이 그가 극찬한 자본주의의 “세대 사이의 이타주의”가 낳은 결과가 다음 세대의 삶을 파괴하는 기후위기라는 사실을 알긴 할까? 또, 확대되는 불평등, 뻔뻔함을 더해가는 불공정과 가늘어지고 있는 연대감 앞에서 자칭 진보경제학자가 어떻게 이따위 ‘자본주의 사모가’를 부를 수 있을까? 진실로 극과 극은 통하는 듯하다.
노동주의, 곧 일 중독에 관해 한 가지만 언급하고 넘어가자. 폴 라파르그는 『게으를 권리』(2009, 필맥)에서 노동에 대한 신화를 다음과 같이 폭로한다. “자본주의 문명이 지배하고 있는 국가의 노동자들은 기묘한 환각에 사로잡혀 있다. 그것은 여러 세기에 걸쳐 불쌍한 인류를 괴롭혀온 개인적, 사회적 재앙을 줄줄이 몰고 다니는 환각이다. 그것은 일에 대한 애착 또는 노동에 대한 처절한 열정인데 각 개인과 그 후손의 생명력을 고갈시킬 정도에 이르렀다. 그러나 성직자와 경제학자와 도덕가들은 이러한 정신적 이상 상태에 반대하기는커녕 노동에 거룩한 후광을 씌웠다.”(p.9)
놀기만 하면 좋은 삶에 이를 수 있을지는 나도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일 중독에 빠져, 여가 없이 사는 삶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은 진실이다. 일에 대한 몰두로 번민을 잠재울 수 있을지 몰라도, 그 속에서 우리의 복된 삶도 잊힌다. 일에 치여 정신없이 그저 바쁘기만 한 삶이 과연 좋은 삶일까? 3명의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를 포함해 두 번째와 세 번째 집단에 속한 11명의 저명한 경제학자들을 제외한 어떤 누구도 이 ‘정신 나간’ 상태를 칭찬하지 않을 것이다.
경계해야 할 경제학의 제국주의
미켈레 볼드린 및 데이비드 레빈 워싱턴대 교수(12장)는 그들의 에세이 ‘흥미로운 질문들과 잘못된 이유들’에서 여러 가지 쟁점을 다루고 있다. 이 속에서 그들은 노동시간 단축을 통해 여가를 즐기는 유럽식 경제체제를 ‘유럽경화증’이라고 힐난한다. “현대의 도덕적 가치로 보면 케인스의 발언은 분명히 아주 계급주의적이고, 성차별적이며, 유럽 중심의 주장으로 보인다.” 그러면서 그들은 케인스가 “영국 상류층에 대한 편견들만 가지고 형편없이 선별해 만든 생각에 기초하여” “인류의 약 7분의 6에 해당하는” “천재적 재능이 없는 대중 사람들의 경제 상태”를 무시했으며, 이런 편견에 기초하여 “인간의 장기적인 발전 이론을 확립하려 했다”(p.329~330)고 비판한다. 그러면서 미국식 일 중독과 소비주의적 행복을 또 찬양한다.
하지만 비록 케인스가 편견에 치우쳐 있더라도 세계의 7분의 6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현재의 삶을 옹호하고 두둔하는 편견은 실로 또 다른 해로운 편견이다. 전문 직업인의 일 중독, 가짜 노동에 대한 열정, 대다수 노동자의 희망 없는 고역, 멈추지 못하는 낭비적 소비, 영원히 청산될 수 없는 가계부채, 파괴되는 환경이 왜 옹호되어야 할 삶인가? 내가 보기에 지금은 오히려 케인스의 편견이 필요한 때이며, 그 고결한 편견 없이는 인류세를 넘어 지속가능한 발전을 이루어낼 수 없을지도 모른다.
게리 베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및 루이스 라요 시카고대 교수(13장)의 에세이 ‘케인스가 장기적으로 소비는 과소평가하고 여가는 과대평가한 이유’ 역시 끝없는 소비와 지칠 줄 모르는 노동을 찬양하며, 물질적 쾌락에 대한 탐닉을 옹호하는 세 번째 집단의 논지를 벗어나지 않는다. 이들 역시 케인스의 본성론과 윤리론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하지만 앞 논자들의 주장을 체계적으로 옹호하며, 케인스의 윤리론을 부정하기 위해 이들은 주류경제학의 연구방법론, 그중에서 ‘일원론적 인과율’을 도입한다. 곧, 경제학은 경제적 요인에만 집중하는 ‘경제주의적 접근방법’으로 연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경제주의적 환원론은 경제학에서 ‘비경제적이며 비물질적인’ 요인을 배제하기 위해 적합하다. “케인스는 ‘경제적’ 문제가 결국에는 대부분 사라질 테고 남자든 여자든 먹고살기 위해 일할 필요가 거의 없을 것이기 때문에 경제학자들의 중요성도 크게 낮아질 것이라는 결론을 도출했다. 당연히 현실은 정반대였다.
일례로 요즘 거물 정치인 중 경제 자문단을 두지 않은 사람은 없고, 뉴스 매체들도 경제학자들의 의견을 끊임없이 요청한다. 케인스가 이를 오판했던 이유 중 하나는 경제학자들의 분석 영역이 단지 삶의 물질적 측면뿐 아니라 행복, 이타주의, 사회적 상호작용, 결혼과 이혼 같은 삶의 비물질적 측면과 관련된 다양한 영역으로 확대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발전 양상은 케인스가 ‘경제학’을 너무 좁게 규정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p.347) 주류경제학의 윤리론을 정착시키기 위해 ‘경제학의 제국주의화’를 도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케인스는 바로 이런 경제학의 제국주의화를 경계했다. 특히 주류경제학의 배금주의, 물질주의, 노동주의, 소비주의, 공리주의로 채워진 경제주의적 세계관이 우리 삶을 공격할 때 ‘좋은 삶’은 멀어져만 갈 것이라고 본 것이다. 케인스가 볼 때, 비경제적이고 비물질적인 삶에 대한 침략을 적극 감행하는 이들은 삶의 파괴자들이다. 이들이 노벨상을 받는 사회는 정상적이지 않다.
그런 점에서 그의 윤리론을 조롱하면서 낭비와 일 중독을 찬양하는 세 번째 집단의 주장은 분별력을 잃었을 뿐 아니라 무모하며 무책임하기까지 하다.
몇몇 논자들이 지적한 것처럼 케인스가 불평등과 분배의 문제를 소홀히 다룬 부분은 진보적 관점에서 볼 때 그의 한계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시 낭비적 소비와 휴식 없는 일 중독, 그리하여 ‘경제성장’에 기대는 두 번째 집단 역시 문제가 있기는 마찬가지다.
두 번째와 세 번째 집단의 경제학자 중 다수가 소스타인 베블런의 제도경제학과 윌리엄 제임스와 존 듀이의 프래그머티즘 철학(실용주의)을 이용해 자신들의 주장을 옹호한다. 가령 베블런이 주목한 인간의 ‘장인정신’(제작본능)과 프래그머티즘 철학을 근거로 삼아 일 중독을 옹호하거나 ‘과시적 소비’를 거론하면서 소비지상주의를 옹호하는 식이다.하지만 제도경제학과 프래그머티즘에서 장인정신과 실용주의는 ‘공동체의 공동선’에 이바지하기 위해 활용되어야 하고, 베블런 경제학에서 과시적 소비는 장려될 행동이 아니라 비판받아 제거되어야 행동이다. 아전인수격 해석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케인스는 충분한 물적 토대가 마련될 경우, 그가 바라는 좋은 삶에 이를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고, 어찌 보면 현재의 세계 경제 규모는 케인스가 예측한 경제 규모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조지프 스티글리츠 교수가 추산한 것처럼 “48조 달러가 넘는 글로벌 GDP(2006년)를 전 세계 약 65억 명의 인구에게 균등하게 나눠준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면 각 개인에게 약 7,000달러씩 할당할 수 있어 지구촌 주민 모두가 가난에서 벗어나게 해 준다.(이는 미국의 4인 가족 기준 빈곤선보다 더 높은 기준이다).”(p.88) 경제학자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의 말대로 지금은 실로 ‘풍요의 시대’다! 따라서 케인스가 예측한 바대로 현재 ‘경제문제’는 해결되었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 우리에게는 성장이 아니라 분배가 더 시급한 과제다. 그 때문에 더 많은 노동보다 더 많은 여가가 여러모로 바람직하다. 더욱이 우리는 인류세라는 새로운 위기에 봉착해 있다. 이런 국면에서 더 많은 소비가 과연 정의로운지 재고해 봐야 한다. 이 모든 것은 우리에게 도덕적 판단을 요구하며, 경제학자들이 윤리적으로 경제를 바라볼 것을 촉구한다. 경제학자들, 특히 진보를 지향하는 비주류 경제학자들이 케인스의 이 작은 에세이를 읽어야 하는 이유다.
특히 『일반이론』에만 주목함으로써 윤리적 판단을 망각해 왔던 케인지언, 특히 포스트케인지언 경제학자들이 반드시 읽어야 할 글이다. 유효수요관리, 최저임금인상, 복지정책은 케인스의 윤리론의 지도에 따라 실행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이런 점에서 『일반이론』(1936)은 ‘우리 손자 손녀들이 누릴 경제적 가능성’(1930)이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활용할 수단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첫 번째 집단에 속하는 피브리지오 질리보티(2장), 조지프 스티글리츠(3장), 악셀 레이욘후부드(7장), 레오나르고 베체티(14장), 윌리엄 보몰(15장)은 이 여정에 서 있는 학자들로서, 이들은 내게 진정한 케인스의 제자들로 생각된다.
『굿바이, 케인스』를 진정한 『다시, 케인스』로
마지막으로 이 책에 대한 몇 가지 평가도 조심스럽게 따져볼 필요가 있다. “아마도 우리가 손자 손녀 세대에게 물려줄 21세기는 지구촌 전체가 즐거운 노동, 끝없는 혁신, 자유로운 기업가들로 채워질 것이다. 이는 케인스가 1930년에 꿈꿨던 최선의 미래는 아니지만, 대사상가로서 그는 우리 의견에 동조할 것이다.”(p.41) 15편의 에세이를 검토한 후 이 책의 ‘서문’을 작성한 Unicredit Group의 로렌조 페티와 로마 토르 베르가타 대학교 구스타보 피가 교수가 내린 결론이다.
하지만 이는 케인스의 생각을 왜곡한 주장이며, 인류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은 제안이다. 지금 상황에서 노동, 혁신, 시장의 자유가 통제되지 않으면 과시와 과로, 지배와 모욕, 불평등의 고통, 생태계의 파괴가 가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몇 가지 새로운 측면들을 예측하지 못했고, 불평등에 주목하지 못했지만, 자유주의와 자본주의가 낳을 이런 폐해를 염려했던 케인스의 관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자살률 OECD 1위, 최장 시간 노동, 산재 사망률 1위, 3분의 1을 훨씬 넘는 비정규직, 살인적 입시경쟁, 최저 합계출생률, 황금만능주의, 각자도생의 한국 사회에서 케인스의 이 작은 에세이 우리 손자 손녀들이 누릴 경제적 가능성이 갖는 의미는 더욱 크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 중 대다수를 이루는 로버트 솔로(4장), 에드먼드 펠프스(5장), 리 헤오니언(6장), 벤저먼 프리드먼(8장), 리처드 프리먼(9장), 로버트 프랭크(10장), 장 폴 피투시(11장), 미켈레 볼드린과 데이비드 레빈(12장), 게리 베커와 루이스 라요(13장)가 케인스의 이 관점을 비판하며, 심지어 조롱한다. 심지어 ‘서문’을 집필한 두 경제학자 로렌조 페티와 구스타보 피가를 추가하면 그 수는 13명으로 늘어난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케인스의 통찰을 돌아보며 모두가 함께 번영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한 것인가라는 커다란 질문을 던지고 있다”는 이강국 리쓰메이칸대학교 교수의 추천사는 좀 의아하다. 제대로 검토한 후 쓴 추천사인지 궁금하다. 오히려 “이 책을 통해 케인스의 이른 사망이 현대 사회의 비극임을 또 한 번 확인할 수 있다”는 홍진채 라쿤자산운용 대표이사의 추천사가 이 책의 ‘비판적’ 독서를 위한 가이드라인으로 적절할 것 같다. 어찌 보면 『다시, 케인스』보다 『굿바이, 케인스』가 적절한 제목일 것 같다. 석학들의 얘기라고 다 맞는 건 아니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들의 말도 마찬가지다. 시민들이 깨어있어야 할 이유다. 깨어있는 시민만이 『굿바이, 케인스』를 진정한 의미의 『다시, 케인스』로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글·한성안
문화평론가. 경제학자. 영산대학교수를 역임했다. 현재 ‘좋은경제연구소장’으로 활동하면서 집필, 기고, 강연 중이다. 페이스북과 블로그를 통해 진보적 경제학을 주제로 시민들과 활발히 소통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