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전쟁으로 흔들리는 스위스의 중립국 지위

“스위스가 이제는 회색지대에서 벗어나야 할 때”

2024-08-30     앙젤리크 무니에 쿤 | 기자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스웨덴과 핀란드는 중립을 포기하게 됐으나, 스위스는 서구 세계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중립국의 지위를 계속 유지하고 있다. 베른이 대(對)러시아 제재에 동참한다면, 베른의 고객들은 스위스산 무기를 키이우에 재수출할 수 없다. 이런 중간적 입장은 유럽의 이웃 국가들로부터 비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스위스 전역이 뙤약볕 아래 숨을 죽이고 있었다. 2021년 6월 16일, 취재 경쟁이 한창인 기자들과 촘촘히 배치된 보안군에 둘러싸인 스위스 제네바는 미국과 러시아의 대통령을 성대하게 맞이했다. 제재에서 양국 외교관의 교차 해임에 이르기까지, 조 바이든과 블라디미르 푸틴의 이 첫 번째 정상회담은 긴장이 고조되는 분위기에서 진행됐다.

핵보유국으로 세계에서 가장 강한 두 나라 정상들은 ‘중립국’ 스위스의 환대를 받으며 대화 재개에 나섰다. 로널드 레이건과 미하일 고르바초프 사이의 첫 번째 정상회담은 누구나 기억할 것이다. 1985년 11월, 냉전 종식으로 이어진 협상 라운드 역시 스위스 제네바의 레만 호수에서 시작됐다.

35년 뒤 스위스는 ‘제네바 정신’이 또 다른 기적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믿으려 했다. 스위스는 벌써 이 역사적인 날로부터 좋은 이미지를 얻게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자유급진당 소속 이그나치오 카시스 외무장관은 언론에 “이 회담은 전 세계에 스위스의 신뢰감을 보여줄 좋은 기회다. 강력한 민주주의와 사회적 안전성이 어우러진 작은 중립국 스위스가 신뢰감을 고취할 기회다”라고 선언했다. 취리히의 주요 보수 일간지 〈노이 취르허 차이퉁〉은 “작은 나라 스위스, 큰 정치의 극장”이라며 자부심을 드러냈다.

이후의 뒷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다. 대화 시도는 군화 소리를 잠재우지 못했다. 제네바에서 몇 차례 더 회담이 열렸으나, 2022년 2월 24일로 예정됐던 미 국무장관 앤터니 블링컨과 러시아 외무장관 세르게이 라브로프의 최종 회담은 취소됐다. 바로 이날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침공했고, 베른은 이 공격이 “명백한 국제법 위반”이라고 곧장 비난했다.

전쟁은 유럽대륙의 균형을 흔들어놓음으로써, 세계에 대한 개방성에 큰 중요성을 부여하던 스위스를 고립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스위스에서는 지금까지 합의된 사항이었던 중립성 문제가 도마 위에 올랐다. 외부적으로는, 그사이 스위스연방 대통령이 된 이그나치오 카시스가 강조한 ‘신뢰성’이 베른의 협력국들 사이에서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개입하기 시작한 뒤, 주요 정당들을 대표하는 연방의회는 본의 아니게 많은 사람들을 등 돌리게 만드는 그 어려운 일을 해냈다.

 

러시아의 ‘적대적 목록’에 포함된 스위스

중립성에 가장 강하게 집착하는 사람들은 스위스 정부가 망설이다가 유럽연합(EU)이 러시아를 상대로 채택한 모든 제재를 받아들임으로써 중립성을 팔아먹었다고 비난했다. 그전까지 스위스와 특히 경제적으로 좋은 관계를 유지했던 러시아는 보복심에서 모스크바 제재에 참여한 모든 국가들을 적은 ‘적대적 목록’에 스위스를 포함시켰다.

반대로 스위스 내부에서나 이웃 국가들 사이에서는 베른이 러시아 자산의 추적을 거부하고, 특히 중립성을 편협하게 해석하여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유럽이 행한 노력을 방해했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스위스가 전쟁터에 무기를 보내는 것이 전혀 문제되지 않았는데도, 스위스는 독일, 덴마크, 스페인 등 몇몇 유럽 국가들이 스위스 기업에서 구매한 물자를 스위스에서 보내는 것을 거부했다. 국회의원들은 이 문제를 놓고 의견이 심하게 엇갈렸고, 이미 제3국에 의한 스위스 무기의 ‘재수출’ 건을 둘러싸고 수차례 논쟁을 벌인 바 있다.

전쟁 물자 관련 연방법은 “대상국이 내부적으로나 국제적으로 무력 충돌과 관련이 있을 때”(1) 무기 재수출을 금지하고 있다. 스위스 연방의회는 무기에 관한 제한적이거나 금지적인 모든 조치들이 “전쟁 당사국에도 (...) 동일하게 적용돼야 한다”(2)라고 규정한 제5차 헤이그조약도 언급했다.

 

독일 외무장관, “중립을 취하는 것은 침략자의 편에 서는 것”

우크라이나에 공급한 대공포(對空砲)에 대해 스위스산 탄환을 재수출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한 독일은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 생태학자이자 독일 외무장관인 아날레나 베르보크는 지난 2월 뮌헨 안보회의에서 “중립은 이제 선택사항이 아니다. 중립을 취하는 것은 침략자의 편에 서는 것”이라고 일침을 가했다.

시민들의 우려, 정치적 계층의 분열, 스위스를 구속하는 이웃 국가들 때문에 확신이 흔들리고 있는 스위스연방은, 따라서 중립성의 의미와 지정학적 재편 속에서 스위스의 위치를 재고해야 한다.

그러나 시기적으로는 스위스에게 상황이 유리하게 돌아가는 듯했다. 유엔(UN)에 가입한 지 21년 만인 2023년 1월, 스위스는 핵심기구인 안전보장이사회에 최초로 입성하여, 2년간 비상임이사국으로 활동하는 동시에 5월 한 달 동안 의장을 맡게 됐다.

과거 외무장관(사회주의)을 역임했고, 2007년과 2011년 두 차례에 걸쳐 스위스연방 대통령을 역임한 미셸린 칼미 레이는 “스위스를 뒤흔드는 논쟁은 건전하고 민주적이다. 통상적으로 그렇듯이 그것이 국내 정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외교정책과 관련이 있다는 점이 더 흥미롭다. 이런 문제들을 공개적으로 논의할 수 있다는 것도 능력이다”라고 말했다.

스위스 외교문서 연구센터(Dodis) 책임자이자 스위스 역사학회 회장인 사차 찰라는 “중립성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아는 사람이 없고,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스위스에서도 모든 사람이 각자 나름대로 중립성을 해석한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서 “외국에서는 중립성이 국가의 정체성을 결정짓는 데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지 이해가 부족하다”라고 강조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스위스는 독일 편향의 독일어권 스위스와 프랑스 편향의 프랑스어권 스위스로 갈라졌다. 사차 찰라 회장은 “중립성은 최소한의 공통분모가 될 수밖에 없었다. 전후(戰後)에 중립성은 스위스 내부의 갈등을 가라앉히는 데 꼭 필요했고, 결국 거의 종교적인 위상을 얻게 되었다”라고 평가했다.

 

스위스의 중립성은 1815년 빈 회의 산물

이런 집착의 증거로, 취리히 연방공과대학의 최근 연례 ‘안보’ 연구는 스위스 국민의 91%가 스위스는 “중립성을 유지해야 한다”라고 생각한다는 결과를 보여줬다(2021년에는 89%, 2020년에는 97%).(3) 같은 연구에서 스위스 국민의 75%는 대 러시아 제재가 중립성을 훼손하지 않는다고 판단했고, 55%(2021년 대비 10% 증가한 수치)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우호적인 입장에 찬성한다고 말했다.

어떤 전설은 중립성의 기원이 마리냥에서 스위스 용병이 패배한 사건(1515)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말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중립성이라는 개념은 1815년 빈회의의 산물이다. 혁명과 나폴레옹전쟁의 역사적 한 페이지를 넘기고 싶었던 유럽 열강들은 “스위스의 영구적 중립”을 결정했고 “영토의 보존과 불가침”을 스위스에 보장했다.

당시에는 스위스를 오스트리아와 프랑스 사이의 완충지대로 만드는 것이 중요했다. 1907년에 헤이그협약은 중립법을 성문화했고, 스위스는 1910년에 그 법안들을 비준했다. 이후로 세상은 변했지만 국제법의 이런 측면은 거의 바뀌지 않았다.

기본적이며 전시에 국한된 중립법은 중립국이 국제적 무력 충돌에 관여하지 않도록 하고, 군대, 무기, 영토를 제공하여 전쟁 당사국을 돕는 것을 금한다. 중립국은 국경을 지켜야 하므로, 자국 군대를 보유해야 한다. 스위스의 무기 산업은 번영했고, 현재 스위스군은 원칙적으로 민병대, 즉 국가를 위해 봉사하는 시민의 참여에 기반하며 매우 신속하게 동원 가능한 15만 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다.

냉전의 긴장이 최고조에 오른 시기, 스위스는 1970년에 핵확산금지조약(NPT)에 서명하기로 결정하기 전까지 자국의 지위를 보호하기 위한 최후의 보험으로 원자력 무기의 보유까지 고려했다.

“스위스 중립의 복합적인 측면은 아주 간단한 중립의 법칙과 정책 사이에 1920년대부터 자리 잡은 구분에서 비롯됐다. 이 구분은 모든 중립국가들처럼 스위스가 원하는 것은 대부분 할 수 있게 하기 위한 폭넓은 기동력을 열어주었다”라고 사차 찰라는 설명했다. 상황에 따라 스위스의 중립성을 규정하는 형용사들, 즉 ‘영구적인, 무력을 사용하는, 차별화된, 완전한, 엄격한, 능동적인, 협력적인’ 같은 형용사의 숲에서 길을 찾기는 쉽지 않다.

칼미 레이는 “나는 이 중립정책을 시행했다. 이 정책은 설명하기가 어렵다”라고 시인했다. 그녀는 “중립성이란 절대 고정된 개념이 아니었다. 그것은 변화했고, 과거에는 고립 전략에 기반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지금은 국제법과 국제협력을 근거로 한다. 군사력 사용을 거부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예방, 영향력, 대화의 힘을 우선시하게 하는 가치이기도 하다”라고 강조했다.

 

스위스의 주선자 정책, 다자주의 쇠퇴 속에 명분 잃어

프랑스와 인민해방전선(FLN) 사이의 협상으로 에비앙협정이 체결되고 그것이 1962년 알제리 독립으로 이어진 것은 스위스의 중립정책 덕분이다. 칼미 레이가 관련 업무를 맡았을 때, 러시아는 스위스의 중재로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할 수 있었고, 조지아는 이에 반대했다. 스위스는 콜롬비아무장혁명군(RAFC)이 억류한 많은 인질들의 석방을 도왔고, 게릴라와 보고타가 대화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베른은 튀르키예와 아르메니아의 관계 정상화에 일조했다(이 사건과 관련하여 2009년에 탄생한 취리히 의정서의 효력이 현재는 사라졌다고는 하지만). 최근에는 모잠비크에서 서로 대립하는 두 정당인 프렐리모와 레나모의 평화 협상을 중재해달라는 요청을 받기도 했다.

또한 스위스 연방은 ‘훌륭한 주선자’로서 권력 위임을 보호한 대단한 이력이 있다. 스위스 연방은 특히 1979년부터 이란에서 미국의 이익을 대변한 바 있고, 조지아에서는 러시아의 이익을 대변했으며, 2009년부터는 반대로 러시아에서 조지아의 이익을 대변했다.

마지막으로 주로 발칸반도(코소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와 아프리카 등 12개 국가의 국제 작전에 스위스 군대가 참여함으로써 ‘평화 장려’에도 힘썼다. 그러나 위기의 발원지가 증가하고 있는 상황에서, 다자주의의 쇠퇴는 훌륭한 주선자 정책에 ‘심각한 문제’를 제기했다. 칼미 레이는 “우리의 접근법은 더 이상 효과적이지 않다”고 인정한다.

 

전 제네바 외교클럽 의장, “스위스는 진영을 택해야 한다”

스위스에서는 유권자의 1/4 이상을 대표하는 민족주의 및 주권주의 우파 성향의 정당 스위스인민당(SVP)이, 분열된 목소리들 속에서 떨어져 나오고자 한다. “‘중립성’이라는 말의 어원인 라틴어 네우테르(neuter)를 살펴보면 ‘이쪽도 저쪽도 아니다’라는 뜻이다. 이 개념은 어떤 의미로든 왜곡될 수 있고, 러시아와 관련된 경우처럼 제재 이행에 협력할 수 있다. 사실상 어느 한쪽 편을 드는 것이다”라고 스위스 하원인 국가평의회의 스위스인민당 소속 의원 장뤼크 아도르는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유일하게 제기되는 질문은 스위스의 이익과 관련된 것이다. 그러나 스위스는 러시아와 미국의 갈등에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휘말리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이 전쟁은 스위스의 전쟁이 아니다.”

젊은 자유주의 및 유럽주의(europhile) 정치 운동인 ‘오퍼레이션 리베로(Operation Libero)’의 공동의장이며 스위스 정계의 떠오르는 인물인 사니자 아메티는, 반대로 스위스가 중립성의 ‘신화’라는 이름으로 신뢰를 무너뜨리고 안보를 약화시키고 있다고 생각한다.

“중립성은 목표가 아니고, 법의 규칙에 근거한 국제 질서 내에서만 작동할 수 있는 도구다. 러시아 같은 안전보장이사회의 이사국이 스위스 같은 나라의 안전을 보장하는 명령을 명백히 위반했을 때 중립성은 존재할 수 없다”라고 사니자 아메티는 힘주어 말했다. 이 30세의 여성은 취리히 시의회에서 녹색자유당(‘역사적인’ 녹색당과는 다른) 의원으로 선출된 바 있다.

전직 대사이자 제네바 외교클럽 의장을 역임한 레몽 로레탕은 이 문제들을 단도직입적으로 정리한다. “스위스는 진영을 택해야 한다.” 이 기민당(현재는 중도당으로 바뀜) 전 사무총장은 “스위스가 중립을 원한다면 보다 일관성 있는 태도를 유지해야 하고, 우크라이나에 했던 것처럼 러시아에도 그만큼 확실하게 손을 내밀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전쟁이 시작되고 나서 베른은 키이우와는 몇 차례 간접적인 접촉을 했으나 모스크바와는 그러지 않았다. 로레탕은 “스위스가 유럽이 되기를 원한다면 유럽연합과 북대서양조약기구와의 협력을 ‘심화해야’ 한다. 이제는 국제사회가 볼 때 불편하고 난해한 이 회색지대에서 벗어나야 할 때다”라고 결론 맺었다.

 

 

글·앙젤리크 무니에 쿤 Angélique Mounier-Kuhn 
기자. 스위스 제네바의 프랑스어 일간지 <Le Temps>에서 국제정치팀장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독립언론인으로 국제 문제, 인도주의적 이슈, 경제적 사안 등에 관해 보도하고 있다.

번역·조민영
번역위원


(1) 1996년 12월 13일 전쟁 물자에 관한 연방법.
(2) 전쟁 시 중립국과 국민의 권한과 의무에 관한 1907년 헤이그협약 제9조.
(3) 『Sicherheit(안보) 2023』, 2023년 3월 2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