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양국의 문화톡톡] 달팽이-빙하 그리고 배신의 속도

2024-10-07     최양국(문화평론가)

“옛날 옛적에 토끼와 거북이가 살았다. 토끼는 매우 빨랐고, 거북이는 너무 느렸다. 그들은 달리기 경주를 했다. 경주를 시작한 토끼는 거북이가 한참 뒤처진 것을 보고 안심을 하며 중간에 낮잠을 잔다. 잠에서 문득 깬 토끼는 거북이가 자신을 추월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빨리 뛰어가 본다. 결과는? 느리지만 꾸준히 기어간 거북이가 승리한다.”

- 《토끼와 거북이》(이솝 우화) -

 여름이 느리게 날아간 자리에 가을은 빠르게 떨어진다. 햇살과 바람이 밝음과 어둠을 저울질한다. 소곤거리듯 반짝거리며 자연의 속도가 흔들린다. 속도와 함께 푸른 하늘에 구름 꽃들이 피어난다. 느린 꽃, 빠른 꽃, 사라진 꽃. 가을의 꽃 내음을 맡으며 속도를 만난다. 느림과 빠름으로 어우러진 속도 생태계의 시공간적 퍼즐을 맞추러 가을의 창(窓)을 연다. 느려진 여름을 메고 달팽이가 빠르게 기어간다. 빨라진 가을을 안고 빙하가 물이 된다. 믿음이나 의리를 저버린 속도가 계절, 동물 그리고 우리를 지배한다. 느리게 찾아와 빠르게 흘러가는 가을의 어느 날, 춤추듯 아름다운 어떤 창가에 앉아 속도 방정식을 풀며 소설가와 철학자를 만난다.

 

속도의 / ‘느림’ 미학 / 소설과 / 달팽이 만남

 열린 가을의 창으로 밀란 쿤데라(Milan Kundera, 1929년~2023년)의 일곱 번째 장편소설 『느림』(La lenteur, 1995년)이 들어온다. 이는 액자식 구성(하나의 이야기 속에 또 하나의 이야기가 들어 있는 구성)으로 총 51장의 서사로 이루어진다. 서사는 18세기(2, 9~12, 44~45, 47장)와 20세기(9~12를 제외한 4~43, 46, 48)의 쾌락 추구를 통해 비유된 느림과 빠름의 미학, 그리고 결론(49~51장)의 느림 예찬으로 나누어진다. 그의 소설이 갖는 고유 속성인 시공간의 흩어짐, 무관함 속의 엮임, 쿤데라 자신의 존재 드러냄 등을 통해 느림 미학에 대한 메시지를 전한다.

소설 속 ‘나’(밀란쿠)는 아내(베라)와 함께 하룻밤을 묵기 위해 호텔(과거의 성)로 가는 자동차 안에서 속도를 만난다.

“속도는 기술 혁명이 인간에게 선사한 엑스터시의 형태이다. 오토바이 운전자와는 달리, 뛰어가는 사람은 언제나 자신의 육체 속에 있으며, 끊임없이 자신의 물집들, 가쁜 호흡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 뛰고 있을 때 그는 자신의 체중, 자신의 나이를 느끼며,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자신과 자기 인생의 시간을 의식한다. 인간이 기계에 속도의 능력을 위임하고 나자 모든 게 변한다. 이때부터 그의 고유한 육체는 관심 밖에 있게 되고 그는 비신체적, 비물질적 속도, 순수한 속도, 속도 그 자체, 속도 엑스터시에 몰입한다.”

- 『느림』(La lenteur), 밀란 쿤데라(Milan Kundera)/김병욱 옮김(2014년) -

속도(Velocity)는 거리와 시간의 비교값으로서 크기와 방향을 갖는다. 오토바이와 달리기의 비교를 통해 느림의 미학이 출발하며, 이 소설을 지배하는 모티프가 된다. 느림이 크기의 최대화와 방향의 지향점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나타낸다.

“어찌하여 느림의 즐거움은 사라져 버렸는가? 아, 어디에 있는가, 옛날의 그 한량들은? 민요들 속의 그 게으른 주인공들, 이 방앗간 저 방앗간을 어슬렁거리며 총총한 별 아래 잠자던 그 방랑객들은? 시골길, 초원, 숲속의 빈터, 자연과 더불어 사라져 버렸는가? 한 체코 격언은 그들의 그 고요한 한가로움을 하나의 은유로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그들은 신의 창(窓)들을 관조하고 있다고. 신의 창들을 관조하는 자는 따분하지 않다. 그는 행복하다. 우리 세계에서 이 한가로움은 빈둥거림으로 변질되었는데, 이는 성격이 전혀 다르다. 빈둥거리는 자는 낙심한 자요, 따분해하며, 자기에게 결여된 움직임을 끊임없이 찾는 사람이다.”(전게서). 느림의 즐거움은 에피쿠로스(Epicurus, 기원전 341년 ~ 기원전 271년)의 쾌락주의로 이어지며 18세기 소설 두 편의 서사를 등장시킨다. 첫 번째는 비방 드농(Dominique Vivant Denon, 1747년~1825년)의 단편소설 『내일은 없다』(1777년). 스무 살의 기사와 T 부인(기사 정부인 백작 부인의 여자 친구)은 어느 날 저녁 극장의 옆자리에 앉아 공연을 본다. T 부인의 유혹에 의해 마차를 타고 그녀의 성(현재의 ‘나’가 묵고 있는 성)으로 동행을 하고, 3막극(정원 산책~정자의 정사~성의 한 밀실에서의 사랑)으로 구성된 사랑의 아리아를 부른다. 그들의 은밀한 하룻밤 정사는, 빠른 결과보다는 느리게 진행되는 과정을 추구하는 T 부인의 연출된 예술이다. 에피쿠로스가 주장하는 신중하고 절제된 쾌락과 맞닿아 있다.

“대화를 나누면서, T 부인은 지반을 측량하고, 사건의 다음 단계를 준비하고, 파트너에게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를 이해시킨다. 이일을 그녀는 섬세하게 우아하게, 마치 딴 얘기를 하듯이, 간접적으로 해낸다.~(중략)~. 그녀는 비단 임박한 미래를 조직할 뿐 아니라 어떤 경우에도 자신이, 그가 헤어져서는 안 될 그 백작 부인의 경쟁자가 되고 싶지는 않다는 것을 이해시킴으로써 먼 미래까지도 조직한다.”(전게서). 느림의 크기는 빠름이 아닌 느림을 통해 흥분과 쾌락의 상태를 최대화하는 것을 상징한다. 느림의 방향은 T 부인이 젊은 기사와 하룻밤을 보내고 나서 그녀의 외도를 숨기기 위한 도구(결과적으로 남편, 정부인 후작 그리고 기사를 모두 속임)로 이용된 것임을 깨닫게 해주는 마지막 작별의 말(“나와 백작 부인 사이를 망가뜨리지 마세요.”)에서 드러난다. 결과적으로 T 부인의 치밀한 하룻밤 정사 게임을 통해 수반된 쾌락은, 18세기를 나타내는 느림의 미학으로 연결된다.

두 번째는 쇼데를로 드 라클로(Pierre Choderlos de Laclos, 1741년~1803년)의 『위험한 관계』(1782년). 이 소설은 시종일관 서간체의 형식을 유지하며, 등장인물들은 오직 쾌락의 정복만을 추구할 뿐 그 밖의 다른 것은 도외시하는 내용으로 가득 채워진다. 서간 형식의 특성은 자연스럽게 폭로로 이어지며, 그 무엇도 두 사람만의 비밀로 남겨 두지 않는다.

“모든 사람이 거대한 하나의 소리 나는 조개껍질 속에 있는 듯한데, 여기서는 속삭인 말 하나하나가 다수의 끝없는 메아리들로 증폭되어 울린다. ~(중략)~. 인간, 그는 미처 깨닫지 못한 채로, 애초부터 그런 공명하는 조개껍질 속에서 줄곧 살고 있는 것일까? 어쨌거나 공명하는 조개껍질, 그것은 제자들에게 숨어 살기를 설파하는 에피쿠로스의 세계가 아니다.”(전게서). 조개껍질 속에 갇혀서 결과 위주의 쾌락을 경쟁적으로 좇으며, 타인의 시선이나 TV와 카메라 화면 등을 당연한 듯 의식하는 20세기 속도 생태계가 빠름으로 태어난다.

『느림』의 표지 위에서 18세기의 성을 향해 기어가는 동물. 속도 생태계 중 느림을 대표하는 동물인 달팽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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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표를 자신의 집 위에 달고, 달리는 듯 기어간다. 외신은 지난 7월 6일 영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 중 하나인 콩햄(Congham)에서 달팽이 경주 월드 챔피언십 대회(World Snail Racing Championships )가 열린 것을 소개한다. 축축한 천이 깔린 원형 탁자의 빨간 중앙 원에서, 13.5 인치(약 34cm) 떨어진 까만 가장자리 원의 결승선까지 먼저 도착하는 순으로 승자를 가리며 토너먼트 방식으로 진행된다. 올해는 85마리의 달팽이 선수가 참가하여 뜻 없는 빠름을 위해 달린다. 느림을 뒤에 남기고 빠름을 위해 나아가는 달팽이의 속도 경쟁은, 18세기 느림의 미학을 배반한 『위험한 관계』의 쾌락 추구 속편을 보여주는 듯하다.

달팽이가 자신의 집을 메고 속도 경쟁을 하며 20세기를 향해 달린다. 18세기의 젊은 기사와 T 부인이 이를 바라보며, 또 다른 하룻밤 시간 여행을 상하로 나눈다.

 

‘빠름’ 지향 / 쾌락 추구 / ‘춤꾼’ 통한 / 빙하 소멸

 『느림』은 세 번째 서사로 이어지며 현대(20세기)의 속도 생태계 속 ‘빠름’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18세기의 젊은 기사와 T 부인이 떠나간 성은 호텔이 된다. ‘나’가 묵은 호텔(성)은 젊은 기사와 T 부인의 공간에서, 20세기 곤충학자들을 위한 학술 대회의 장소로 바뀐다. 뱅상(젊은 곤충학자)과 퐁트벵(뱅상의 멘토 역할 역사학자로서 ‘춤꾼’ 개념 창안자), 베르크(정치인 같은 지식인), 체호르집스키(쿤데라 정체성의 중의적 표현 수단인 체코 출신 곤충학자), 쥘리(뱅상의 하룻밤 연인)와 임마쿨라타(베르크의 고교 시절 음란한 사랑 대상 & TV 방송국 연출가), 카메라맨(임마쿨라타의 애인) 등의 등장인물을 통해 쾌락 추구를 희화화하며 빠름의 역설적 미학을 그려낸다. 쿤데라는 20세기의 쾌락 추구와 빠름의 속도 생태계를 드러내기 위해 '춤꾼'이라는 개념을 내세운다.

“퐁트벵에 의하면, 오늘의 모든 정치가들이 어느 정도는 다 춤꾼들이요, 모든 춤꾼들이 또 정치에 관여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그들을 서로 혼동해서는 안 된다. 춤꾼이 여느 정치가와 다른 것은 권력이 아니라 명예를 갈구한다는 점이다.~(중략)~. 무대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을 무대에서 몰아내야 한다. 이는 특별한 전투 기술을 전제로 한다. 춤꾼이 행하는 전투, 퐁트벵은 그것을 <도덕 씨름>이라 부른다. 춤꾼은 세상 모든 사람에게 결투를 신청한다. 누가 그보다 도덕적이라고 (좀 더 용기있고, 좀 더 정직하고, 좀 더 성실하고, 좀 더 희생적이고, 좀 더 진실하다고) 자처할 수 있는가? 그는 상대를 자기보다 도덕적으로 열등한 상황에 처하게 할 갖은 기술을 다 쓴다.”(전게서). 곤충학자들의 학술 대회는 밤이 되어, 마치 곤충과 같은 춤꾼들의 짝짓기를 향한 춤과 소리의 향연으로 바뀐다. 순간적 쾌락을 향한 사랑의 서사(뱅상과 쥘리, 베르크와 임마쿨라타 등)가 흘러넘친다. 자신의 시공간을 지배할 무대를 장악하기 위해, 첫 번째 서사와는 반대로 '느림'을 버리고 ‘빠름’의 가치를 추구한다. 현대사회의 특성인 즉각적인 쾌락의 소비와 충족, 빠른 망각과 또 다른 쾌락 추구를 위한 자기 변명을 위해 연기하며 다른 춤꾼들을 공격한다. 춤꾼의 1막은 또 다른 춤꾼의 2막, 3막 등으로 이어지며 ‘존재의 행복한 춤꾼’(빠름을 지향하되, 형식적 도덕성을 앞세워 익명의 대중들 앞에서 춤추는 부류와 실질적 맞춤성을 무기로 대상 집단 앞에서 춤추는 부류로 이원화) 들은 빠름의 크기를 자랑한다.

“뱅상이 안뜰로 나서는 것은, 프런트로 이르는 보다 은밀한 또 다른 문을 통해서다. 그는 여전히 수영장 가의 그 난교 파티 이야기를 암송하려 애쓰는데(지금은 이미 그 흥분으로부터 매우 멀리 있는데도) 쥘리에 대한 그 참을 수 없도록 애절한 추억을 그것으로 뒤덮어 버리기 위함이다. 그는 오직 이 꾸며 낸 이야기만이 그로 하여금 실제로 일어난 일을 잊게 할 수 있음을 안다. 그는 지체없이 큰 목소리로 이 새로운 이야기를 전하고 싶고, 이를 장엄한 트럼펫 팡파레로 탈바꿈시켜, 쥘리를 잃게 한 그 가련한 섹스 시늉을 무효화해 버리고 싶다.”(전게서). 현대사회를 상징하는 중요한 단어 중의 하나는 속도 생태계 속 ‘빠름’이다. 전통적 정보통신 매체와 혁신적 소셜미디어를 통해 다양한 군의 셀럽(언론과 플랫폼 기업 포함)들이 춤꾼으로 등장한다. 그 춤꾼들은 언제나 불특정 다수 대중에게 쾌락을 주고 유명세를 받기 위해 계산하고 연기하며 무대 위에 서 있다. 이는 곧 타인들의 눈에 어떻게 비칠까를 끊임없이 생각하며 연기하고 반응하는 현대인의 공허한 자아로 끊임없이 연결되며 밀려온다. 빠름은 셀럽 추종의 준거집단(판단이나 행동의 기준이 되는 개인 또는 집단)을 향한 맞춤형 정체성과 또 다른 준거집단의 모방을 좇아 흔들리며 흘러간다.

속도 생태계 속 ‘빠름’이 태곳적 고향의 목마름으로 떠 있고 누워 있다. 가장 빠르게 기어간 콩햄 달팽이(0.0049km/h)로부터 바통(baton)을 넘겨받은 빠름의 대명사. 지구별의 운명을 예언하며 수평으로 벌어지고 수직으로 떨어지는 북극과 남극의 빙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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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림의 가치를 버린 빠름의 역설적 미학은 고체의 액체화로 다가온다. 지난 2월 네이처(Nature) 자매지인 ‘사이언티픽 리포트(Scientific Reports)’에 영국 리즈대(University of Leeds) 연구팀이 게재한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30년간 그린란드에서 2만 8,490㎢ 규모(서울 면적의 약 47배)의 빙하가 녹는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또한 지난해 코펜하겐 대학(University of Copenhagen) 연구팀이 발표한 연구 결과는, 20년 전 연평균 5~6m씩 녹던 빙하는 최근 연평균 25m씩 녹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 녹는 속도가 지난 20년간 5배 빨라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빙하의 사라짐은 해수면 높이 상승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지난 1월의 극지연구소 연구팀 발표에 따르면, 극지방 빙하가 녹으면서 2050년에는 지구 평균 해수면이 3.6cm 오른다고 한다. 심지어 지구 자전 속도를 느리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여 지구 생태계에 예측 불가능하고 불가역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예측도 있다. 단어나 관광지로서의 빙하가 하얀 고체의 본성을 잃어버린 채, 푸른 액체의 막연함 속으로 사라져간다. 빠름을 향한 쾌락 추구의 결과물인 빙하의 속절없는 속도 경쟁은, 20세기 프랑스 어느 호텔에서 느림의 미학을 배반하며 춤을 춘 춤꾼들의 자화상을 보여주는 듯하다.

뱅상과 퐁트벵이 소설 속 가스코뉴 카페에서 만나, 빠름만을 향해 질주하는 ‘존재의 행복한 춤꾼’들의 느림 추구를 위한 회개에 대해 혼동스러워 한다.

 

‘느림’의 / 가치 추구는 / (인식론적) 걷기 통한 / 행복 노래

 『느림』은 18세기 등장인물(마차를 타고 떠나는 젊은 기사)과 20세기 등장인물(오토바이를 타고 떠나는 뱅상)이 호텔을 떠나는 모습을, ‘나’와 아내가 바라보며 액자를 거는 형식을 취하며 결론을 드러낸다.

“나는 마차 쪽으로 천천히 가는 나의 기사를 좀 더 바라보고 싶다. 그의 걸음걸이의 리듬을 음미해 보고 싶다. 그가 앞으로 나아갈수록 그의 걸음걸이들은 느려진다. 저 느림 안에 행복의 어떤 징표가 있는 것 같다.~(중략)~. 제발, 친구여, 행복하게나. 막연한 느낌이지만 난 행복할 수 있는 자네 능력에 우리 유일한 희망이 달렸다고 느끼네. 마차는 안갯속으로 사라져 갔고 나는 시동을 건다.”(전게서). 소설 제목으로의 회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속도 생태계 속 느림이라는 것, 이러한 느림을 가치화하는 느림의 미학을 찾아 끊임없이 방황하고 추구하는 것. 이를 위해 피에르 쌍소(Pierre Sansot, 1928년~2005년)의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 1』(1999년, 김주경 옮김)를 만난다. 그는 느림의 의미에 대해, “느림은 개인의 성격 문제가 아니라, 삶의 선택에 관한 문제다. 어느 한 기간을 정해 놓고 그 안에 모든 것을 처리하려 서두르지 않아도 되고, 시간에 쫓기지 않아도 되는 삶을 선택할 수도 있다. 그것은 모든 것이 우리를 서두르게 만드는 사회, 우리가 자발적으로 그 요구에 따르는 이 사회에서 건강한 삶을 유지하기 위해 절실하게 필요한 과제다.”라고 한다. 느림은 삶의 크기와 방향을 가진 채, 느리게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이다. 빈둥거림 혹은 게으름이 아닌, 자연을 닮은 인간 본성을 찾아가는 행복한 권태로움이다.

느림으로 가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는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 2-바람 부는 길에서』(2000년, 김주경 옮김)를 통해 다음과 같이 안내한다. “걷는 것, 그것은 내부의 평화를 경험하는 것이다. 걸을 때의 나는 너무 어리석어서 실패하게끔 되어 있는 헛된 소망들과 허황한 공상ㆍ착각들로부터 돌아설 수 있다. 좀 더 긍정적으로 표현하자면, 나는 걸으면서 나 자신과 화해를 한다. 나는 행복을 추구하여 그 뒤를 좇는 것이 아니라 행복과 나란히 걷는다.”

느림은 걷는 것이다. 누군가를 만나거나 어떤 정보를 얻을 때 또는 온갖 이동 수단(마차~ 오토바이~자동차 등)을 탈 때에 항상 걷는 것이다. 걷는다는 것은 타인 또는 정보나 이동 수단이 길로 변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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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크기와 방향을 갖는 속도 생태계 속 느림과 내밀한 관계가 있다. 뭔가 생각하고자 할 때는 걸음이 늦어지고 머리는 빨라진다. 무엇을 잊어버리고자 할 때는 걸음이 빨라지고 머리는 망각을 향해 멀어져간다. 느림과 기억, 빠름과 망각은 걷기를 통해 우리의 자아를 심화시킬 수 있다. 느림의 미학은 인식론적 걷기를 통해 이루어진다. 창을 통한 관조를 거부하고 가림막에 가려진 간이 침실로 변해가는 기차 이동은 까만 빠름을 향한 시공간의 실종이다. 단어와 풍경, 그리고 소설가・철학자와 대화를 나누며 차창 밖을 보면, 달팽이와 빙하를 만나며 속도 생태계 속 느림의 미학을 그릴 수 있다. 배신의 속도 주체인 우리를 떠나, 느리게 다가온 가을이 빠르게 사라지는 곳으로 여행을 떠난다. 진양조 장단이 흐르며, 느린 마을의 가을이 익어간다.

 

 

글·최양국
격파트너스 대표 겸 경제산업기업 연구 협동조합 이사장
전통과 예술 바탕하에 점-선-면과 과거-현재-미래의 조합을 통한 가치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