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정식의 시네마 크리티크]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역설과 욕망의 삼각형
이병헌 주연의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2023·감독 엄태화)의 제목은 중의적이다. 먼저 제목에 사용된 ‘콘크리트’와 ‘유토피아’는 상식을 뛰어넘는 조합이다. 삭막함, 황폐함, 딱딱함 등의 성질을 지닌 콘크리트는 부정적인 의미로 많이 사용된다. 반면 유토피아는 어디에도 없는 지상낙원이다. 인간이 상상력으로 그려낸 동서고금의 유토피아 중에서 콘크리트로 이뤄진 곳은 없다. ‘콘크리트’와 ‘유토피아’의 관계도 모호하다. 두 단어 사이에 조사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선 이 제목은 콘크리트로 된 유토피아로 해석할 수 있다. 두 단어는 한국사회에서 아파트가 차지하는 비중 혹은 아파트에 대한 환상의 다른 표현일 수 있다. 혹은 영화의 주요 공간인 황궁 아파트가 콘크리트처럼 단단하고 안전한 유토피아라는 의미로 읽을 수도 있다. 물론 이러한 의미는 표리부동한 것이다.
‘콘크리트’와 ‘유토피아’의 관계를 어떤 의미로 해석하는지와 상관없이 영화의 제목은 역설적이다. 콘크리트로 지어진 아파트는 유토피아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영화는 콘크리트로 된 유토피아 혹은 콘크리트가 성벽 역할을 하는 유토피아의 부조리와 모순을 나타낸다. 그 공간은 실질적으로는 디스토피아에 가깝다. 황궁 아파트는 대재난 속에서 유일하게 붕괴하지 않았지만, 즉 황궁 아파트 주민들은 일시적으로 천국의 삶을 누리지만, 결국은 지옥 같은 상황에 직면한다. 그 천국과 지옥의 바탕에는 인간의 욕망이 똬리를 틀고 있다. 이때 인간의 욕망은 개인적인 것과 집단적인 것, 자연적인 것과 인공적인 것이 뒤섞여 있다. 콘크리트와 유토피아의 관계가 그러한 것처럼.
대지진으로 온 세상이 폐허가 된 상황에서 유일하게 남은 황궁 아파트가 유토피아라면, 황궁 아파트 이외의 모든 장소는 유토피아가 아닌 곳이 된다. 그런데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 유토피아는 참으로 앙상한 세계이다. 황궁 아파트는 유일하게 파괴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생존이 보장되는 곳이 되고, 살아남을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유토피아처럼 인식된다. 그런데 대재난 속의 유토피아인 황궁 아파트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상황은 녹록지 않다. 그 직접적인 이유는 “아파트는 주민의 것!”이라는 대사에 담겨 있다. 이 대사는 황궁 아파트 주민과 외부인의 구분을 전제로 한다. 그리고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 발생하는 갈등과 비극은 일차적으로 주민과 외부인의 구분에서 시작된다. 이 구분은 삶과 죽음을 가르는 기준이 된다는 점에서 치명적이다.
그런데 주민과 외부인을 가르는 이러한 구분은 낯설지 않다. 대재난 이전에도 황궁 아파트를 둘러싼 ‘구분’이 있었다. 그때는 황궁 아파트의 길 건너편에 있는 드림 팰리스 주민들이 구분의 주체였다. 그들은 황궁 아파트 주민들이 자기네 아파트 단지를 지나가는 것조차 금지했다. 똑같이 콘크리트로 지어졌다고 해서 똑같은 아파트가 아닌 것이다. 황궁 아파트 주민들은 그때 받았던 설움을 추방이라는 행위로 되갚는다. 그러니까 <콘크리트 유토피아>에는 한국사회의 계층 갈등 문제가 배경에 깔려있다. 그래서 주민 대표로 뽑힌 김영탁은 “주민만이 살 수 있다”, “함께 잘살아봅시다”라고 연설한다. 여기에서 ‘함께’의 주체는 물론 황궁 아파트 주민들이다.
하지만 김영탁의 이 연설은 허구이자 허위이다. 황궁 아파트 주민 사이에서도 묘한 구분과 차별의 기류가 존재한다. 주민 대책회의에서 집주인인지 세입자인지를 두고 언쟁이 오간다. 즉 주민 한 명이 이왕이면 책임감이 있는 집주인이 임원을 맡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그러한 점에서 젊은 김민성이 혹시 세입자가 아니냐고 의심하고, 이에 김민성이 대출이 많기는 하지만 자신은 어엿한 집주인이라고 강조하고, 부녀회장이 김민성에게 집문서가 있느냐고 재확인하는 장면이다. 드림 팰리스와 황궁 아파트를 구분하고, 황궁 아파트 내에서도 집주인과 세입자를 구분하는 장면들은 익숙하다. 이러한 편 가르기 의식은 온 도시가 폐허가 된 상황에서도 바퀴벌레처럼 끈질기게 살아남아 꿈틀거린다.
한국사회에서 아파트는 단순한 거주 공간이 아니라 경제력을 포함한 사회적인 신분의 표상이다. <콘크리트 유토피아> 속 인물들의 욕망도 개인적인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사회적인 것으로 확장된다. 주인공 김영탁이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는 이유도 그가 우리 사회에 그어져 있는 완고한 ‘선’을 넘었기 때문이다. 그는 사실은 902호 집주인 김영탁에게 사기를 당한 모세범이며, 김영탁을 살해한 후 김영탁 행세를 하다가 주민 대표까지 맡게 된 인물이다. 즉 김영탁은 ‘가짜’ 이면서 ‘진짜’인 것처럼 위장하고, 김영탁의 집에 몰래 거주하고, 세입자조차 못 되는 처지에 아파트 집주인 행세를 한다. 김영탁은 그 대가로 결말에서 죽음이라는 처벌을 받는다. 이는 <기생충>에서 박 사장 저택의 지하에 몰래 숨어 살던 근세가 죽음을 맞이하고, 기택 일가족이 박 사장네를 속이고 신분 상승을 하려다가 죽음, 정신이상, 추방의 처벌을 받은 것과 유사한 맥락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보면,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결말은 다소 낭만적이다.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이러한 성격은 명화의 행적에서 두드러진다. 명화는 김영탁의 실체를 파헤침으로써 그가 처벌받는 계기를 제공한 인물이다. 명화는 김영탁과 주민들, 주민들과 외부인이 뒤엉켜 싸우는 황궁 아파트를 떠난다. 그런데 명화가 새롭게 찾아간 곳은 황궁 아파트와 같은 디스토피아가 아니다. 그곳에 머무르는 사람들은 죽은 자를 매장해주고, 낯선 사람에게 따뜻한 주먹밥을 건네준다.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 진짜 유토피아는 황궁 아파트가 아니라 명화의 새로운 터전이다. 이는 명화가 아비규환의 황궁 아파트에서 꼬마를 비롯한 ‘외부인’을 감싸주고 보살펴준 인물이라는 점과 연결된다.
그렇다면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아파트를 매개로 한국의 경제적·사회적 모순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동시에 진정한 유토피아의 희망을 남겨놓은 묵시록이라고 할 수 있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아파트 공화국’인 한국사회의 부조리와 모순, 그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인간의 욕망을 구체적이면서 다층적으로 보여준다. 예를 들어 김영탁은 주민 대표로 선출된 뒤 “선택받았다”라고 말하는데, 이는 단순히 자신이 대표가 됐다는 것만을 의미하는 대사가 아니다. 즉 황궁 아파트 주민들이 ‘선민’이라는 의미로 확장해서 해석할 수 있다. 일차적으로 황궁 아파트는 대재난 속에서도 생존 가능한 공간이고, 나아가 그 주민들은 ‘외부인’과 구분되는 존재들이라는 점에서 새로운 의미의 선택받은 사람들이자 계층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황궁 아파트에서 멀지 않은 곳에, 비록 건물은 무너져내렸지만, 사람들 사이에 따뜻한 위로와 공감이 흐르는 장소가 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 중요한 대사의 하나는 “그냥 평범한 사람들이에요.”라는 명화의 대답이다. 명화는 남편 김민성을 매장한 후 낯선 사람들의 거주지에 합류하는데, 그때 한 남자가 황궁 아파트 주민들이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소문이 사실이냐고 묻는다. 실제로 이 영화에서는 식인을 연상시키는 장면도 등장한다. 하지만 명화는 작은 목소리로 “(황궁 아파트 주민들도) 평범한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황궁 아파트에서 펼쳐진 아비규환은 특별한 사건이 아니며, 그 지옥 같은 사건들은 다른 곳에서도 재현될 수 있다. 혹은 이와 반대로 해석할 수도 있다. 즉 명화는 황궁 아파트 주민들이 사람을 잡아먹을 정도로 극악하지는 않다는 의미로 대답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훗날에 황궁 아파트 주민들과 명화는 다시 ‘함께’ 살아갈 수 있을까? 그렇게 된다면 그곳은 유토피아일까, 디스토피아일까?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인간의 욕망과 욕망이 날것으로 충돌하는 영화이다. 대재난 속에서 살아남으려는 생존 욕망은 본능적이다. 그래서 아파트를 지키려는 ‘주민’과 아파트에 들어오려는 ‘외부인’의 싸움은 그 어느 전투보다 치열하다. 이때의 욕망은 개인적이고 본능적이며, 여기에는 윤리 개념이 끼어들 틈이 없다. 하지만 아파트라는 공간은 이 충돌이 사회적인 욕망, 한국사회의 계층 갈등과 관련된다는 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주민대책회의가 평등을 강조하고, 외부인을 인민재판 방식으로 처벌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또 <콘크리트 유토피아>에는 거주 공간에 대한 인간의 자연적인 욕망, 근대화·산업화 과정에서 강화된 아파트에 대한 인위적인 욕망과 환상도 거미줄처럼 얽혀 있다. 그러면서도 결말에서는 진정한 유토피아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이러한 결말은 서사 전개의 측면에서 다소 갑작스럽게 느껴진다. 하지만 그러한 결말이 깨진 유리창 틈으로 비쳐 들어온 한 조각 햇살만큼의 희망과 위로를 전해주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다. (이 글은 인터넷신문 '로컬데일리'에도 실려 있습니다.)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글·임정식
영화평론가. 영화를 신화의 관점에서 분석하는 작업에 관심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