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치용의 시네마 크리티크] 욕망을 금지당한 어린 마녀가 욕망을 되찾으며 일어난 일
리뷰 '델마'
*이 글에는 영화의 전개와 결말을 알 수 있는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금지를 금지하라.
68혁명의 구호 중 하나다. 68혁명은 세계 혁명사에서 매우 중요한 혁명의 하나이지만 동시에 미완의 혁명이기도 하다. 하기야 혁명은 속성상 언제나 미완의 혁명일 수밖에 없지만 68혁명은 특별히 더 그러하다.
아마도 그 이유를 '금지를 금지하라'는 구호에서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금지'와 '금지의 금지'와 관련한 조금 복잡하고 근원적인 논의는 생략하고, '금지를 금지하라'가 매우 아름다운 이념이지만, '금지의 금지'라는 금지를 '금지를 금지하라'의 유일한 예외로 남겨야 하는가 하는 매우 심오한 논쟁에 직면한다는 게 이 구호가 담은 딜레마이다. 금지를 금지하라 역시 금지이기 때문이다. 이 금지를 예외로 두었을 때 역사에서 우리는 전체주의의 준동을 보았고, 예외로 두지 않았을 때 요즘 용어로 적폐의 간단한 부활을 보았다.
현실, 혹은 현실정치의 심란한 얘기는 그만하고 '금지의 금지'를 다룬 흥미로운 영화 한 편을 살펴보자. 현실정치와 다르게 영화에서는 '금지의 금지'를 '금지'의 예외로 둘 것인지 말 것인지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영화 한 편에선 '금지'와 '금지의 금지'를 영화적으로 보여주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영화 <델마>는 혁명의 근간이라고 할 이 주제를 독창적인 방식으로 표현했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혁명을 다루지는 않는다. 오히려 존재에 관한 영화라고 보는 게 더 정확하다.
마녀 전설과 원죄의 스릴러 너머
요아킴 트리에 감독의 <델마>는 독특한 성격의 스릴러다. 일단 형식면에서 스릴러로 갖춰야 할 것은 모두 갖췄다. 그것도 크게 호들갑스럽지 않은 방식으로. 취향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우아한 형식의 스릴러라고 판단한다.
스릴러라는 영화적 형식보다는 영화 전편에서 스며 나오는 인간 존재에 관한 철학적 탐구라는 전언에 나는 더 주목했다. 트리에 감독은 "자신의 운명을 거부하는 인물이 언젠가는 그 운명을 마주하게 되는 이야기"라고 이 영화를 설명한다. 다소 미흡한 설명이긴 하지만 이 언급에서, 트리에 감독이 자신이 만든 영화의 방향성을 막연할지라도 사전에 어느 정도 인식하였음을 알 수 있다.
영화는 '금지된' 주인공 델마(에일리 하보 분)가 금지를 금지함으로써 '금지되지 않은' 델마로 거듭나는 과정을 스릴러 기법을 통해 그려낸다. 영화는 이러한 인간 존재론을 석명(釋明)하는 과정에서 사실적인 재료와 비사실적인 재료를 섞어서 쓴다. 극중에서 '심인성 비간질성 발작(PNES)'이란 진단을 받는 델마는 사실 평범한 용어로는 초능력자이고, 조금 더 친숙한 유럽의 전통적인 표현을 빌리면 마녀이다. 현대의학의 설명은 달라졌지만 간질(epilepsy)의 어원은 그리스어에서 "악령에 영혼이 사로잡힌다"는 뜻을 갖는다. 델마의 발작이 마녀와 암시적으로 연결되는 셈이다.
<델마>를 기획할 때, 오슬로를 배경으로 하는 마녀 이야기를 마음에 품고 있었던 트리에 감독은 "스토리 자체는 초자연적인 뿌리를 가지되, 인간적인 캐릭터를 통해 관객들의 공감대를 얻고 싶었다"고 말했다. 영화 도입부의 수수께끼 같은, 다소 놀라운 첫 장면의 의미는 영화가 전개됨에 따라 드러난다. 델마는 6살 때 '마녀'임이 밝혀지는데, 그것도 형제살해라는 충격적인 사건을 통해서이다.
영화 수입/배급사에서 사용한 "WANT HER? WAKE HER"라는 홍보 카피에서 짐작하듯, 델마가 '마녀'로서 깨어나는 계기는 욕망이다. 욕망이 좌절되었을 때, 더 정확하게는 욕망이 존재를 각성할 때 델마는 마녀가 된다. 동생이 태어나 부모의 사랑을 빼앗긴 유아가 흔히 지배당하는, 동생을 없애버리고 싶다는 욕망이 델마에게선 실제로 실현된다. 왜냐하면 델마는 '마녀'이기 때문이다.
어린 마녀 델마의 욕망은, 욕망의 주체가 선과 악을 구분하지 못하는 상태이고 구체적인 행위로 전환하려는 적극적인 의지가 개입하지 않은 순수한 욕망에 머문다. 그러므로 개인의 존재 차원에선 죄를 구성하지 못한다. 그러나 사회적인 결과는 죄가 된다.
사회적으로는, 욕망 자체가 죄를 구성하지 못하고 그러한 욕망을 행위로 옮겨 물리적으로 '금지된' 결과를 초래했을 때만 죄가 성립한다. 어린 마녀 델마에겐 욕망 자체는 간절하였지만 아무런 의지나 (물리적) 행위의 개입 없이 그저 욕망이 결과로 구현된다. 어린 델마가 마녀이기에 그가 마음에서 원하면 현실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현실에서 구체적 죄(결과)는 존재하지만 죄에 합당한 책임을 질 죄인은 없는 역설이 발생한다. 행위 없이 욕망만으로 죄의 결과가 빚어졌기 때문이다.
성서의 창세기에 카인이 아우 아벨을 돌로 쳐 죽이고,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는 여호와의 질문에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이니까"라고 대답한 유명한 사건과 비교하면 결과는 동일하되 맥락이 달라진다. 욕망과 의지, 행위, 결과의 주체인 카인과 달리 델마는 그저 욕망의 주체일 따름이다. 따라서 델마를 '여자 카인'이라고 부른다면 부당하다. 그럼에도 델마는 자신의 욕망으로 인해 모종의 원죄를 지고 살아야 할 운명에 맞닥뜨린다. 그의 존재 자체가 원죄를 구성한다.
금지와 해방
델마의 할머니와 마찬가지로 델마가 '마녀'임이 판명된 이후 델마의 부모는 델마의 욕망 자체를 금지하는 방법으로 델마의 삶을 통제한다. 마녀의 능력을 보인 후 시설에 수용되어 격리의 삶을 산 할머니와 달리 델마는 기독교 신앙의 힘으로 욕망을 억압하는 삶을 산다. 욕망을 억압한 경건한 삶을 살기로 한 건 당연히 델마의 의사가 아니다.
'원죄'에 대한 벌로 욕망이 금지된 삶을 사는 델마의 인간 존재는 타인에겐 무해하지만 자신에겐 무익한, 한 마디로 금지된 존재로 형상화한다. 델마는 원래 다른 존재이지마 금지를 통해 자신에게 타인과 같은 존재로 변경된다. 영화는 금지된 상태를 보여주다가 그 금지의 연원을 스릴러의 형식으로 추적한다. 델마가 사랑이라는 간절한 욕망에 휩싸이면서 마침내 델마는 '금지의 금지'의 길로 나가기 시작한다.
마지막 영화적 반전을 준비하는 대목에 이르면, 델마는 자신의 존재를 자각하고 그 존재의 위험성을 인식함에 따라 암암리에 무의식적으로 모색한 '금지의 금지'를 포기하고 대신 '금지된 존재'라는 그의 부모가 과거에 부여한 타율적 해법을 다시 자발적으로 수용한다. 남과 완벽하게 다른 존재로 살아간다는 일은 힘든 일이다. 현실에서도 그렇고 영화에서도 그렇다.
영화의 결말은 말하자면 '해피엔딩'이다. 금지된 존재라는 자신의 본질을 이해한 후에도 델마는 다시 '금지의 금지'에 귀의해 드디어 자신의 존재와 욕망을 주체적으로 되찾기 때문이다.
'금지'와 '금지의 금지'라는 개념어를 중심으로 영화를 해설하였기에, 이 평을 접한 사람은 영화를 보기 전에 이 영화에 어떤 편견을 갖게 될지 모르지만, 영화 자체로는 관객이 즉자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구성해 잘 만든 스릴러물이기에 그냥 영화 자체에 몰입할 수 있을 것이다.
금지라는 키워드와 관련하여 영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내용은 두 가지다. 금지에서 벗어나도록 촉발한 욕망의 대상은 아냐(카야 윌킨스 분)라는 동성 친구이다. 직관적으로 이성애보다는 동성애가 이 '금지'와 '금지의 금지'의 맥락에 더 어울린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영화가 만들어지기 전에 사전에 알아채는 건 감독의 감각에 속한다. 뒤집힌 엘렉트라 콤플렉스 또한 예수/사탄, 뱀 등 영화 속 흐름과 잘 호응한다. 델마가 마녀이며 과격하고 급진적인 돌파로 해방에 이른다는 스토리는 기독교와 가부장제의 오랜 역사에 비추어 설득력 있는 설정이다. 분명히 할 점은 영화는 영화라는 사실이지만, 이 영화는 기독교와 가부장제를 돌파한다.
영화의 처음과 끝에 광장이 등장한다. 인간 존재는 광장에서 입증된다. 밀실 안에 고립된 인간은 같고 다름을 모른다. 금지 또한 광장의 영역에 속한다. 금지의 금지의 목적은, 다름을 아는 공존하는 인간이 되고자 함이다. 다른 인간을 사랑하고 소통할 수 있는 인간이 되고자 함이다. 그런 인간이 되려면, 특히 다른 인간과 다른 어떤 인간이 그런 인간이 되려면, 불가피하게 밀실의 고립을 거치며 자신과 적나라하게 대면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 영화는 철학적 스릴러물이라 할 수 있는데, 이 평과 달리 철학 냄새를 전혀 풍기지 않는 미덕을 갖췄다.
글 안치용, 사진 그린나래미디어(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