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등의 탈출구가 멀고 먼, 아프리카 대호수 국가들

르완다 집단학살 30년 그후

2024-07-31     마리옹 피케 | 기자

지금 “천 개 언덕의 나라” 르완다에서는 1994년 4월 7일부터 7월 17일까지 투치족을 비롯해 당시 정권에 반대했던 일부 후투족 등 8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집단학살에 대해 자유롭게 이야기하기 힘들다. 폴 카가메 르완다 대통령이 콩고민주공화국 등 이웃 국가들과 유지하는 관계에 있어서 이 비극의 기억은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이다.

 

르완다 서쪽에 자리한 부게시 마을은 겉보기에는 평온해 보였다. 작은 마을의 중심가에는 회갈색 모자를 쓴 목동이 땅에 시선을 고정한 채 장화 신은 발로 땅을 밟으며 걷고 있었다. 왼손에 쥔 막대기도 두 발과 함께 박자를 맞췄다. 그는 커다란 감자 포대들을 쌓아 올리고 있던 십여 명의 청년 쪽으로 다가갔다. 선선한 날씨지만 청년들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송 맺혀 있었다. 목동은 잠시 멈춰 서서 그들을 바라보고는 다시 걸음을 뗐다.

그때 갑자기 르완다 방위군 병사가 탄 오토바이 한 대가 나타났다. 오토바이는 요란한 엔진음을 내며 언뜻 비어 보이는 오두막 뒤로 흙먼지와 함께 사라졌다. 다른 군인 한 명은 나무 벽 뒤에서 굳은 표정으로 보초를 서고 있었다. 이 허름한 건물은 콩고민주공화국 북키부주와 맞닿은 국경검문소 중 하나다.

 

르완다와 콩고민주공화국, 외교관계 악화일로 

46세의 에릭*도 부게시에 산다. 목공소에서 용접 중인 그의 주변으로 불꽃이 튀었다. 그는 용접 마스크를 머리 위로 올리고는 이렇게 말했다. “여기는 안전하다. 경제가 굴러가고 국가가 우리를 보호해 준다.” 르완다의 이 마을은 평온하지만, 몇 km 떨어진 곳에서는 많은 무장단체가 활동한다. 키부주를 약탈하고 주민들을 공포로 몰아넣은 반란군 M23(3월 23일의 운동)도 있다. 2012년 등장한 M23 반군은 8년간의 휴지기를 보내고 2021년 말 다시 무기를 들었다.(1)

“국경 너머 상황은 난장판이다. 하지만 우리가 직접 볼 수는 없고, 언론에서 전하는 걸 들을 뿐이다”라고 40대의 쥐스틴*이 말했다. 그때 소총과 최신 안테나로 무장한 여섯 명의 순찰대가 픽업트럭을 타고 마을을 가로질렀다. 그러자 쥐스틴은 더는 대답하지 않고 입을 다문 채 발끝만 쳐다봤다. 르완다에서는 항상 말을 조심해야 한다. 어디에서 말이 새어나갈지 모르기 때문이다. 인구 1,300만 명의 르완다는 유엔과 콩고민주공화국으로부터 M23 반군을 지원한다는 의혹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폴 카가메 르완다 대통령은 펠릭스 치세케디 콩고 정부가 오히려 ‘르완다 해방민주군(FDLR)’을 돕고 있다고 비난한다. FDLR은 콩고로 망명한 르완다인들이 세운 단체로 1994년 집단학살에 가담한 혐의를 받고 있다.

양국의 이런 대립 관계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1998년에서 2003년까지, 제1차 아프리카 대전이라고도 불리는 제2차 콩고전쟁 때문에 6백만 명이 사망했는데, 르완다도 전쟁에 상당 부분 책임이 있다. 콩고전쟁 이후에도 콩고 동부 지역에는 수많은 분쟁이 이어지고 있어 여전히 피해가 크다. 콩고 전문 작가인 고티에 드빌레는, 그렇다고 현재의 혼돈 상황이 전쟁 때문이라고 단정하는 건 “지나친 일반화”라고 주장했다.(2) 한 가지 확실한 점은, 후투족과 투치족 사이의 갈등과 1994년 집단학살 문제가 르완다와 이웃 국가들의 관계를 결정짓는다는 사실이다.

르완다와 콩고민주공화국의 관계가 지닌 본질을 이해하려면 우간다와 르완다의 관계를 먼저 살펴봐야 한다. 부게시에서 북동쪽으로 약 70km 떨어진 도시 시야니카는 우간다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푸르른 언덕들이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내는 이 도시에서는 사파리와 하이킹이 관광객들에게 인기가 높다.

국경 너머 우간다에서는 오토바이 운전자들이 바람에 머리를 휘날리며 자유롭게 달리지만, 르완다에서는 헬멧 착용과 속도 제한이 엄격히 요구되고, 위반 시 강력한 처벌을 받는다. 두 나라가 가진 공통점이라고는 화산과 주위를 둘러싼 안개뿐이다. 최근 양국 관계가 더욱 악화하고 있지만, 항상 사이가 나빴던 것은 아니다.

1957년에 태어난 카가메 대통령과 그의 가족은 투치족의 박해를 피해 1961년 르완다에서 도망쳐 우간다로 갔다. 비행기 조종사를 꿈꿨던 카가메는 젊은 시절을 우간다의 수도 캄팔라에서 보냈고, 1976년에서 1978년 사이 여러 차례 불법으로 국경을 넘나들었다. 요웨리 무세베니 우간다 대통령을 처음 만난 것도 바로 이 시기였다. 무세베니는, 1979년 이디 아민 다다 정권을 전복시키는 데 일조한 혁명 단체 ‘구국전선(Fronasa)’을 창설한 상태였다.(3)

 

이해관계가 엇갈린 우간다와 르완다

투쟁에 목말랐던 카가메는 게릴라 부대에 합류했고, 몇 년 뒤 조직될 ‘르완다 애국전선(RPF)’의 첫 사령관 프레드 르위게마와도 친분을 쌓았다. 1986년 1월, 무세베니가 수도 캄팔라를 점령한 뒤, 카가메는 정보부 부국장, 르위게마는 국방부 차관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몇 년 후, 두 사람이 르완다 출신이라는 것을 문제 삼는 우간다 민족주의자들의 반발을 이기지 못한 무세베니 대통령은 무기로 맺은 두 형제를 물러나도록 했다.(4) 군사 훈련을 받으러 미국 캔자스로 떠났던 카가메는 1990년 10월 르위게마가 석연치 않은 정황으로 살해된 이후 그의 뒤를 이어 RPF의 수장이 됐다. 무세비니의 지원을 받은 RPF는 르완다를 장악할 수 있었고, 1994년 7월, 투치족 집단학살도 종식됐다. 이후 카가메는 르완다에서 정권을 잡았지만, 2000년이 돼서야 대통령으로 공식 선출됐다.

반군 출신의 카가메 르완다 대통령은 군대를 정비하고 콩고 2차 전쟁에도 끼어들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우간다와 르완다의 이해관계가 엇갈렸고, 두 나라의 군대는 1999년부터 콩고에서 맞서기 시작했다. 2021년 5월 카가메 대통령은 이렇게 설명했다. “양국의 불화는 무세베니와 나 사이의 신뢰 문제로만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니다. 20년도 더 된 일이고, 매번 이 주제를 언급할 때마다 불편하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우리는 그 누구에게도 종속되지 않는다. 누군가의 통제를 받고 이용당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작지만 우리는 위대하다.”(5)

르완다 대통령의 말은 또 다른 이웃 국가인 부룬디와의 관계에도 적용된다. 르완다 동쪽에 자리한 마하마 난민 캠프에서는 마을 주민과 부룬디 난민들의 공생 관계가 완벽한 듯 보인다. 바나나 나무 그늘에서 쉬던 농부들은 커다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난민들이 이곳에 자리 잡으면서 마을 농부들은 농업 협동조합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게 됐고, 덕분에 연간 수확량이 증가했다. 42세의 조합장 크리스토프는 “난민들이 있어서 상황이 개선됐다. 이곳 부룬디 사람들과 경제 협력도 맺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양국의 외교 관계는 이런 화합과는 거리가 멀다. 벨기에의 식민지였고, 망명 무장단체의 영향을 받았다는 공통점을 가진 두 나라지만 좀처럼 합의점을 찾지 못한다. 르완다 애국전선을 이끈 것은 투치족이고, 부룬디의 여당인 ‘민주방위국민평의회-민주방위군(CNDD-FDD)’은 후투족이 다수였던 옛 반군단체에서 시작됐기 때문이다. 2005년, CNDD-FDD가 정권을 잡은 이후, 두 나라의 관계는 악화하기 시작했다. 부룬디는 르완다가 쿠데타 시도를 지원했다고 비난했고, 르완다는 부룬디가 집단학살을 일으킨 반군들을 숨겨줬다고 비난했다. “양국 관계에 있어 결정적인 쟁점 중 하나는 바로 추모 방식이다. 한쪽에서는 르완다 투치족들의 죽음을 추모하고, 다른 쪽에서는 부룬디의 후투족들을 추모한다. 어느 쪽도 상대방 희생자들을 언급하려 하지 않는다.” 대호수 지역 전문가인 앙드레 기샤우아의 설명이다. 종족 갈등 때문에 화해란 불가능한 것일까?

마하마 캠프 맞은편에는 캠프 난민들의 규모를 가늠하기 힘든 탄자니아 부리기 국립공원이 자리하고 있다. 르완다와 탄자니아의 관계는 르완다가 다른 이웃 국가들과 맺고 있는 관계와 사뭇 다르다. 프랑스 국제관계연구소(IFRI)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센터의 시나 슐리메르는 “사미아 술루후 탄자니아 대통령과 폴 카가메 대통령의 논의는 주로 경제적인 목표와 관련한다. 두 정상은 1980~1990년대의 정치적 문제보다 기반시설 건설 협력에 초점을 맞춘다. 탄자니아는 대호수 지역 국가들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한다”라고 설명했다.

1992년 7월, 르완다 내전 종식을 위한 협정이 탄자니아의 도시 아루샤에서 체결됐다. 이 협정으로 1994년 집단학살 책임자들을 처벌하기 위한 르완다 국제형사재판소(ICTR)가 아루샤에 설치된 것만 봐도 그 맥락을 잘 알 수 있다. 2004년에는 ‘대호수 지역의 평화, 안전, 민주주의, 발전’을 위한 선언문이 탄자니아에서 채택되기도 했다.

그러나 두 나라의 관계도 혼란을 겪었다. 2013년, 아디스아바바에서 열린 아프리카연합 정상회담에서 외교 마찰이 발생한 것이다. 자카야 키퀘테 당시 탄자니아 대통령(임기 2005~2015년)이 르완다 대통령에게 르완다 해방민주군과 대화할 것을 제안하면서, 무장단체 M23 지원을 중단할 것을 촉구했기 때문이다. 두 나라의 긴장 관계는 2016년, 존 폼베 마구풀리 전 탄자니아 대통령의 방문 이후에야 정상으로 돌아왔다.

 

광물자원에 대한 탐욕 속에 혼란 지속

르완다의 외교 관계가 자국 역사를 만든 민족 갈등에 좌우되는 것처럼, 경제적 이해관계 역시 대호수 지역에 혼란을 일으킨다.(6) 부룬디, 우간다, 탄자니아, 르완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바로 콩고 키부주에 매장된 광물자원에 대한 탐욕이다. 키부주에는 100개가 넘는 무장단체가 활보하는데, 이는 만족할 줄 모르는 이웃들에게는 횡재나 마찬가지다. 이 지역 전문가인 비르쿨롱의 설명에 따르면 “금은 탄자니아와 부룬디를 거쳐 가고, (…) 르완다는 아랍에미리트로 불법 수출되는 콜탄, 주석, 텅스텐에 집중한다. 르완다는 탐욕스러워졌다. 2021년 이후 M23이 돌아와 이 세 가지 광물이 많은 지역을 통제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르완다는 국경선까지 문제 삼고 있는데 그 태도가 대담해졌다.”

하지만 르완다 정부는 이런 주장을 반박해왔다. 윌리 응고마 M23 대변인도 자신의 반군단체가 “광산 지역에서 활동하지 않으며, (…) 종족주의 근절을 위해 활동한다”고 주장했다. 어쨌든, 티에리 비르쿨롱의 주장처럼 르완다 당국이 북키부주의 자원 덕분에 “부를 축적”할는지는 몰라도 일반 르완다 국민은 아무런 혜택을 받지 못한다. 니라공고 화산 아래 자리한 키라로(Kiraro) 마을 주민들은 자국과 이웃 콩고의 분쟁에는 관심이 없다. M23이 활동을 재개한 이후로 국경을 넘나들기 힘들어졌고 주민들 사이에는 분노가 퍼졌다.

머리에 생선튀김 바구니를 이고 있던 자클린*이 “예전에는 콩고에 가서 생선을 사 왔다. 2만 5,000 르완다 프랑이면 두 상자를 사 올 수 있었는데, 여기에서는 한 상자도 사기 힘들다”며 불평을 쏟아냈다. 또 다른 이웃 주민 역시 “우리나라에는 부패가 만연하다. 그렇지만 자칫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으니 입을 다무는 편이 낫다. 국경이든 어디든 가난한 사람들은 그 어떤 지원도 받지 못한다”고 토로했다.

 

*인터뷰에 응한 사람들의 안전을 위해 가명을 사용했습니다.

 

 

글·마리옹 피케 Marion Fiquet
기자

번역·김자연
번역위원


(1) Sabine Cessou, ‘Jours d’après-guerre au Congo 아직 끝나지 않은 콩고 내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한국어판, 2014년 1월호.
(2) Gauthier de Villers, ‘La guerre dans les évolutions du Congo-Kinshasa 킨샤사 콩고의 발전과 전쟁’, <Afrique contemporaine>, n° 215, Paris, 2005년.
(3) Michela Wrong, 『Do Not Disturb : The Story of a Political Murder and an African Regime Gone Bad』, Public Affairs, New York, 2021년.
(4) Bernard Leloup, ‘Le Rwanda et ses voisins. Activisme militaire et ambitions régionales 르완다와 이웃 국가들. 군사 행동주의와 지역적 야망’, <Afrique contemporaine>, n° 215, Paris, 2005년.
(5) François Soudan, Romain Gras, ‘Paul Kagame : “Tshisekedi, Kabila, Macron, Touadéra, ma famille et moi” 폴 카가메, “치세케디, 카빌라, 마크롱, 투아데라, 내 가족과 나”’, <Jeune Afrique>, 2021년 5월 25일.
(6) Sabine Cessou, ‘Omniprésence des intérêts étrangers 카빌라, 국제형사재판소의 심판대에 설까?’,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한국어판, 2016년 1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