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아름의 시네마 크리티크] 과연 동일한 범죄가 되었는가? - 영화 <그녀가 죽었다>

2024-07-15     송아름(영화평론가)

(영화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잔혹한 범죄에 놀라는 데에는 다양한 원인이 있겠지만 어떻게 저렇게까지 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이 큰 부분을 차지할 것이다. 누군가를 해하는 데에 전력을 쏟아 치밀한 계획을 세우는 잔인함은 범죄(자)를 가장 이해할 수 없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 이 사이 여성의 범죄가 더욱 주목받는다는 것은 치밀한 그 태도에 대한 의아함이 더욱 강력하다는 것을 의미할 테다. ‘도대체’ ‘여자가’ ‘어떻게’ ‘이렇게 까지’ 라는 각각의 분절 속 담긴 의문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있는 여성의 악행이 어떤 방향으로 향할지를 충분히 짐작케 한다. 원래부터 악하고 또 나쁜 X, 그리고 이것으로 이르는 경로에서 확인되는 차분함, 섹슈얼함, 그러니까 여성성의 이용. 이것으로의 수렴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최근 공개된 한 프로그램의 태도가 정확히 여기에 있었던 것처럼.

 

영화 <그녀가 죽었다>는 한 남성의 관음과 한 여성의 관종, 그러니까 분명한 범죄 혐의를 내재한 두 또라이의 대결 정도로 정리될 지 모르겠다. 공인중개사인 구정태(변요한)는 자신의 직업을 이용하여 타인과 타인의 집을 염탐하고 몰래 침입까지 해가며 전리품을 모으고 전시한다. 이러한 정태의 시야에 들어온 한소라(신혜선)는 거짓으로 자신의 SNS를 꾸미고 이를 방해하거나 방해할 소지가 있는 이들을 없애가며 스스로가 상상하는 바로 그 모습을 구축해 간다. 정태는 몰래 방문한 소라의 집에서 피투성이가 된 채 누워있던 소라를 발견하고, 놀라 뛰쳐나갔다가 다시 돌아왔을 때에 소라가 실종됐다는 것을 확인한다. 이후 정태는 정태가 바로 그 현장에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이의 협박 속에서 이 모든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분투한다. 

 

영화는 초반은 정태의 서사를, 중반 이후부터는 소라의 서사를 진행시키며 현재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누가 누구를 어떻게 속이고 있는지를 설명해간다. 언뜻 영화는 분명한 범죄의 혐의가 있는 두 인물의 이야기로 대결을 펼치는 듯 하지만 두 사람을 전혀 다른 층에 위치시키며 위험한 시각을 내보인다. 정태는 분명 스토커이다. 그럼에도 정태는 누군가에게 어떠한 피해도 주지 않으며 몰래 침입한 집의 문제들을 해결해준다는 이유로 스스로를 합리화한다. 영화는 정태가 바로 이러한 사고 체계를 통해 범죄를 아무렇지도 저지르지 않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며 그의 무신경한 태도를 지적한다. 그러나 이러한 합리화는 정태의 내레이션으로 설명되는 것일 뿐, 그가 남의 침을 침입하는 행동이나 그의 컬렉션을 전시하는 장면의 연출은 어딘가 장난스러우면서도 가벼워보인다. 

 

그러나 소라의 행위는 이와는 전혀 다른 방향을 향하면서 범죄 그 자체에 집중한다. 소라의 목소리로 설명되는 소라의 서사는 변명의 여지가 없는 냉혈한의 그것과 정확히 일치한다. 자신의 필요에 따라 지적 장애가 있는 동생을 어선에 넘기려다 가족들에게 발각, 연을 끊고 집을 나온 소라는 술집에서 일을 하며 친구와 모의해 사람들을 속이고 남의 것을 자신의 것인 양 전시하는, 필요하다면 사람을 죽이는 것도 서슴지 않는 위험한 인물이다. 자신에게 유리하다면 사람도 상황도 마음대로 이용하며 그 결과의 해석 역시 자기중심적으로 움직이는 소라의 광기는 어떠한 변명도 잔인함 그 자체로 전시된다. 여기에 소라가 자신의 무기처럼 활용하는 미모는 그가 ‘범죄’를 이어가면서도 사람들에게 호응받을 수 있던 중요한 이유로 놓이기까지 한다.

 

이러한 이유로 두 사람의 행위는 분명 다른 감각을 자아낸다. 사실 정태의 행위가 두렵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그의 합리화보다 그 합리화로 인해 당하는 이들이 어떠한 공포를 겪는지가 등장해야 할 것이다. 내가 수리하지 않은 무엇이 작동하고 있고, 무엇인가 미묘하게 집이 바뀐 듯한 느낌을 주는 공포는 분명 정태가 다녀간 집 주인의 몫일 것이다. 영화는 정태가 행한 행위가 어떠한 결과를 초래하는지는 중요하게 보여주지 않았지만 소라가 어떤 인간이었고 어떤 결과를 만들어가고 있는지는 명확하게 보여주면서 분명하게 다른 층차를 설정하고 있다. 결국 이는 한 쪽이 한 쪽에 위협을 가할 것이라는 긴장을 자아내면서 명확하게 가해의 위치를 소라에게 할애한다. 

 

소라의 행위에 비한다면 정태의 행위는 그가 스스로 이야기했던 것처럼 홀로 행하는 자잘한 일탈 정도로 보일 수밖에 없으며, 이것으로 스토커였던 정태는 피해자의 위치에 놓인다. 게다가 소라가 정태를 찾아 접근하는 것은 그가 자신을 살피는 것에 대한 공포가 아닌(사실 공포를 느낀다면 그를 대면할 용기 조차 내지 못할 것이다) 자신이 사람들을 속이는 바로 그 장면을 정태가 포착했기 때문이었다. 나를 방해하는 이를 제거하기 위한 접근, 이는 분명 소라와 정태가 비슷한 위치에 놓이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태를 살인자로 만들려는 소라의 계략은 악행을 저지른 악인이 악행을 계속하기 위해 누군가를 해하려는, 즉 소라보다 분명 덜 악한 정태에게 누명을 씌우는 것으로 쉽게 전환되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은 몇몇 단어들을 활용하며 ‘선량한’ 남성이 피해자가 될지 모른다는 공포를 정확히 관통한다.

 

영화는 정태가 공포를 느끼는 것을, 그리고 경찰 영주(이엘) 앞에서 정태가 스스로 잘못했음을 인정하는 부분을 몇 번이나 보여주면서도 변명도 반성도 없는 소라의 폭주는 그대로 노출시켰다. 이렇게 나쁜 이가 이렇게 반성하고 있는 이를 지속적으로 괴롭히는 것, 그리고 자신을 좋아하는 마음을 이용하여 범행을 공모하고 효용이 다했을 때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를 처리하는 모습 등은 소라라는 여성이 얼마나 잔인한지, 이 잔인함을 무엇으로 가려 사람을 꾀어내는지, 바로 이런 이에게 정태가 얼마나 ‘잘못 걸려든’ 것인지를 충분히 보여준다. 두 사람이 대결을 벌일 때에 한 쪽을 응원하게 되는 것은 이러한 인물의 배치와 표현의 결과로 한 쪽의 범행을 충분히 상쇄시켰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 <그녀가 죽었다>가 보여주는 이 틀에 박힌 혐오는 이 사건을 해결하는 경찰이 여성으로 설정되었다는 점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렇게 범죄를 저지르는 이와 다르게 이렇게 선량한 여성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을 때에게 여성은 어떤 위치라도 점할 가능성을 가진다는 것, 영주의 설정은 바로 이 변명의 증거로 볼 수 있다. 영화 <그녀가 죽었다>가 보여주고 있는 편 가르기는 매우 위험한 전제를 포함하며 결국 많은 사건·사고 프로그램들이 보여주었던 의아한 여성 범죄의 재현에 가닿았다. ‘그’라는 단어에 특별히 남성을 지칭하는 의미가 없음에도 ‘그녀’라는 지칭이 필요한 것은 왜인가? ‘그녀’들로 인한 공포는 왜 그녀들이 겪을 공포보다 더 크게 그려져야 하는가? 영화는 이 물음에 분명하게 답해야 할 것이다. 

 

<그녀가 죽었다>(2024)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글·송아름
영화평론가. 한국 현대문학의 극(Drama)을 전공하며, 연극·영화·TV드라마에 대한 논문과 관련 글을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