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독일 체제 수호의 선봉이 된 <아르테> 채널
고급스럽지만, 보지 않는 채널
프랑스와 독일의 공동 채널인 <아르테>는 공적이고 문화적이며 엄격하기로 유명하다. 자본과 시청률에 치이면서도 실시간으로 프로그램을 방영하는 방송계에서 이 채널은 마치 기적과도 같다. 고품격의 드라마와 다큐멘터리를 제공하면서 엘리트주의라는 꼬리표에서 벗어나는 중이다. 그러나 반(反)나치즘과 반(反)공산주의로 축소된 역사관, 대서양주의, 자유주의 유럽을 향한 신념을 대중에게 전달하려는 성향을 여전히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난해한 드라마를 좋아하고 전기 영화와 공들인 다큐멘터리를 즐겨보는 좌파 부르주아 계급이 선호하는 프랑스-독일의 문화 채널이 있다. <아르테> 채널은 유럽에서는 이례적으로 미국에서 제작한 드라마를 절대 방영하지 않는다. <아르테>가 제작한 다큐멘터리 <테마의 저녁 시간>의 전 보조 감독인 파트리크 데머랭은 “두 국가 사이에서 만들어진 가장 큰 문화 기업이자 전 세계에 단 하나밖에 없는 이중 언어 채널”이라고 강조했다.(1)
보잘것없는 시청률(시장 점유율이 프랑스에서 2.9%, 독일에서 1.2%)(2)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 덕분인지 몰라도 <아르테> 채널은 별다른 대안이 없었던 방송계에서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기관으로 성장했다. 대중에게는 크게 인지도가 없는 이 채널은 몇몇 광팬을 제외하곤 특별히 좋아하지도, 그렇게 싫어하지도 않는 채널이다.
“<아르테> 채널의 존재 환경은 참 독특합니다. 사람들은 이 채널을 보지 않으면서도 이 채널의 존재만으로도 만족하고 있거든요.”
<아르테> 채널을 20년 동안 이끌었던 전 사장 제롬 클레망이 자랑스레 말했다. 보지는 않으면서 높이 평가한다는 이야기가 논리적으로 맞는 말일까?
“문화 채널이 얼마나 훌륭한지 말하면서 상업 채널을 무시하는 태도는 정작 자신은 전자보다 후자를 즐겨 보면서도 예술적이면서도 지적으로 보이고자 하는 사람들이 쓰는 뻔한 수법이다.”
2003년 <프랑스 퀼튀르> 방송의 진행자이자 프로듀서인 필리프 메이예르가 비꼬면서 한 말이다.(3)
독일 주간지, “<아르테>는 꽤 훌륭하지만 거의 보지 않는다”
1981년부터 1984년까지 프랑스 사회당 정부의 총리를 지낸 피에르 모루아의 문화 고문이었던 제롬 클레망은 <아르테>의 기획자와 시청자 특유의 문화적 특성이 드러나는 채널을 구축했다. 제롬 클레망의 자서전을 보면 그가 회화예술에 심취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가 받은 교육 때문이었다.
“나는 언제나 회화와 하나였다. 어린 시절, 나는 본가에서 몇 시간 동안 유화와 판화를 보면서 시간을 보내곤 했다. 친할아버지 집안의 스타일은 그야말로 고전파 자체였다. 제3공화국 양식이 섞인 나폴레옹 시대의 양식이라고 해야 할까. 마호가니 목재로 된 가구들, 장정본으로 가득한 서재,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시대를 연상케 하는 불편하고 뻣뻣하기 그지없는 소파들로 채워진 곳이었다.”(4)
이런 그의 성향은 <팔레트> 방송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알랭 조베르는 이 방송에서 학술적이고 교육적인 방식으로 그림을 철저하게 분석했다.
“저는 정말 기쁩니다. <라 세트> 채널(<아르테> 채널의 전신)이 이 어려운 환경에서 문화의 대중화에 기여하고 있으니까요.” 클레망은 자랑스럽게 말했다.
초창기 때 극소수만이 <아르테> 채널을 시청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이 채널의 대중화는 눈속임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1992년 <아르테> 채널이 탄생했을 때처럼 <아르테>가 ‘엘리트주의’와 ‘속물주의’에 물들어 있다는 비판의 목소리는 더는 들리지 않는다. 초창기에 제작된 현대 미술의 색조를 띤 난해한 프로그램은 잊히다시피 했다. 1994년, <아르테>가 “데릭 자르만 감독이 만든, 파란 바탕에 시적 음향 효과를 더한 75분짜리 시청각 작품 <블루>를 방영한 사실을 누가 기억하고 있는가?”(5)
프랑스에서 <아르테> 채널이 방영된 지 10년, 간신히 비평에 불을 붙인 것이 전부다. 독일에서는 주간지 <디 차이트>가 “상당히 훌륭하지만 거의 보지 않는 채널”이라고 평가했다. 몇 년 후, 독일 좌파 신문인 <프랑크푸르터 룬트샤우>는 의문을 제기했다. “우리는 왜 이렇게 훌륭한 방송국이 이토록 반향을 못 일으키는 것인지 자문해 봐야 한다.” (<라 크루아>, 2006년 3월 4일)
“<아르테>를 엘리트주의 채널로 여기는 것은 대단한 오해”
<아르테 독일>의 시청률도 낮은 건 마찬가지였다. 독일에서 <아르테>가 유일한 문화 채널이 아닌 것도 한몫했다. <3사트> 채널은 독일 공영방송 채널인 <ARD>와 <ZDF>가 제작한 문화 프로그램뿐 아니라 오스트리아 채널인 <ORF>, 스위스 채널인 <SRG SSR>이 제작한 프로그램도 방송했다.
상류 계층의 높은 지식인 취향에 맞는 엘리트주의적인 프로그램을 내놓기 때문에 시청률이 낮은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자 자신들 역시 상류 계층에 속해있는 <아르테> 경영진은 분노했다.
“<아르테>를 엘리트주의 채널로 여기는 것은 대단한 오해이다”라고 유럽 경제 이익 그룹(European Economic Interest Grouping, EEIG) 프로그램의 총책임자인 잉그리드 리베르시에가 반박했다. “우리 프로그램을 자세히 보세요. <정신분석 상담> 같은 드라마는 조회수가 무려 1억 2,300만 회가 넘을 정도로 엄청난 성공을 거뒀습니다.”
어떻게 하면 문화 콘텐츠를 고급 텔레비전 프로라는 영역에서 끄집어낼 수 있을 것인가? <아르테> 창립 3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다.
“시청률이 충분하지 않으면 비판받고, 프로그램이 민영방송의 프로그램과 비슷해지면 또 비판받습니다. <아르테>는 아슬아슬한 외줄타기를 하는 것입니다.”
1999년부터 2002년까지 <아르테> 채널의 공동 회장이었던 욥스트 플로그의 말이다. <아르테> 채널의 전 회장이었던 제롬 클레망 역시 이 문제로 고민했다.
“<아르테>가 창립되었을 때, 당시 <프랑스 텔레비전> 회장이었던 에르베 부르주는 우리 채널이 문화의 대중화를 막고 있다고 비판했습니다. 에르베 회장은 공영방송이 아니고서는 문화 채널을 발전시킬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시청률 문제는 민영방송에서만 겪는 문제가 아니에요. 공영방송인 <프랑스 텔레비전>에서조차 시청률 문제로 문화 프로그램 제작하고자 하는 야심을 꺾어야 하는 일이 있거든요.”
1987년 <TF1> 채널이 민영화된 이후 프랑스 방송업계에 일어난 변화를 보면 그의 말에 일리가 있어 보인다.
고급방송과 민영방송 사이에서 외줄을 타는 <아르테>
프랑스와 독일의 공동 채널을 만들어보자는 기획은 본래 프랑스에서 나온 아이디어였다. “문화 채널에 대한 아이디어는 상당히 오래됐죠. 1978년 프랑수아-레지 바스티드 작가가 쓴 보고서 안에서 교육 및 문화 채널에 대한 흔적을 찾을 수 있습니다. 사회당 사무국에서 이 보고서를 채택했고 좌파 문화 정책의 큰 방향을 잡았습니다.” 클레망이 회상했다. “1984년, 로랑 파비우스 총리가 유럽 채널을 계획했습니다.” 그는 덧붙였다.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은 중세 시대 역사학자인 조르주 뒤비의 조언을 구했다. 다큐멘터리 시리즈 <대성당의 시대>의 작가인 그는 교육 및 문화 텔레비전 채널을 창설할 것을 권했다.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와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와 같은 저명한 지식인들 역시 이에 지지를 보냈다. 그 결과 1986년, 초창기 문화 채널이라고 할 수 있는 <라 세트>(유럽 텔레비전 프로그램 협회)가 탄생했다. 그리고 조르주 뒤비가 그 협회의 회장을 맡았다.
<라 세트> 채널이 출범한 직후, 프랑스와의 문화 관계를 담당하는 독일의 전권 공사인 로타르 슈파트는 “(당시 문화부 장관이었던) 자크 랑에게 연락해서 양국 공동 프로젝트 형태로 문화 채널을 확장하는 방안을 제안했다”고 <아르테>의 전 간부인 마르크 빌랭은 회상했다.
이렇게 문화 채널을 확장하는 방안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라 세트> 채널을 옹호하는 사람들과 부딪쳤다. “조르주 뒤비 전 회장은 프랑스와 독일이 채널을 공동 운영하는 일에 찬성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지정학적 측면에는 관심이 없었고, 지식인들에게 열려있는 유럽 문화 채널을 바랐습니다.” 클레망은 설명했다.
“<아르테> 채널은 프랑스에서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부활시켰다”
그러나 독일 측, 다시 말해 랑데르 같은 연방 정부에서는 채널이 유럽의 다른 국가들로 확장되는 것을 거부했다. “독일인들은 자신들의 통제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있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선 프랑스와 독일이라는 축 그 자체가 목적이었습니다.” 고등사범학교 학생이자 <아르테> 창립에 관한 보고서를 쓴 장-밥티스트 파르주는 분석했다. 이런 결정적인 상황에서 최종 결정을 내린 국가는 독일이었다.
11개 파트너 채널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든든한 재정을 보유하고 있는 <아르테> 채널은 프랑스와 독일뿐 아니라 유럽 문화 산업의 버팀목이 되었다. <아르테> 채널의 진정한 영향력은 공동 제작 작품의 수나 3% 정도 되는 단순한 시청률로 평가할 만한 것이 아니다. “<아르테> 채널은 프랑스에서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부활시켰고 여전히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의 강력한 후원자”라고 클레망은 강조했다.
제라드 모르디야 영화감독도 “<아르테> 채널은 대중에게 현명하게 다가가면, 대중도 현명하게 반응하는 사실을 증명했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1997년, <아르테> 채널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다큐멘터리 시리즈를 내놓았다. 제롬 프리외르와 공동으로 제작한 기독교 기원을 다룬 프로그램이었다. 카메라 앞에서 어떤 연출이나 편집 효과도 없이 연구자들이 요한복음을 해설했다. 원래 소수의 시청자를 위한 비상업적 프로그램이었다.
“12개 에피소드가 평균적으로 무려 180만 명의 시청자들을 끌어모으면서 그야말로 대박을 터트렸었죠.” 제작자였던 드니스 프레드가 기억을 더듬었다.
25년 후, 모르디야 감독 역시 이와 같은 기법을 사용해서 <세계와 그 소유> 그리고 <일, 임금, 이윤> 같은 시리즈를 제작했다. <테마의 저녁 시간>과 <노동자의 시대>, <자본주의>, <신도 주인도 없는 무정부주의 역사>, <미국 자본주의, 부의 숭배>와 같은 장편 다큐멘터리를 통해 <아르테>는 지배적인 경제 질서와 사회 질서를 비판했다.
그러나 <아르테>도 자신이 속한 미디어 세계를 직접적으로 비판하는 일은 삼간다. 주요 미디어를 비판하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것으로 유명한 피에르 카를레스 감독은 1998년에 개봉한 다큐멘터리 <사회학은 언쟁의 스포츠다>를 제작하기 위한 자금을 <아르테>에 요청했으나 허탕을 쳤다.
“그 당시 <아르테> 방송에서 유일하게 볼 수 있었던 것은 피에르 부르디외와 귄터 그라스 사이에서 오가는 신자유주의의 폭력성에 관한 대화였습니다. 그 프로그램을 보면 부르디외를 단순한 ‘참여적’ 지식인, ‘분노하는’ 지식인으로 축소해 놓았습니다. 부르디외의 학자로서의 면모와 그의 연구는 온데간데없어요. <아르테> 내부에서 그 누구도 시청자들에게 부르디외를 제대로 알려주려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자주 부르디외 이름을 인용하고 <아르테>는 더 그러한데, 대중이 부르디외의 연구에 쉽게 접근하고 이해할 수 있게끔 하는 노력을 하지 않았습니다.” 피에르 카를레스가 지적했다.
이에 클레망은 사회학자 부르디외의 사상을 차단한 적 없다고 변론한다. “제가 먼저 부르디외에게 그의 사상을 중심으로 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해 보자고 제안했지만, 부르디외가 거절했습니다.”
“프랑스와 독일이 문화적, 지식적으로 가까워지는데 기여했냐”는 비판도
2002년, 파트리크 데머랭은 <르 데바> 잡지에서 프랑스와 독일 사이의 기념비적인 합의로 창립된 <아르테>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냈다.(6) 단순히 시청률이 낮은 문제를 넘어 <아르테>가 애초에 추구했던 문화 간 교류라는 야심이 무너졌다는 것이었다.
“왜 이 ‘유럽 채널’은 유럽인들, 특히 프랑스인과 독일인들 간의 주요 현안에 대해 정기적으로 논의하려 하지 않는가? (…) 10년 동안 <아르테>가 프랑스와 독일의 관계가 문화적으로, 지적으로 가까워지는 데 기여했는가? 유럽의 의식을 깨우는 데 도움을 줬는가?”
국가 기관은 각국의 정치·행정적 특성을 반영하여 중앙집권제로 운영될 수도 있고, 연방제로 운영될 수도 있다. <아르테 프랑스>에 근무하는 직원들은 파리 근처의 이시레물리노에 위치한 <아르테 프랑스> 본사에 다 모여있다.
반면에 <아르테 독일> 직원들은 <아르테 독일>에 소속돼 있는 여러 기관의 건물에 분산돼 있다. 독일 제1의 공영방송인 <ARD>는 9개 지역 채널로 구성돼 있다. 그리고 여기서 제작된 프로그램이 국가 전역에 방영된다. 다른 독일 채널인 <ZDF>의 경우엔 프랑스 채널 <프랑스2> 같이 중앙집권적 방식으로 운영된다.
“<ARD>와 <ZDF>는 각각 50%씩 독일 측 프로그램을 제작하거나 구매합니다. 그리고 이 프로그램이 <아르테>에서 처음으로 방송되는 것입니다.” 경영진이 설명했다.
<프랑스 텔레비전> 이사회에서 20년 동안 이사로 재직한 사회학자 도미니크 볼통은 “일반 채널 콘셉트를 유지”해서 사회적 유대를 공고히 하길 원하고 있다. 그의 눈에 <아르테>는 프랑스 전 국민에게 문화 분야를 확장해야 하는 엘리트 계층의 의무를 덜어주는 “보증 수표”다. “<아르테>가 더 융통성을 갖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덜 고상한 방식을 사용하면서 어떤 면에서는 ‘대중화’되기도 했는데 이를 통해 시청률을 높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2011년, 클레망의 후임이 된 베로니크 카일라 회장은 <아르테> 채널을 완전히 고립에서 벗어나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해변에 선 드골> 같은 드라마나 <사일렉스 앤드 더 시티> 같은 짧은 프로그램을 방영하면서 유머 콘텐츠에 주력했다. 같은 맥락에서 <28분>이라는 프로그램도 선보였다. 프랑스 정보와 토론을 다룬 시사 프로그램이었는데 <아르테 프랑스>에서 저녁 뉴스 시간에 방영됐다. 독일에서는 자막과 함께 밤 시간대에 방송됐다.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엘리자베스 캥 기자는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예의 바르게 초대 손님들을 맞이한다. 그녀는 초대 손님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2023년 5월 30일, 자신의 ‘1인극’을 소개하러 나온 배우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리베라시옹>의 마크롱주의 언론인이 토론에 가장 많이 출연
“앙드레 뒤솔리에 배우님, 정말로 매력적이세요. 모두가 다 인정하는 사실이죠.”
배우, 감독, 기자, 과학자, 대학교수 너나 할 거 없이 모두가 무언가를 홍보하러 온다. 친절하면서도 예의 바른 사람들이 모여있다. 분위기는 학구적인 동시에 가볍다. 분위기가 너무 무거워지는 것은 금물이다.
세 명의 전문가가 시대의 화두에 관해 토론하는 것이 이 프로그램의 핵심이다. 금요일에는 <28분> 프로그램 기본 틀을 그대로 가져온 후 이를 약간 변형한 다른 형식의 프로그램이 방영된다.
<르 클럽>은 홍보하러 온 초대 손님은 없고 수필가, 대학교수, 기자로 이루어진 삼인조가 길게 토론한다. 역사학자 파스칼 블랑샤르와 브뤼셀에서 근무하는 <리베라시옹> 특파원 장 카트르메르는 이 방송에 가장 자주 보이는 얼굴이다. 식민지 역사 전문가이자 다양성의 전도사인 블량샤르는 좌파 매체에 자주 등장하는 ‘모범적인 초대 손님’의 전형이다.
그는 이런 매체에 출연해서 자신의 책을 선전하는 데 익숙하다. <리베라시옹>, <폴리티스>, 그리고 <아르테> 너나 할 거 없이 나서서 블랑샤르를 방송에 모시려고 애쓴다. 사회적으로 어떤 대가가 따르는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무조건 유럽연합을 옹호하는 카트르메르는 이미 한물간 마크롱주의를 따라가고 있다.
<프랑스 앵포>의 인터뷰 기자기도 한 르노 델리가 <28분>의 주말 진행을 맡고 있는데, 초대 손님에게 친근하게 다가간다.
“대중이 너무 잘 아는 분이죠. 여기 제 메모에 역사학자라고 적혀있는데 저기 보이시네요. 파스칼 블랑샤르 교수님, 오셨나요?”
‘참여’ 기자, 나아가 ‘활동가’인 카트르메르는 2017년 대통령 2차 선거 때,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 후보의 정당인 ‘앙 마르슈’에 기부했다고 밝혔다. 그는 자신의 페이스북 계정에 “나는 나의 국가에서 파시즘이 승리하지 않도록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글을 남겼다.(7)
카트르메르는 모든 지정학적 문제를 제2차 세계대전과 비교해서 설명할 수 있다고 여긴다. 그런 그의 눈에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아돌프 히틀러의 화신이다. “러시아 운동선수들이 올림픽에 참가하는 일을 금지해야 합니다. 중립 기치를 내걸어도 안 됩니다. 마치 ‘1942년에 나치 독일이 올림픽에 참석하는 것을 허용해야 할까요?’라고 묻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르노 델리는 여기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네, 아니죠. 나치 독일이 올림픽에 참가하도록 허용하지 않겠죠.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서 하는 짓, 그것은 나치 독일이 했던 일이나 진배없다는 것입니다. 아주 단순한 이야기예요.” 2023년 3월 31일 방송에서 카트르메르는 열변을 토했다.
프랑스 미디어 비평단체, “<아르테>는 공영 채널인 것을 잊지 말아야”
2015년, <아르테>는 유럽연합과 국제통화기금(IMF)이 그리스에 강요한 정책을 옹호하는 카트르메르의 두 편의 다큐멘터리를 방영했다. 편파 방송이었다. “장 카트르메르가 자신의 의견, 신념, 그리고 유럽주의에 대한 환상을 그의 보도 활동에서 철저하게 우선시하는 것은 그의 권리입니다. 그를 고용한 <리베라시옹>이나 그 독자들이 평가할 문제죠. 그러나 <아르테>는 공영 채널인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공영방송이 일개 개인에게 자신의 편향된 견해를 포장해서 내보낼 수 있는 다큐멘터리를 만들 수 있도록 한 것은 또 다른 문제입니다.” 프랑스의 미디어 비평 단체인 <아크리메드> 사이트에서 블레즈 마냉이 말했다.(8)
<아르테>의 초국가적 관점에 관한 논문을 쓴 장-미셸 위타르는 <28분>에 대해 복잡한 시선을 보낸다. 그는 “다른 곳에서도 서로 얽혀있는 사람들 간의 은밀한 합의”가 엿보인다고 말한다.
“방송에 나와서 하는 발언의 내용과는 별개로, 친밀하게 오가는 눈짓을 보면 프랑스 내 특권 계층이 자신들끼리 결속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미디어 여기저기서 거의 같은 얼굴들을 만날 수 있고, 유럽통합을 지지하는 비슷한 견해를 되풀이해서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습니다.”(9)
클레망는 <아르테> 채널의 관계자들에게 공감을 표하면서 장-미셸 위타르의 분석이 맞다는 사실을 은연중에 확인해 주었다. “<아르테>의 입장은 다소 생태주의적이고 약간 좌파적이지만 절제하고 있습니다. 이중국적자도 많고 독일과 프랑스 양쪽 문화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다 보니 하나의 유럽 건설을 지지합니다. 주권주의 성향을 보이는 사람들은 <아르테>에서 일하지 않습니다.” <아르테> 전 회장인 클레망의 말은 핵심을 찔렀다.
프랑스와 독일의 ‘중앙기구’에서 제작한 <아르테 뉴스>는 이 채널의 가치를 대표하는 푯대라고 볼 수 있다. 독일에서는 19시 20분, 프랑스에서는 19시 45분에 방영되고 뉴스 내용은 양쪽이 동일하다.
편집팀은 51명의 전임 기자로 구성되어 있고, 이들 중 30명은 프랑스인, 21명은 독일인이다. 대부분 스트라스부르에 있지만 베를린, 파리, 브뤼셀에서도 근무하고 있다. 이 외에도 45명의 독립 기자가 더 있다.
카롤린 올리비에 편집장은 “다른 미디어보다 우리는 소수자와 여성의 권리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여러 가지 사례가 있지만 몇 가지를 살펴보면 2023년 7월 16일 뉴스에서는 헝가리에서 열린 동성애자 공동체의 ‘프라이드 행진’을 집중 조명했다.
‘유럽 특집 편’에서 라트비아에서 벌어진 여성 폭력을 다루기도 했다. 역사적인 이유 때문인지 확실히 프랑스 편집자들은 아프리카에 더 많은 관심을 두고 있고, 독일 편집자들은 동유럽에 더 집중하고 있다. 프랑스와 독일이 타협하여 탄생한 <아르테> 채널의 또 다른 특징은 이스라엘을 압도적으로 지지하는 유럽 미디어와는 다르게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분쟁을 균형 잡힌 시각으로 보도한다는 점이다.
우크라이나 사태 다큐멘터리, NATO 찬양 심해
그리스 국민에게 강경한 태도를 보여 충격을 준 볼프강 쇼이블레 독일 전 재무장관은 2023년 말 사망했다. 바로 다음 날, 전 유럽연합 집행위원회 위원장으로 단일 유럽에 핵심 역할을 한 사회당 정치인 자크 들로르가 사망했다. <아르테 뉴스>는 같은 해 12월 27일 방송에서 이 두 인물을 특집으로 다뤘다. 이들은 각각 유럽 통합에 있어서 악동과 선한 천재로 소개됐다.
보수주의자 쇼이블레는 “독일 정치에 50년 동안 큰 발자취를 남겼으나 엄격한 예산 정책에 있어서 절대 타협하지 않는 정치인으로 이름을 남길 것입니다.” 멜린 프레다는 냉정한 목소리로 뉴스를 진행했다.
그러나 자크 들로르에 대해서는 “유럽의 기사”, “실용주의적인 운동가” 같은 칭찬의 말이 쏟아졌다. 리오넬 쥘리앵 기자는 “들로르 방식” 덕분에 상품, 사람, 서비스, 자본의 자유로운 유통이 가능하게 됐다고 감탄의 목소리를 높였다. 그리고 “유럽의 소방관”이었던 그가 “새로운 유럽을 건축한 건축가가 되었다”고 강조했다.
자크 들로르가 사망하자 <아르테>는 그를 대체할 인물로 라파엘 글뤽스만을 선택했다. 2014년 9월부터 엘리자베스 캥은 라파엘 글뤽스만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여름을 우크라이나에서 보내시고, 몇 달 전 키이우에 유럽 민주주의 센터를 설립했다고 들었습니다. 아버지로부터 미쳤다는 소리를 들으셨다고요? 지금 행보를 보면 베르나르-앙리 레비가 질투할 만한 상황이 아닌가 싶습니다. 푸틴에게 반기를 든 운동가이자, 이상주의자라는 평가를 받고 계시는데, 의원님은 본인 스스로를 혁명 컨설턴트라고 여기신다고 들었습니다.”(10) 한동안 글뤽스만은 <28분>이 선정한 전문가 ‘클럽’에 소속되기도 했다.
그 뒤로 10년이 지났다. 유럽 의회의 의원이자 인권 위원회 부회장이 된 글뤽스만과 <아르테> 기자들 사이의 공생 관계는 거의 완벽해졌다. 2023년 12월 11일, <아르테 뉴스>에 글뤽스만이 출연했다.
“유럽인들이 우크라이나의 유럽연합 가입 문제를 놓고 협상을 시작할까요? 확실한 것이 지금 아무것도 없습니다. 빅토르 오르반 헝가리 총리가 강력하게 반대하고 있습니다.”
뉴스 진행자인 멜린 프레다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거리낌 없이 자신이 지지하는 뜻을 드러냈다. 그리고 이미 기대하는 답변이 있는 듯한 어조와 내용으로 질문을 던졌다.
“유럽연합은 우크라이나의 유럽연합 가입을 위한 협상을 열 생각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설마 유럽이 이런 역사적인 순간을 놓치려는 건 아니겠죠?” “빅토르 오르반 헝가리 총리의 고집 때문에 지금 유럽이 이도 저도 못하는 상황 같거든요. 어떻게 해야 오르반 총리를 굴복시키고 그의 뜻을 바꿀 수 있을까요?”
이제 글뤽스만이 이미 준비해 온 대본을 읽을 차례다. “우리는 지금 역사적인 기회를 놓치고 있습니다. 러시아에 저항하고 있는 우크라이나에 충분한 도움과 지원을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유럽의 지원은 줄어드는 중입니다.”
군사적으로 공격받는 국가를 향한 안타까움을 표현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유럽 공영방송 채널의 역할이 서구 진영을 체계적으로 선전하는 것인가? 논쟁이 될 만한 문제를 대할 때 어겨서는 안 될 언론의 원칙이 있는 법이다. 그 원칙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두 개의 다큐멘터리는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를 찬양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발트해의 공황>을 제작한 프랑스 감독인 프레데릭 콩팽과 브누아 라보르드는 2000년대 독일과 프랑스의 국가 원수와 정부가 푸틴 대통령을 순진할 정도로 관대하게 대했다고 질책한다. 그 결과, 러시아 제국주의의 토대가 마련됐다는 것이다. 노르트스트림2 가스관? 당연히 ‘전략적 실수’였다.
에스토니아 외교관인 스벤 사코프는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혹은 어떤 다른 면에서 어떤 대가를 치른다고 할지라도 서구 유럽이 러시아 에너지가 없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보여준 지정학적 프로젝트”라고 강조한다. 2022년 9월 26일, 노르트스트림1과 2는 유럽 에너지 기반 시설을 통틀어 역대 가장 큰 테러를 당했다.
<아르테 앵포 플러스>에서 방영한 <노르트스트림 테러 후 1년, 우리는 지금 어디 있는가?> 에피소드에서도 “공식 조사에 의하면 테러범들은 우크라이나로 도망쳤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그런데 테러 사건을 정리하는 멘트가 끝내자마자 이 방송은 이 가스 공급관을 이용해 유럽인들에게 ‘함정을 설치한’ 푸틴 대통령의 ‘사악한 전략’에 대해 과장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푸틴의 그림자 전쟁> 다큐멘터리 시리즈에서는 명확하게 말하거나 증거를 제시하지는 않지만, 러시아가 이 테러의 주범일지도 모른다고 암시했다.
2022년 6월과 9월, 러시아 두 군함이 향후 폭발한 일어날 장소 근처를 항해했다. 영국의 해군 전문가는 이 근처를 “어슬렁거리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이 선박의 위치가 “수상하다”라고 판단했다. 이 시리즈 가장 마지막에 가서야 “독일 조사관들은 이 폭발이 우크라이나의 책임일 가능성에 대해 조사하고 있다”라고 슬쩍 언급하기만 했다.
2024년 방영이 예정된 <푸틴, 나토 그리고 유럽>은 ‘자유세계’의 언어 요소들을 돌려 말하지 않고 대놓고 이야기했다. 오선지처럼 줄이 딱딱 맞는 군사 훈련 이미지가 배경에 깔리는데, 이는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 홍보실에서 친히 제공한 것이다. 시작부터 앞으로 어떤 내용이 전개될지 훤히 보인다.
“제2차 세계대전의 폐허 속에서 세워진 나토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는 데 성공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적을 동지로 변화시켰습니다.” 나토의 고위 관계자들, 전 지도자들, 친밀한 연구자들이 연이어 등장하면서 칭찬의 말을 늘어놓는다.
미국 공화당의 신보수주의자 중에서도 강경파로 유명한 존 볼턴은 베트남, 이라크, 그 외 국가에서 미국의 참전을 적극 지지한 인물이다. 그는 우스울 정도로 단순하게 지정학적 문제를 설명했다.
“어떤 사람들은 나토가 국경을 러시아 쪽으로 확장하면서 나토가 러시아를 위협하고 일종의 공격을 가한다는 식으로 말합니다. 저는 조지 부시 1세의 행정부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여러분께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바르샤바 조약이 무너지고, 소비에트 연방은 붕괴했고, 중앙 유럽과 동유럽에 있는 국가들은 너도나도 나토에 가입하려고 문을 두드리고 있습니다.”
<아르테>의 오래된 표적인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은 <테마의 저녁 시간>에서 자주 나치 전체주의와 동일한 취급을 받는다. 예를 들어, <안녕 동지들!> 방송을 보면 한 체코인이 1968년 프라하의 봄이 진압당했던 사건을 언급한다. 그리고 “러시아 사람들이 독일 사람들보다 더 나쁘다”고 설명한다.
반(反)전체주의를 표방하는 ‘신 철학자’들과 공산주의를 비판하는 역사학자들의 노선에 맞춰 <아르테>는 소련이 이룬 성과를 1920년대 소련에서 벌어진 조직적인 인권 침해 하나로 축소했다. 세계를 선한 민주주의자와 악한 공산주의자, 둘로 나눠버린 <아르테> 채널은 이 흑백 세상에 어울리지 않는 불편한 요소들은 전부 지워버렸다.
윈스턴 처칠을 찬양하는 수많은 영화 중 하나인 <세기의 거인>에서 처칠 영국 총리는 전체주의의 절대 악에 맞선 자유주의 용기의 정수를 보여준다. 알고 보니 처칠이 베니토 무솔리니를 존경했다거나 각종 인권 침해를 벌인 장본인이라는 사실은 굳이 언급하지 않는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300만 명의 인도인들을 굶어 죽게 했으며, 1953년 이란에서 민주주의를 파괴했고, 같은 시기에 영국령 케냐에서 마우마우족의 독립운동을 진압했다는 내용은 어디에도 없다.
지나치게 칭송되는 베르나르-앙리 레비의 업적
<아르테>의 정치적·지적 영역을 확장하는 데 있어서 <아르테> 감시위원회 회장을 의지한 것은 오히려 독이 됐다. 제롬 클레망과 가까웠던 베르나르-앙리 레비는 1993년부터 감시위원회 회장의 직책을 수행했고 이제야 그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런데도 <아르테> 채널은 여전히 그를 떠받드는 데 여념이 없다.
<아르테>는 지금도 레비의 진부한 영화를 방영 중이다. 그의 영화 속에서는 리비아인, 쿠르드인, 우크라이나인 단역 사이에서 서구의 영향력 있는 인물이 매번 주연 역할을 하고 있다. 2022년 6월, <아르테>는 <왜 우크라이나인가>라는 영화를 방영했는데 다음은 그 영화 소개 글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최전선부터 민간인들의 저항까지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담았다. 베르나르-앙리 레비 감독은 우크라이나 전쟁을 촬영하며 유럽이 나서주길 간절히 바라고 있다.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도움을 요청하는 절박한 호소는 감동적인 몰입을 선사한다.”
베르나르-앙리 레비는 이를 두고 자신 있게 결론을 내린다.
“<아르테> 채널이야말로 유럽에서 제대로 목소리를 내는 드문 채널이라고 볼 수 있죠.”(11)
정말 베르나르-앙리 레비 덕분일까? 신 철학자였던 베르나르-앙리 레비는 이미 70세가 넘었다. 진즉 물러났어야 했다. 하지만 주주총회는 규정에 예외를 두고, 그에게 또 마지막 임기를 맡겼다. 그 임기가 올해 끝난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아르테> 채널은 베르나르-앙리 레비의 든든한 후원자로 그의 영화에 수차례 자금을 지원했다. 영화 <숲속 깊은 곳에>(2010)에 40만 유로, 그리고 영화 <사랑 이야기>(2011)에 50만 유로를 지원했다.
“이번에도 엄청난 <아르테> 돈이 연기처럼 사라졌다. 왜냐하면 이번 마지막 영화도 흥행에 대실패를 했기 때문이다. 극장에서 4만 4,082명이 관람했고, <아르테> 채널에서 오후 11시 30분에 방영했을 때 1만 4,000명이 시청했다.”
이 것은 경제 전문지인 <카피탈>에 실린 내용이다.(12) 또한 <카피탈>에 따르면, <아르테 프랑스>는 베르나르-앙리 레비의 요청에 따라 10만 유로를 카불에 있는 프랑스 고등학교 강당을 복원하기 위해 후원했다.
“베르나르-앙리 레비가 채널의 편집 방향에 영향을 주는 건 아닙니다.”
약간 당혹감이 섞인 말투로 편집장인 보리스 라존이 중얼거렸다. <아르테>는 베르나르-앙리 레비의 업적을 칭송하며 배웅하고 있다.
글·다비드 가르시아 David Garcia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기자
번역·이정민
번역위원
(1) Patrick Démerin, 「Arte, vache sacrée des Français, vache à lait des Allemands, vache folle européenne ? <아르테>는 프랑스인의 신성한 소, 독일인의 젖소, 유럽의 미친 소인가?」, <Le Débat>, n° 120, Paris, 2002년 5월~8월.
(2) <Arte France>
(3) Philippe Meyer, 『Démolition avant travaux 공사 전 철거』, Robert Laffont, Paris, 2002.
(4) Jérôme Clément, 『Le choix d’Arte <아르테>의 선택』, Grasset, Paris, 2011.
(5) Julien Baldacchino, 「30 choses à savoir sur la chaîne Arte, qui fête ses 30 ans ce 30 mai 이번 5월 30일에 30주년을 맞는 채널 <아르테>에 대해 알아야 할 30가지 사실」, <France Inter>, 2022년 5월 29일, www.radiofrance.fr
(6) Op. cit.
(7) Sébastien Fontenelle, Mona Chollet, Olivier Cyran, Laurence de Cock, 『Les Éditocrates 2. Le cauchemar continue… 편집계의 권력자들 2, 악몽은 계속된다…』, La Découverte, Paris, 2018.
(8) Blaise Magnin, 「Sur Arte, le procureur Jean Quatremer instruit le procès à charge de Syriza <아르테>에서 검사 장 카트르메르가 시리자를 기소」, 2015년 11월 9일, www.acrimed.org
(9) Jean-Michel Utard, 「Arte : information télévisée et construction d’un point de vue transnational : étude d’un corpus franco-allemand <아르테>, 텔레비전 정보와 초국가적 관점의 구축, 프랑스-독일 자료집 연구」, université Robert Schuman de Strasbourg, 1997.
(10) Manuel Vicuña, 「Raphaël Glucksmann, nouvel intello préféré des médias 라파엘 글뤽스만, 미디어가 선호하는 새로운 지식인」, 2019년 3월 22일, www.arretsurimages.net
(11) Entretien, 「Arte est une des rares choses qui fonctionnent en Europe <아르테>는 유럽에서 제대로 목소리를 내는 드문 채널」, <L’Opinion>, Paris, 2014년 7월 2일.
(12) Jamal Henni, 「France Télévisions et Arte, grands mécènes du cinéaste Bernard-Henri Lévy <프랑스 텔레비전>과 <아르테>, 베르나르-앙리 레비 감독의 주요 후원자들」, <Capital>, Paris, 2021년 5월 1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