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숙의 문화톡톡] 창(窓, Window)

2024-07-09     이인숙(문화평론가)

窓은 ‘창문’이나 ‘굴뚝’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窓자는 穴(구멍 혈)자와 厶(사사로울 사)자, 心(마음 심)자가 결합하여 창이라는 글자와 뜻을 나타내게 된것이다. 창을 형성하는 글자를 보면 뜻을 나타내는 구멍혈(穴 구멍)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글자 悤(총)의 생략형(省略形)이 합(合)하여 이루어 졌고 悤(총)의 생략형(省略形)과 마음속(心)의 밝은 눈이라는 뜻이 합(合)하여 구멍을 내어 밝은 빛을 받는 「창」을 뜻한다. 창은 사전적 의미로 공기(空氣)나 햇빛을 받을 수 있고, 밖을 내다볼 수 있도록 벽(壁)이나 지붕에 낸 문(門)을 뜻하며 현대에는 컴퓨터 모니터(monitor) 화면에서의 사각형, 흔히, ‘윈도(window)’라고 하는 뜻으로도 쓰이고 있다.(네이버 사전)

창은 일반적으로 사전적 의미를 넘어 나와 세계를 연결하는 통로로 인식하거나 세상을 바라 볼  수 있는 실제적인 혹은 상징적인 수단, 방법, 도구로 여겨지기도 한다. 문을 열거나 나가지 않아도 우리는 창을 통해 밖을 볼수 있고 햇빛이나 바람을 맞을 수 있다. 나아가 우리는 창에 대해 소통과 통함, 연결과 관계 등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도 보인다. 정지용 시인의 시 유리창에서는 안과 밖의 경계, 죽음과 삶의 경계, 이승과 저승의 경계, 단절과 소통의 매개체로 창을 묘사하고 창으로 비유되는 시인의 의미와 감정, 그리고 심정을 표현하고 있다.

우리가 집을 지으면서 창을 내는 이유는 창의 기능성만을 고려한 것은 아닌것 같다. 집안과 집밖의 연결선상에서 그리고 순환과 통함을 잠재적으로 의식하고 창의 위치와 크기를 정한다. 집안 공간의 한계를 넘어 외부의 환경과 풍경 등을 나의 생활공간과 연결하여 나의 공간을 확대시키려는 본능 같은 욕구? 로 문이 아닌 창문을 만드것 같다. 집에서의 창문은 그래서 참 중요할 뿐 아니라 위치와 방향, 모양과 크기에 많은 신경을 쓰게 되는 것 같다.

 

한편으로는 공연장의 무대를 세상과 소통하는 하나의 창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무대를 통해 세상을 이해하고 공감하며 비평하기도 하고 배우기도 하기 때문이다. 무대예술론(The Stage in Action)에서 새무엘 셀던(Samuel Selden)은 관객이 극장이나 공연장에 가는 이유로 첫째, 기분전환과 변화를 위함으로 영화나 무대에서의 공연을 보면서 기분을 전환 시키고 일상에서의 변화를 바라기 때문이라고 한다. 극중의 새로운 인물과 그 스토리를 통해 간접적인 모험과 몰입은 최소한 공연이 진행되는 동안 현실에서 오는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둘째는 공연에서 느끼는 열정적인 느낌과 기대하는 마음이 일생생활에서 가질 수 없는 자극을 주기 때문이라고 한다. 세째는 무엇을 더 알고 배우고 싶은 욕망으로 극장이나 공연장을 간다고 한다. 대사나, 상징적인 동작, 공연을 이루는 여러 요소들이 보여 주는 공연은 인간의 삶을 해석한 하나의 논평과 같다고 여기며 정치적, 도덕적, 경제적으로 혼란스러울때 삶의 방향에 대한 힌트를 얻기도 하고 공감하기도 하고 미처 생각지 못했던 방법이 생각나기도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극장이나 무대를 통해 〞관객이 자신이나 다른 사람 그리고 일반적인 세계를 더 분별력 있게 보도록 도움을 준다〞고 말한다. 즉, 무대위에서 벌어지는 생활의 단면이나 화제가 되는 이슈, 다양한 시각에서의 해석 등을 공연이라는 형식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게 된다. 이러한 것들은 일상의 한부분으로 이해하거나 서로 공감하기도 하고 또는 다른 세상을 보게되기도 하며 알아가게도 한다. 창으로서 무대가 가지는 또 다른 소통의 방법인 것이다.                

무대로서의 창은 시간과 공간, 물리적 영역과 범위를 초월한다. 눈에 보이는, 측량이 가능한 높이, 깊이, 넓이만으로는 이야기 할 수 없는 공간이다. 무대에서 공연되는 공연의 특징이나 성격에 따라 다양한 공간이미지를 창출하기 때문에 시간적인 간극과 공간이 지니는 무한함은 단적으로 표현하기 어렵다. 무대 장치로 표현되는 공간은 그 이상을 넘어 보는 이의 상상력을 더하여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공간이다. 무대는 상상과 마음의 창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오래전 우연히 지나는 길에 마을과는 좀 거리가 있는 외각에 비교적 넓은 밭의 언저리로 멋지게 지어진 집 한채를 보았다 그저 무심코 스치면서 왜 저 집은 저렇게 덩그러니 주위와 어울리지 않은 느낌으로 지어진 걸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집은 분명 이쁘고 멋지게 보였다. 그러면서 내가 만약 저 집에 산다면 창을 통해 보이는 밖은 좀 황랑하고 재미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밖에서 보는 집」과 「안에서 보는 집」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밖에서 보는 집과 안에서 보는 집은 큰 차이가 있다. 밖에서 보는 집은 의도했던 그렇치 않든 남에게 보여 주기 위한 측면이 더 강조 되어 있는 것 같다. 집으로서 보기에 멋진 집과 내가 누릴 수 있는 주위의 환경과 아름다움을 위한 집의 차이는 생각보다 크게 느껴졌다. 지나치는 짧은 순간이지만 집과 창의 의미를 생각해 보게되는 순간이었다.  

현대에서 창은 훨씬 복잡하고 다양하게 해석된다. 창이 가지는 이중적기능, 안과 밖, 삶과 죽음, 현실과 상상을 아우르는 더 포괄적이고 광범위하게 해석되고 있다. 물리적 현실에서 뿐 아니라 가상의 세계로도 그 역할을 확대 하고 있다. 현대에서의 창은 공간적 차원의 창이나 심리적 소통의 창보다는 휴대폰이나 컴퓨터의 모니터를 통해 바라보고 인식하고 소통하는 창의 기능이 더욱 커지고 넓어졌다. 가상 공간에서의 창은 시대를 넘나들고 공간을 초월하며 범위와 규모의 한계를 넘어 확대를 계속해 가고 있다. 현대의 가상현실의 창은 더욱 그 속에 그들만의 세계를 만들고 모두를 가두고 있는 것 같다. 그 안에서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끼리 그들만의 시각으로 그들만이 진실인것 처럼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높은 담을 쌓고 있다. 조류, 추세 등의 명목으로 원인과 과정, 진실과 가치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보여지는 단편적인 현상에만 관심을 가지고 오도하고 비평하고 정당화 시킨다. 마치 황량한 벌퍈에 덩그러니 지어진 밖에서 보기에만 좋은 집 처럼 ....   

현대인들의 마음의 문은 휴대폰속의 세계를 향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지나친 생각일까?  가족이나 친구들과 같이 밥을 먹을 때도, 같은 차를 타고 여행 할 때도 모두 몸은 같이 있지만 각자 다른 세계에 있는 사람들 처럼 보인다. 먼저 약속된 만남 보다 지금 울려대는 핸드폰 소리에 더 민감하고 더 적극적으로 반응하고 더 빠리 몰입 한다. 같이 만나서 이야기 하거나 밥을 같이 먹어야 하는 이유가 있는 것인지 조차 혼란스럽다. 어짜피 같이 있어도 따로 있는 것과 다를바 없는데 ....

어떤이는 사람들의 마음의 문은 손잡이가 안에만 있고 밖에 없기 때문에 안에서 본인이 열어야만 열린다고 한다. 참 재미있게 들리지만 맞는 말인것 같다.

 

창으로 보는 것의 또 다른 관점 

창은 세상과 연결하고 소통하는 하나의 상징적인 의미로 우리는 창을 대한다. 그러나 창을 통해 보고, 알게 되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잘 알지 못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든다.  

창은 간접적이다, 창을 통해 보고 이해하는 것은 현장에서 직접 보고 경험한 것이 아닌, 일정한 거리를 두고 구경꾼의 시각으로보는 것이며 그 보는 사람의 사고의 틀 안에서 해석하고 이해 하는 것이다 창을 통해 보는 것은 방관자의 입장 혹은 제 3자의 시각인 것이다 .    

창은 밖에서 벌어지는 현상에 대해 직접적으로 관여하는 것이 아닌, 창을 통해 밖의 현상을 바라보거나 밖에서 언듯 안을 바라보는 수동적인 행동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그저 잠깐 본것, 혹은 창을 통해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구경하는 것을 그 보는 이의 시각이나 견해로 해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창....

창은 개인이 가지고 있는 틀이다. 개인의 자아, 세계관, 지식, 경험, 개념, 편견, 상식, 기준 등 상당히 주관적인 시각이며 간접적이고 방관자적인 입장이며 타인의 시각이다. 어쩌면 창에서 나와서 함께 하지 못하고 창가에서 바라만 보는 구경꾼에 머물 뿐이다. 

그러한 개인의 틀로 보는 시각은 단편적인 것만을 보게 되기도 하고, 핵심을 보지 못한채 겉모습만 보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나아가 해석에 많은 오류와 편견이 있어 진실을 왜곡시키고 그 변형시킨 정보를 전달하게 될 것이다. 특히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어하는 이야기만 들으려 하는 현대인들의 선택주의적 시각에서는 점점 오해와 갈등을 키우게 되고 편을 가르기에 바쁠 것이다. 다른이들의 상항이나 처지는 들어 보려고 하지도 않으며 계속 내 주장만 외쳐대는 상황에서는 이해와 화합은 이미 기대조차 불가능할 것이다. 화해와 소통의 문제를 현대의 중요한 키워드로 부각시키면서까지 강조하고 중요하게 여기는 현실에서 소통은 더 어려운 과제를 우리에게 던저 주는 것 같다. 특히 이러한 혼란을 이용하여 개인의 이익과 목적을 위해 잘 알지도 못하는 개인이나 단체를 어려움으로 몰아놓고 자신의 실익만을 얻으려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의도된 계략인지도 모르는 일들이 자주 발생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균형잡힌 시각의 중요함이 절실한 상황이다.   

방관자로, 구경꾼으로 그저 남의 일을 바라 보는 제3자의 시각으로 자신 만의 창안에 갇혀 훈수나 두고 있어야 할지, 아니면 같이 생각을 모으고 방법을 찾는 책임감 있는 당사자로서의 입장으로 나와야 하는지... 우리의 현재의 처지와 위치가 어딘지도 모르는 혼동스러운 상황이 불안함을 키우기도 한다. 우리를 가두어 놓은 가상의 세계나 개인의 틀에 맞추어 세상을 보는 시각으로는 우리 삶에 균형을 찾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저 겉모습만 보는 창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마음과 세상을 균형있게 볼 수 있는 창으로, 그리고 창안에 갇힌자 되지 말고 창을 통해 나눔과 함께함과 공감하는 세상으로의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할 것이다.

 

 

글·이인숙
문화평론가, 교육학박사, 문화예술경영전공. 현재 청주대학교 영화영상학부 초빙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면서 한국ESG위원회 공연예술위원회 위원장, 북경수도사범대학교과덕대학 공연예술대학부학장역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위원, 한국연기예술학회이사, 국제문화예술교육교류협회회장, EINSchool대표이사, 청주시도시문화추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