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주의 문화톡톡] 하느님처럼 되리라

절연, 역사의 시작

2024-06-11     김창주(문화평론가)

세상의 중심 에덴동산에 뱀이 등장한다. 고대 이집트와 그리스의 스스로 꼬리를 먹는 우로보로스처럼 창세기의 뱀은 영원한 생명의 화신은 아니다. 창세기에서 뱀은 짐승 중에서 가장 영악한(עָרוּם') 피조물이다. 그는 두 사람 중 여자에게 속삭인다. 사실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명령은 아직 여자가 창조되기 전 남자에게 한 말이다(창세기 2:17,22). 여자는 이미 동산에 관한 정보를 남자에게 들었을 것이다. 뱀이 여자에게 접근한 것은 심리적이며 전략적이다. 유혹자는 걸려 넘어질 구실을 잘 알고 있다. 여자에게 묻는다.

 

진짜(אַף) 하느님이 에덴동산의 모든 과일을 먹지 말라고 하셨어?(창세기 3:1)

 

뱀은 영악하게 애초 내용을 살짝 비튼다. 그러자 여자는 뱀의 정확하지 않은 정보를 바로잡는다.

 

동산에 있는 모든 과일은 먹을 수 있어.
근데 가운데 있는 거는 먹지 말고 만지지도 말라셔. 먹으면 죽을 거래(2-3).

 

뱀의 작전은 일단 성공이다. 처음 본 대상과 한두 마디 말을 건넸으니까. 자신감을 얻은 뱀은 결정적인 한마디를 던진다.

 

에이 절대 안 죽어(לֹא־מוֹת תְּמֻתוּן)!
먹으면 너네 눈이 밝아지고 또 하느님처럼 되면 선악을 알게 되니까 먹지 못하게 하신 거야(4-5).

 

뱀의 설득을 듣고 보니 과연 그 나무는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탐냄직하였다.’ 여자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선악과를 따서 먹고 남자에게도 주었다. 선악과를 따먹은 후 두 사람의 변화는 놀랍다. 우선 뱀의 말처럼 그들은 죽지 않았다. 안심하고 서로를 바라보자니 알몸(עֵירֻמִּם)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의 눈이 밝아진 것이다. 부랴부랴 무화과 잎사귀로 가렸다. 두 사람이 선악과를 먹고도 죽지 않은 데 대한 안도감보다는 벗은 몸이 부끄러운 것이다.

16세기 화가 알브레흐트 뒤러의 작품은 이 광경을 포착한 것이다.1) 구리에 그림을 새겨(engraving) 부식시킨 후 흑백으로 찍은 판화다. 동산의 두 나무 사이에 최초의 남자와 여자가 서 있다. 뱀이 휘감고 있는 나무는 선악과이고 남자가 오른손으로 붙잡고 있는 나무는 생명나무다. 여자의 오른손은 뱀과 함께 열매를 쥐고 남자에게 주려 하고, 왼손으로는 꺾인 가지에 붙어있는 또 다른 열매를 들고 있다. 여자가 열매를 먹고 함께 있던 남자에게 주었으니 여자의 왼손에 숨기듯 들려 있는 과일은 생명나무 열매일 것이다. 이제 두 사람의 치부를 눈여겨봐야 한다. 여자를 가린 잎사귀는 줄기에서 끊어지고 살짝 시들었지만, 남자를 덮은 잎사귀의 가지는 줄기에 붙어있다.

 

하필 이때 하느님의 소리(קוֹל)가 들려온다. 두 사람은 두려워하며 허겁지겁 동산 나무 사이에 숨어들었다.

 

어디 있지(אַיֶּכָּה)?

 

하느님은 아담을 찾는다. 이인칭 남성 단수다. 그렇다고 여자가 배제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한 낱말로 된 질문 앞에 두 사람은 얼어붙듯 압도된다. 언제까지 떨면서 숨어있을 수 없다. 그가 작은 목소리로 답한다.

 

하느님의 소리를 들으니 벌거벗은 게 두렵고 무서워 숨었어요.

 

숨은 상태에서 자신의 위치를 노출하는 꼴이다. 나뭇잎으로 가리고 몸을 숨겼지만, 여전히 알몸이며 여전히 하느님의 소리 앞에서 두려운 마음이다. 선악과를 먹고 눈이 밝아졌을 때 보인 행동과 다르다. 그들은 부끄럽다고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치마를 만들어 입었다.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서는 벗은 몸이 두렵다며 숨은 것이다. 이른바 양심의 가책이랄까! 이로써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균열이 시작되었다. 정직하지 않는 아담에게 하느님의 질문이 이어진다.

 

누가 벌거숭이라고 말했지?
내가 먹지 말라던 그 열매를 먹은 거야?

 

아담의 대답은 또 한 번 정곡을 피해 간다.

 

하느님이 제게 만들어주신 여자가 그 열매를 주어서 제가 먹었어요.

 

하느님도 선악과를 따먹은 일에 어느 정도 책임이 있다며 은근슬쩍 발뺌하려는 태도다. 결국 그가 먹었다고 자인한 셈이지만 책임소재가 100% 본인에게 있다고 인정할 수 없다는 항변으로 들린다. 하느님은 더 이상 캐묻지 않고 이번에는 여자에게 질문한다.

 

무슨 생각으로 이런 거야?

 

그녀는 마치 예상하였다는 듯 미리 준비된 변명이 들린다.

 

저 뱀의 꾐에 넘어가 먹고 말았어요.

 

하느님이 정작 듣고 싶은 답이 아니라는 것은 남자와 여자는 물론 독자도 안다. 마지막은 뱀이다. 선악과 문제를 촉발시킨 장본인이니 하느님의 심문이 뱀에게 집중될 것이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그의 책임은 크지 않다는 듯 지나친다. 그러고 보니 사건의 진행과 심문의 순서가 다르다. 선악과를 먹을 때 주도성은 뱀, 여자, 남자 순서지만, 심문은 거꾸로 올라간다. 남자가 맨 처음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기 때문이다. 한편 마지막 선고는 처음과 같이 뱀, 여자, 남자 순서로 진행된다.

에덴동산 이야기에서 기독교인을 비롯한 대부분 독자는 선악과를 따먹은 불순종이나 타락을 떠올리지만, 실은 더 근원적인 문제를 주목해야 한다. 다시 말하자면 선악과라는 세상의 축(Axis mundi)을 중심으로 창조 세상의 균열과 절연, 분리 및 분화가 거듭 일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동사 먹다’(אָכַל)라는 상징적인 행위에서 비롯된 파급효과는 에덴동산 전체에 미친다. 아래에서 살필 네 항목에 언급되는 분리, 절연, 균열, 분화등은 히브리어 마브딜(מַבְדִּיל)의 번역어로 문맥에 따라 달리 옮겼을 뿐 의미상 차이는 없다(창세기 1:6). 선악과에 의해서 촉발된 절연, 곧 시원적이며 근친적인 유대가 단절되자 에덴동산이 한바탕 소용돌이에 휩싸인다.2)

 

나무와 열매

이것은 손쉽게 관찰되는 자연현상이다. 지금까지 선악과와 그 열매의 분리를 눈여겨보지 못한 측면이 있다. 예컨대 나무에 열매가 맺혀 숙성되면 다른 생명체가 먹이로 삼는다. 이 과정에 일부는 다른 생물이 먹고, 나머지는 땅에 떨어져 새 생명을 싹틔운다. 이처럼 나무와 열매의 분리는 필연적이다. 뱀은 여자에게 접근하여 선악과를 먹도록 종용하고, 남자에게 먹게 하였다. 나무와 열매의 태생적 유대를 단절하지 않고, 따지 않고먹는 행위는 불가능하다. 선악과는 줄기로부터 분리된후 여자와 남자의 먹이 대상이 되었다. 가장 손쉬운 분리, 곧 절연에 해당한다.

 

사람과 자연

선악과를 먹은 후 여성과 뱀의 관계는 파탄 난다. 하느님의 심문이 시작되자 남자는 여자를, 여자는 뱀을 탓하며 자신의 책임을 회피한다. 에덴동산의 연대에 균열이 생기고 불신과 책임 전가의 시작이다. ‘영악한뱀에게는 하느님께 변명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뱀은 짐승이나 생물보다 더 가혹한 저주를 받고 배로 가며 흙을 먹어야 한다. 더 나아가 여자와 원수(אֵיבָה)가 되고, 그 후손과도 갈라져 머리를 때리고 발꿈치를 상하게 하는 대적자가 되었다. 극단적인 균열이자 분리다. 한편 가시덤불과 엉겅퀴는 사람과 땅 사이의 불청객처럼 끼어든다. 선악과가 열매로 사람과 동물을 부른다면 가시덤불과 엉겅퀴는 사람과 동물의 접근을 방해한다. 이제는 사람이 노동과 수고를 통해서 음식을 먹을 수 있다. 이렇듯 태초에 조성된 사람과 자연의 대동(大同) 세상에 단절과 분리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인간관계나 가족의 절연과 상실은 더 아프게 느낀다.

 

사람과 사람

선악과를 먹은 후 남자와 여자는 가장 먼저 옷을 만들어 입었다. 눈이 밝아져 알몸이 부끄러워졌기 때문이다. 선악과를 따 먹기 전에는 서로에 대하여 수치심을 느끼지 않았다. 부끄러움을 모면하기 위한 가릴 것이 필요하였다. 벗을 채로 있어도 아무렇지 않던 둘 사이에 미묘한 거리감, 곧 균열이 생긴 것이다. 하느님의 추궁으로 남자가 여자를 변호하기는커녕 탓하며 책임을 전가하자 둘 사이는 더욱 멀어진다. 작은 구멍이 큰 둑을 무너뜨릴 만큼 커진다.

여자는 임신의 고통과 해산의 수고를 감내해야 하고 남자의 다스림을 받는다. 균열과 분리의 극단이다. 당시 가부장적 시대상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지만 본래 관계를 회복하기 어려운 단계에 진입한 것이다. 남자는 죽을 때까지 땀을 흘려야 땅의 열매를 먹을 수 있고 종국에는 그가 난 자리 흙의 품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 역시 자신이 태어난 과 협력적 관계가 아니라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서걱거리게 하는 절연과 분화의 관계를 지속적으로 겪게 된다.

사람을 단절하기란 매우 어렵다. 함께 사업하던 동료를 손절할 수 있다지만, 오랫동안 사귄 절친을 끊어내기란 상상조차 힘들다. 더구나 가족, 부모, 형제, 특히 자녀라면 이루 말할 수 없는 절연의 아픔과 상실의 후유증이 괴롭게 할 것이다. 태생적으로 주어진 혈연적 연대를 끊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사람과 하느님

너희가 결코 죽지 않으리라고 말한 뱀은 옳았다. 그의 주장처럼 선악과를 먹고도 사람은 죽지 않았다. 그러나 남자와 여자는 하느님을 두려워하여 나무 사이에 숨어야 한다. 하느님과 사이에 벽이 생긴 것이다. 또 다른 차원의 절연이자 분화다. 하느님과 사람의 분리는 선악과를 먹은 후 진행되기 시작하였다. 부모와 자녀라는 가장 강력한 연대에도 예외 없다. 분리와 균열은 성장, 발전 과정의 원초적인 단계이며 필연적 현상이다. 아메바는 자신의 몸을 분절시키지 않고 새로운 생명을 품지 못한다. 삶의 과정에 절연은 자연스럽다. 사람은 언젠가 부모를 떠나서’(עָזַב) 다른 짝을 만나고 가정을 이루는 것도 같은 이치다(창세기 2:24).3)

너희가 하느님처럼 되리라고 말한 것은 근친적 유대를 끊고 독립적인 존재가 되어 새로운 생명을 일군다는 뜻이다. 태생적, 즉 부모나 자연에 고착된 관계를 끊는다는 것은 죽음에 견줄 수 있는 분리이자 통과제의다. 이 과정에 새로운 관계와 확장이 벌어지며 진보가 일어난다. 최초의 남자와 여자가 따먹은 선악과는 과거, 자연, 태생적 연결고리를 단절하는 행위이며 절연이다. 성장 과정에서 아이가 어머니의 절대적 영향력을 점차 줄여가야 어느 순간 성인으로 장성할 수 있다.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의 행위를 하느님에 대한 불순종이라며 타락혹은 로 간주해왔다. 지금까지 기독교 신학과 성서 해석의 근간이다. 에덴동산 이야기에서 선악과 금지가 앎에 대한 사람의 호기심을 증폭시킨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그 열매를 따 먹는 행위를 죄나 타락으로 단정할 수 없다. 애초 선악을 구별할 수 없는 사람에게 금지는 의미가 없을뿐더러 선악과를 먹고 나서야 그들은 단지 벌거숭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원초적인 지적 호기심을 자극한 것일뿐, 선악의 윤리로 판단할 수 없다.4) 무엇보다 하느님이 뱀과 여자와 남자에게 선악과 일에 대한 대가를 각각 치르게 하였지만 ,’ 또는 타락이라고 단 한 차례 언급도 없다. 그것은 후대 독자의 규정이고 교회의 해석이다.

창세기는 우주의 시원과 함께 에덴동산에서 벌어지는 절연, 또는 분화의 서막을 신화적으로 보여준다. 에덴동산의 균열은 두 가지로 모아진다. 하나는 분화란 생명이 있는 모든 공간과 시간에 필연적으로 일어난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모든 균열은 단절이나 분열, 더 나아가 유기나 소외가 아니라 호기심이 가득한생명체의 번식이자 새로운 삶의 시작과 확장이라는 사실이다. 사람은 에덴동산에서 인생을 알아가고, 동시에 역사를 일궈간다.*

 

 

1) 뒤러의 판화 속 앵무새는 ‘지혜, 박애’를, 뱀은 ‘악마의 사자’를 상징하고, 고양이, 토끼, 황소, 사슴은 차례로 사람의 네 가지 유형을 암시한다. James W. Ellis, "Adam and Eve Iconography: The Fall of Man through the Ages." International Journal of Humanities, Literature and Arts 3.1(2020): 18-31.
2)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식물, 동물, 사람은 각각 다른 근원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On the Soul> ① 생혼(βιο'ς): 식물의 번식과 성장을 일으키는 근원. ② 각혼(ζωῆ) : 동물의 번식과 성장, 그리고 이동과 감각을 촉진하는 근원. ③ 지혼(ψυχἠ): 사람의 번식과 성장, 이동과 감각, 그리고 사유와 반추를 추동하는 근원
등이다.
3) 일반적으로 ‘떠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아자브’는 사전적으로 ‘버리다, 배반하다’를 뜻한다(시편 22:1 참고).
4) ‘선악’(טוֹב וָרָע)은 오역일 뿐 아니라 적절하지 않은 표현이다. 문자적으로 ‘좋은 것’과 ‘나쁜 것’이나 ‘이로운 것’과 ‘해로운 것,’ 이해(利害)로 번역하는 것이 낫다. 민수기 13:19를 참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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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김창주
한신대 신학부 교수. 히브리 유산을 인문학으로 푸는 글을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