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승의 시네마 크리티크]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 <물안에서> <우리의 하루>

2024-10-15     김현승(영화평론가)

눈을 감아야 비로소 들려오는 소리가 있다. <물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또렷한 이미지를 허락하지 않는 스크린을 마주한 관객은 자연스레 인물들이 나누는 대화에 귀를 기울인다. 한 여자를 둘러싼 두 남자, 제작비에 허덕이는 감독과 더 좋은 대접을 받고 싶은 스태프, 서로 다른 미학을 추구하는 연출가와 촬영감독. 얕지만 아슬아슬한 긴장감이 서려 있는 세 사람의 대화는 흥미진진한 라디오 사연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물안에서>는 분명 한 편의 영화이고, 관객은 뿌연 스크린을 바라보고 있다. 영화는 어떠한 구체적인 대상도 가리키지 않는다. 가리키는 것이 있다면 오직 하나, 우리가 아무것도 볼 수 없다는 서글픈 사실뿐이다.

아무것도 볼 수 없다는 선언은 역설적으로 보고 싶다는 욕망을 추동한다. 인물들의 말소리가 욕망의 불씨에 기름을 끼얹는다. 유채꽃이 아름답다며 감탄하는 대화는 눈이 먼 관객을 조롱한다. 보고 싶다. 하지만 볼 수 없다. 감독(신석호)은 배우(김승윤)에게 돌담길을 걸어보라고 지시한다. 너무 이쁘지 않아 좋다고 말하는 감독과 달리, 카메라맨(하성국)은 정말 이쁘다며 감탄을 내뱉는다. 하지만 이번에도 관객은 미추(美醜)에 관한 판단을 내릴 수 없다. 유채꽃, 바다와 마찬가지로 여성의 모습은 뭉뚱그려진 기표 뒤에 숨어있다. 관객에게 허락된 것은 대화의 형태로 제시되는 언어뿐이다.

극이 전개되며 보고자 하는 욕망은 어느새 영화 속 예술가에게 전이된다. 카메라맨은 귀신을 믿냐는 여자의 질문에 “눈에 안 보이는 세계를 보고 싶다.”라고 답한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고뇌에 빠진 감독의 모습에 풍성한 유채꽃의 이미지가 결합한다. 왜 이들은 이토록 볼 수 없는 것을 보고자 하는 것일까?

 

<우리의 하루>에 이르러 관객은 잃어버린 눈을 되찾는다. 하지만 여전히 모든 것은 모호하다. 상원(김민희)이 라면에 고추장을 푼다. 기이한 식성에는 한 가지 단서가 뒤따른다. 아는 아무개가 라면에 고추장을 풀어 먹는데, 그녀는 그 사람의 영향을 받았다. 이후 의주(기주봉)가 같은 행동을 반복하며 교점 하나 없는 두 시공간 속 인물들에 대한 의문이 피어오른다. 같은 방식의 ‘우연’이 <우리의 하루> 곳곳에 배치된다. 두 사람은 유사한 구도로 침대에 몸을 뉘고, 지인에게 기타를 선물 받은 경험이 있다. 시인이 애상에 젖어 오랫동안 연락이 되지 않는 자신의 딸을 언급할 때, 우리는 두 사람의 관계를 다시 한번 고민하게 된다. 하지만 완벽한 대칭을 이루는 플롯에도 영화는 이들의 관계를 증명할 어떤 명확한 증거도 제시하지 않는다. 그저 홍상수의 작품에서 늘 반짝이던 미묘한 반복들을 통해 지레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감독의 전작들에 주목한다면 <우리의 하루> 속 캐릭터들 간의 관계에 새로운 가능성을 상상할 수 있다. 기주봉은 <소설가의 영화>, <강변 호텔>에서 이미 술을 좋아하는 시인이었고, 김민희는 <소설가의 영화>에서 연기를 그만둔 배우였다. 시인의 집을 방문한 두 젊은이는 우연히도 <물안에서> 속 촬영을 위해 제주도로 내려간 영화인들이다. 홍상수는 배우들은 물론 그 유명한 ‘가위바위보 술게임’을 통해 자기 자신을 스크린 내부에 위치시키는 것 또한 주저하지 않는다. 이로써 <우리의 하루> 속 캐릭터들은 모호하게 나눠진 여러 층위를 형성한다. 돌담길 앞의 여성을 바라보는 <물안에서>의 두 남자처럼, 혹은 행방이 묘연한 <우리의 하루> 속 고양이를 보듯, 관객은 같은 것을 보고도 다른 결론에 이르는 혼란을 마주한다.

 

“시인은 젊은이들에게 관심받지만, 사실 평화를 원한다.”

“상원은 지수와 말을 섞으며 더욱 답답해진다.”

“시인은 술과 담배를 하고 싶은 욕구가 더욱 커진다.”

“정수는 잃어버릴 수 없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

 

이미지가 우연적인 관계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과 대조적으로 <우리의 하루>의 텍스트는 서사에 명료함을 더한다. 주로 인물의 심정을 묘사하는 언어는 이미지가 부재할 때야 비로소 스크린에 모습을 드러낸다. 훌륭한 배우는 자신에게 주어진 감정을 한 줄의 대사 없이도 전달할 수 있다. 하지만 기표가 기의에 미끄러질 확률을 고려한다면, 이미지가 언어보다 훨씬 ‘위험한’ 소통 방식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서사의 볼륨이 커질수록 영화가 소설을 닮아가는 이유이기도 하다.

카메라는 진실을 온전히 포착할 수 있을까? <우리의 하루> 중간중간에 삽입된 텍스트는 이 질문에 대한 홍상수의 단호한 대답과 같다. 언어의 한계를 깨달은 인간에게 영화라는 새 시대의 매체는 구원자로 다가왔다. 그러나 언어에서 벗어나려는 시도 속에서 인간은 이미지의 추상성이라는 또 다른 막다른 길에 도달한다. “우리는 진리를 알 수 없다. 그리고 절대 알 수 없다면 그건 없는거다.” 언어와 이미지, 두 단계의 인식 불능을 마주한 인간 홍상수는 기어이 진리 자체를 부정하고 만다.

진실에 도달할 방법을 모두 잃은 ‘불능’의 상태는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으로 이어진다. <물안에서>의 영화감독은 카메라를 켠 채 바다에 뛰어든다. “왜 굳이 태어나서 힘들게 살아야 하지?” 삶의 궁극적인 이유를 찾던 예술가는 자신이 경험한 ‘절대적 선’을 카메라에 담고 싶다. 하지만 관객은 감독의 경험을 재현하는 여배우의 모습을 볼 수 없다. 두 번째 테이크에 이르러 여자의 형체가 드러나지만, 초점이 나간 카메라는 여전히 그녀의 형상을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 속에 가둔다. 심지어 배우가 아무리 실제 인물과 똑같은 대사를 내뱉어도 그 뉘앙스는 미묘한 차이를 보인다. 경이로운 순간을 간직한 원경험은 결코 재연/재현될 수 없다.

 

<우리의 하루> 속 시인은 바다에 뛰어드는 대신 술과 담배를 연거푸 들이킨다. 갖가지 독이 펼쳐진 상은 자기 자신을 위해 차려진 조촐한 제사상과 같다. 인간은 이번에도 진리가 무너져 내린 황폐한 삶 속을 덧없이 방황한다. 그런데, 먼 산을 바라보며 담배를 태우는 남자의 모습은 놀랍도록 처연하지 않다. 의연한 그의 모습은 오히려 젊은이들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무언가를 깨달은 자로 느껴질 정도이다. 죽음을 암시하는 장면에서 느껴지는 역설적인 생명력의 단서는 <물안에서>의 마지막 시퀀스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영화 내내 반복되는 음악은 언제나 느닷없이 시작되고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끊기며 장면을 전환한다. 하지만 단 한 장면, 바다에 뛰어드는 예술가의 최후에 음악은 끊기지 않고 유유히 멀어져가는 남자의 모습을 포근하게 감싼다.

인간은 결코 진리에 도달할 수 없다. 예술가는 우습게도 닿을 수 없는 것에 닿고자 발버둥 친다. 그러나 이들이 언어와 이미지의 한계에 무지한 것은 아니다. 닿을 수 없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닿고자 뻗어보는 손, 굴러떨어질 것을 알고 있음에도 있는 힘껏 돌을 밀어 올리는 강력한 삶의 의지. 바다에 뛰어들고 담배를 입에 문 그들에게서 느껴진 놀라운 생명력을 이제야 이해할 수 있다. 예술이 감히 흉내조차 못 낼 본원적 삶이 텅 빈 진리의 자리를 대체한다. 이것이 홍상수와 그의 영화가 세상일에 초연한 듯 보이는 이유일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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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김현승
영화평론가. 2022 영평상 신인평론상으로 등단하였다.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이론과 예술전문사에 재학 중이다.